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참고)고구려사초 초역(3)- 6세신명선제-7세 태조황제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12:09
*출처:http://katnani.egloos.com/1164028
고구려사초 해석글이 블로그에 올라가 있으니, 참고용으로 올립니다.
[ ]부분은 블로그 주인장이 삽입시켜 놓은 개인적인 주석입니다.
주인장님 주석부분만 조금 띄워 놓았고,
제목을 '고구려사략'으로 적어 놓은 부분은 제가 '고구려사초'로 정정했습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참고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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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초 초역(3)- 6세신명선제-7세 태조황제
제6世神明仙帝紀 73-112년.
[삼국사기에는 이 왕이 빠져있다. 대신에 전부 太祖王의 재위로 채우고 있다. 태조왕의 재위가 93년이라는 너무나 긴 시간이 되어 있는 이유가 이로써 밝혀진 게 아닐까?]
諱는 再思 또는 鹿臣으로 대무신제의 別子다. 어머니는 曷思태후로 그 아버지인 解素는 柳花夫人이 낳은 金蛙의 아들이다
[즉, 금와-해소-갈사태후란 말].
성격이 聰悟하고 好仁하였으며 仙書를 읽고 의약에 통달하였으며 用兵에 능하고 언변이 출중하였으나 항상 아무 것도 모르는 것 처럼 침묵하였다. 그 胞兄인 好童이 비명횡사한 까닭이다. 민중제가 승하하자 國人이 세우려 하였으나 固辭하면서, 嫡子가 있는 데 庶子가 가당키나 하냐 하고 그 어미와 함께 달아나니, 慕本이 그 뜻을 높이 사 仙王으로 봉하였다. 扶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고, 모본이 시해되자 麻勁등이 맞아들여 東都新宮에서 즉위하여 大赦하고 神明으로 改元하였다.
元年계유년[73년] 10월, 麻勁을 大芻加淹淲公으로, 松寶를 太輔, 烏希를 左輔, 羽眞을 右輔, 麻樂을 主兵大加大主簿, 松豆智를 中畏大夫, 穆卓과 達賈를 左右將軍으로 삼고, 葦花와 芦花를 皇后, 麻씨와 羽씨를 副后로 삼았는 데, 위화는 好童의 딸이고 호화는 王文의 딸로 갈사태후의 동생이며, 마경의 딸과 우진의 딸은 다 慕本의 后였다. 太輔가 청해 다 後宮으로 들인 것이고 모본의 아들 翊은 태자로 삼았다.
2년갑술년[74년] 1월, 宮태자를 東宮으로 삼아 호화황후와 함께 政事를 배우게 하니 이 때 7세였으나 대체로 일을 알아 제대로 하는 것도 제법되었다. 10월, 朱那가 반란을 일으키다.
3년을해년[75년] 3월, 仙院을 열어 尙仁을 師로 삼다. 상인은 漢音과 글자에 능통해 사람들을 잘 가르쳐 모두가 神처럼 우르렀다. 10월, 백제가 蛙山을 빼앗다. 朱那를 평정하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22년인 서력 74년 10월에 薛儒.를 보내 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4년병자년[76년] 10월, 東沃沮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평정하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4년인 서력 56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해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9월, 신라가 蛙山을 수복하다
[특이하게도 9월 기사가 10월 기사 뒤에 있다]
5년정축년[77년] 2월, 松寶가 죽어 烏希를 太輔, 우진을 左輔, 高敬을 우보로 하다. 8월, 신라의 吉門이 加耶와 黃山津口(漢江과 昭陽江이 合水하는 곳)에서 싸워 천여급을 베어 海湌이 되다. 10월, 扶余가 뿔 셋인 사슴과 긴 꼬리의 토끼를 바치니 太后가 상서롭다하여 대사령을 내리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25년, 서기 77년 10월에 바치니 왕이 대사령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10년임오년[82년] 1월, 五部仙院을 설치하다. 仙師 尙仁을 海山高士로 삼다. 麻后가 딸 芸을 낳다. 烏씨를 다시 太后로 하다.
14년을유년[85년] 5월, 南蘇城을 쌓다. 麻后가 아들 邯을 낳다.
16년정해년[86년] 1월, 상인에게 명해 三代鏡을 修하다. 오희가 죽어 우진을 태보, 高敬을 좌보, 乙祥을 主兵大加로 하다. 신라가 加台城과 馬頭城을 쌓다.
21년계사년[87년] 4월, 5부를 순시하여 민가의 俊才를 뽑아 도덕과 6예를 가르쳐, 음란한 일과 賣子 賣妻를 금지시키다. 우진이 죽어 고경과 을상을 높이고 扶謙을 우보, 高英을 主宮으로 하다.
22년갑오년[94년] 2월, 을상이 죽어 부겸을 좌보, 乙景을 右輔로 삼다. 신라의 吉元이 加耶와 馬頭城(麗州)에서 싸워 대첩을 거두다. 烏태후가 80세로 죽어 閔中陵에 장사지내다.
24년병오년[96년] 7월, 갈사태후가 77세로 죽으니 大武獸林陵에 장사지내다. 蒙蒙의 主 射旭이 죽고 동생 射滿이 서다.
25년정유년[97년] 1월, 旭의 아들인 鷄山이 滿을 죽이고 자립하니 應點이 漠北으로 달아나다.
26년무술년[98년] 3월, 上이 東巡하여 柵城의 西罽山에 이르러 白鹿을 잡다
[같은 기사이지만,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46년인 서력 98년 3월에 적어놓고 있다].
10월, 穆卓을 沸流沛者로 삼다. 卓은 東明의 공신인 黙居의 女孫으로 부여의 亂을 진압함에 공을 세웠다.
29년신축년[101년] 2월, 고경이 죽으니 부겸을 태보, 을경을 좌보, 禾玄을 우보로 삼다.
30년임인년[102년] 1월, 高朱利를 東海谷(x尼港)太守로 삼아 北海(白羽嶺)와 섬(樺太)의 추장을 진압하게 하다. 주리는 高婁의 손자이다. 質重하여 어리석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총명했다. 上이 동해곡을 지킬만한 곳이라 하여 設官했으나 멀다고 가려는 사람이 없었는 데 주리가 자청하여 가니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겼다. 이해 8월, 音汁伐國이 悉直谷國과 서로 영토분쟁을 일으키니 신라가 首露를 불러 해결하게 하고 6部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였는 데 韓祇만이 다른 사람들은 다 伊湌인 데 직위가 낮다고 해, 수로의 奴 耽下里가 한기를 죽이고 保齊하여 도망 가 音汁伐主에 의탁하니 他鄒干이 집을 뒤졌으나 보내지 않는 고로 신라가 마침내 音汁伐國을 정벌해 멸망시켰다. 이 해, 신라가 , 또, 居道로 하여금 悉直과 押督을 멸했다. 이에 앞서 신라가 거도로 하여금 張吐의 들에서 牧馬하게 했는 데, 병사들로 騎馳하고 喜樂을 일상으로 하니 두 나라가 옆에서 보고도 이를 일상으로 여겨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 데 이때 이르러 군사를 일으켜 멸한 것이다.
32년갑진년[104년] 1월, 扶謙이 죽어 乙景을 태보, 禾玄을 좌보, 尙仁을 우보로 삼다. 3월, 麻황후가 62세로 죽다. 后는 勁의 딸로, 忠直好善했다. 처음에 慕本后가 되어 아들 翊과 典공주, 宋공주, 馬공주를 낳았는 데, 直諫으로 폐위되었다가 上이 즉위하면서 처음에는 副后로 삼았는 데 나이도 높고 모든 后가 다 공경했으며 上과 7子 2女를 낳아 제3皇后로 봉해졌었다. 射滿의 아들 應點이 漠北에 나라를 세우고 아들 査功을 보내 낙타 5마리를 바쳤다
33년을사년[105년] 3월, 鎭北장군 麻樂이 盖馬의 諸城을 重修하고 㹮騎로 遼東을 정벌해 白若(注庫), 長嶺(鐵嶺), 菟城(玄菟舊x로 지금의 奉天이다), 汶城(新民), 章武(xxxx로 지금의 彰武다), 屯有(遼中) 등 6성을 얻었다. 漢人이 크게 놀라 慌忙하여 耿夔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니 宮태자가 使者 穆度婁와 輕騎兵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좌우를 깨뜨려 대파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53년, 서기105년 1월에 장수를 보내어 漢의 遼東에 쳐들어가 6현을 奪掠했다고 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지명은 언급이 없다. 또 요동태수 경기가 출병해 아군이 대패한 것으로 적고 있다. 또, 9월에는 요동태수 경기가 貊人을 격파했다고도 되어 있는 데 이는 34년 1월 기사의 앞부분만 기록한 것이 아닐까?].
34년병오년[106년] 1월, 白岩태수 鄭元이 耿夔와 章武에서 싸웠는 데 패한고로 宮태자가 친정하여 수복하다. 松豆智를 遼東태수로 삼다. 左輔 禾玄이 죽어 尙仁으로 대신하고 麻樂을 우보로 삼다. 신라가 押督을 賑하고 馬頭성주로 하여금 加耶를 정벌하게 하다.
35년정미년[107년] 7월, 乙景이 죽어 尙仁으로 대하고 高德을 좌보로 삼다.
37년을유년[109년] 3월, 麻樂이 右北平을 정벌하여 2천여명을 사로잡아 오다. 신라가 比只(星州), 多伐(大丘), 草八(草溪) 3國을 병합하다. 말갈이 백제의 牛谷을 약탈하다.
39년신해년[111년] 2월, 松豆智가 漢으로 가 和를 약조했는 데 境界를 정함에 過失이 있어 上이 노해 두지를 沸流에 유배하다. 3월, 摩樂에게 漢을 치게 하다
[ 3월 기사는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59년, 111년 漢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玄菟에 소속되길 바랬다는 말도 안되는 기사가 있는 데, 김부식도 의아했던지, 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宮이 濊貊과 함께 玄菟를 寇했다고 되어 있어, 침략한 것인지 소속되기 원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의문을 표하고 있다. 소속되기 원한다는 말도 안되는 기록은 중국쪽의 曲筆일 것이다].
4월, 尙仁이 병이 들어 은퇴하니 高德으로 대신하고 마락을 좌보, 羽靖을 우보, 好万을 中畏大夫로 하니 葦황후의 동생이다.
40년임자년[112년] 2월, 羽靖이 죽어 好万을 우보로 하다. 5월, 上이 海山으로 가 宮태자에 선위하고 스스로 海山先皇이라 하고 內外仙政을 총괄 했으며, 尙仁과 高德은 左右太師로 삼고 好万은 仙相으로 삼았다. 葦황후와 羽황후는 左右仙后, 芦后는 攝政太后로 하니 軍國之政이 전부 太子에게 돌아가 石鸞臺에서 즉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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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世太祖皇帝紀[112년 - 146년]
諱는 宮으로 於漱라고도 함. 신명선제의 長子로 어머니는 芦花태후 扶餘씨로 東扶餘[部餘로 잘못쓰고 있다]太師인 王文의 딸이다. 帝는 태어나면서 눈을 떠 볼 수 있었으며 神功이 있어 병사를 잘 지휘해 요동을 정벌하여 여러번 큰 공을 세웠으며 이 때 선위를 받아 즉위하니 45세였다. 성격이 寬仁孝友하여 捨己從人했는 데 父皇이 政事에 염증을 내어 母太后에게 자문을 구하고 결정해 太輔를 두지 않았다.
원년임자년[112년] 1월, 仙帝를 높여 太上皇, 모후를 芦花宮皇太后, 麻樂을 좌보, 松豆智를 우보로 하고, 연호는 神明을 그대로 썼는 데, 仙帝가 생존해 계신 까닭이다. 三代鏡 57권이 이루어지다. 동명, 광명, 태무 3대의 聖繪다. 仙皇이 詔하시기를, 무릇 만백성의 군주는 代鏡이 있어야 하는 데, 鏡은 善을 비추는 것으로(照者也) 惡을 비추는 것으로 악을 廢할 수 없으니 이를 가지고 내 자손에게 경계하고자 함이라 하시다. 10월, 신라의 婆娑가 죽어 蛇陵에 장사지내고 아들 祗味가 서다. 어미 史省은 許婁의 딸이고 妻인 愛禮는 摩帝의 딸이다. 처음에 파사가 지미와 함께 韓岐의 허루를 만나 [허루가] 그 딸로 妻를 삼으려고 지미와 그 딸을 나가 춤추게 하고 마제도 그 딸과 나가 춤추게 하면서 威譔美醞으로 대접하니 지미가 摩帝의 술을 多取한 고로 마침내 애례로 처를 삼았다. 마제를 이에 酒多干(舒弗邯 牛角의 아들이다)이라 하고 그 곳은 大庖라 명명했다.
2년계축년[113년] 1월, 태후가 친히 太輔의 직책을 행하다.
3년갑인년[114년] 2월, 仙師尙仁이 上化하여 普尊仙師로 시호를 내렸다. 상인은 仁善하였는 데 上帝品 120권을 畵하였으며 98세 였다. 高德의 딸 高씨로 황후를 삼았는 데, 이 때 后가 아들 萬勒을 낳은 까닭이다. 德은 高婁태자의 제8子로 仙術이 높아 普尊에 比肩되었었다.
4년을묘년[115년] 2월, 西河(長春), 南口(遼源), 河城(通遼), 安平(開原), 長嶺(鐵嶺), 菟城(奉天), 屯有(遼中), 平郭(令安), 河陽(遼陽寓堡), 高顯(冊通), 南蘇(赫爾蘇)등의 성을 重修하여 西南을 방비하다. 8월, 나라 남쪽에 蝗이 들어 순시하여 南海에 이르렀다가 10월에 돌아오다. 7월, 祗味가 加耶를 친정하여 步騎로 黃山河(漢江)을 건넜는 데 林薄에서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수 겹으로 포위되었는 데 힘써 결사적으로 싸워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勇將 長春郞은 전사했다.
5년병진년[116년] 2월, 羽弈의 딸로 副后를 삼다. 3월, 日食이 있었다. 8월, 祗味가 친히 정병 1만을 이끌고 加耶를 정벌하였으나 가야가 굳게 지키고, 날씨도 오랫동안 비가 내려 소득없이 돌아갔다. 査功이 동생 健을 보내어 낙타 30필을 바치니 荻공주를 妻로 하였다.
6년정사년[117년] 3월, 上皇이 巡狩하여 淌村에 이르러 尙溫의 딸 天花를 後宮으로 들이고 尙須祠를 修하기를 명하였으며 買溝谷長者 迫化로 主畜을 삼고 그 아들 仁을 海山高仙으로 삼았다. 仁은 溫의 손자로 대대로 修德淨心하여 왔으며 天花는 성격이 溫柔하고 勒貌하여 천하제일의 絶色이었다. 高황후가 元공주를 낳다.
7년무오년[118년] 3월, 3軍을 설치해 羽弈을 中軍장군, 高良을 좌군장군, 禾直을 우군장군으로 삼았다. 6월, 漢人이 菟城을 침략했으나 패하고 돌아가 華麗를 다시 공격했다. 漢人 師大가 歷代治亂繪 7권을 바치니 매년 곡식과 소와 양을 주었다. 8월, 마락을 태보, 송두지를 좌보, 乙布를 우보로 하다.
8년기미년[119년] 1월, 副后가 羽공주를 낳다. 6월, 羽弈, 高良, 禾直등이 富車(連平), 候城(寧城), 遼隧(嶺脈)등을 쳐 1000여명을 사로잡아오다. 9월, 八藝인사를 뽑다. 禮,樂,射,騎,畵,算,樂,陶이다. 槍劍에 능한 자는 射科, 書刻에 능한자는 畵科, 陰陽에 능한 자는 禮科, 鶴舞에 능한 자는 樂科, 針灸에 능한 자는 藥科, 匠木에 능한 자는 陶과에 附하다. 採金使를 두어 諸金과 貨貝를 주관하게 하다. 上이 天花를 宮人으로 들였는 데 上皇이 命한 것이다.
9년경신년[120년] 2월, 漢人 姚光이 菟城태수라 자칭하며 汶城에 근거하면서 수차례 菟城, 平郭, 屯有를 침범하여 約條를 위반해 왕의 동생인 遂成이 禾直, 乙魚등을 이끌고 遼東(彰武)을 공격해 빼앗으니 姚光이 汶城(新民)으로 도망가니 漢人 천명이 투항해 왔다. 漢人師大에 명해 三代鏡繪 180권을 畵하게 하여 新鏡을 만들다. 그 畵가 精鮮燎然하여 舊鏡 57권은 古色蒼然 簡素하니 가히 法으로 삼을만한 고로 政經이라 이름하다. 師大가 처음에는 舊鏡을 飜하다가 令으로 또 着新한고로 乙布의 딸을 처로 주고 小兄으로 爵하다.
10년신유년[121년] 1월, 宮人 天花가 아들 伯固를 낳다. 이보다 먼저 上皇의 꿈에 天花가 上과 관계하여 龍을 낳았는데, 이의 應驗인 고로 伯固라 이름한 것이다. 자라면서 仁賢하여 上皇의 뜻을 不失했다. 査功이 죽고 健이 서다. 2월, 姚光이 幽州에서 쳐들어와 丘利渠帥를 죽였는 데 禾直이 급히 구원하러가 대파했다. 乙魚가 그 대군을 甬道로 유인해 伏嶮阨을 設해 殄滅하고 그 兵仗馬匹을 무수히 획득하고 赤山(赤峰), 棘城(津平)으로 추격하여 그 성곽과 양식을 불사르고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다. 포로중 技能者는 관직을 주고 聲色者는 將士에게 妾으로 주었다. 上皇이 백고를 洗하고 병이 들어 한달을 넘겨 2월 그믐에 돌아가시어 茅山(지금의 葦花)에 장사지내다. 4월, 蔡諷을 遼隊(古北口의 嶺脈)로 친정해 新城(永平)에서 싸워 그 장수 耿芼, 龍端, 公孫酺, 孫壽 등 140여명을 목베니 棘城印이 다 우리 땅이 되다. 諷은 달아나 幽州로 도망가 다시는 침범하지 못했다. 8월, 漢使가 來朝해 上皇을 조문하고 賻를 바치며 화해를 청하니 群臣들이 그 奸凶을 믿을 수 없다고 斬하자 했으나 上이 厚待해 돌려보내다. 10월, 上이 太后와 扶余로 가 柳花聖母와 太后의 祖廟에 제사지내다. 11월, 上이 부여에서 돌아와 遂成을 大芻加로 삼아 兵權을 맡기니 太后의 命이었다. 12월, 姚光이 句麗(林西)渠帥 屠利를 玄菟都尉로 삼겠다고 꾀어 卑離反賊 尉仇台와 모의하여 紫蒙故地를 復하고 玄菟府를 川西(林東)에 新置하여 거주하니 上이 친히 馬韓, 盖馬軍 1만 騎로 천서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가 2월에 大甑山城을 쌓고 4월에는 倭가 [신라의]東邊을 노락질하다.
11년임술년[122년] 2월, 上이 다시 馬韓, 句茶, 盖馬 세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川西와 句麗를 쳐 이를 빼앗으니 姚光은 달아났으나 그 부하에게 피살되고 仇台는 달아나 西紫蒙(達里湖西 沙漠之地)으로 들어가 西扶餘라 자칭하다가 나중에 宇文에게 축출되었다. 4월, 태보 麻樂이 69세로 죽다. 卑離王 義鹿 摩離의 아들이다. 大武神의 딸 都공주에 장가들어 樂을 낳았으니 배에 붉은 三星무늬가 있었고 용맹하여 여러번 대공을 세워 輔의 자리에 올라 大臣의 풍체로 大事를 잘 처결하였으니 가히 賢相이라 일컬을만 했다. 송두지를 태보, 乙布를 좌보, 遂成을 우보, 羽弈을 大注簿, 尙溫을 大評者, 尙岑을 馬장군, 尙蕃殿을 中皂衣(舍人)으로 삼았다.
13년갑자년[124년] 5월, 右장군 穆吉이 죽어 尙岑으로 대신하다. 禾直이 紫蒙軍을 이끌고 尉仇台를 쳐 月海(達里湖)를 깨뜨리고 月都(多倫)까지 갔다가 돌아오다. 遂成을 좌보, 우혁을 우보로 삼다. 8월, 太伯山 남쪽(白羅山과 大西山의 경계)에 사냥 가, 크기가 말만한 白鹿을 잡다. 綠綿으로 鞍을 해 타고 다녔는 데, 上의 신장이 8尺, 무게가 100근 남짓했으나 사슴은 如古한 고로 매 조회시마다 騎馳하여 사람들이 白鹿大王이라 불렀는 데, 하루는 毛屯谷에 이르러 三賢의 집에서 聖母의 팔찌를 얻은 고로 優勃水(哈爾屯河)에 제사를 지냈다. 나라 남쪽에 蝗이 들어 仙人 陽父를 보내어 제거하다. 9월 그믐 경신일에 日食 하다. 漢使가 와 和를 청하다. 11월, 東都에 地震. 尙后가 衲공주를 낳다. 好万을 태보로 하다. 송두지가 71세로 죽어 그 妻인 典공주에게 매년 곡식을 내리다.
14년을축년[125년] 1월, 尙溫을 우보, 朱文을 中畏大夫, 富文을 松江(同江)沛者로 하니, 주문과 부문은 芦花태후의 동생이다.
15년병인년[126년] 2월 7일, 麻樂의 妻 烏씨가 穆崇의 아들 靖을 낳아 請하여 樂으로 허락하게 하다[즉, 불륜의 씨앗이라는 의미]. 尙溫의 딸 銀花를 副后로 들이니 天花의 누이동생이다.
16년정묘년[127년] 7월 朔 갑술일에 日食하다. 상후가 아들 將固를 낳다.
17년무진년[128년] 8월, 曷思王 都頭가 나라를 바쳐 와 于台로 삼다. 尙溫을 東部大使者, 우혁을 우보로 삼다.
18년기사년[129년] 3월, 松奇가 딸 黃龍을 낳아 왕에게 바쳤는 데, 그 妻는 度婁의 누이동생이다. 尙溫의 셋째딸 暖花가 또 後宮으로 들어왔다. 高황후가 莫德태자를 낳다. 가을, 상후가 裶공주를 낳다.
20년신미년[131년] 2월, 난화를 萬勒태자의 처로 삼으니, 태자가 高황후에 청한 까닭이다. 송기를 大評者로 삼다. 7월, 태보 好万이 73세로 죽다.
21년임신년[132년] 1월, 芦花태후가 84세로 죽다. 키가 8척에 무게가 130근이었고 槍劍에 능했으며 慕本초에 夫皇인 再思대왕을 따라 부여 내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고 仙帝때에는 나라의 큰 일을 전부 后가 결정했으며 上이 즉위한 초에는 태보의 자리에 잇으면서 英斷으로 어려운 일을 잘 해결했다. 상후가 아들 春固를 낳다. 遂成이 태보, 우혁이 좌보, 禾直이 우보가 되다. 3월, 藻那王 心이 반란을 일으켜 貫那沛者 達賈, 東部大使者 穆度婁를 보내 평정하고 心을 관나로 옮기고 목도루를 柵城태수로 삼았다. 4월, 上이 尙后와 遂成에게 명해 太伯山 諸仙院을 出遊하고 돌아오게 하다. 元공주를 遂成의 처로 삼다.
22년계유년[133년] 1월, 遂成을 皇太弟로 삼아 東宮을 두고 각료 78명을 배치하였으며 상후를 遂成의 妃로 삼았다. 우혁을 태보, 을포를 좌보, 尙溫을 우보로 삼았다. 6월, 遂成의 妃가 遂成을 아들 駿을 낳으니 목도루를 東宮大夫로 삼다. 그 妻 松花는 柵城에서 딸 守禮를 낳고오니 駿의 乳媼으로 삼았다. 牛山城(丸都)을 처음으로 쌓아 避暑地로 했다.
23년갑술년[134년] 3월, 紇于의 손자 龍山이 桓阿와 越都 2郡으로 항복해 와 桶口태자를 命해 桓阿태수로 하고 월도에 이르러 용산의 딸 흘씨를 納하다. 10월, 朱那가 반란을 일으켜 桓那沛者 薛儒에게 명해 정벌하다. 그 나라는 호수가 많은 까닭에 湖國이라고도 불렀는 데, 나라가 藻那(令尼婆의 서북해안)의 남쪽에 있어 조나와 相婚한 까닭에, 조나를 復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는 데 남자는 많고 여자는 적었으며 사슴 비슷한 큰 개(獹)가 있어 능히 사람말을 알아들었다.
24년을해년[135년] 1월, 주나왕자 乙音이 항복해 와 古芻加에 봉하고 眞공주를 처로 주었다. 주나의 남은 무리는 桓河의 樂浪人부락으로 옮겨 서로 혼인해 살게 했다. 3월, 鸞臺를 중수하여 宮으로 하고 白으로 하여금 三代鏡을 벽에 그리게 하여 玄武渡河相이라 이름하다.
25년병자년[136년] 3월, 태보 우혁이 71세로 죽다. 그 아버지 方은 광명제의 外孫으로 오랫동안 中畏를 지냈으며 恭儉했다. 혁도 무술로 여러번 큰 공을 세웠다. 을포를 태보, 尙溫을 좌보, 목도루를 右輔겸 牛山太守中畏大夫로 삼다.
26년정축년[137년] 5월, 주나의 잔당이 낙랑인과 함께 浿口, 桶口로 습격해 와 태자가 被創되어 산골짜기로 들어가 죽으니 從臣 于恢가 묻고 그 고향으로 돌아갔다. 恢는 황룡왕 仁의 후예다. 禾直이 낙랑, 주나의 잔당을 소탕하여, 좌보로 삼고, 達賈는 우보, 尙溫은 淌水公으로 삼다. 10월, 부여가 사슴을 바치다. 12월, 東部에 눈이 5자가 왔다. 말갈이 2월에 신라의 長嶺 5柵을 불살랐다. 8월 경자일, 백제에서 熒惑이 南斗를 범하다.
27년무인년[138년] 2월, 高황후가 47세로 죽다. 聖德이 있고 高行하여 上이 敬愛했다. 아들은 여섯을 낳았으니, 맏이가 桶口, 두 번째가 萬勒, 세 번째가 大德, 네 번째가 莫德, 다섯 번째가 最德, 막내가 孝德으로 모두 賢行이 있었고, 다섯公主는 眞, 元, 慕元, 陽德, 慕玄后인데, 효덕을 낳고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니 上이 애통해하고 茅山에 장례지냈다. 3월, 紇씨가 恢의 아들 素를 낳고 嬖耳가 桶口의 딸 龍寶를 낳다. 上이 伯固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는 데 백고가 紇씨와 비밀히 相通했다. 御苑의, 길이 2丈의 큰 범이 병사했는 데, 수컷 8마리와 암컷 2마리를 낳았었다. 신라가, 2월에 金城에 政堂을 설치하다. [신라왕이] 10월에는 北巡하여 太伯山에 제사지내고, 11월에는 [백제의] 己婁가 죽고 盖婁가 섰다.
28년기묘년[139년] 6월, 西河태수 尙岑이 그 동생 蕃과 㹮騎를 거느리고 嶺東都尉府를 습격하여 珍寶를 가지고 왔다. 9월, 嶺東태수 公孫玄이 침입해와 盖馬에서 패하고 돌아가다. 목도루가 서하를 지키고 상잠은 安平(開原)을 지키다.
29년병진년[140년] 3월, 尙后가 딸 白雲을 낳아 乙布의 妻 羽씨로 乳媼을 삼다. 4월, 羽공주를 遂成의 처로 삼다. 목도루를 南部대사자로 하다. 신라가 長嶺에 柵을 세우다.
30년신사년[141년] 4월, 帶方의 張彦이 屯有를 침범하니 菟城태수 乙魚가 공격해 죽이다. 낙랑태수 龍俊이 서안평을 침입하니 安平태수 상잠이 격파하고 추격하여 新安居鄕까지 가 그 처자와 兵仗을 배앗아오니 적들이 幽州로 달아나다. 좌보 禾直이 죽어 尙溫을 좌보, 목도루를 우보로 하다. 9월, 그믐신해일에 日食하다. 상후가 딸 靑雲을 낳다. 10월, 동해곡태수 尙蕃이 꼬리가 9척, 몸길이가 1丈인 豹를 보내와 御苑서 기르게 하다.
31년임오년[142년] 1월, 達賈를 좌보로 삼다. 3월, 遂成이 質陽으로 사낭가 7일동안 돌아오지 않으면서 戱樂을 無度하게 하고 7월에도 箕丘로 사냥가 5일동안 보내고 다시 倭山에 사냥가 민가의 黍菽을 헤치다.그 무리인 貫那于台 彌儒, 桓那우태 菸疾, 沸流皂衣 陽神등과 서로 의논하기를, 兄皇이 늙었는 데 죽지않으니 어찌할까? 나도 늙어가니 더 기다릴 수 없겠다하니 모두가 다, 옳소이다 당장 廢立하시지요하나 伯固가 말하기를 嫡子가 있는 데 하필 兄弟가 相傳한단 말인가? 公이 황제의 親으로 百僚의 長이니 마땅히 충효로 存心하여야 하거늘 어찌 이른 荒滛를 하는가? 禍福은 문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하니, 수성이 居樂之勢 하면서 不遊하면 何爲리오? 너는 말을 말아라 하다. 9월, 石에 지진이 있고 上이 밤에 꿈을 꾸었는 데, 표범 한 마리가 호랑이 꼬리를 물어 끊은 것이다. 무당이 말하기를 필히 皇親이 대통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니 上이 기뻐하지 않았다. 高福章이 말하기를 선을 행하면 재앙이 복이 되고 선하지 않은 것을 행하면 吉이 匈이 되니 지금 폐하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같고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으시니 어찌 근심하시리오. 대개 임금의 복은 덕에 있지 꿈에 있지 않나이다 하다. 복장은 婁의 曾孫이다.
32년계미년[143년] 3월, 태보 乙布가 죽어 尙溫을 태보, 達賈를 좌보로 하다.
33년갑신년[144년] 3월, 高福章으로 하여금 西河를 지키게 하다. 松奇의 딸로 遂成의 처를 삼다.
34년을유년[145년] 2월, 尙蕃을 柵城褥薩로 삼다. 白面이 仙皇修道繪 3권을 바치다.
35년병술년[146년] 2월, 達賈가 죽어 목도루를 좌보, 高福章을 우보로 삼고 乙魚로 서하를 지키게 하다. 7월, 遂成이 그 무리 彌儒등과 倭山에서 모의하여 廢立하기로 하니 義臣이 諫하기를, 殿下가 孝順으로 上을 섬긴지 오래인 데 上이 연로하다고 改心하시면 忠이 아닙니다. 어찌 기다리지 않으십니까 하니 좌우에서 죽이려 하니 遂成이 이르기를, 直諫은 약이며 不可無比一人이다 하다. 10월, 高福章이 上에게 권해 遂成을 죽이라 하니 上이 이르기를, 형제가 相殘할 수 없고 장차 禪位하려한다 하니 복장이, 遂成이 不仁하여 나라를 맡길 수 없어 禍를 끼칠 것입니다 하다. 帶方이 반란을 일으켜 乙魚가 그 태수 劉虎를 공격해 斬하니 나머지 무리가 무서워 복종했다. 12월, 上이 遂成에게 선위하고 물러나 鶻川別宮으로 가니 춘추가 79세 였다. 遂成이 鸞宮서 즉위하여 尙后를 中宮황후, 羽공주를 左宮황후, 松奇의 딸 黃龍을 右宮황후, 松奇를 우보로 삼았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고구려사초 해석글이 블로그에 올라가 있으니, 참고용으로 올립니다.
[ ]부분은 블로그 주인장이 삽입시켜 놓은 개인적인 주석입니다.
주인장님 주석부분만 조금 띄워 놓았고,
제목을 '고구려사략'으로 적어 놓은 부분은 제가 '고구려사초'로 정정했습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참고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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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초 초역(3)- 6세신명선제-7세 태조황제
제6世神明仙帝紀 73-112년.
[삼국사기에는 이 왕이 빠져있다. 대신에 전부 太祖王의 재위로 채우고 있다. 태조왕의 재위가 93년이라는 너무나 긴 시간이 되어 있는 이유가 이로써 밝혀진 게 아닐까?]
諱는 再思 또는 鹿臣으로 대무신제의 別子다. 어머니는 曷思태후로 그 아버지인 解素는 柳花夫人이 낳은 金蛙의 아들이다
[즉, 금와-해소-갈사태후란 말].
성격이 聰悟하고 好仁하였으며 仙書를 읽고 의약에 통달하였으며 用兵에 능하고 언변이 출중하였으나 항상 아무 것도 모르는 것 처럼 침묵하였다. 그 胞兄인 好童이 비명횡사한 까닭이다. 민중제가 승하하자 國人이 세우려 하였으나 固辭하면서, 嫡子가 있는 데 庶子가 가당키나 하냐 하고 그 어미와 함께 달아나니, 慕本이 그 뜻을 높이 사 仙王으로 봉하였다. 扶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고, 모본이 시해되자 麻勁등이 맞아들여 東都新宮에서 즉위하여 大赦하고 神明으로 改元하였다.
元年계유년[73년] 10월, 麻勁을 大芻加淹淲公으로, 松寶를 太輔, 烏希를 左輔, 羽眞을 右輔, 麻樂을 主兵大加大主簿, 松豆智를 中畏大夫, 穆卓과 達賈를 左右將軍으로 삼고, 葦花와 芦花를 皇后, 麻씨와 羽씨를 副后로 삼았는 데, 위화는 好童의 딸이고 호화는 王文의 딸로 갈사태후의 동생이며, 마경의 딸과 우진의 딸은 다 慕本의 后였다. 太輔가 청해 다 後宮으로 들인 것이고 모본의 아들 翊은 태자로 삼았다.
2년갑술년[74년] 1월, 宮태자를 東宮으로 삼아 호화황후와 함께 政事를 배우게 하니 이 때 7세였으나 대체로 일을 알아 제대로 하는 것도 제법되었다. 10월, 朱那가 반란을 일으키다.
3년을해년[75년] 3월, 仙院을 열어 尙仁을 師로 삼다. 상인은 漢音과 글자에 능통해 사람들을 잘 가르쳐 모두가 神처럼 우르렀다. 10월, 백제가 蛙山을 빼앗다. 朱那를 평정하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22년인 서력 74년 10월에 薛儒.를 보내 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4년병자년[76년] 10월, 東沃沮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평정하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4년인 서력 56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해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9월, 신라가 蛙山을 수복하다
[특이하게도 9월 기사가 10월 기사 뒤에 있다]
5년정축년[77년] 2월, 松寶가 죽어 烏希를 太輔, 우진을 左輔, 高敬을 우보로 하다. 8월, 신라의 吉門이 加耶와 黃山津口(漢江과 昭陽江이 合水하는 곳)에서 싸워 천여급을 베어 海湌이 되다. 10월, 扶余가 뿔 셋인 사슴과 긴 꼬리의 토끼를 바치니 太后가 상서롭다하여 대사령을 내리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25년, 서기 77년 10월에 바치니 왕이 대사령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10년임오년[82년] 1월, 五部仙院을 설치하다. 仙師 尙仁을 海山高士로 삼다. 麻后가 딸 芸을 낳다. 烏씨를 다시 太后로 하다.
14년을유년[85년] 5월, 南蘇城을 쌓다. 麻后가 아들 邯을 낳다.
16년정해년[86년] 1월, 상인에게 명해 三代鏡을 修하다. 오희가 죽어 우진을 태보, 高敬을 좌보, 乙祥을 主兵大加로 하다. 신라가 加台城과 馬頭城을 쌓다.
21년계사년[87년] 4월, 5부를 순시하여 민가의 俊才를 뽑아 도덕과 6예를 가르쳐, 음란한 일과 賣子 賣妻를 금지시키다. 우진이 죽어 고경과 을상을 높이고 扶謙을 우보, 高英을 主宮으로 하다.
22년갑오년[94년] 2월, 을상이 죽어 부겸을 좌보, 乙景을 右輔로 삼다. 신라의 吉元이 加耶와 馬頭城(麗州)에서 싸워 대첩을 거두다. 烏태후가 80세로 죽어 閔中陵에 장사지내다.
24년병오년[96년] 7월, 갈사태후가 77세로 죽으니 大武獸林陵에 장사지내다. 蒙蒙의 主 射旭이 죽고 동생 射滿이 서다.
25년정유년[97년] 1월, 旭의 아들인 鷄山이 滿을 죽이고 자립하니 應點이 漠北으로 달아나다.
26년무술년[98년] 3월, 上이 東巡하여 柵城의 西罽山에 이르러 白鹿을 잡다
[같은 기사이지만,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46년인 서력 98년 3월에 적어놓고 있다].
10월, 穆卓을 沸流沛者로 삼다. 卓은 東明의 공신인 黙居의 女孫으로 부여의 亂을 진압함에 공을 세웠다.
29년신축년[101년] 2월, 고경이 죽으니 부겸을 태보, 을경을 좌보, 禾玄을 우보로 삼다.
30년임인년[102년] 1월, 高朱利를 東海谷(x尼港)太守로 삼아 北海(白羽嶺)와 섬(樺太)의 추장을 진압하게 하다. 주리는 高婁의 손자이다. 質重하여 어리석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총명했다. 上이 동해곡을 지킬만한 곳이라 하여 設官했으나 멀다고 가려는 사람이 없었는 데 주리가 자청하여 가니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겼다. 이해 8월, 音汁伐國이 悉直谷國과 서로 영토분쟁을 일으키니 신라가 首露를 불러 해결하게 하고 6部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였는 데 韓祇만이 다른 사람들은 다 伊湌인 데 직위가 낮다고 해, 수로의 奴 耽下里가 한기를 죽이고 保齊하여 도망 가 音汁伐主에 의탁하니 他鄒干이 집을 뒤졌으나 보내지 않는 고로 신라가 마침내 音汁伐國을 정벌해 멸망시켰다. 이 해, 신라가 , 또, 居道로 하여금 悉直과 押督을 멸했다. 이에 앞서 신라가 거도로 하여금 張吐의 들에서 牧馬하게 했는 데, 병사들로 騎馳하고 喜樂을 일상으로 하니 두 나라가 옆에서 보고도 이를 일상으로 여겨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 데 이때 이르러 군사를 일으켜 멸한 것이다.
32년갑진년[104년] 1월, 扶謙이 죽어 乙景을 태보, 禾玄을 좌보, 尙仁을 우보로 삼다. 3월, 麻황후가 62세로 죽다. 后는 勁의 딸로, 忠直好善했다. 처음에 慕本后가 되어 아들 翊과 典공주, 宋공주, 馬공주를 낳았는 데, 直諫으로 폐위되었다가 上이 즉위하면서 처음에는 副后로 삼았는 데 나이도 높고 모든 后가 다 공경했으며 上과 7子 2女를 낳아 제3皇后로 봉해졌었다. 射滿의 아들 應點이 漠北에 나라를 세우고 아들 査功을 보내 낙타 5마리를 바쳤다
33년을사년[105년] 3월, 鎭北장군 麻樂이 盖馬의 諸城을 重修하고 㹮騎로 遼東을 정벌해 白若(注庫), 長嶺(鐵嶺), 菟城(玄菟舊x로 지금의 奉天이다), 汶城(新民), 章武(xxxx로 지금의 彰武다), 屯有(遼中) 등 6성을 얻었다. 漢人이 크게 놀라 慌忙하여 耿夔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니 宮태자가 使者 穆度婁와 輕騎兵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좌우를 깨뜨려 대파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53년, 서기105년 1월에 장수를 보내어 漢의 遼東에 쳐들어가 6현을 奪掠했다고 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지명은 언급이 없다. 또 요동태수 경기가 출병해 아군이 대패한 것으로 적고 있다. 또, 9월에는 요동태수 경기가 貊人을 격파했다고도 되어 있는 데 이는 34년 1월 기사의 앞부분만 기록한 것이 아닐까?].
34년병오년[106년] 1월, 白岩태수 鄭元이 耿夔와 章武에서 싸웠는 데 패한고로 宮태자가 친정하여 수복하다. 松豆智를 遼東태수로 삼다. 左輔 禾玄이 죽어 尙仁으로 대신하고 麻樂을 우보로 삼다. 신라가 押督을 賑하고 馬頭성주로 하여금 加耶를 정벌하게 하다.
35년정미년[107년] 7월, 乙景이 죽어 尙仁으로 대하고 高德을 좌보로 삼다.
37년을유년[109년] 3월, 麻樂이 右北平을 정벌하여 2천여명을 사로잡아 오다. 신라가 比只(星州), 多伐(大丘), 草八(草溪) 3國을 병합하다. 말갈이 백제의 牛谷을 약탈하다.
39년신해년[111년] 2월, 松豆智가 漢으로 가 和를 약조했는 데 境界를 정함에 過失이 있어 上이 노해 두지를 沸流에 유배하다. 3월, 摩樂에게 漢을 치게 하다
[ 3월 기사는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 59년, 111년 漢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玄菟에 소속되길 바랬다는 말도 안되는 기사가 있는 데, 김부식도 의아했던지, 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宮이 濊貊과 함께 玄菟를 寇했다고 되어 있어, 침략한 것인지 소속되기 원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의문을 표하고 있다. 소속되기 원한다는 말도 안되는 기록은 중국쪽의 曲筆일 것이다].
4월, 尙仁이 병이 들어 은퇴하니 高德으로 대신하고 마락을 좌보, 羽靖을 우보, 好万을 中畏大夫로 하니 葦황후의 동생이다.
40년임자년[112년] 2월, 羽靖이 죽어 好万을 우보로 하다. 5월, 上이 海山으로 가 宮태자에 선위하고 스스로 海山先皇이라 하고 內外仙政을 총괄 했으며, 尙仁과 高德은 左右太師로 삼고 好万은 仙相으로 삼았다. 葦황후와 羽황후는 左右仙后, 芦后는 攝政太后로 하니 軍國之政이 전부 太子에게 돌아가 石鸞臺에서 즉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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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世太祖皇帝紀[112년 - 146년]
諱는 宮으로 於漱라고도 함. 신명선제의 長子로 어머니는 芦花태후 扶餘씨로 東扶餘[部餘로 잘못쓰고 있다]太師인 王文의 딸이다. 帝는 태어나면서 눈을 떠 볼 수 있었으며 神功이 있어 병사를 잘 지휘해 요동을 정벌하여 여러번 큰 공을 세웠으며 이 때 선위를 받아 즉위하니 45세였다. 성격이 寬仁孝友하여 捨己從人했는 데 父皇이 政事에 염증을 내어 母太后에게 자문을 구하고 결정해 太輔를 두지 않았다.
원년임자년[112년] 1월, 仙帝를 높여 太上皇, 모후를 芦花宮皇太后, 麻樂을 좌보, 松豆智를 우보로 하고, 연호는 神明을 그대로 썼는 데, 仙帝가 생존해 계신 까닭이다. 三代鏡 57권이 이루어지다. 동명, 광명, 태무 3대의 聖繪다. 仙皇이 詔하시기를, 무릇 만백성의 군주는 代鏡이 있어야 하는 데, 鏡은 善을 비추는 것으로(照者也) 惡을 비추는 것으로 악을 廢할 수 없으니 이를 가지고 내 자손에게 경계하고자 함이라 하시다. 10월, 신라의 婆娑가 죽어 蛇陵에 장사지내고 아들 祗味가 서다. 어미 史省은 許婁의 딸이고 妻인 愛禮는 摩帝의 딸이다. 처음에 파사가 지미와 함께 韓岐의 허루를 만나 [허루가] 그 딸로 妻를 삼으려고 지미와 그 딸을 나가 춤추게 하고 마제도 그 딸과 나가 춤추게 하면서 威譔美醞으로 대접하니 지미가 摩帝의 술을 多取한 고로 마침내 애례로 처를 삼았다. 마제를 이에 酒多干(舒弗邯 牛角의 아들이다)이라 하고 그 곳은 大庖라 명명했다.
2년계축년[113년] 1월, 태후가 친히 太輔의 직책을 행하다.
3년갑인년[114년] 2월, 仙師尙仁이 上化하여 普尊仙師로 시호를 내렸다. 상인은 仁善하였는 데 上帝品 120권을 畵하였으며 98세 였다. 高德의 딸 高씨로 황후를 삼았는 데, 이 때 后가 아들 萬勒을 낳은 까닭이다. 德은 高婁태자의 제8子로 仙術이 높아 普尊에 比肩되었었다.
4년을묘년[115년] 2월, 西河(長春), 南口(遼源), 河城(通遼), 安平(開原), 長嶺(鐵嶺), 菟城(奉天), 屯有(遼中), 平郭(令安), 河陽(遼陽寓堡), 高顯(冊通), 南蘇(赫爾蘇)등의 성을 重修하여 西南을 방비하다. 8월, 나라 남쪽에 蝗이 들어 순시하여 南海에 이르렀다가 10월에 돌아오다. 7월, 祗味가 加耶를 친정하여 步騎로 黃山河(漢江)을 건넜는 데 林薄에서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수 겹으로 포위되었는 데 힘써 결사적으로 싸워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勇將 長春郞은 전사했다.
5년병진년[116년] 2월, 羽弈의 딸로 副后를 삼다. 3월, 日食이 있었다. 8월, 祗味가 친히 정병 1만을 이끌고 加耶를 정벌하였으나 가야가 굳게 지키고, 날씨도 오랫동안 비가 내려 소득없이 돌아갔다. 査功이 동생 健을 보내어 낙타 30필을 바치니 荻공주를 妻로 하였다.
6년정사년[117년] 3월, 上皇이 巡狩하여 淌村에 이르러 尙溫의 딸 天花를 後宮으로 들이고 尙須祠를 修하기를 명하였으며 買溝谷長者 迫化로 主畜을 삼고 그 아들 仁을 海山高仙으로 삼았다. 仁은 溫의 손자로 대대로 修德淨心하여 왔으며 天花는 성격이 溫柔하고 勒貌하여 천하제일의 絶色이었다. 高황후가 元공주를 낳다.
7년무오년[118년] 3월, 3軍을 설치해 羽弈을 中軍장군, 高良을 좌군장군, 禾直을 우군장군으로 삼았다. 6월, 漢人이 菟城을 침략했으나 패하고 돌아가 華麗를 다시 공격했다. 漢人 師大가 歷代治亂繪 7권을 바치니 매년 곡식과 소와 양을 주었다. 8월, 마락을 태보, 송두지를 좌보, 乙布를 우보로 하다.
8년기미년[119년] 1월, 副后가 羽공주를 낳다. 6월, 羽弈, 高良, 禾直등이 富車(連平), 候城(寧城), 遼隧(嶺脈)등을 쳐 1000여명을 사로잡아오다. 9월, 八藝인사를 뽑다. 禮,樂,射,騎,畵,算,樂,陶이다. 槍劍에 능한 자는 射科, 書刻에 능한자는 畵科, 陰陽에 능한 자는 禮科, 鶴舞에 능한 자는 樂科, 針灸에 능한 자는 藥科, 匠木에 능한 자는 陶과에 附하다. 採金使를 두어 諸金과 貨貝를 주관하게 하다. 上이 天花를 宮人으로 들였는 데 上皇이 命한 것이다.
9년경신년[120년] 2월, 漢人 姚光이 菟城태수라 자칭하며 汶城에 근거하면서 수차례 菟城, 平郭, 屯有를 침범하여 約條를 위반해 왕의 동생인 遂成이 禾直, 乙魚등을 이끌고 遼東(彰武)을 공격해 빼앗으니 姚光이 汶城(新民)으로 도망가니 漢人 천명이 투항해 왔다. 漢人師大에 명해 三代鏡繪 180권을 畵하게 하여 新鏡을 만들다. 그 畵가 精鮮燎然하여 舊鏡 57권은 古色蒼然 簡素하니 가히 法으로 삼을만한 고로 政經이라 이름하다. 師大가 처음에는 舊鏡을 飜하다가 令으로 또 着新한고로 乙布의 딸을 처로 주고 小兄으로 爵하다.
10년신유년[121년] 1월, 宮人 天花가 아들 伯固를 낳다. 이보다 먼저 上皇의 꿈에 天花가 上과 관계하여 龍을 낳았는데, 이의 應驗인 고로 伯固라 이름한 것이다. 자라면서 仁賢하여 上皇의 뜻을 不失했다. 査功이 죽고 健이 서다. 2월, 姚光이 幽州에서 쳐들어와 丘利渠帥를 죽였는 데 禾直이 급히 구원하러가 대파했다. 乙魚가 그 대군을 甬道로 유인해 伏嶮阨을 設해 殄滅하고 그 兵仗馬匹을 무수히 획득하고 赤山(赤峰), 棘城(津平)으로 추격하여 그 성곽과 양식을 불사르고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다. 포로중 技能者는 관직을 주고 聲色者는 將士에게 妾으로 주었다. 上皇이 백고를 洗하고 병이 들어 한달을 넘겨 2월 그믐에 돌아가시어 茅山(지금의 葦花)에 장사지내다. 4월, 蔡諷을 遼隊(古北口의 嶺脈)로 친정해 新城(永平)에서 싸워 그 장수 耿芼, 龍端, 公孫酺, 孫壽 등 140여명을 목베니 棘城印이 다 우리 땅이 되다. 諷은 달아나 幽州로 도망가 다시는 침범하지 못했다. 8월, 漢使가 來朝해 上皇을 조문하고 賻를 바치며 화해를 청하니 群臣들이 그 奸凶을 믿을 수 없다고 斬하자 했으나 上이 厚待해 돌려보내다. 10월, 上이 太后와 扶余로 가 柳花聖母와 太后의 祖廟에 제사지내다. 11월, 上이 부여에서 돌아와 遂成을 大芻加로 삼아 兵權을 맡기니 太后의 命이었다. 12월, 姚光이 句麗(林西)渠帥 屠利를 玄菟都尉로 삼겠다고 꾀어 卑離反賊 尉仇台와 모의하여 紫蒙故地를 復하고 玄菟府를 川西(林東)에 新置하여 거주하니 上이 친히 馬韓, 盖馬軍 1만 騎로 천서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가 2월에 大甑山城을 쌓고 4월에는 倭가 [신라의]東邊을 노락질하다.
11년임술년[122년] 2월, 上이 다시 馬韓, 句茶, 盖馬 세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川西와 句麗를 쳐 이를 빼앗으니 姚光은 달아났으나 그 부하에게 피살되고 仇台는 달아나 西紫蒙(達里湖西 沙漠之地)으로 들어가 西扶餘라 자칭하다가 나중에 宇文에게 축출되었다. 4월, 태보 麻樂이 69세로 죽다. 卑離王 義鹿 摩離의 아들이다. 大武神의 딸 都공주에 장가들어 樂을 낳았으니 배에 붉은 三星무늬가 있었고 용맹하여 여러번 대공을 세워 輔의 자리에 올라 大臣의 풍체로 大事를 잘 처결하였으니 가히 賢相이라 일컬을만 했다. 송두지를 태보, 乙布를 좌보, 遂成을 우보, 羽弈을 大注簿, 尙溫을 大評者, 尙岑을 馬장군, 尙蕃殿을 中皂衣(舍人)으로 삼았다.
13년갑자년[124년] 5월, 右장군 穆吉이 죽어 尙岑으로 대신하다. 禾直이 紫蒙軍을 이끌고 尉仇台를 쳐 月海(達里湖)를 깨뜨리고 月都(多倫)까지 갔다가 돌아오다. 遂成을 좌보, 우혁을 우보로 삼다. 8월, 太伯山 남쪽(白羅山과 大西山의 경계)에 사냥 가, 크기가 말만한 白鹿을 잡다. 綠綿으로 鞍을 해 타고 다녔는 데, 上의 신장이 8尺, 무게가 100근 남짓했으나 사슴은 如古한 고로 매 조회시마다 騎馳하여 사람들이 白鹿大王이라 불렀는 데, 하루는 毛屯谷에 이르러 三賢의 집에서 聖母의 팔찌를 얻은 고로 優勃水(哈爾屯河)에 제사를 지냈다. 나라 남쪽에 蝗이 들어 仙人 陽父를 보내어 제거하다. 9월 그믐 경신일에 日食 하다. 漢使가 와 和를 청하다. 11월, 東都에 地震. 尙后가 衲공주를 낳다. 好万을 태보로 하다. 송두지가 71세로 죽어 그 妻인 典공주에게 매년 곡식을 내리다.
14년을축년[125년] 1월, 尙溫을 우보, 朱文을 中畏大夫, 富文을 松江(同江)沛者로 하니, 주문과 부문은 芦花태후의 동생이다.
15년병인년[126년] 2월 7일, 麻樂의 妻 烏씨가 穆崇의 아들 靖을 낳아 請하여 樂으로 허락하게 하다[즉, 불륜의 씨앗이라는 의미]. 尙溫의 딸 銀花를 副后로 들이니 天花의 누이동생이다.
16년정묘년[127년] 7월 朔 갑술일에 日食하다. 상후가 아들 將固를 낳다.
17년무진년[128년] 8월, 曷思王 都頭가 나라를 바쳐 와 于台로 삼다. 尙溫을 東部大使者, 우혁을 우보로 삼다.
18년기사년[129년] 3월, 松奇가 딸 黃龍을 낳아 왕에게 바쳤는 데, 그 妻는 度婁의 누이동생이다. 尙溫의 셋째딸 暖花가 또 後宮으로 들어왔다. 高황후가 莫德태자를 낳다. 가을, 상후가 裶공주를 낳다.
20년신미년[131년] 2월, 난화를 萬勒태자의 처로 삼으니, 태자가 高황후에 청한 까닭이다. 송기를 大評者로 삼다. 7월, 태보 好万이 73세로 죽다.
21년임신년[132년] 1월, 芦花태후가 84세로 죽다. 키가 8척에 무게가 130근이었고 槍劍에 능했으며 慕本초에 夫皇인 再思대왕을 따라 부여 내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고 仙帝때에는 나라의 큰 일을 전부 后가 결정했으며 上이 즉위한 초에는 태보의 자리에 잇으면서 英斷으로 어려운 일을 잘 해결했다. 상후가 아들 春固를 낳다. 遂成이 태보, 우혁이 좌보, 禾直이 우보가 되다. 3월, 藻那王 心이 반란을 일으켜 貫那沛者 達賈, 東部大使者 穆度婁를 보내 평정하고 心을 관나로 옮기고 목도루를 柵城태수로 삼았다. 4월, 上이 尙后와 遂成에게 명해 太伯山 諸仙院을 出遊하고 돌아오게 하다. 元공주를 遂成의 처로 삼다.
22년계유년[133년] 1월, 遂成을 皇太弟로 삼아 東宮을 두고 각료 78명을 배치하였으며 상후를 遂成의 妃로 삼았다. 우혁을 태보, 을포를 좌보, 尙溫을 우보로 삼았다. 6월, 遂成의 妃가 遂成을 아들 駿을 낳으니 목도루를 東宮大夫로 삼다. 그 妻 松花는 柵城에서 딸 守禮를 낳고오니 駿의 乳媼으로 삼았다. 牛山城(丸都)을 처음으로 쌓아 避暑地로 했다.
23년갑술년[134년] 3월, 紇于의 손자 龍山이 桓阿와 越都 2郡으로 항복해 와 桶口태자를 命해 桓阿태수로 하고 월도에 이르러 용산의 딸 흘씨를 納하다. 10월, 朱那가 반란을 일으켜 桓那沛者 薛儒에게 명해 정벌하다. 그 나라는 호수가 많은 까닭에 湖國이라고도 불렀는 데, 나라가 藻那(令尼婆의 서북해안)의 남쪽에 있어 조나와 相婚한 까닭에, 조나를 復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는 데 남자는 많고 여자는 적었으며 사슴 비슷한 큰 개(獹)가 있어 능히 사람말을 알아들었다.
24년을해년[135년] 1월, 주나왕자 乙音이 항복해 와 古芻加에 봉하고 眞공주를 처로 주었다. 주나의 남은 무리는 桓河의 樂浪人부락으로 옮겨 서로 혼인해 살게 했다. 3월, 鸞臺를 중수하여 宮으로 하고 白으로 하여금 三代鏡을 벽에 그리게 하여 玄武渡河相이라 이름하다.
25년병자년[136년] 3월, 태보 우혁이 71세로 죽다. 그 아버지 方은 광명제의 外孫으로 오랫동안 中畏를 지냈으며 恭儉했다. 혁도 무술로 여러번 큰 공을 세웠다. 을포를 태보, 尙溫을 좌보, 목도루를 右輔겸 牛山太守中畏大夫로 삼다.
26년정축년[137년] 5월, 주나의 잔당이 낙랑인과 함께 浿口, 桶口로 습격해 와 태자가 被創되어 산골짜기로 들어가 죽으니 從臣 于恢가 묻고 그 고향으로 돌아갔다. 恢는 황룡왕 仁의 후예다. 禾直이 낙랑, 주나의 잔당을 소탕하여, 좌보로 삼고, 達賈는 우보, 尙溫은 淌水公으로 삼다. 10월, 부여가 사슴을 바치다. 12월, 東部에 눈이 5자가 왔다. 말갈이 2월에 신라의 長嶺 5柵을 불살랐다. 8월 경자일, 백제에서 熒惑이 南斗를 범하다.
27년무인년[138년] 2월, 高황후가 47세로 죽다. 聖德이 있고 高行하여 上이 敬愛했다. 아들은 여섯을 낳았으니, 맏이가 桶口, 두 번째가 萬勒, 세 번째가 大德, 네 번째가 莫德, 다섯 번째가 最德, 막내가 孝德으로 모두 賢行이 있었고, 다섯公主는 眞, 元, 慕元, 陽德, 慕玄后인데, 효덕을 낳고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니 上이 애통해하고 茅山에 장례지냈다. 3월, 紇씨가 恢의 아들 素를 낳고 嬖耳가 桶口의 딸 龍寶를 낳다. 上이 伯固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는 데 백고가 紇씨와 비밀히 相通했다. 御苑의, 길이 2丈의 큰 범이 병사했는 데, 수컷 8마리와 암컷 2마리를 낳았었다. 신라가, 2월에 金城에 政堂을 설치하다. [신라왕이] 10월에는 北巡하여 太伯山에 제사지내고, 11월에는 [백제의] 己婁가 죽고 盖婁가 섰다.
28년기묘년[139년] 6월, 西河태수 尙岑이 그 동생 蕃과 㹮騎를 거느리고 嶺東都尉府를 습격하여 珍寶를 가지고 왔다. 9월, 嶺東태수 公孫玄이 침입해와 盖馬에서 패하고 돌아가다. 목도루가 서하를 지키고 상잠은 安平(開原)을 지키다.
29년병진년[140년] 3월, 尙后가 딸 白雲을 낳아 乙布의 妻 羽씨로 乳媼을 삼다. 4월, 羽공주를 遂成의 처로 삼다. 목도루를 南部대사자로 하다. 신라가 長嶺에 柵을 세우다.
30년신사년[141년] 4월, 帶方의 張彦이 屯有를 침범하니 菟城태수 乙魚가 공격해 죽이다. 낙랑태수 龍俊이 서안평을 침입하니 安平태수 상잠이 격파하고 추격하여 新安居鄕까지 가 그 처자와 兵仗을 배앗아오니 적들이 幽州로 달아나다. 좌보 禾直이 죽어 尙溫을 좌보, 목도루를 우보로 하다. 9월, 그믐신해일에 日食하다. 상후가 딸 靑雲을 낳다. 10월, 동해곡태수 尙蕃이 꼬리가 9척, 몸길이가 1丈인 豹를 보내와 御苑서 기르게 하다.
31년임오년[142년] 1월, 達賈를 좌보로 삼다. 3월, 遂成이 質陽으로 사낭가 7일동안 돌아오지 않으면서 戱樂을 無度하게 하고 7월에도 箕丘로 사냥가 5일동안 보내고 다시 倭山에 사냥가 민가의 黍菽을 헤치다.그 무리인 貫那于台 彌儒, 桓那우태 菸疾, 沸流皂衣 陽神등과 서로 의논하기를, 兄皇이 늙었는 데 죽지않으니 어찌할까? 나도 늙어가니 더 기다릴 수 없겠다하니 모두가 다, 옳소이다 당장 廢立하시지요하나 伯固가 말하기를 嫡子가 있는 데 하필 兄弟가 相傳한단 말인가? 公이 황제의 親으로 百僚의 長이니 마땅히 충효로 存心하여야 하거늘 어찌 이른 荒滛를 하는가? 禍福은 문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하니, 수성이 居樂之勢 하면서 不遊하면 何爲리오? 너는 말을 말아라 하다. 9월, 石에 지진이 있고 上이 밤에 꿈을 꾸었는 데, 표범 한 마리가 호랑이 꼬리를 물어 끊은 것이다. 무당이 말하기를 필히 皇親이 대통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니 上이 기뻐하지 않았다. 高福章이 말하기를 선을 행하면 재앙이 복이 되고 선하지 않은 것을 행하면 吉이 匈이 되니 지금 폐하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같고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으시니 어찌 근심하시리오. 대개 임금의 복은 덕에 있지 꿈에 있지 않나이다 하다. 복장은 婁의 曾孫이다.
32년계미년[143년] 3월, 태보 乙布가 죽어 尙溫을 태보, 達賈를 좌보로 하다.
33년갑신년[144년] 3월, 高福章으로 하여금 西河를 지키게 하다. 松奇의 딸로 遂成의 처를 삼다.
34년을유년[145년] 2월, 尙蕃을 柵城褥薩로 삼다. 白面이 仙皇修道繪 3권을 바치다.
35년병술년[146년] 2월, 達賈가 죽어 목도루를 좌보, 高福章을 우보로 삼고 乙魚로 서하를 지키게 하다. 7월, 遂成이 그 무리 彌儒등과 倭山에서 모의하여 廢立하기로 하니 義臣이 諫하기를, 殿下가 孝順으로 上을 섬긴지 오래인 데 上이 연로하다고 改心하시면 忠이 아닙니다. 어찌 기다리지 않으십니까 하니 좌우에서 죽이려 하니 遂成이 이르기를, 直諫은 약이며 不可無比一人이다 하다. 10월, 高福章이 上에게 권해 遂成을 죽이라 하니 上이 이르기를, 형제가 相殘할 수 없고 장차 禪位하려한다 하니 복장이, 遂成이 不仁하여 나라를 맡길 수 없어 禍를 끼칠 것입니다 하다. 帶方이 반란을 일으켜 乙魚가 그 태수 劉虎를 공격해 斬하니 나머지 무리가 무서워 복종했다. 12월, 上이 遂成에게 선위하고 물러나 鶻川別宮으로 가니 춘추가 79세 였다. 遂成이 鸞宮서 즉위하여 尙后를 中宮황후, 羽공주를 左宮황후, 松奇의 딸 黃龍을 右宮황후, 松奇를 우보로 삼았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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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득 님의 싸이트에 있는 것이군요. 이 부분은 좀 빨라질 수 있겠읍니다. 참고하겠읍니다. "사초"와 "사략" 문제는 본문 내용의 제목을 기준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사략"은 사서이고, "사초"는 사료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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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댓글을 달았듯이.. 의견을 받아 들이기로 했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고.. 신용득님 해석글이 맞고.. 문장은 조금 딱딱하지만..오류는 적게 보이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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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 수록 대단한 내용들이 숨어 있군요. 신용득님 같은 분이 참여해 주신다면 보다 빨리 우리역사의 진실이 밝혀 질것 같내요. 영토에 대해 저도 자신은 없지만 낙랑은 진한이다. 진한은 신라이다. 낙랑과 신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존재한다, 도대체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혹시 신라는 평양(또는 서울)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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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은 진한이다. 진한은 신라이다. 낙랑과 신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존재한다, 맞는 얘기인가 봐요.. 산책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