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구당서舊唐書 거란契丹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 지역인 선비족(鮮卑族)의 옛 영토에 살고 있다.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동북쪽으로 5,300 리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으로는 해국(奚國), 남쪽으로는 영주(營州)와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에 다다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냉형산(冷陘山)이 위치하고 해국의 서산(西山)과 서로 맞대고 있으며 영역은 사방 2,000리이다. 사냥을 일삼아 왕래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군장(君長)의 성씨는 대하씨(大賀氏)이다. 정예병사 43,000명인데 8부족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만약 군사의 징발이 있으면 각각의 부족에서는 모두 반드시 합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거병을 할 수 없었다. 수렵은 각 부족별로 행하였으며 전쟁은 각 부족이 함께 수행하였다. 본래 돌궐(突厥)에게 신속하였으나 해와 함께 싸우기를 좋아하여 불리하면 청산(靑山)이나 선비산(鮮卑山)에 숨어 들어가 보존하였다. 풍속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무덤을 만들지 않으며 시신은 마차나 수레로서 대산(大山)으로 보내 나무위에 걸어 두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기간은 없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 저녁으로 이를 슬퍼하여 곡을 하지만, 반면 부모가 죽으면 자손은 곡을 하지 않는다. 그 밖의 풍속은 돌궐과 같다. 무덕(武德) 초에 자주 당나라 변경을 침략하였다. 무덕 2년(619) 평주(平州)를 침략하였다. 무덕 6년(623) 거란의 군장 돌라(咄羅)가 사신을 보내어 명마와 좋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貞觀) 2년(628)

거란의 군장 마회(摩會)가 부족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사신을 보내어 양사도(梁師都)와 거란을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본래 다른 부류이다. 지금 나에게 항복해 왔으데 무슨 연고로 (돌궐은 거란을) 찾는냐? 양사도는 본래 중국인으로 우리의 영역을 점거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다. 돌궐이 아무 연고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있어 우리 군대가 가서 토벌하니 구원을 요청하였다. 생각건대 오래지 않아 저절로 사로잡혀 망할 것이다. 설령 그렇게 안되더라도 결코 거란과 바꾸지 않겠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영주에 이르러 거란의 군장과 노인 등을 만나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고, 군장 굴가(窟哥)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에 임명하였다. 정관 22년(648) 굴가 등의 부족이 모두 당나라에 복속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고 굴가를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송막도독부·무극현남(無極縣男)으로 임명하고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다. 현경(顯慶) 초에 다시 굴가를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에 임명하였다. 굴가의 증손 호막리(祜莫離)는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좌위장군(左衛將軍) 겸 검교탄한주자사(檢校彈汗州刺史)·귀순군왕(歸順郡王)을 역임하였다.

또 거란의 다른 부족의 추장으로 손오조(孫敖曹)가 있었는데 처음 수(隋)나라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지냈고, 무덕 4년(621) 말갈(靺鞨) 추장 돌지계(突地稽)와 함께 사신을 보내 복속하였다.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영주성 근처에 안치하도록 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요주총관(遼州總管)을 제수하였다. 증손 손만영(孫萬榮)에 이르러 수공(垂功) 초에 우옥검위장군(右玉鈐衛將軍)·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에 임명하고 영락현공(永樂縣公)에 책봉하였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손만영이 매부 송막도독(松漠都督) 이진충(李盡忠)과 함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에게 모욕을 받아 두 사람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굴가의 후손으로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겸 송막도독을 역임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들의 반란에 분노하여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萬斬),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盡滅)로 고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진멸은 곧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으로 자칭하고 손만참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선봉에서 노략질하도록 하니, 전진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켜 10일만에 병사가 수만명으로 불어나 단주(檀州)까지 육박하였다. (측천무후는) 조서를 내려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

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섰다. 서협석곡(西硤石谷)에서 손만참과 싸웠지만 관군이 대패하고 장현우와 마인절이 사로잡혔다. 다시 하관상서(夏官尙書) 왕효걸(王孝傑)·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 소굉휘(蘇宏暉)에게 7만을 거느리고 계속 토벌하게 하였다. 손만참과 동협석곡(東硤石谷)에서 싸웠지만 왕효걸은 진중에서 사망하고, 소굉휘는 갑옷을 버리고 도망갔다. 손만참은 승승장구하여 유주(幽州)까지 쳐들어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건안군왕(建安郡王) 무유의(武攸宜)가 부장을 보내 토벌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하내왕(河內王) 무의종(武懿宗)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御史大夫) 누사덕(婁師德)을 부대총관(副大總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사탁충의(沙吒忠義)를 전군(前軍) 총관으로 삼아 30만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얼마후 이진멸이 죽고 손만참이 대신 무리를 이끌었다. 손만참은 다시 별도로 낙무정(駱務整)과 하아소(何阿小)를 유격대 선봉으로 삼아 기주(冀州)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자사 육보적(陸寶積)을 죽이고 관리의 자녀 수천명을 도륙하였다.

얼마후 해와 돌궐의 무리가 배후를 습격하여 노약자를 약탈하였다. 손만참이 무리를 버리고 경기병(輕騎兵) 수천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전군부총관(前軍副總管) 장구절(張九節)이 수백기를 거느리고 매복하였다가 맞아 싸웠다. 손만참이 곤궁에 처하여 노비와 경기병 몇몇과 달아아 노하(潞河) 동쪽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안장을 풀고 쉬고 있을 때 노비가 목을 베었다. 장구절이 그 머리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로부터 잔당들이 모두 돌궐에 항복하였다. 개원(開元) 3년 (715) 거란의 수령 이실활(李失活)이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이 쇠퇴한 틈을 타서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로 항복해 왔다. 이실활은 이진충의 사촌 동생이다. 이에 다시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실활을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 겸 송막도독에 임명하였다. 그가 거느리는 8부락은 예전 우두머리를 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장군 설태(薛泰)로 하여금 감독하고 진무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이실활이 입조하자, 종실의 질녀 양씨(楊氏)를 영락공주(永樂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개원 6년(718) 이실활이 죽자

현종이 애도를 표하고 특진(特進)에 추증하였다. 이실활의 사촌 동생 사고(娑固)가 무리를 대신 다스리자 사신을 보내 책봉하고 형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사고의 대신 가돌우(可突于)는 날래고 용감하여 무리의 환심을 얻으니 사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가돌우가 도리어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도독 허흠첨(許欽澹)이 설태에게 용감한 군사 500명을 거느려, 해왕(奚王) 이대보(李大輔) 및 사고의 무리를 징발하여 함께 가돌우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관군이 불리하여 사고와 이대보는 진중에서 가돌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영주 도독부가 크게 놀라 허흠첨은 군대를 서쪽으로 유관(渝關)으로 후퇴시켰다. 가돌우는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鬱于)를 임금으로 삼았다. 얼마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죄를 청하니 현종이 울우를 책봉하고 사고의 관작을 계승하도록 하고 가돌우의 죄를 용서하였다. 개원 10년(722) 울우가 입조하여 청혼하였다. 현종이 다시 사촌 누이의 남편인 솔경령(率更令 ; 당나라에서 황족의 서열과 형법을 관장하는 솔경시의 장관) 모용가빈(慕容嘉賓)의 딸을 연군공주(燕郡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아울러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좌금오위원외대장군

겸 정석군경략대사(靜析軍經略大使)에 임명하고 물품 1,000단을 하사하였다. 울우가 돌아간 후 가돌우가 내조하니 좌우림장군에 임명하였다. (가돌우는) 현종의 병주(幷州) 행차를 수행하였다. 이듬해 울우가 병들어 죽자, 동생 토우(吐于)가 대신 무리를 다스렸다. 당나라에서는 형의 관작을 계승하고 연군공주로 다시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그런데 토우와 가돌우는 서로 시기하여 개원 13년 (토우가) 공주와 함께 도망와서 돌아가지 않았다. 당나라는 그를 요양군왕(遼陽郡王)에 책봉하고 숙위(宿衛)로 머물게 하였다. 가돌우는 이진충의 동생 소고(邵固)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 현종의 어가가 동쪽으로 순행할 때 소고가 행재소에 와서 태산까지 수행하였다. (현종은 그를) 좌우림군원외대장군·정석군경략대사로 임명하고 다시 광화군왕(廣化郡王)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사촌 외질녀 진씨(陳氏)를 동화공주(東華公主)로 책봉하여 시집보냈다. 소고가 돌아가고 다시 가돌우가 입조하여 토산품을 바쳤다. 중서시랑(中書侍郎) 이원굉(李元紘)이 예우하지 않자 가돌우가 불만을 품고 돌아갔다. 좌승상(左丞相) 장열(張說)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두 오랑캐(거란과 해)는 반드시 모반할 것이다. 가돌우는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지녔으니 오직 이익만 바라본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장악하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니 만약 우대하며 기미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개원 18년(730)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자기 부락과 협박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동화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투항하였다. 이에 중서사인(中書舍人) 배관(裴寬)·급사중(給事中) 설간(薛侃) 등이 수도와 관내(關內)·하동(河東)·하남(河南)·하북(河北)에서 나누어 용사들을 모집하고, 충왕준(忠王浚)을 하북도행군원수(河北道行軍元帥)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군대가 끝내 출동하지 못하였다. 개원 20년(732) 예부상서(禮部尙書) 신안왕(信安王) 위(禕)를 행군부대총관(行軍副大總管)으로 삼아 무리를 거느리고 유주장사(幽州長史) 조함장(趙含章)과 함께 장성을 넘어 격파하였으니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가돌우가 휘하의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니 해의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고, 위는 곧바로 회군하였다. 이듬해 가돌우가 다시 노략질하였다. 유주장사 설초옥(薛楚玉)이 부장 곽영걸(郭英傑)·오극근(吳克勤)·오지의(鄔知義)·나수충(羅守忠)을 보내 정예병 만명과 항복한 해의 무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군대가 유관(渝關)의 도산(都山)의 아래에 이르자

가돌우가 돌궐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관군에 저항하였다. 해의 무리가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관군이 대패하니 오지의와 나수충은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달아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진중에서 사망하였고 휘하의 6,000명은 모두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서를 내려 장수규(張守珪)를 유주장사 겸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하여 경략하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점차 장수규에게 핍박받아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얼마후 미혹함에 빠져 갈팡질팡하다 무리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향하여 돌궐로 향하려고 하였다. 장수규가 관기(管記) 왕회(王悔) 등을 부락으로 보내 설득하였다. 이때 거란의 관리 이과절(李過折)이 가돌우와 군사를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서로 협동하지 못하는 정황이 되자, 왕회가 몰래 유혹하였다. 그래서 이과절이 밤에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가돌우와 무리 수십명을 죽였다. 개원 23년 가돌우의 머리를 낙양에 전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과절을 북평군왕(北平郡王)에 책봉하고 특진(特進)·검교송막주도독(檢校松漠州都督)을 제수하고 비단 옷 한 벌과 은 그릇 10개, 그리고 비단 3,000필을 하사하였다. 그해 이과절이 가돌우의 잔당 이례(泥禮)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다른 아들도 다 죽었는데 날건(剌乾)만이 안동도호부로 도망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천보(天寶) 10년(751) 안록산(安祿山)이 거란 추장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병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유주·운중(雲中)·평로(平盧)의 군대 수만명을 동원하여 황수(潢水 ; 시라무렌) 남쪽에서 거란과 싸웠는데, 안록산이 대패하여 돌아왔으니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12년에 다시 항복하여 왔다. 정원(貞元) 연간까지 격년으로 사신을 보내어 복속국의 예를 다하였다. 정원 4년(788) 해와 함께 당나라 진무(振武)를 침략하여 사람과 가축을 대량으로 약탈하여 갔다. 9년과 10년 다시 사신을 보내 내조하니, 대수령(大首領) 회락예하(悔落拽何) 이하에게 각각 관직을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11년 대수령 열소(熱蘇) 등 25인 내조하였다. 이후로 원화(元和)·장경(長慶)·보력(寶曆)·대화(大和)·개성(開成) 연간까지 때때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회창(會昌) 2년(842) 9월 제서를 내려 ‘거란의 새로 즉위한 왕 굴술(屈戍)에게 운휘장군(雲麾將軍)·수우무위장군원외치동정원(守右武衛將軍員外置同正員)을 줄 만하다’라고 하였다.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중무(張仲武)가 상소하여 “굴술 등이 ‘거란은 예부터 회흘(迴紇)의 도장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지금 간청하여 아뢰며 나라에서 인장을 내려주기를 간청합니다”라고 하니 허락하였다. 그 도장에는 ‘봉국거란지인(奉國契丹之印)’이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