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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傳 전문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말갈(靺鞨)은 곧 숙신(肅愼)의 땅이니, 후위(後魏) 때에는 이를 물길(勿吉)이라 하였다. 경사(京師)에서 동북 방향으로 6천 여리 밖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突厥)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高句麗)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室韋)와 인접해 있다. 그 나라는 모두 수십 부나 되는데, 각각 우두머리(酋帥)가 있어 더러는 고구려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더러는 돌궐의 신하로 예속되어 있다.

유 주도독(幽州都督)을 추증하고 건릉(乾陵)에 배장하였다. 그 뒤로부터 때로는 추장이 직접 오고 때로는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백산부(白山部)는 본래 고구려에 부용(附庸)되었는데, 평양성이 함락된 뒤에 많은 무리들이 중국으로 들어 왔다. 골돌(汨咄), 안거골(安居骨), 호실(號室) 등의 부족도 고구려가 함락된 뒤로는 뿔뿔이 흩어지고 미약해져 그 후의 활동은 알 수 없으며 더러는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발해에 편입되었다. 오직 흑수부(黑水部)만이 강성하여 지역을 16부로 나누고, 또 남부와 북부로 구분하여 일컬었다. 개원(開元) 13년(A.D. 725 ;新羅 聖德王 24)에 안동도호(安東都護) 벽태(薜泰)가 흑수말갈안에 흑수군을 두자고 청하였다. 이를 변경하여 가장 큰 부락으로 흑수부(黑水府)를 삼고 그 추장(酋長)을 도독으로 삼아 다른 여러 부의 자사를 예속시켰다. 중국에서는 장사(長史)를 두어 그 부락들을 감시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개원(開元) 16년 (A.D. 728 ;新羅 聖德王 27)에 그 도독에게 이씨(李氏)의 성과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내리는 한편, 운휘장군(雲麾將軍),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를 제수하고, 이어서 유주도독을 그의 압사(押使)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정주(定州)에 와서 태종(太宗)에게 사자를 보내와 절도(節度) 벼슬을 청하니, 전공의 보답으로 시국공(蓍國公)에 봉하였다. 또 그 부락을 유주(幽州)의 창평성(昌平城)으로 옮겼다. 마침 고개도(高開道)가 돌궐의 군사를을 이끌고 와서 유주를 공격하므로, 돌지계가 군병을 거느리고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정관(貞觀, A.D. 627~649 ;高句麗 榮留王 10~寶藏王 8) 초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제수하고 이씨(李氏)의 성(姓)을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돌지계가 죽었다. 아들 근행(謹行)이 그 지위를 이어 받으니 위모와 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인덕(麟德, A.D. 664~665 ; 高句麗 寶藏王 23~24)연간에 영주도독(營州都督)으로 옮겼다. 그 부락의 가동(家僮)이 수천이나 되고 재력이 변방에서 가장 좋아 오랑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여러 번의 승진으로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에 배수되고, 적석도경략대사(積石道經略大使)가 되었다. 토번(吐蕃)의 재상인 논흠릉(論欽陵) 등이 무리 십 만명을 거느리고 황중(湟中)에 침입하였을 적에는 근행의 병사는 땔나무를 모으고 있어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깃발을 꽂고 북을 울리며 성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토번의 군대는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을 하여 마침내 진입하지 못하였다. 상원(上元) 3년(A.D. 676 ;新羅 文武王 16)에 또 토번의 수 만 무리를 청해(靑海)에서 무찌르니, 고종(高宗)은 친히 글을 보내어 격려해 주었다. 재차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을 제수하여 연국공(燕國公)에 봉하였다. 영순(永淳) 원년(A.D. 682 ;新羅 神文王 2)에 죽으니,

정주(定州)에 와서 태종(太宗)에게 사자를 보내와 절도(節度) 벼슬을 청하니, 전공의 보답으로 시국공(蓍國公)에 봉하였다. 또 그 부락을 유주(幽州)의 창평성(昌平城)으로 옮겼다. 마침 고개도(高開道)가 돌궐의 군사를을 이끌고 와서 유주를 공격하므로, 돌지계가 군병을 거느리고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정관(貞觀, A.D. 627~649 ;高句麗 榮留王 10~寶藏王 8) 초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제수하고 이씨(李氏)의 성(姓)을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돌지계가 죽었다. 아들 근행(謹行)이 그 지위를 이어 받으니 위모와 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인덕(麟德, A.D. 664~665 ; 高句麗 寶藏王 23~24)연간에 영주도독(營州都督)으로 옮겼다. 그 부락의 가동(家僮)이 수천이나 되고 재력이 변방에서 가장 좋아 오랑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여러 번의 승진으로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에 배수되고, 적석도경략대사(積石道經略大使)가 되었다. 토번(吐蕃)의 재상인 논흠릉(論欽陵) 등이 무리 십 만명을 거느리고 황중(湟中)에 침입하였을 적에는 근행의 병사는 땔나무를 모으고 있어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깃발을 꽂고 북을 울리며 성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토번의 군대는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을 하여 마침내 진입하지 못하였다. 상원(上元) 3년(A.D. 676 ;新羅 文武王 16)에 또 토번의 수 만 무리를 청해(靑海)에서 무찌르니, 고종(高宗)은 친히 글을 보내어 격려해 주었다. 재차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을 제수하여 연국공(燕國公)에 봉하였다. 영순(永淳) 원년(A.D. 682 ;新羅 神文王 2)에 죽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