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황룡자웅(黃龍雌雄)과 고구리(高句麗)의 흘승골성(訖升骨城)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24
/정성일 님.
‘고구려사략 (동명왕)’편을 해석하여 올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고구리(高句麗)의 초기 수도였던 ‘흘승골성(訖升骨城)’의 위치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어서, 부득이 좌계가 해당되는 대목만 발췌해서 일단 답글로 올립니다.
1. 정성일 님의 절구(絶句)와 해석.
(원문(原文))
三年丙戌三月黃龍雌雄見於鶻岺. 至王骨岺支(岐?)首脫爪至南岺支(岐?)蟠三日乃. 以其山爲龍山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정성일 님의 해석)
“3년 병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이(추모와 황룡왕) 鶻岺에서 만났다. 王骨岺의 갈림길 首脫爪에서 岺의 남쪽 갈림길 蟠까지 3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산을 龍山이라 하고 물 이름을 龍溝라 하였다. 군신들이 상서롭다하여 궁실을 짓기를 청하였으나 병사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2. 좌계의 절구(絶句)와 해석
/정성일 님.
좌계가 볼때에는 위 원문(原文)의 절구(絶句)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새로히 절구(絶句)한 원문(原文))
三年丙戌三月 黃龍雌雄 見於鶻岺.至王骨岺支(岐?) 首脫爪至南岺支(岐?) 蟠三日 乃以其山爲龍山 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즉 좌계가 볼 때에 위 원문(原文)에서 ‘見於鶻岺. 至王骨岺支(岐?)’이 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首脫爪至南岺支(岐?) 蟠三日’이 또한 한 문장입니다.
이렇게 절구(絶句)를 하면, 해석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새로운 절구(絶句)에 따른 해석)
“3년 병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雌雄)이 골령(鶻岺)에서 왕골령(王骨岺)의 ‘지맥(支脈)’에까지 보였다. (암수 황룡(黃龍)의) 머리들이 서로의 발톱을 벗어나 (튀어나온 모양이 남령(南岺)의 지맥(支脈)에 까지 이르렀다. (암수 황룡이 어울려서 섹스(sex)하느라고) 몸을 뒤트는 모습이 3일간이나 어우러졌다. (이런 이유로(=내(乃)) 이 산(山)을 용산(龍山)이라하고, 이 물을 용구(龍溝)라고 부르게 되었다. 뭇 신(神)들이 (또한) 상서(祥瑞)로움을 뿜어내니, (사람들=군신(群臣)들이 왕(王)에게) 궁실을 (이 용산(龍山)과 용구(龍溝)) 위에 짓자고 청(請)했다. 그러나 (왕(王)은) 병사(兵事)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 왜 이 부분이 중요한가?
가. 흘승골성(訖升骨城)의 위치 파악에 도움을 준다.
좌계가 고구리 사략 가운데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병사미진(兵事未盡)하여 허락되지는 안았지만, 나중에 이곳에 고구리 첫 도읍인 흘승골성(訖升骨城)을 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의 정확한 해석은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되찾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나. 황룡(黃龍)자웅(雌雄)이 만나서 ‘섹스(sex)’를 하는 자리라는 암시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에 황룡국(黃龍國)이 은연중 둘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는 오늘날 만주 지방이고, 또 하나는 섬서성 태백산 지방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운(氣運)이 만나서 어떤 교합(交合)을 가지는 것에 고구리 사략(史略)은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화적 전제(前提)가 ‘고구리 초기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1)

‘고구려사략 (동명왕)’편을 해석하여 올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고구리(高句麗)의 초기 수도였던 ‘흘승골성(訖升骨城)’의 위치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어서, 부득이 좌계가 해당되는 대목만 발췌해서 일단 답글로 올립니다.
1. 정성일 님의 절구(絶句)와 해석.
(원문(原文))
三年丙戌三月黃龍雌雄見於鶻岺. 至王骨岺支(岐?)首脫爪至南岺支(岐?)蟠三日乃. 以其山爲龍山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정성일 님의 해석)
“3년 병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이(추모와 황룡왕) 鶻岺에서 만났다. 王骨岺의 갈림길 首脫爪에서 岺의 남쪽 갈림길 蟠까지 3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산을 龍山이라 하고 물 이름을 龍溝라 하였다. 군신들이 상서롭다하여 궁실을 짓기를 청하였으나 병사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2. 좌계의 절구(絶句)와 해석
/정성일 님.
좌계가 볼때에는 위 원문(原文)의 절구(絶句)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새로히 절구(絶句)한 원문(原文))
三年丙戌三月 黃龍雌雄 見於鶻岺.至王骨岺支(岐?) 首脫爪至南岺支(岐?) 蟠三日 乃以其山爲龍山 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즉 좌계가 볼 때에 위 원문(原文)에서 ‘見於鶻岺. 至王骨岺支(岐?)’이 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首脫爪至南岺支(岐?) 蟠三日’이 또한 한 문장입니다.
이렇게 절구(絶句)를 하면, 해석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새로운 절구(絶句)에 따른 해석)
“3년 병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雌雄)이 골령(鶻岺)에서 왕골령(王骨岺)의 ‘지맥(支脈)’에까지 보였다. (암수 황룡(黃龍)의) 머리들이 서로의 발톱을 벗어나 (튀어나온 모양이 남령(南岺)의 지맥(支脈)에 까지 이르렀다. (암수 황룡이 어울려서 섹스(sex)하느라고) 몸을 뒤트는 모습이 3일간이나 어우러졌다. (이런 이유로(=내(乃)) 이 산(山)을 용산(龍山)이라하고, 이 물을 용구(龍溝)라고 부르게 되었다. 뭇 신(神)들이 (또한) 상서(祥瑞)로움을 뿜어내니, (사람들=군신(群臣)들이 왕(王)에게) 궁실을 (이 용산(龍山)과 용구(龍溝)) 위에 짓자고 청(請)했다. 그러나 (왕(王)은) 병사(兵事)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 왜 이 부분이 중요한가?
가. 흘승골성(訖升骨城)의 위치 파악에 도움을 준다.
좌계가 고구리 사략 가운데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병사미진(兵事未盡)하여 허락되지는 안았지만, 나중에 이곳에 고구리 첫 도읍인 흘승골성(訖升骨城)을 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의 정확한 해석은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되찾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나. 황룡(黃龍)자웅(雌雄)이 만나서 ‘섹스(sex)’를 하는 자리라는 암시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에 황룡국(黃龍國)이 은연중 둘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는 오늘날 만주 지방이고, 또 하나는 섬서성 태백산 지방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운(氣運)이 만나서 어떤 교합(交合)을 가지는 것에 고구리 사략(史略)은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화적 전제(前提)가 ‘고구리 초기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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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骨+鳥)岺"="骨岺"="訖升骨城 "=黃龍國=龍城 과 비슷한 결과를 조심스레 예측하여 봅니다. 訖升骨城은 용이 홀연히 승천한 곳 ?... <추모제>을 "龍山"에 장사했다 하고, 현금의 북경 서북인근에 유리묘가 있다면, 어림잡아도 이들 모두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황룡(黃龍)자웅(雌雄)이 만나서 ‘섹스(sex)’를 3일간이나 치열하게 했다는 의미도 궁금합니다. 초에 소서노와 주몽이 함께 도망가서 어울린 곳 ? 또는 초에 주몽과 송양이 어울어져 패권 다툼을 한 곳 ? 아니면 주몽(추모)가 승천한 곳 ? 좌계 선생님의 명쾌한 해설 기대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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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도움이 될까해서 한 말씀 올립니다 홀승골을 제 나름의 음운으로 풀면 평지와 산맥이 만나는 지역입니다 전 백제가 개봉에 도읍한 강력한 심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홀승골은 황하 북안이라고 추측합니다 초기에 백제와 고구려는 산업이 보완관계로 보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철기가 필요 했을거고 고구려는 백제의 식량과 생활용품이 필요했을겁니다 초기에 사이가 좋은 관계는 이런 경제 관계때문이라고 봅니다 후기엔 고구려의 광산개발로 황하물이 흐려져 백제의 농경에 지장을 주어 이게 분란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기에 철광제련에 필요한 탄광까지 가세하니 황하의 오염은 극에 달하거구요 이걸 시정해 달라고 백제가 고구려에 요구해도 들어 줄수가 없는거죠 생존의 문제이니까요 백년하청이죠 만리 장성을 처음 쌓기 시작한 그곳 노천 탄광이 있는그곳 황하강변 개봉보다 상류인 그곳 태원 과 대동부를 가장 유력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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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환님 당시 광산개발이 강에 오염을 줄정도로 대단위 였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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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렇다고 봅니다 황하에 진흙이 많다해도 일년 내내그런것은 아닐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광산개발은 다르죠 저 시대에는 흙에서 철알을 줍다시피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엄청난 양의 토사가 황하로 들어갔다고 봅니다 이 토사가 퇴적되어 강 바닥도 올라가 범람도 심해 질거구요 농경을 하는 백제로서는 엄청난 타격이 되겠지요 삽질할때 생기는먼지와 장성을 쌓을때 생기는 먼지도 피해를 줄거구요 장성 쌓을 정도 인원의 두배수가 움직이면 산이 하나 없어지는것은 순식간이죠 그게 거의다 황하로 흘러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생 결단 할 만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