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re]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의 미스테리 풀리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26
/ 정성일 님.
정말 경탄스러운 ‘날카로운 추정’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적 발견’을 해 주었습니다
머리 숙여 ‘치밀한 추론’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남당(南堂)의 일사(逸史)가 고대 아시아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중요한 돌파구임의 명백한 한 사례를 정성일 선생께서는 해주셨다고 좌계는 믿습니다.
현재까지 석탈해(昔脫解)에 대해서는
1)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포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迎日)에서 한 노파가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형 이야기와
2) 김수로 왕과의 신화적인 각술(角術) 싸움을 하다가, ‘중국으로 들어가려다가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이 주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정성일 선생께서 이번에 규명한 사실은 실로 어마어마한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조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선생의 추론 과정
일단 선생의 추론 과정은 완벽합니다.
즉 선생께서 해석을 한 ‘고구리 사략 동성왕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納柴吉女鵲氏爲夫人.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 十月以溫祚太子爲正胤以烏干女爲太子妃以馬黎爲東宮大夫使習文字入講經籍上與皇后亦聽之.
15년 무술(B.C.23)년 5월 동쪽을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고 배를 타고 건너서 시길이 딸을 바치니 작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8월 신마 2천필을 한빈에서 검열하였다.
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正胤阿爾爲爲東宮妃溫公主副之. 二月鵲氏生鵲太子.
19년 임인(B.C.20)년 1월 유리가 후계자가 되고 아이가 동궁비, 온공주가 곁에서 보좌했다. 2월 작씨(낙랑태수 시길의 딸)가 작태자를 낳았다.
그리고 아직 해석을 올리시지 않으신 ‘고구리 사략 유리왕 편’의 다음과 같은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고구려 유리왕
29년 경오년(A.D.10) 6월, 鵲태자가 新羅太輔가 되다.
신라 남해차차웅
7년(A.D.10) 가을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2. 이 ‘새로운 사실(史實)의 발견’이 왜 중요한가?!
좌계가 볼 때에는 이는 정성일 선생께서 밝혀낸 사실은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기존의 역사해석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가 봅니다.
가.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 미스테리를 풀었다.”는 점입니다.
그 첫째는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의 의미에 대한 미스테리가 풀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용성국(龍城國)은 유목민족의 용성대제(龍城大祭)와 관련되어서 주로 거론되어왔습니다.
그런데, 고주몽-동명성왕이 황룡(黃龍) 자웅(雌雄)이 섹스(sex)하던 곳에서 고구리 초기 수도인 흘승골성(訖乘骨城)에서 도읍하고, 또 용산(龍山)을 장지(葬地)로 하였기 때문에,
결국 고구리-백제의 연합국 - 그리고 이번 ‘정성일 선생’께서 밝힌 사실을 통해서 - 신라까지 포함되어서 포괄해서 지칭할 때에는 용성국(龍城國)이라 했음이 분명히 들어난다고 좌계는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좌계가 꾸준히 해 온 이야기이긴 하나, ‘고래와 대화를 하는 여인’을 아씨(阿氏)라고 칭했으며, 이들 만이 왕후(王后)의 자격이 있고, 이들을 훈련시키는 곳이 부상국(扶桑國 -- 한반도에 사천 김성겸님이 주장한 대한국(大漢國)이 있었으므로, 좌계의 사견(私見)으로는 현 울릉도)” 근처의 여인국(女人國), 적녀국(積女國)이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왕후(王后) 훈련을 받고, ‘국제-배달화백-특구’인 낙랑(樂浪)의 ‘시길’의 공주(公主)로 있었던 작(鵲)씨가 고주몽-동명성왕을 만나서 결혼 진정한 왕후(王后)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번 ‘정성일 선생의 규명’에 의해서 드러나는 점이 있습니다.
나. 고구리, 백제, 신라는 ‘서로 피가 통하는 왕가(王家)’이다.
지금까지는 고구리와 백제가 소서노(召西奴)어라하와 고주몽 동명성왕과의 관계 때문에 같은 피가 흐르는 왕가(王家)임은 널리 인정되었으나, 신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성일 선생이 석탈해(昔脫解)의 출자(出自)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에, 결국 용성국(龍城國) 즉 고주몽-동명성왕의 ‘피’가 고구리-백제-신라에 모두 흐름을 규명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번 ‘정성일 선생’이 규명한 사실의 중요성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다. 석탈해는 ‘가야’와의 ‘법률-프로토콜’의 통합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 김수로 왕과의 신화적인 각술(角術) 싸움인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사실은 “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칭하는가?”를 재조명할수 있는 ‘학술적 위치’를 던져주었다고 봅니다.
정성일 선생님!
정말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1)

정말 경탄스러운 ‘날카로운 추정’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적 발견’을 해 주었습니다
머리 숙여 ‘치밀한 추론’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남당(南堂)의 일사(逸史)가 고대 아시아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중요한 돌파구임의 명백한 한 사례를 정성일 선생께서는 해주셨다고 좌계는 믿습니다.
현재까지 석탈해(昔脫解)에 대해서는
1)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포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迎日)에서 한 노파가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형 이야기와
2) 김수로 왕과의 신화적인 각술(角術) 싸움을 하다가, ‘중국으로 들어가려다가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이 주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정성일 선생께서 이번에 규명한 사실은 실로 어마어마한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조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선생의 추론 과정
일단 선생의 추론 과정은 완벽합니다.
즉 선생께서 해석을 한 ‘고구리 사략 동성왕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納柴吉女鵲氏爲夫人.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 十月以溫祚太子爲正胤以烏干女爲太子妃以馬黎爲東宮大夫使習文字入講經籍上與皇后亦聽之.
15년 무술(B.C.23)년 5월 동쪽을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고 배를 타고 건너서 시길이 딸을 바치니 작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8월 신마 2천필을 한빈에서 검열하였다.
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正胤阿爾爲爲東宮妃溫公主副之. 二月鵲氏生鵲太子.
19년 임인(B.C.20)년 1월 유리가 후계자가 되고 아이가 동궁비, 온공주가 곁에서 보좌했다. 2월 작씨(낙랑태수 시길의 딸)가 작태자를 낳았다.
그리고 아직 해석을 올리시지 않으신 ‘고구리 사략 유리왕 편’의 다음과 같은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고구려 유리왕
29년 경오년(A.D.10) 6월, 鵲태자가 新羅太輔가 되다.
신라 남해차차웅
7년(A.D.10) 가을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2. 이 ‘새로운 사실(史實)의 발견’이 왜 중요한가?!
좌계가 볼 때에는 이는 정성일 선생께서 밝혀낸 사실은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기존의 역사해석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가 봅니다.
가.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 미스테리를 풀었다.”는 점입니다.
그 첫째는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의 의미에 대한 미스테리가 풀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용성국(龍城國)은 유목민족의 용성대제(龍城大祭)와 관련되어서 주로 거론되어왔습니다.
그런데, 고주몽-동명성왕이 황룡(黃龍) 자웅(雌雄)이 섹스(sex)하던 곳에서 고구리 초기 수도인 흘승골성(訖乘骨城)에서 도읍하고, 또 용산(龍山)을 장지(葬地)로 하였기 때문에,
결국 고구리-백제의 연합국 - 그리고 이번 ‘정성일 선생’께서 밝힌 사실을 통해서 - 신라까지 포함되어서 포괄해서 지칭할 때에는 용성국(龍城國)이라 했음이 분명히 들어난다고 좌계는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좌계가 꾸준히 해 온 이야기이긴 하나, ‘고래와 대화를 하는 여인’을 아씨(阿氏)라고 칭했으며, 이들 만이 왕후(王后)의 자격이 있고, 이들을 훈련시키는 곳이 부상국(扶桑國 -- 한반도에 사천 김성겸님이 주장한 대한국(大漢國)이 있었으므로, 좌계의 사견(私見)으로는 현 울릉도)” 근처의 여인국(女人國), 적녀국(積女國)이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왕후(王后) 훈련을 받고, ‘국제-배달화백-특구’인 낙랑(樂浪)의 ‘시길’의 공주(公主)로 있었던 작(鵲)씨가 고주몽-동명성왕을 만나서 결혼 진정한 왕후(王后)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번 ‘정성일 선생의 규명’에 의해서 드러나는 점이 있습니다.
나. 고구리, 백제, 신라는 ‘서로 피가 통하는 왕가(王家)’이다.
지금까지는 고구리와 백제가 소서노(召西奴)어라하와 고주몽 동명성왕과의 관계 때문에 같은 피가 흐르는 왕가(王家)임은 널리 인정되었으나, 신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성일 선생이 석탈해(昔脫解)의 출자(出自)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에, 결국 용성국(龍城國) 즉 고주몽-동명성왕의 ‘피’가 고구리-백제-신라에 모두 흐름을 규명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번 ‘정성일 선생’이 규명한 사실의 중요성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다. 석탈해는 ‘가야’와의 ‘법률-프로토콜’의 통합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 김수로 왕과의 신화적인 각술(角術) 싸움인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사실은 “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칭하는가?”를 재조명할수 있는 ‘학술적 위치’를 던져주었다고 봅니다.
정성일 선생님!
정말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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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용성국(龍城國)이 고구리, 백제, 신라가 통합된 초기 국가 명칭이었음이 분명해진다는 것은 이 싸이트(site)에서 ‘라무 님’께서 최근 짜증(?)을 낸 사실 - “여러분께 실망합니다.”에서 강력히 주장한 내용 - 즉 용(龍)도 우리의 중요상징이었다. 절대 화하(華夏)의 것이 아니다.-를 역사적 사실로써 증명하는 쾌거(快擧)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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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국인 <고구리> 초기에 <고구리>에서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신라>로 흘러들어간 일은 아래와 같이 "고구리사초/고구리사략권지일"에 적혀있읍니다. 찬밥(?)신세인 <작>태자와 <유리명왕>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쌓인 감정으로 해고된 <협보>가 느끼기엔 "미련없이" <신라>로 흘러들어 갑니다.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1.<東明>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2.<東明>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東宮. 二月,<鵲>氏生<鵲>太子 3.<琉璃光明>二十二年癸亥,十二月,上以<陜父>初附於<沸流>有蘊意至是罷之. <陜父>以瓢浮海入<新羅>. 4.<琉璃光明>二十三年甲子,二月,....<鵲>太子浮海入<新羅>. 5.<琉璃光明>二十七年戊辰,三月,....<新羅>以女妻<鵲>太子. 6.<琉璃光明>二十九年庚午,六月,....<鵲>太子爲<新羅>太輔. 한참을 지나면 <신라>의 왕후를 꼬드겨(?) 황후로 삼았다는 기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주 남남은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수백년 세월이 흐르면서 <고구리><백제><신라>는 서운한 일들이 쌓이게 되고, 나중엔 권위와 재산을 다투는 사이로 되었는가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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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선생님. 남당(南堂) 선생의 유고(遺稿)의 중요성을 갈수록 실감하게 됩니다. 계속 해석의 장정(長征)을 기원(祈願)해 마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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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계가 ‘[re]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의 미스테리 풀리다’의 글에서 ‘김성겸 선생’의 견해가 부상국(扶桑國), 우산국을 현 울릉도로 규명했다고 했으나, 오늘 ‘김성겸 님’의 소론(所論)을 꼼꼼히 읽어본 바에 의하면, “한반도 북부는 현 평양의 한성(漢城) 각자(刻字)와 관련해서, 대한국(大漢國)이라는 확언(確言)을 하고 계시나, 부상국(扶桑國)에 대해서는 그것이 ‘울릉도’인지 ‘한반도 남쪽’인지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계심을 발견하였습니다.
따라서 인용을 정정(訂正)합니다.
“부상국(扶桑國 - 사천 김성겸 선생이 규명했다시피 현 울릉도)”이란 글을
“부상국(扶桑國 - 한반도에 사천 김성겸님이 주장한 대한국(大漢國)이 있었으므로, 좌계의 사견(私見)으로는 현 울릉도)”로 고칩니다.
좌계가 사천 김성겸 선생의 의견도 좌계의 사견과 같은지 착각을 하였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무튼 사천 김성겸 선생은 이 문제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고, 이 점 좌계는 존중하여서 인용(引用) 정정(訂定)을 합니다.
좌계가 “왜 우산국=부상굮=울릉도를 같은 지명으로 보는가?”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