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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라디오 님) 고구리(高句麗)의 대대로(大對盧) 전칭(前稱)이 선왕(仙王)?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12:10
라디오 님.  
사천(史穿) 김성겸 님께서 현재 번역하고 있는 고구리 사략(史略)과 관련해서 좌계가 ‘댓글’로써 경기(耿夔)를 ‘벅수군’의 이칭(異稱)으로 착각한 것을 ‘요동 태수’로 밝혀주셔서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약간만 조사(調査)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이런 확인과정 없이 ‘댓글’을 달았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사천(史穿) 선생께 큰 실례를 범했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좌계는 남당(南堂)선생의 ‘고구리 사략(史略)’을 읽으면서, 엄청난 경악을 느끼고 있습니다.  

1.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에서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임금의 명칭은 ?

그것은 좌계가 꾸준히 연구해온 내용 - 주로 경제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신시(神市)와 화백(和白)을 연구해 왔었는데, 이를 주도하는 것을 고조선-삼한 시대부터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에서 이루어졌고, 이를 관장하는 사람을 단군(檀君 -고조선이 불렀던 명칭), 천군(天君-삼한이 불렀던 명칭)이었음은 ‘라디오’ 님 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이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이란 주역의 표현으로 고대 아시아에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서, 백성인 천독(天毒)들은 자유롭게 이리 저리 국가를 초월해 이동하면서 화백-민주주의 권리(權利)를 향유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왔습니다.

그리고 또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 조(條)를 섬세히 읽어본 바에 의하면, 소도(蘇塗)가 있었다는 그 별읍(別邑)이 주로 ‘호수(湖水) 안’에 선박(船舶)들이 핵(核)이 되어 주변 옥토(沃土)를 관장하고있음을 알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대륙은 호수(湖水)가 많고, 이는 강(江)을 통해 전부 네트워킹(networking)되기 쉬운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좌계의 유별난 ‘역사해석’은 “고구리, 백제, 신라는 겉으로는 다른 나라지만, 소도(蘇塗)를 통해서 보면, 결국 한나라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소도국(蘇塗國) 아래, 고구리, 백제, 신라가 하나의 역할국가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부여와 왜(倭)도 첨가시키는 그런 견해(見解)였습니다.

사실 (A),(B),(C)하는 번호를 붙여가면서 긴 글을 쓰는 것도 원래 “동천왕(東川王)이 패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법(國法)으로 순사(殉死)를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고구려 사람들이 존경해서 순사를 많이하게 되었나?”하는 사천(史穿) 김성겸 님의 의문(疑問)에 대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득이 길고 긴 이야기를 쓰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도중에 김성겸 님은 남당(南堂) 선생의 유고(遺稿) 해석이라는 대장정(大長征)의 길을 나섰는데,  좌계가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놀라는 이유는 ‘신시(神市)와 화백’에 관련된 소도(蘇塗)문명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전제(前提)된 역사적 사실이 발견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좌계가 쓰려고 하던 긴 글을 잠시 멈추고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을 비롯한 정성일 선생의 해석 작업에 일조(一助)하고 져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서(史書)에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직책을 고구리, 백제 (아마도 신라도 포함해서)에서는 대로(對盧)라 칭하고, 관경삼국(管境三國)을 총괄한 분이 대대로(大對盧)라고 좌계는 생각해 왔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구리, 백제, 신라는 겉의 나라였고, ‘안’의 나라가 소도국(蘇塗國)인데, 그 소도국의 소왕(小王)들이 각기 고구리, 백제, 신라에 있고, 대왕(大王)인 대대로(大對盧)는 고구리(高句麗)의 ‘중심된 소도(蘇塗)’에 있었다.”라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왔었기 때문에, 좌계는 소도(蘇塗)-신시(神市)-화백(和白)-벅수군 관련의 이야기가 전제된 많은 새로운 사료(史料)가 고구리-사략에 등장하자,  경기(耿夔)를 ‘벅수군’으로 ‘지레 짐작’하는 과오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를 “내기할까요?” 하고 ‘라디오’님께서 교정(矯正)해 주심에 대해 다시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2.  선왕(仙王)은 대대로(大對盧)의 이칭(異稱) ?

좌계가 오늘 이 글을 쓰는 것은 이런 변명(辨明)을 쓰고져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로(對盧)혹은 대대로(大對盧)의 전칭(前稱)이 선왕(仙王)이 아니겠는가?”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가운데,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왕(王)의 이름이 선왕(仙王) 혹은 대대로(大對盧)로 병칭되어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김성겸 선생이 번역한 ‘신명선제기’
그리고 ‘라디오’ 님이 옮긴 ‘태조황제기’를 읽어보고 느끼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측은 좌계가 대로(對盧)를 향찰(鄕札)로 읽어서, ‘맞이 로’ 즉 ‘마지로’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부터 설명드리는 것이 편할 듯 합니다.

상대(相對)의 ‘대(對)’는 ‘맞-상대’라는 말에서 보듯이 ‘맞’의 뜻이 있고, 지금도 조선(朝鮮) 무교(巫敎)에서 탱화에 걸려있는 신(神)의 모습은 ‘부처님’ 모습이라기 보다는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마지’라 칭하고 있고, 또 로(盧)는 존칭어미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선왕(仙王)을 ‘신선(神仙)들의 왕’이란 개념으로 보다도 ‘신선들을 모시는 왕’의 개념으로 좌계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대대로(大對盧)나 선왕(仙王)의 개념이 완전히 등치(等値)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좌계의 생각은 고구리 사략(史略)에서 노골적(露骨的)으로 밝혀집니다.


가.  별읍(別邑)과 별자(別子)

첫째는 신명선제(神明仙帝)를 설명할 때, “제의 휘(諱)는 <재사(再思)> 또는 <록신(鹿臣)>이며, <대무신제(大武神帝)>의 별자(別子)이다.(帝諱<再思>又曰<鹿臣>, <大武神帝>別子也.)”한 기록에서 드러난다고 봅니다.

이 기사(記事)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별자(別子)라는 말인데, 물론 그 뜻은 서자(庶子)의 이칭(異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좌계는 소도(蘇塗)를 별읍(別邑)이라고 칭한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과 연관되어서 생각합니다.

원래 어머니인 갈사후(曷思后)께서 ‘배달어미’ 즉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V.I.P.로 처음부터 수련을 받은 여자였고,  또 “소도(蘇塗)는 불교와 비슷한 종교적 단체였다.”라는 동이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호동(好童) 왕자의 자살 사건이 일어난 뒤에, 태자(太子)의 자리가 재사(再思)에서 모본제(慕本帝)로 옮기게 되자,  숫제 갈사후(曷思后)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별읍(別邑), 즉 소도(蘇塗)에 바쳐진 아이라는 뜻으로 별자(別子)라고 칭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천주교(天主敎) 등에서 ‘아들을 신부(神父)가 되기 위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과 궤(軌)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재사(再思)라는 이름 이외의 이명(異名)인 록신(鹿臣) 역시 범상(凡常)치 않는 이름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록(鹿)이 사슴이고, 이 사슴은 민중(民衆), 백성의 상징으로 많이 쓰이고, 신(臣)은 ‘어미’로 해석할수 있기 때문에 ‘백성의 어미’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어서, 결국 소도(蘇塗)와 관련깊은 이름이라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고구리(高句麗)의 소도(蘇塗) 명칭이 갈사궁(曷思宮)?

둘째는 ‘신명선제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입니다.  
‘민중제(閔中帝)가 돌아가시매, 나랏사람들이 그를 보위(寶位)에 세우려 하였으나, 고사하며 말하기를 “적자(嫡子)가 있으며, 이는 서자(庶子)가 감당할만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생모(生母)를 모시고 피하여 달아났다.  모본제(慕本帝)도 그 뜻을 옳게 여기고, 선왕(仙王)을 봉(封)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원문(原文) :<閔中帝>崩, 國人欲立之, 固辭曰; "嫡子在, 比庶子之所勘當也.", 遂奉母而走. <慕本>亦義其志, 封爲<仙王>.

국인(國人)이 화백회의를 통해서 ‘말발’로써 밀어주는 과정이 있음을 ‘국인욕입지(國人欲立之)’로 표현하고 있는데, 어머니이신 ‘갈사후’를 모시고 피하여 달아난 것은 왕권(王權)이 미치지 못하는 소도(蘇塗)에 들어가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태도를 보고 “모본제(慕本帝)도 그 뜻을 옳게 여겨서 ‘선왕(仙王)’을 봉(封)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문제는 봉(封)하는 형식이 그 당시로는 역시 모본제(慕本帝)가 신시(神市)의 어떤 화폐로 ‘말발’을 밀어주어서 대대로(大對盧) 혹은 선왕(仙王)이 되게한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갈사궁(曷思宮)은 고구리에서 선왕(仙王) 혹은 대대로(大對盧)가 거(居)하는 소도(蘇塗)가 있는 궁궐(宮闕)이 이름인듯한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초(楚) 나라의 경우, 죄인(罪人)이 도망가도 왕권(王權)이 쫓을수 없는 궁궐(宮闕)이 있었고, 이를 장화궁(章華宮)이라고 불렀음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다.  부끄러워 한 이유

‘모본제기’에 드러나듯이, 모본제(慕本帝)는 황음(荒淫)무도(無道)한 사람입니다.
워낙 여색(女色)이든 남색(男色)이든 가리지 않고 즐겼는데도 그가 “부끄럽다.”고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실은 선왕(仙王) 즉 대대로(大對盧)이었던 재사(再思)가 ‘동복(同腹) 형(兄)인 호동(好童)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해서, 그 딸인 위화(葦花)를 후실(後室)로 두었는데, 모본제(慕本帝)가  불러들여 임신시키고 “부끄럽다.”한 그 사건입니다.
‘모본제기’에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호동의 딸 **<위화(葦花)>를 불러들였고, 그녀는 <재사(再思)>의 여자(再思室)였었다.**
<갈사궁(曷思宮)>이 딸을 낳고는, 딸 낳은 것을 부끄러워 하며, **"이걸 낳았으니, 어쩌나?" 하고는, 이름을 <니(怩)>라고 지었다.**  

원문(原文) : 八月, 發倉賑民. 納好童女葦花,再思室也. <曷思宮>生女怩之, 曰: "生此, 何爲," 乃名怩

좌계가 볼 때에 모본제(慕本帝)가 “부끄럽다.”라고 말한것은 고조선-삼한 이래 신성하게 생각해온 소도(蘇塗)의 임금의 후실(後室)에게 임신(姙娠)을 시킨 사실 자체가 아무리 자신이 황음(荒淫) 무도(無道)해도 이는 “쪽 팔리는 일이다.”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런 면에서도 좌계 생각에는 고구리의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 ‘갈사궁(曷思宮)’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신명선제(神明仙帝) 때 왕권(王權)을 대신한 사람은 마경(麻勁) 대추가(大芻加)

중요한 것은 “이 신명선제(神明仙帝)에 대한 이야기가 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빠져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고구리는 물론, 백제와 신라까지도 소도(蘇塗)의 임금이 되려면, 왕가(王家)으로써의 ‘계승권’이 없음을 ‘의례(儀禮)’상의 죽음을 통해, 분명히 하는 사회적 약속이 있었다고 봅니다.
어쩌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이 ‘약속’의 의미를 철저히 지키는 사관(史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소도(蘇塗)의 왕(王)인 선왕(仙王) 혹은 대대로(大對盧)의 직책을 그대로 지닌 채, 제위(帝位)는 ‘빈 자리’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고구리 왕(王)을 대행하는 사람의 명칭을 대추가(大芻加)가 였으리라고 좌계는 추정합니다.   대대로 혹은 선왕(仙王)으로써 ‘배달화백’에 의해서 ‘왕권(王權) 대행(代行)’으로 임명된 분이 바로 마경(麻勁)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리(高句麗)에서는 화백회의에서 왕의 후보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을 고추가(古鄒加)였으리라고 좌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추가(大芻加)는 ‘이런 고추가 가운데 가장 큰 분’이란 뜻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단어이기있기 때문입니다.

‘신명선제기’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 원년(단기2406년/AD73)계유, 겨울 12월, <마경(麻勁)>을 대추가<엄호공(淹滹公)>으로, <송보(宋輔)>를 태보(太輔)로, <목탁>과 <달가>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원문(原文)) : 元年癸酉, 冬十二月, 以<麻勁>爲大芻加<淹淲公>으로, <松寶>를 <太輔>.   <穆卓>·<達賈>, 左·右將軍.

실제 마경(麻勁)의 이력(履歷)은 왕권(王權) 대행(代行)인 ‘대추가’에 임명되기 좋은 경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모본제(慕本帝)가 왕권(王權)을 잡은 후에, 처음 한 일이 당시에 ‘왕을 대신하여 화백회의에서 ‘왕 턱’을 조정하여 화백회의에 출입(出入)하는 자격을 맡은 - 신라에서 상대등(上大等)이 하는 일 - 태보(太輔)자리에 있던 마경(麻勁)을 파면하고 그를 서민(庶民)으로 만드는
일이었음이 고구리 사략 ‘모본제기’ 원년 조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김성겸 님의 해석’

: 모본제(慕本帝) 원년(단기2401년/AD68)무진, 6월, 선제를 석굴에 장사하고 나서, 말하길; "신하들과 숙부(<민중>)는 내가 커서 알 만큼 알게 되어, 전위하려 하셨었는데, 두 세 명의 간사한 여자들이 모후의 명령을 핑계로 하여 그것을 막았소. 모후께서는 나를 헐뜯기를 즐기셨는데, 이는 태보가 잘못한 때문이오." 라 하고는, <마경>을 파직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며, <송보>와 <을상>은 면직시켰다.

원문(原文) :
◎元年戊辰六月, 葬先帝于石窟. 謂;"左右叔父,以我長而賢,欲傳位,二三奸姬托,以母后之命,而拒之. 母后豈惡我, 是乃太輔之過也." 乃罷<麻勁>爲庶人, <宋보><乙祥>盖免.

즉 모본제(慕本帝)의 독제가 들어설때,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분이 마경(麻莖)이었고, 그 다음이 송보(宋輔)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송보(宋輔)는 태보(太輔)가 되고, 마경은 대추가(大芻加)가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삼국사기에 고구리 왕계(王系)에 왜 신명선제(神明仙帝)의 이야기가 빠져있고, 또한 대신해서 태조왕(太祖王)의 이야기로 바꾸고, ‘라디오’ 님께서 해석을 옮긴 신용득 님께서  “[삼국사기에는 이 왕이 빠져있다. 대신에 전부 太祖王의 재위로 채우고 있다. 태조왕의 재위가 93년이라는 너무나 긴 시간이 되어 있는 이유가 이로써 밝혀진 게 아닐까?]”고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당시에는 왕권대행을 하는 대추가(大芻加) 마경이 있었고,  왕 혹은 제(帝)가 사실상 공석(公席)으로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4.  소도(蘇塗)의 크기

아무튼,  좌계가 고구리 사략을 보면서 놀란 것은 “소도(蘇塗)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한 여러 나라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고조선-부여 연합군과 한(漢)이 전쟁을 해서, 한(漢)이 패배하자, 고조선-부여 연합국은 “우리가 터준 씰크-로드의 교역권은 계속 한(漢)나라가 가져도 좋으나, 하북(河北) 지역에 ‘국제 화백 특구’인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되, 이를 지도(指導)하는 나라를 비류국(沸流國)으로하자”는 협상이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비류국(沸流國)은 분명 소도가 있었습니다.
왜냐?  송화(宋花)를 기녀(基女)라고 칭하고, 유리왕이 이 여자와의 결혼에 대해서 고주몽-동명성왕과 소서노-어라하께서도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으니깐 말입니다.

또 하나는 바로 낙랑국(樂浪國)을 들 수가 있는데,  놀랍게도 현 한반도의 평양 근처가 아니라, 오히려 발해에서 현 압록강 부근으로 고구리 사략(史略)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가 바로 갈사국(曷思國)입니다.
놀랍게도 이 갈사국은 비류국은 물론 모든 부여 - 바이칼 근처의 북부여와 중국 서북부의 부여와 만주에 있는 동부여를 포괄하면서도 하북의 한사군을 지도하는 비류국 까지를 관할하는 가장 큰 소도(蘇塗)를 지녔음이 ‘정성일 님’께서 올린 ‘본기 신편 열전-갈사태후 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리(高句麗) 사략에 묘사되어 있는지 않는지 모르지만 - 이는 지명(地名)과 여러 국가의 위치가 아직 안밝혀졌기 때문임 -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께서 발굴한 대한국(大漢國)이 역시 소도(蘇塗)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좌계 생각에는 소도(蘇塗)의 크기로 보면, 뒤에 언급하는 순서대로 점점 커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낙랑국(樂浪國)<비류국(沸流國) <갈사국(曷思國) <대한국(大漢國)’의 순서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가설(假設)이긴 하지만, 이러한 소도(蘇塗)들의 대통합이 신명선제(神明仙帝)때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소도국(蘇塗國)의 외피(外皮)라고 할수 있는 고구리,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완벽히 포진(布陣)을 마친 때가 바로 신명선제(神明仙帝)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그 다음에 들어서는 고구리 왕(王)의 시호(諡號)가 태조(太祖)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태조(太祖)는 ‘나라를 여는 임금’에 붙여지는 것인데, “어째서 한참 후에 붙여졌는가?”하는 것을 마땅히 설명할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원래 ‘배달화백으로 세계체제’를 담당하려는 고조선-삼한 이래의 뜻이 중국대륙의 혼란을 겪어 잠시 철수했으나, 고주몽-동명성왕을 기점으로 다시 6대를 걸쳐 완벽히 끝났기 때문에 7세이신 태조를 ‘태조황제’로 삼지 않았나 하는 것이 좌계의 시각입니다.

아무튼 삼국사기(三國史記) 태조대왕 62년(AD114)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3월에 일식이 있었다.
8월에 왕은 남해(南海)를 순수하였다.
10월에 남해로부터 서울에 돌아왔다.  

2개월에 걸쳐서 - 다시 말하면, 고구리 국내성으로 부터 - 좌계는 이를 현 북경 자금성으로 보고 있읍니다만 - 소도(蘇塗)를 타고 백제며, 신라 영역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저 남해의 끝 오늘날 해남도가 있는 광동성까지 가는데 1달, 오는데 1달 합하여 2달 걸린 여정(旅程)을 밟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라디오 (2007-05-16 15:29:39)  
아무리 지도를 자주 보아도..실질적인 고구려의 중심지는 요하부근이였습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평양이란 불분명한 지명때문에... 체계적으로 고구려의 강역변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헥갈리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하북성 유역을 파악하는것도 좋은 일이나 이제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 다시금 봐야 할 때라고 봅니다. 시각 거의 전부가 하북성에 포커스를 두기 때문에..사실상 요하주변이나 그외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편입니다.
하고는 싶었으나 기회가 적었고..이제는 기회가 왔으니..고구려 중,후기때의 강역변화를 다시금 알 때라고 보는거죠.
이는 이곳의 사이트의 경향과 배치된다고 보는건 속 좁은 생각입니다.
혹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되오나..
라디오 (2007-05-16 15:35:15)  
중/후기로 갈수록..강역변화로 인해 고구려의 세력이 어떻게 변해갔는냐 사항은..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기존 통설과 가까울수도 있겠죠.
그래도 알건 알아야 합니다.
의무려산,요하,심양,길림,흑룡강 쪽을 다시금 볼 기회가 될겁니다.
특히나 낙랑에 관한 정보가 많이 담긴걸로 보여.. 상당한 충격이 올걸로 생각됩니다.
1/3 왔군요. 분량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고 앞으로 나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해석에 참여하신 분들께 고마움을 느낍니다..
좌계 (2007-05-16 16:03:15)  
/라디오 님.

좌계 생각에는 강역(疆域) 문제는 ‘김 성겸’ 선생 의견대로, 잠시 접어두면서, 일단 새로운 사료(史料)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남당(南堂) 유고집에 ‘괄호’로 현재의 지명을 넣은 것은 원(原) 사료 자체에 그런 위치(位置) 비정(比定)이 아니라, 남당(南堂) 선생의 관점에서 볼 때의 추정인 듯 싶습니다.
아무튼 좌계 생각에도 김성겸 님 의견대로 일단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이 해석을 통해 들어나는 ‘사건(事件)의 관계’에 의해서 지명(地名)과 강역(疆域)을 추정할 수 있는 시야(視野)가 넓어진다고 봅니다.
라디오 (2007-05-16 16:23:55)  
강역은 주석을 우선 믿어보고..주석을 비판할라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합니다. 그럴만한 공력도 갖추고 있지 못한 편이라..우선 믿어보고 조금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고..내세울건 못 됩니다.
해석에 대해서는 오류도 가끔 보입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태클을 걸수 없는 일이고..
정성일님의 오류에 대해 여러번 리플을 달기도 하고 했죠..
저번에 다시 오류를 고쳐 주십사하고 요구를 했지만..받아 들여 지지 않더군요.
그래서,리플을 지웠습니다. 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해석은 백송님 좀 해 주셨으면..그런 바램이 있지만..바쁘신 것 같고.. 중간에 태클만 거는편이라..
개인적으로 친하면야, 태클이 아니라..농담도 주고받며 모두 다 이해하고 넘어 갈 수 있지만..
다 자세히 모르는 분들과 의견을 맞추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죠..
라디오 (2007-05-16 16:28:45)  
그런 어려움이 있으니.. 저 아니래도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줄만한 분이 나타나셔야 할터인데..
아직 그런 분은 잘 안보이니 걱정이죠. 고수분이 적으니..필요할땐 아쉽고 그런 편이죠..
뒤부분을 잠시 보니..페이지수도 많고..분량도 많더군요.
해석도 어쩌다 조금 할 정도입니다. 도움을 많이 드려야 할텐데..머리가 아프군요^^
라디오 (2007-05-16 18:12:45)  
해석에 대해 다시 얘기하자면.. 중간 태클정도 거는 정도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직접 한자 타자도 잘 못치고.. 아래한글2002에 약합니다.
아크로뱃 간단 편집은 할 수 있어도... 워드는 무리이군요.
그리고, 자꾸 중간에 끼어들면 저만 못된 놈 되는거 같아 보입니다.
개인 욕심은 채울 수 있겠지만..별로 보기 좋은 현상은 아니죠..
그래서 생각을 많이 접었습니다. 이해하시라 생각합니다..
좌계 (2007-05-16 20:18:45)  
/라디오 님.
원래 해석이란 것이 설왕설래(說往說來) 끈기가 있어야하는 작업입니다.
또한 서로가 절차탁마(切磋琢磨)해줌을 기대하고, 겸허히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솔직한 견해는 계속 피력해야하는 작업인 것이지요.
솔직함과 수용성이란 두가지의 핵(核)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작업입니다.
강단(講壇)사학은 이 ‘피곤함’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이모양 이꼴이 된 것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