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한서지리지 上谷郡 기록, 造陽은 없고 沮陽만 나온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9. 5. 14:39
한漢나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는 조양造陽이 언급되어 조양朝陽의 옛 이름으로 조양造陽이 많이 언급되어 왔습니다.
조양造陽은 한漢나라의 상곡군上谷郡에 해당한다고 모든 사가들이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상곡군上谷郡은 한漢나라때 한무제때등 일부 강성할때를 제외하고는 한漢나라의 최전방 지역이었고 <조양현造陽縣>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으니 바로 한漢나라시대를 대표하는 사서인 후한의 반고(班固 : 32~92)가 완성한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입니다.
당연히,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조양造陽이 언급되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뜻밖에도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편에는 <조양현造陽縣>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양沮陽이란 지명만이 나올 뿐입니다.
도대체,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편에 그 유명한 조양造陽이란 지명이 언급되지 않다니 이것이 어찌된 연유일까요?
먼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의 해당 원문이 실린 상곡군上谷郡편을 찾아 보겠습니다.
**************************************************************************************************************
新校本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上谷郡,秦置. 莽曰朔調.屬幽州.戶三萬六千八,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縣十五:
沮陽(縣),莽曰沮陰.[一] 泉上(縣),莽曰塞泉. 潘(縣),莽曰樹武.[二] 軍都(縣),溫餘水東至路,南入沽.
居庸(縣),有關. 雊瞀(縣),[三] 夷輿(縣),莽曰朔調亭. 寧(縣),西部都尉治.莽曰博康. 昌平(縣),莽曰長昌.
廣寧(縣),莽曰廣康. 涿鹿(縣),莽曰抪陸.[四] 且居(縣),陽樂水出東,南入沽.莽曰久居. 茹(縣),莽曰穀武.
女祈(縣),東部都尉治.莽曰祈. 下落(縣).莽曰下忠 .
[一] 孟康曰:「音俎.」
상곡군上谷郡
진秦이 설치하였고 유주幽州에 속하며 호구수는 36,008명이고 인구수는 117,762명이고 현縣은 15곳이다.
沮陽(縣),왕망王莽은 沮陰이라 불렀다.[一]
[一] 맹강孟康이 이르길,「그 음音은 조俎이다」라고 하였다.
참조 : 사료원문에는 15현의 이름을 나열할때 그 지명만을 나열하였지만 구분을 위해서 (縣)을 덧붙입니다.
**************************************************************************************************************
상곡군上谷郡의 15현중의 하나인 沮陽(縣)에 대한 맹강孟康의 주석에는 <沮>의 발음은 <조俎>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조俎>는 아래와 같습니다.
조俎
㉠도마 ㉡적대(炙臺: 제사 때 희생을 얹는 그릇)
다른 한자옥편에서는 높은 대(臺)를 뜻한다고도 나옵니다.
결국, <沮陽>은 '저양'이 아니라 '조양'으로 읽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향을 드릴 수 있거나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높은 대(臺)의 의미가 거기에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한漢나라의 최전방 지역인 상곡군上谷郡의 15현중 하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요새였던 <조양현>의 한漢나라 당시의 지명은 <조양현造陽縣>이 아니라 <조양현沮陽縣>이었던 것입니다.
운영자님께서 <조양현造陽縣>의 위치를 기존에 언급해 주셨듯이 그곳이 오르도스일대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명의 변화와 함께 섬서성 북방의 남몽골-내몽골- 황하변의 <조양造陽>이 하북성의 <조양朝陽>으로 그 위치가 지나사가들에 의해 변조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림 1. 운영자님께서 밝혀주신 <조양造陽> 이동도
그림 2. 운영자님께서 밝혀주신 수,당나라때의 <조양造陽>의 실제위치
그런데, 한漢나라 당대의 이름이 <조양현沮陽縣>이라는 새로운 사실은 한대이후 지명변화와 함께 그 위치가 또 한번 바뀌어졌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즉, 본래 <조양현沮陽縣>은 현 황하만곡부가 아닌 그 이남의 섬서성 북부 지역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참조로 <후한서 지리지> 역시 상곡군上谷郡의 최전방에 위치한 조양현의 이름을 <조양현沮陽縣>이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
新校本後漢書/志/志第二十三 郡國五/幽州/上谷
上谷郡 秦置.陽東北三千二百里.八城,戶萬三百五十二,口五萬一千二百四.
沮陽, 潘 永元十一年復, 寧, 廣寧, 居庸, 雊瞀, 涿鹿[一], 下落
참조 : 한서지리지와 비교하면 후한때에는 상곡군上谷郡의 관할하는 가호수와 인구가 전한(서한)때의 절반으로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조양造陽은 한漢나라의 상곡군上谷郡에 해당한다고 모든 사가들이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상곡군上谷郡은 한漢나라때 한무제때등 일부 강성할때를 제외하고는 한漢나라의 최전방 지역이었고 <조양현造陽縣>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으니 바로 한漢나라시대를 대표하는 사서인 후한의 반고(班固 : 32~92)가 완성한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입니다.
당연히,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조양造陽이 언급되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뜻밖에도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편에는 <조양현造陽縣>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양沮陽이란 지명만이 나올 뿐입니다.
도대체,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편에 그 유명한 조양造陽이란 지명이 언급되지 않다니 이것이 어찌된 연유일까요?
먼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의 해당 원문이 실린 상곡군上谷郡편을 찾아 보겠습니다.
**************************************************************************************************************
新校本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上谷郡,秦置. 莽曰朔調.屬幽州.戶三萬六千八,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縣十五:
沮陽(縣),莽曰沮陰.[一] 泉上(縣),莽曰塞泉. 潘(縣),莽曰樹武.[二] 軍都(縣),溫餘水東至路,南入沽.
居庸(縣),有關. 雊瞀(縣),[三] 夷輿(縣),莽曰朔調亭. 寧(縣),西部都尉治.莽曰博康. 昌平(縣),莽曰長昌.
廣寧(縣),莽曰廣康. 涿鹿(縣),莽曰抪陸.[四] 且居(縣),陽樂水出東,南入沽.莽曰久居. 茹(縣),莽曰穀武.
女祈(縣),東部都尉治.莽曰祈. 下落(縣).莽曰下忠 .
[一] 孟康曰:「音俎.」
상곡군上谷郡
진秦이 설치하였고 유주幽州에 속하며 호구수는 36,008명이고 인구수는 117,762명이고 현縣은 15곳이다.
沮陽(縣),왕망王莽은 沮陰이라 불렀다.[一]
[一] 맹강孟康이 이르길,「그 음音은 조俎이다」라고 하였다.
참조 : 사료원문에는 15현의 이름을 나열할때 그 지명만을 나열하였지만 구분을 위해서 (縣)을 덧붙입니다.
**************************************************************************************************************
상곡군上谷郡의 15현중의 하나인 沮陽(縣)에 대한 맹강孟康의 주석에는 <沮>의 발음은 <조俎>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조俎>는 아래와 같습니다.
조俎
㉠도마 ㉡적대(炙臺: 제사 때 희생을 얹는 그릇)
다른 한자옥편에서는 높은 대(臺)를 뜻한다고도 나옵니다.
결국, <沮陽>은 '저양'이 아니라 '조양'으로 읽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향을 드릴 수 있거나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높은 대(臺)의 의미가 거기에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한漢나라의 최전방 지역인 상곡군上谷郡의 15현중 하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요새였던 <조양현>의 한漢나라 당시의 지명은 <조양현造陽縣>이 아니라 <조양현沮陽縣>이었던 것입니다.
운영자님께서 <조양현造陽縣>의 위치를 기존에 언급해 주셨듯이 그곳이 오르도스일대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명의 변화와 함께 섬서성 북방의 남몽골-내몽골- 황하변의 <조양造陽>이 하북성의 <조양朝陽>으로 그 위치가 지나사가들에 의해 변조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림 1. 운영자님께서 밝혀주신 <조양造陽> 이동도
그림 2. 운영자님께서 밝혀주신 수,당나라때의 <조양造陽>의 실제위치
그런데, 한漢나라 당대의 이름이 <조양현沮陽縣>이라는 새로운 사실은 한대이후 지명변화와 함께 그 위치가 또 한번 바뀌어졌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즉, 본래 <조양현沮陽縣>은 현 황하만곡부가 아닌 그 이남의 섬서성 북부 지역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참조로 <후한서 지리지> 역시 상곡군上谷郡의 최전방에 위치한 조양현의 이름을 <조양현沮陽縣>이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
新校本後漢書/志/志第二十三 郡國五/幽州/上谷
上谷郡 秦置.陽東北三千二百里.八城,戶萬三百五十二,口五萬一千二百四.
沮陽, 潘 永元十一年復, 寧, 廣寧, 居庸, 雊瞀, 涿鹿[一], 下落
참조 : 한서지리지와 비교하면 후한때에는 상곡군上谷郡의 관할하는 가호수와 인구가 전한(서한)때의 절반으로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