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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남당유고의 구지왕기에 대한 진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15.

남당사료 중에 백제왕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곳에 보면 구지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입니다.
그런데, 구지왕기에는 공손씨가 구지왕에게 딸을 주는 기록이 보이며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구태임이 분명합니다.
위구태는 부여의 왕이지 백제의 왕이 아니므로 구지왕기는 가짜인듯 하나....
백제와 공손씨가 매우 가까운 동맹을 맺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5년 (238년)
여름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른 용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 나갔다.


대체 이 기록이 뭔가하고 봤더니 해답은 동사강목에 있었습니다.


<동사강목> 권2 상 백제 고이왕 5년 (위 명제 경초 2년, 238년)
황룡(黃龍)이 궁궐문에서 날아 나왔다.
○ 이 해에 위의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쳐서 죽이고 요동을 취하였다. 의(懿)가 출병할 때에 고구려 왕이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어 병사 1천을 거느리고 이를 도왔다.
○ 위가 장수를 보내 낙랑군(樂浪郡)ㆍ대방군(帶方郡)을 취하였다. 이 때에 2군이 중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에 분속(分屬)되어 있었는데, 위가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2군을 평정하였다. 이에 요동ㆍ현도ㆍ낙랑ㆍ대방이 모두 위에 속하였고, 한(韓) 땅에 있는 여러 나라의 신지(臣智)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내렸으며, 그 다음은 읍장(邑長)을 삼았다. 그 풍속은, 머리에 책(幘)을 쓰기를 즐겨하였고, 하호(下戶)가 군(郡)에 나아가 조알(朝謁)할 때는 모두 책(幘)을 빌어서 썼으므로, 스스로 인수를 차고 책을 쓴 자가 1천여 인이었다.
부종사 (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 치하였다 해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여 주었다. 상고하니, 이때에 신라ㆍ백제란 칭호가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중국인이 신라ㆍ백제를 한국(韓國)이라 불렀다. ○ 《삼국지(三國誌)》ㆍ《문헌통고》에서 보충


삼국사기는 위나라가 장수를 보내어 공손연을 죽이고 낙랑과 대방을 취하고 韓이 멸망한 것을 기록하지 않고, 그 대신 알 수 없는 암호인 "황룡이 궁궐에서 나왔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을까요?
이유는 백제가 공손씨의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함이었겠고 또한 공손씨와 韓이 238년에 멸망하자 백제는 비로소 독립국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는 이것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죠.
다시말해 삼국지에서 공손씨가 딸을 주어 동맹을 꾀하였던 위구태는 동부여의 왕이 아니라 온조가 건국한 백제의 왕이었던 것인데 이런 역사를 숨기다보니 황룡이 밖으로 나왔다는 암호만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백제가 왜 238년에 독립을 하게 되었는지 제 추측이 심하게 들어간 "소설" 한번 써보겠습니다. 소설이라고는 하나 모두다 근거가 있은 것이니 이상한 점을 질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제 독립 과정

백제의 독립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 멀리 기후(箕詡)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1) 기후(箕詡)에서 위만조선의 멸망까지

기후가 정권을 찬탈하였을때 영토는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하북성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를 아우르는 아주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大海中東西以海限, 바다를 가운데에 두고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히었다). 그리고 국가명은 조선이 아니라 마한(馬韓)이었는데 그 뜻은 맑한 즉 선명국(鮮明國)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한(馬韓)은 제후국을 2개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진한(辰韓)이고 두번째는 변진(弁辰)이죠.

마한국은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이동합니다. 보통 기준이 쫓겨간 곳이 한반도라고 알고 있으나 제가보기에는 기준이 이동한 곳은 은殷나라 남쪽땅입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남은(南殷)에 대한 변증설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때 방 장군(龐將軍)이란 자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는 기와 굽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더욱 노기(怒氣)를 품고 출전하여 용맹한 적장(賊將)을 죽이고 크게 승첩(勝捷)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 남은 무종(南殷武宗)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을 토평(討平)하였는데, 한 나라에서 온 장수가 이곳 기와 굽는 사람의 딸에 대한 용맹을 듣고는 크게 놀라 이상하게 여기며, 그녀가 쓰던 큰 칼을 보고 말하기를 '이 칼은 무게가 1백여 근(斤)이나 되겠다.' 하였다."


기준이 남쪽으로 옮겨가 국가명이 남은(南殷)이란 것은 옛 은나라 땅 남쪽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기준과 위만은 여러번 전쟁을 했고 남은(南殷)의 임금 무종(武宗)이 漢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고 하죠. 이는 위만을 멸망시킬때 漢의 군사만을 가지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준의 군사도 같이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위만의 관료들을 분열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만은 燕나라 사람이지만 箕準은 비록 子胥餘의 자손이라고는 하나 조선으로 귀화한지 약 1000년이 넘었기에 완전한 조선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위만조선의 관료들은 옛 조선사람이 많았으므로 漢과 箕準이 같이 침략해오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이 들어서죠. 현도와 진번과 임둔은 북부여나 송양의 비류국에서 차지해버리고 현도군은 위치를 옮겨버리니 남은 것은 낙랑군 하나죠.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 즉 마한의 전쟁 참여에서 시작됩니다.
위만을 멸망시킨 것은 漢 혼자서 한것이 아니라 箕準의 마한이 한 몫 한것이죠.
그래서 낙랑군은 漢의 것만이 아니라 마한의 것도 됩니다. 저는 이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고 봅니다.
또한 이 시기에 진한은 그들을 다스렸던 마한이 위만에 망하여 남으로 이동하였고 그들 동쪽에는 낙랑군이 있으니 진한도 어부지리로 독립한 상태가 됩니다.

2) 백제의 남하와 마한

漢과 마한이 낙랑군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하여 서로 신경전이 계속되어지는 때에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를 합니다. 그리고 마한에게 의지를 합니다.
마한의 임금은 꾀를 내어 마한의 동북쪽 땅, 즉 낙랑의 서쪽 땅을 백제에게 봉지로 줍니다.
왜냐?
그 위치가 낙랑군과 漢 사이의 길목이기 때문에 그 길목을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한은 낙랑군에 대한 다스림을 확고히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3) 漢의 세력 약화와 공손도의 흥기

이렇게 세월이 200년 가까이 흘러 漢은 점점 약화되고 요동지방에 공손도가 일어납니다.
그 지역은 아마도 백제와 인접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낙랑군 서쪽이 백제이고 공손도는 요동군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점점 주변세력을 잠식하여 국가로 발전을 도모하죠.
이러한 상황에 공손도는 자신의 딸을 백제왕인 위구태에게 주어 동맹을 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제도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공손도는 漢에서 독립을 꾀하였고 백제도 마한으로부터 독립을 꾀하였던 것이죠(백제가 건국초기에 마한을 멸망시켰다고는 하나 백제가 200년대에 독립한 것을 숨기기 위한 위사라고 판단).


이런 공손도와 백제의 동맹은 북쪽의 고구려, 서남쪽은 漢, 남쪽의 마한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漢은 3나라로 분리되고 북쪽에 魏나라가 서고 남쪽에 吳나라가 섭니다.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갑니다.

4) 고구려의 선택

고구려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 동맹국으로 吳를 선택합니다. 왜 바다멀리 떨어져 있는 吳를 선택하였는지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만... 하여간 고구려는 吳를 선택하고 사신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동사강목> 고구려 동천왕 7년 (233년)
○ 고구려가 사신을 오(吳)에 보냈다.

이 때에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이 오에 대해 신하[臣]임을 자칭하니, 오주(吳主) 손권(孫權)은 크게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연(淵)을 연왕(燕王)에 봉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연(淵)은 그 사신 장미(張彌)를 목베어 머리를 위(魏)에 보내고 그를 따라온 진단(秦旦)과 황강(黃彊) 등을 현도(玄菟)에 구금(拘禁)하였다. 단(旦) 등이 고구려로 달아나 인하여 오주의 전지(傳旨)를 전하면서 ‘하사한 것이 있었는데 요동에서 겁탈당했다.’고 속여 말하니, 왕이 기뻐하여 조의(皂衣) 25인을 보내 단 등을 오로 송환하고 표(表)를 올려 칭신(稱臣)하며 초피(貂皮) 1천 매(枚)와 갈계피(鶡雞皮) 10구(具)를 공물로 바쳤다. 《자치통감》과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보충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입니다. 풀어서 보면...
고구려가 吳를 동맹국으로 선택하자 공손연은 吳의 신하임을 자칭하죠.
왜냐?
고구려가 吳와 동맹을 하는 것을 중간에서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고구려는 남쪽 바닷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낙랑군과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런 고구려의 어려움을 알아챈 공손연이 고구려와 吳의 동맹을 방해하려고 공손연이 吳의 신하임을 자칭하여 육로 혹은 바닷길을 고구려에 터주죠.
하지만 고구려 사신을 吳에 보내기는 거녕, 사신은 잡아 魏에 보내버리고 따라온 자들은 강금합니다.
고구려는 吳와 동맹을 하기 위한 사신들이 실패하자 다시 사신을 吳에 또 보내어 吳와 동맹을 굳건히 합니다.

5) 魏의 공손씨 견제를 위한 고구려와의 동맹

상황이 이쯤되어 공손씨의 세력이 막강해 진것 같습니다.
그러자 魏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고구려와 동맹을 합니다.
아마도 공손씨가 세력이 점점 커져 魏에 위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魏는 동맹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8년
8년(234)에 위(魏)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동맹국을 갖게된 魏는 드디어 공손씨를 침략하게 되죠.


<삼국지>공손탁전
景初元年, 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
경초 원년, 이에 유주자사 관구검 등에게 새서를 주어 공손연을 징벌하도록 보내었다.

二年春, 遣太尉司馬宣王征淵. 六月, 軍至遼東....중략..., 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2년 봄, 태위 사마선왕을 보내어 공손연을 정벌토록 했다. 6월, 군이 요동에 이르렀다. ...중략.... 요동·대방·낙랑·현토가 모두 평정되었다.


魏가 공손씨를 칠때에 고구려가 도와주죠. 도와주었다기보단 협공이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2년
12년(238)에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왜 고구려는 魏와 협공하여 공손씨를 공격하였을까요?
고구려는 마한과 마한의 속국이었던 백제 그리고 낙랑군 등을 원했기때문이죠.


6) 공손씨 멸망 후 마한, 백제, 진한, 魏 사이의 갈등

지금까지 말한 시대상황을 염두해 두고 앞서 인용한 동사강목 238년의 기록을 보면 아주 재밌죠.
왜 마한의 신지가 魏나라 편을 들고, 진한은 왜 대방군 가리영을 공격하였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서는 왜 이 기록이 빠졌는지를 알게됩니다.
정확히 보기 위하여 삼국지 동이전을 인용해봅니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열전
○ 景初 연간(A.D.237~239) 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帶方·대방樂浪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韓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樂浪이나 대방帶方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는 모두 의책衣幘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部從事 오립吳林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國을 "統" 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진)한을 멸하였다.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기준의 마한이 위만에 멸망되자 기준은 산동반도 근처로 이동하고 진한은 독립하게 됩니다.
마한과 漢은 위만을 같이 멸하고 낙랑군이 세워지게 되고, 마한과 漢은 낙랑군 점령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신경전을 벌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백제가 남하하자 마한은 낙랑과 漢사이에 백제를 두고 자신의 세력으로 漢을 견제하게 되죠.
복잡한 상황이 더욱더 복잡하게 되니, 백제의 서쪽으로 공손씨가 일어나게 됩니다.
공손씨는 같은 처지에 있는 백제와 동맹을 하고 낙랑군 등을 침략하여 영토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자 난감하게 된것은 마한이죠.
낙랑군을 차지하려고 백제를 漢과 낙랑 사이에 두었는데 그 주변에 공손씨가 일어나 백제와 낙랑까지 아우르게 되고 공손씨의 세력은 아주 커집니다. 마한은 백제와 낙랑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력이 커질대로 커진 공손씨를 드디어 고구려와 魏가 침략하여 멸망시킵니다.
그리고나서는 魏는 낙랑지역을 마한에게 주려고 합니다.
낙랑지역은 멀기도 한 뿐더러 점차 세력이 커지는 진한을 견제하는데 마한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마도 마한은 魏와 아주 친했던 모양입니다. 혹 魏와 마한이 공손씨를 같이 침략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진한도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 역시 낙랑군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공손씨가 멸망한 후에 영토를 魏와 마한이 나누어 갖는 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이 회의에서 낙랑군 모든 땅은 마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魏는 요동군을 차지하였겠죠. 고구려는... 모르겠군요.
마한 임금은 생각해보니 아주 잘된 것이었습니다.
백제도 다시 자신들 편으로 만들고 낙랑지역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한의 신지는 통역을 일부러 이상하게 합니다.
진한 지역까지 차지하기 위해서이죠. 그전에 진한은 마한의 영역이었으니까요.


통역을 잘못한 부분은 이것인데 


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낙랑이 본래 韓을 통치했으니 진한8국을 나누어 낙랑에 주려 하여하였다.


원래 말은 아마도 이정도 되지 않을까합니다.


樂浪本通韓國, 分辰韓爲八國與樂浪
낙랑은 본래 韓과 한 통속인데 진한이 낙랑과 더불어 8개 국가로 나뉘었다.


마한의 신지가 진한과 낙랑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계책이죠.
그러나 성질이 난 진한은 대방군을 공격하지만 辰韓은 망하게 됩니다.
아마 진한이 멸망할때 마한도 같이 멸망하지 않았나 하며, 이때되어 비로소 백제는 그들을 다스렸던 마한이 망하자 독립하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옛 공손씨의 세력을 모아 영토확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로국 신라도 드디어 이때 되어 독립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다스렸던 진한이 망하였기 때문이죠.

삼국사기는 위 모든 일련의 과정을 숨기기 위하여 구지왕을 뺀 것입니다. 구지왕이 공손씨와 동맹관계였고 공손씨가 멸망하자 드디어 독립국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기때문에 삼국지에 백제와 신라가 없고 오직 韓만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