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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수경(水經)과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한는 패수(浿水)에 대한 상반된 설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5.
수경주(水經注)란 수경(水經)이라는 저자를 알 수 없는 기록에 력도원(酈道元)이 주석을 달아 놓은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나 수경주는 수경이 쓰여진 후 약 100년 남짓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패수(浿水) 관련해서는 원래 저자가 쓴 수경(水經)의 기록과 력도원(酈道元)이 쓴 수경주(水經注)의 기록이 서로 다르며, 력도원은 패수는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을 반증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원래 저작물인 수경의 기록을 봅시다.

수경(水經)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案近刻過下衍于字)
패 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림패현(臨浿縣)을 지나서 해(海, 바다 호수 큰강)로 들어간다. (案: 過 자 아래에 衍于 자가 있다. 案을 염두하여 해서 번역하면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지나가다가 림패현으로 흘러 海로 들어간다)


원래 저자는 말하기를 패수는 동남으로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경에 주석을 달은 력도원은 이것이 믿기지 않았는지 패수는 동남으로 흐른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하여 무지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래 구절이 패수는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는 기록에 대한 력도원의 주석입니다.


수경주의 기록
許慎云浿水出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盖出其縣南逕鏤方也(案南近刻訛作而又此句之下原本空一字朱謀煒引謝耳伯云宋本原缺十二字) 昔燕人衞滿自浿水西至朝鮮(案西近刻訛作而) 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下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髙句麗之國治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以朝鮮為逺循遼東故塞至浿水為界考之今古于事差謬盖經誤證也

허신(許愼, 설문해자의 저자)이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으로 흘러 해(海)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樂浪郡) 패수현(浿水縣)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는 패수현(浿水縣)이 낙랑군 동북에 있고 루방현(鏤方縣)은 낙랑군 동쪽에 있어서 모두 그 2개의 현을 나와 남쪽으로 루방현(鏤方縣)을 지난다. (案: 남(南) 자는 잘못 쓴 것이다. 그리고 윗 구절의 원본에는 1자가 빠져있다. ***朱謀煒引謝耳伯(해석못했습니다)*** 말하기를 송본(宋本)에는 원래 12자가 없다) 옛날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의 서쪽으로부터 이동하여 조선(朝鮮)에 이르렀다. (안: 서(西)는 오자에 가깝다) 조선(朝鮮)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이다. 기자가 이들에게 義田織信厚約 등 8개의 법을 가르치니 금지하는 것을 알고 예절의 풍속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사방 1000리였다. 그 자손 우거왕에 이르러 한(漢) 류철(劉徹)이 BC109년에 루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왕을 공격하였는데 우거왕을 패수(浿水)에서 깨뜨려서 드디어 그들을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설문해자의 기록대로) 동으로 흘렀다면 패수(浿水)를 건널 수 없었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인데 력도원이 사신으로 가서 그들에게 물어보니 패수(浿水)의 북쪽에 성(城)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는 것이다. 조선현은 낙랑군을 다스리는 현인데 한(漢) 류철(劉徹)이 설치한 것이다. 패수는 다시 서북으로 흘러간다. 한서(漢書)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도달하여 해(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한(漢)이 일어났을 때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땅이 너무 멀어 요동(遼東)의 옛 성을 다시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여 볼 때 수경(水經)에서 패수가 동쪽으로 흘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열나게 력도원은 반증하려고 노력하였는데, 틀렸습니다. 이유를 들면

1) 설문해자에서는 패수가 동으로 흐른다고 하였고, 수경의 저자는 동남으로 흐른다고 하였으나, 력도원은 위 두개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체 그냥 동으로 흐른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설문해자에서 동으로 흐른다는 것은 대충 말한 것이며 정확히 말하면 동남으로 흐른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이 漢에서 고조선으로 투항할때 패수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패수는 동남으로 흐른 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력도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력도원은 자신의 논리에 자신이 빠지는 격이 되는데 왜냐하면 이렇습니다. 패수가 동쪽으로 흐를 수 없는 이유가 위만이 패수를 동쪽으로 건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한서지리지를 예로 들면서 력도원은 패수가 서쪽으로 흘렀다고 주장하고 있죠. 아주 또라이입니다. 동쪽으로 흐르기때문에 동쪽으로 강을 건널수 없다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위만이 동쪽으로 건널수있었겠습니까? 서쪽으로 흐르는 강도 절대 동쪽으로 건널 수 없는 것입니다.

3) 력도원은 469~527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설문해자와 수경에 나타난 패수, 즉 고대에 패수를 자신이 살던 시대의 패수와 연결시키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패수란 고유명사가 아니라 하천을 가리키는 북방계 사투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수도인 평양성을 옮겨가면 그곳의 하천은 무조건 패수입니다. 평양(平壤)는 음으로 읽어 "펴라"로 읽는 것이고 패수(浿水)는 浿는 음으로 읽고 水는 뜻으로 읽어 "펴라(水는 냇가의 뜻을 취함)"로 읽은 것입니다. 이는 거란 여진 등의 언어에서 나타나는데...

欽定遼史語解卷二
哈克繖必賚達克勒拜刷沃濟, 滿洲語哈克繖險峻也必賚河也逹勒拜傍邊也刷山後樹林也沃濟叢林也卷三十一作合四卑臘因鐵里卑稍只
(만주어로).....필뢰(必賚)는 하천을 말한다.

欽定金史語解卷二
徳里必喇, 徳里盤石也必喇河也卷六十四作忒里闢剌部名
필라(必喇)는 하천을 말한다.

欽定金史語解卷四
必喇河也卷六十八作鼈剌水名
필라(必喇)는 하천을 말한다. 권68에서는 별랄(鼈剌)로 썼는데 하천 이름이다.

필 뢰, 필라, 별랄, 이는 모두 하천을 말하는데 패수(浿水)라고 적은 것입니다. 이는 뜻과 음을 번갈아가면서 한자를 쓰던 조상들의 지혜입니다. 水 한 글자가만으로도 "펴라"라고 읽는 것이지만 이것을 더 정확히 알려주기 위하여 앞에 浿(패) 자를 써서 浿水는 패수로 읽지 말고 "펴라"로 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나인들이 알지 못하여 낙랑군에만 浿水가 있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력도원은 수도의 위치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을 기원전 2세기 위만의 왕험성을 기원후 5세기 고구려 도읍에다가 심어놓고 위만조선시대의 패수는 서북쪽으로 흘렀다는 억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하는 바보들에게
력도원의 수경주 기록을 근거로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하는 바보들에게 수경주와 사기 조선열전 서로 연관시켜 자세히 읽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고조선과 위만조선때에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칩시다.
력도원이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야 된다는 주장은 위만이 패수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다는 것에 근거합니다.  
그러면, 위만이 한(漢)나라에서 출발하여 대동강 서쪽에서 대동강을 건너  대동강 동쪽에 조선에 왔다고 사기 조선열전이 해석되는 것입니다.
대동강을 위만조선시대에 패수로 보는 자들은 한(漢)나라를 서해바다 한 복판에 있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상식이 없는 자들이 하는 짓인지 아실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