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정훈님) 패수(浿水)에 대한 의견, 모루(牟婁)및 고모루(古牟婁)와 관련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03:53
정훈님.
이 글은 좌계가 최근 남당(南堂) 유고(遺稿)와 관련해서 ‘정성일’님이 선도(先導)해서 이미
해석한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을 보완(補完)하는 글을 구상하면서 쓰게 되었습니다.

아래 원문(原文)에 정성일 선생의 해석문(解釋文)을 그대로 옮기고 여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원문(原文)
元年癸卯正月沸流東行南渡帶水至彌鄒忽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芽西南行而渡浿河亦會于彌鄒忽,
‘정성일 님’의 해석(解釋) :
원년(B.C.18) 계묘 1월 비류가 동쪽으로 가다 남으로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는 오간, 마려(아)와 더불어 서남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만났다.

여기서 패하(浿河)는 분명히 패수(浿水)를 뜻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좌계가 정훈 선생께 여쭈고 져 하는 것은 ‘나름대로 추정하는 패수(浿水)에 대한 의견’을 꼭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져 합입니다.  

이는 선생의 글 ‘패수란 사기에서 잡아 내야!’에서 이미 좌계가 부탁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패수(浿水)의 문제는 ‘아시아 고대사’를 규명함에 있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고, 또 이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서 우리측 사서(史書)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史書)를 모두 감안해서 선생께서 포괄적인 이해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검토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정훈 선생님’과 같이 이 문제에 관심이 깊은 여러 동학(同學)들께서는 기탄(忌憚)없는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1.  모루(牟婁)와 고모루(古牟婁)에 대해.

이 패수(浿水)의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개토태왕 비문’은 물론 ‘일본서기’에서도 등장하는 모루(牟婁)및 고모루(古牟婁)의 위치비정에 대한 좌계의 생각을 먼저 피력하는 것이 편할듯 합니다.
왜냐하면,  좌계의 견해로는 이 패수(浿水)에 자리 잡은 중요한 도시(都市)가 고모루(古牟婁) 성(城)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가.  모루(牟婁)에 대한 ‘짧은 생각’

일단 좌계 개인적으로는 고대의 지명 명칭에 대해서 “이 말은 이런 의미를 지닌다.”라는 식의 해석을 가급적이면 삼가는 것이 옳다고, 자제(自制)하는 편임을 먼저 말씀드리고져 합니다.
왜냐하면, 고언어학, 비교언어학에 조예(造詣)가 없는 상태에서 ‘얼핏 떠오른 언어감각’으로 생각을 진행시키는 자체가 ‘통속(通俗)어원설(語源說)’에 불과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모루’에 대해서는 좀 과감히 속내를 들어 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이곳에 ‘산동(山東) 백제의 군사(軍事)및 문화 지리 (3)’이란 제목으로 글을 쓸 때, 강하게 마음 속에 짚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 ‘산동 백제의 군사및 문화지리’란 글 속에는 “연(連)이어져 있는 호수(湖水)와 강물들어 어찌 만나고 어찌 방향이 꺽여서 어떻게 흘러 나가는지?”하는 지리설명이 들어있습니다.

즉 산동성(山東省)은 하남성과 연(連)이은 호수(湖水) -  동평호(東平湖) - 거야택(鋸野澤 : 양산박(梁山泊)임) - 남양호-소양호-독산호-미산호가 줄을 이어서 ‘호수(湖水)로 된 긴 경계’를 지니고 있는데 당연히 수많은 강물을 받아서 나가고,
한편,
기원(沂源)과 기몽-모친호에 있는 물들이 합해져서 연(連)이어져 있는 4대호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강물과 비주(邳州)라는 산동성 남쪽 끝의 도시 앞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대기수(大沂水)가 되어 산동성과 강소성을 구분짓는 애산(艾山) - 이는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전쟁을 했다는 장소로 이 싸이트에 소개되 어있음 -을 지나  강소성의 호수인 낙마호(駱馬湖)로 들어갑니다.
크게 보아서는 이른 호수(湖水)를 통한 강물의 진행방향이 남향(南向)입니다.  
그런데, 이 낙마호(駱馬湖)로부터 강물이 (**) 현 숙우시(宿迂市)에 이르러 갑자기 그 방향을 꺾어 동류(東流)해서(**) 신기하(新沂河)로 그 이름을 바꾸어 으로 동류(東流), 하구(河口)인 연미(燕尾)에서 동해로 들어갑니다.
물론 이 글에서 좌계는 이 연미(燕尾)를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기벌포(伎伐浦)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격언(格言)에 있듯이 ‘모루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에서 보다시피, 한국어의 ‘모’는 각(角)지어 꺾임을 뜻하고, ‘모루’는 꺽어져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로 현 강소성 숙우시(宿迂市)이 바로 ‘모루(牟婁)’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일본서기에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록, 또한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모루’가 현 강소성 ‘숙우시(宿迂市)’로 비정(比定)할 때, 해당 기사(記事)가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설명되는 것을 보고 더욱더 이런 생각이 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루’가 방향을 90도로 꺽어서 나가는 것”을 뜻한다면, 옛날에 ‘모루’로 불렀던 성(城)이 고모루(古牟婁)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즉 산동백제는 관경삼국(管境三國) 초기에 개척이 되었기 때문에, - 이는 백제서기(百濟書記)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 훨씬 그 이전에 어떤 하천(河川)이 - 물론 패수(浿水)입니다. - 꺾여지는 위치에 있을 때, 이를 구분해 주기 위해서 고모루(古牟婁)라고 불렀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2. 패수(浿水)의 위치 비정

가.  패수(浿水)는 ‘화폐 교환의 강(江)’

먼저 패수(浿水)의 위치를 비정하는 글을 쓰기 전(前)에, 패수(浿水)의 어의(語義)부터 좌계의 솔직한 의견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좌계가  ‘경제인류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해서 인지 몰라도,  물 수(水)변에 고대에 화폐로 쓰인 ‘조개 패(貝)’가 있는 것을 보아서, 이는 예전부터 고조선이 주로 관리하는 ‘화폐 교환의 강(江)’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제 인류학에 관심이 없는 사학자(史學者)들에게는 좀 엉뚱할런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패수(浿水)로 앞으로 비정(比定)하는 곳에 - 현 중국 하북성(河北省)입니다만 - 전란(戰亂)이 터질 경우, 이 패수(浿水)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좋은 모델(model)이기 때문에,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
전쟁이 터져도 경제거래를 계속해야하고, 그러자면 패수(浿水)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패수(浿水) 다처설(多處說)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전란(戰亂)이 끝나면, 원래부터 패수(浿水)로 칭해지던 곳으로 ‘화폐 교환의 강’이 정상상태로 되돌려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평화시에는 늘 패수(浿水)로 칭해지는 강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나.  평상상태의 패수(浿水)를 나타내는 사료(史料)의 해석

아무튼 평상상태의 패수(浿水)를 나타내는 사료(史料)부터 살펴보고, 이의 해석을 시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 두 가지입니다.
(이 자료를 뫃아준 ‘이희석 님’께 감사드립니다.)

*1) 설문해자(說文解字) 권11상
- 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
-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2)수경주(水經注) 권14
-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통과하여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위 두가지 사료(史料)에서 중요한 것은 강물의 흐름이 동입우해(東入于海) - 즉“동쪽으로해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 일체의 패수(浿水)는 전란(戰亂)이나 비상사태 때, ‘국제 화폐 교환의 강’으로 ‘보다 안전한 곳’에서 잠시 있는 패수(浿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패수(浿水)에 대한 2)의 문장이 ..........
*(1)* 먼저 ‘浿水出樂浪鏤方縣’이 나오고,
*(2)* 나중에 ‘東南過臨浿縣’로 적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패수(浿水)가 낙랑(樂浪) 누방현(縷方縣)에서 나와서(=출(出)), 동남(東南)쪽으로 흐르는데, 그 옆에 임패현(臨浿懸)이 있었다.”라는 식(式)으로 생각하게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현 하북성(河北省) 북경 근처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江)을 찾을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찾아보았자, 그런 강(江)이 없자, 패수(浿水)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 진 원인(原因)이
된다고 봅니다.

1)  위상(位相)을 중시하는 한문(漢文)의 서술방법

그러나 이는 한문(漢文)을 해석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하는 문
장입니다.
왜냐?
한문(漢文)은 유별(類別)나게도, 위상(位相)을 중시하는 사고(思考)가 철저합니다.
그래서 위상(位相)이 높은 것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그 지엽(枝葉)된 말을 쓰는 것이지요.
‘낙랑(樂浪) 누방현(縷方縣)’이라는 것은 당시 국제체제에서 한(漢) 조정(朝廷)이 사해(四海) 밖의 여러 국가와 ‘국제화백특구’를 만들어서 ‘국제적인 합의’를 유도하는 대신, 새외(塞外) 민족과 장성(長城)을 쌓아 대립하지 않고, 자유롭게 ‘실크-로드’를 확보함에 있어서, 대내외(對內外)중요한 공적에 대해서 솥 등 따위의 청동기를 새기는 매우 위치가 높은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이럴 경우, 한문(漢文)은 반드시 위상(位相)이 높은 것을 먼저 쓰는 것이 철저한 예법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위 문장을 한문(漢文) 특유의 위상(位相) 의식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문(原文) :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해석(解釋) : 패수(浿水)는 낙랑(樂浪) 누방현(縷方縣)을 (뚫고)나가는(=출(出)) 강(江)이다.  (그런데, 이 강(江)은) 임패현(臨浿懸)을 지날 때, 동남향(東南向)으로 가는데,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2) 수리(水理)로써 보아서 하북성(河北省)에서 동남(東南)쪽으로 흐르는 강(江)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황하(黃河)는 유달리 모래가 많습니다.  황하(黃河)는 궤(几)란 글자 모양으로 흐르는데, 남향했다가 동(東)으로 흐르는가 싶더니 북동(北東)쪽으로 흐릅니다.
중요한 것은 남향에서 꺽이는 부분부터 아주 예전부터 모래가 강 주변에 쌓여서 주변의 지리(地理)보다 높아지는 매우 특이한 지세(地勢)를 지니는 것이지요.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또 홍수의 피해 때문에, 둑을 쌓는 관계로 황하는 매우 특에하게도 지상천(地上川)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황하(黃河) 중간부터 - 백제수도가 있던 하남의 몽양시(蒙陽市)부터는 그 어떠한 강(江)도 황하로 흘러들어오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강물인 황하로 여러 지류(支流)들이 흘러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피해서 흐르는 매우 이상한 모양을 취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낙랑(樂浪)이 만약 하북성(河北省)에서 오늘날 산서성(山西省) 쪽으로 바싹 붙어 있다고 했을 때,  이로 부터 황하가 있는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수리(水理) 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또한 낙랑이 황해(黃海 : 중국의 동해)로 바싹 붙어있으면, 이렇게 흐르는 강물이 동남(東南)으로 흘렀을 경우 - 지리상 극히 짧은 강(江)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량(水量)도 적어서, 국경(國境)으로 삼을 수 있는 ‘큰 강’이 아니라 겨우 ‘개울’정도로 밖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수리(水理)를 아는 사람이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 조차 없는 이야기 일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명색(名色)이 ‘물에 대한 경전(經典)에 대한 주(注)를 단 책’ 즉 수경주(水經注)에서 이런 초보적인 수리(水理)를 모를리는 없고, “이런 이치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 위상(位相)을 중요시하는 문장의 서술방식으로 서술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3.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가.  위치 비정

좌계가 볼 때에는.......
오늘날 산서성(山西省)에서 동남향(東南向)으로 흘러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로 뚫고 들어오는 청장하(淸漳河)가 이 경계지역을 들어자마자, 동북향(東北向)으로 천진(天津)쪽으로 방향을 꺽어 흐르는 자아하(子牙河)로 보는 것입니다.  
즉 청장하(淸漳河)-자아하(子牙河)인데, 전체적으로 브이(V)자 모양으로 흐르는 강인 것이지요.  즉 청장하(淸漳河)가 동남향(東南向)으로 흘러 브이(V)자의 왼 편이 된다면, 자아하(子牙河)는 브이(V)자의 오른 편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상세히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산서성(山西省) - 따라서 태행산맥(太行山脈) 서쪽이다.-의 도시 가운데 태원시(太原市)가 있습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높은 고원(高原)’이어서 이곳 주변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좋은 곳이지요.  아무튼 이 태원시 쪽에서 동남향(東南向) 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현재 청장서원(淸漳西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태원시 동쪽에 양천시(陽泉市)가 있습니다. 이 역시 이름 자체가 ‘샘이 솟아남’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 부근에서 역시 동남향 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현재 청장동원(淸漳東源)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강물이 산서성 경계를 빠져나와 현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에서 합쳐져서 흐르게 됩니다.  이 합쳐지는 지명이 악성(岳城)인데, 여기에는 현재 악성수고(岳城水庫)가 있습니다.  

1)  임패현(臨浿懸)이 려성(黎城)이다.

그런데 이처럼 합쳐지기 전에 청장동원(淸漳東源)과 청장서원(淸漳西源) 사이에 려성(黎城)이란 성(城)이 있습니다.
좌계가 볼때에는 이 려성(黎城)이 바로 ‘임패현(臨浿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가) 일단 청장서원(淸漳西源)과 청장동원(淸漳東源)이 모두 동남(東南) 쪽으로 흘러서 ‘東南過臨浿縣’의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나) 둘째는 패수(浿水)를 청장하(淸漳河)-자아하(子牙河)로 되어 브이(V)로 보았을 때, 이에 임(臨)하는 조건이 즉 임(臨)-패수(浿水)의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임(臨)의 뜻에는 ‘내려다 보다’, ‘낮은데로 향(向)하여 대(對)하다.’의 뜻이 있으니 깐 말입니다.
다) 세 번째는 이 려성(黎城)의 명칭 자체가 구려(九黎)혹은 ‘구리’라는 오래된 신시(神市) 경제체제를 지켜온 사람들의 명칭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라) 패수(浿水)가 ‘화폐교환의 강’이라면, 교환거래를 하는 ‘실물화폐’나 ‘국가화폐’가 신시(神市)의 화폐로 바꾸어 준 후에, 이를 보유(保有)하고 있어야하는데, 안전한 보유(保有)를 위해서 남북으로 각기 청장서원(淸漳西源)과 청장동원(淸漳東源)이 있어서, 강탈(强奪)에 저항하기 좋은 지리적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마) 또한 이 지역이 중국대륙의 심장(心腸)인 장안(長安)과 낙양으로 최대한 빨리 새외(塞外)에서 가는 가장 큰 지구대(地溝帶) - 즉 여량산맥(呂梁山脈)과 태행산맥(太行山脈)사이에 있어서 이른바 ‘외환(外換)은행’이 들어서기 좋은 교통상의 이점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동남향(東南向)으로 지나는 두 개의 청장하(淸漳河)사이에 있는 임패현(臨浿懸)을 지나, 이미 말씀드린, 악성수고(岳城水庫)를 지나면,  ‘고대에 도자기와 자철(磁鐵)의 생산지로 유명한 자현(磁縣)’ 남쪽을 흐르게 됩니다.  

2)  고모루(古牟婁)는 ‘자현(磁縣)-팽성(彭城)’이다.

그런데, 이 자현(磁縣)이란 위치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고대의 교역품(交易品) 가운데 ‘도자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임패현(臨浿懸) 즉 려성(黎城)에서 화폐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살 물건’이 없으면, 바꿀 필요가 없겠지요.  
이런 면에서 려성(黎城) 즉 임패현(臨浿懸)과 자현(磁縣)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자현(磁縣) 주변에는 팽성(彭城)이 있는데, 이 두 고을을 중심으로 해서 패수(浿水)는 돌연히 동북(東北)쪽으로 흘러서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좌계가 볼때에는 이 ‘자현(磁縣)-팽성(彭城)’이 고모루(古牟婁) 성(城)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 여기서부터 ‘모루’ 꺾여서 패수(浿水)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전략적으로 보아도 이 ‘자현(磁縣)-팽성(彭城)’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정북(正北)에 조(趙)의 수도(首都)가 있는 한단시(邯鄲市)가 있으니깐 말입니다.  
자아하(子牙河)는 계속 흘러 중국대륙에서 쟁지(爭地)가 되었던 거록(巨鹿)을 오른편 어깨를 집고 북동향(北東向)으로 계속 흘러가는 것이지요.  

4.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의 패하(浿河)관련 문장 해석

그런데, ...............
모두(冒頭)에 적은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의 패하(浿河)관련 문장은 다음과 같고, 지금까지 패수(浿水)에 대한 좌계의 생각과 관련해서 엄밀하게 검토해 봄이 중요할 듯 합니다.

원문(原文)
元年癸卯正月沸流東行南渡帶水至彌鄒忽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芽西南行而渡浿河亦會于彌鄒忽,
‘정성일 님’의 해석(解釋) :
원년(B.C.18) 계묘 1월 비류가 동쪽으로 가다 남으로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溫祚)는 오간, 마려(아)와 더불어 서남(西南)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만났다.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지리(地理) 비정은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께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일본 사학자들의 영향을 부지불식간에 받아, 만주 쪽에 치중(置重)해서 괄호 속에 위치비정을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성겸 선생은 “이를 일단 무시하고 해석작업을 하자.”는 지침(指針)을 제시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싸이트(site)에서 은연중 믿고있는 고구리(高句麗) 국내성(國內城)이 현 북경 근처라고 할 때, 위 비류왕(沸流王)의 기사(記事)는 신기할 정도로  많은 선생님들이 추측하는 백제 수도(首都)의 위치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비류(沸流)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행(南行)했다는 것은 오늘날 북경(北京)에서 해안(海岸)이 있는 동쪽으로 간 것이고, 남행(南行)했다는 것은 결국 배(船)로 내려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대수(帶水)는 ‘허리띠 강’이기 때문에 분명 황하(黃河)입니다.
미추홀(彌鄒忽)은 산동백제이기 때문에,  결국 비류(沸流)가 배로 오늘날 산동에 들어간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북경에서 동쪽으로 가서 황해(黃海)를 건너, 남행(南行)해서 오늘날 한강(漢江)을 대수(帶水)로 치고, 미추홀을 인천(仁川)으로 강변(强辯)할수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온조(溫祚)의 행정(行程)입니다.  
“온조(溫祚)는 오간, 마려(아)와 더불어 서남(西南)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만났다.”
위 ‘정성일 선생’의 해석문에서 “도대체 왜 서남(西南)으로 갔느냐?”입니다.
좌계 생각에는 자신의 봉지(封地)인 현 하남성(河南省) 몽양시(蒙陽市)를 가기 위해서는 현 북경에서 서남(西南)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서남(西南)쪽으로 가는 곳에서 패하(浿河)를 건넜다.(西南行而渡浿河)’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강(江)을 건너는 것’은  꼭 잠시 ‘가로질러서 건너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江)을 따라서 길게 건너는 것이, 효율적으로 건너는 것인 게지요.
이런 면에서 보면, 비류(沸流)는 숫제 패수(浿水)를 타고 올라갔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즉 브이(V)자로 되어 있는 패수(浿水)를 역방향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태원시(太原市)쪽에서 흘러나오는 청장서원(淸漳西源)의 항로(航路)로 택했지요.
왜냐?
이 태원 근방에서는 태행산맥과 여량산맥 사이로 흘러서 황하(黃河)로 흐르는 분하(汾河)가 흘러나가기 때문입니다.  즉 온조(溫祚)는 이 분하(汾河)를 타고 황하(黃河)로 해서 가볍게 하남 위례성으로 들어가서, 이것 저것 정무(政務) 처리를 한 다음, 그 다음에 형님이 계신 산동백제로 간 것으로 보면, 놀랍도록 현실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5.  ‘라디오 님’의 사기열전 해석과 관련

그런데 ‘라디오 님’께서 사기열전을 해석하신 것을 좌계가 다음과 같이 보완했는데,
여기에 보면 역시 패수(浿水)가 등장합니다.

(1) 朝 鮮 王 滿 者 , 故 燕 人 也 。
: 조선의 왕 만(滿)이란 자는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2) 自 始 全 燕 時 嘗 略 屬 真 番、 朝 鮮 , 為 置 吏 , 築 鄣 塞 。
: 연(燕)이란 나라가 전일적(全一的)인 정책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이 전연(全燕)은) 진번과 조선의 ‘국제 정치 전략’에 의거해 (이들-진번과 조선을 뜻함-에게) 속했었는데,  (만(滿)은 이 전연(全燕)‘의 관리로써 장새(障塞)를 쌓았다.  

(3) 秦 滅 燕 , 屬 遼 東 外 徼

진(秦)이 연(燕)을 명망시킨 후, (이 연(燕)나라는) 요(遼)의 동쪽에 진(秦)나의 외곽을 빙도는 외요국(外徼國)으로써 자리매김 했었다.  

(4) 漢 興, 為 其 遠 難 守 , 復 修 遼 東 故 塞 , 至 浿 水 為 界 , 屬 燕

한나라가 흥하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의 옛 요새를 다시 고쳤는데,
한(漢)은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해서 (봉지(封地)를 주어서) 연(燕)에게 속하게 했다.  

(5)  燕 王 盧 綰 反 , 入 匈 奴 , 滿 亡 命 , 聚 黨 千 餘 人 , 魋 結 蠻 夷 服 而 東 走 出 塞 , 渡 浿 水 , 居 秦 故 空 地 上 下 鄣 ,

연나라 왕 노관(盧綰)은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만(滿)은 망명하여 무리 수천명을 이끌고, 魋結(상투를 틀고) 만이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주(逃走)하여 (패수(浿水) 이남의 연(燕)나라 요새를 벗어나(=출(出)), 패수(浿水)를 건넜다.  (따라서) 옛 진(秦)나라 땅인 그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6) 稍 役 屬 真 番、 朝 鮮 蠻 夷 及 故 燕 、 齊 亡 命 者 王 之 , 都 王 險 。

(만(滿)은) 이 (상하 운장이란 곳에서) 조선(朝鮮)에 속했던 만이(蠻夷)와 옛날 전연(全燕)과 이에 제휴했던 제(齊)땅의 사람들에게 ‘진번과 조선에서 제시한 국제적인 사역(使役)을 (한다는 명분으로“ 망명자들을 모아서 왕노릇을 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연(燕)과의 경계를 오늘날 자아하(子牙河)를 경계로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첨가 의견]
만약에 오늘날 자아하(子牙河)가 아니라, 다른 강물 즉
수경주(水經注)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을 잘못 읽는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통과하여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로 해석한 ‘가공(架空)의 강(江)’이라면,  연(燕)과의 국경을 이루기에는 너무 짧고, 또 개천에 불과한 강이 되는 모순을 낳는 것입니다.  


6.  우리 측 사서의 패수(浿水)의 기록들 - ‘정성일 님’의 자료(資料) 모음

그런데, 좌계가 이 ‘패수(浿水)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자, ‘정성일 선생’께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모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패수(浿水)=청장하(淸漳河) + 자아하(子牙河)’라는 등식을 대입(代入)시켜 볼 때에,
별 모순되는 것을 좌계는 찾지 못했습니다.

패수(浿水)가 있는 부분은 (**)~ (**)로 표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열거(列擧)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온조(溫祚)왕 때  백제의 강역-(1)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첨가 의견]
이때의 서쪽의 바다는 무조건 현 청해(靑海)로 봅니다.
왜냐하면, 백제를 비롯한 고구리, 신라까지 해운국(海運國)이어서, 여기에 말과 수레를 싣고, 청해(靑海)까지 가는 것은 문제도 안되었던 것이지요.
북쪽으로 패수(浿水)에 이르는 것은 이미 ‘정성일 선생’의 해석에서 밝혀졌듯이, 고구리 수도가 있는 현 하북성 북경에서 브이(V)자로 역행(逆行)해 올라왔다가, 분하(汾河)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가장 쉽게 하남 위례성 - 현 하남 몽양시-로 갈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  온조왕 때의 강역-(2)

온조왕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첨가 의견]

우리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한수(漢水)를 양자강 최대의 지류와 황하를 포괄해서 칭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한수(漢水)=양자강 지류인 한수(漢水)+황하(黃河)’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의 한수(漢水)는 황하를 뜻합니다.
따라서 한수(漢水) 동북(東北) 쪽이면, 저절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황하(黃河)’ 사이가 되는 것이지요.  

다.  온조왕 때의 강역-(3)

(**) 온조왕 38년(서기 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 天地

라.  근초고 왕때 고구리(高句麗)와의 전쟁

(**)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서울[都]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참고 의견]
매복(埋伏)이라는 것이 적(敵)의 영역 속에 들어가 하기에는 힘이 들고, 특히 배(船)가 많이 다니는 하천(河川)일 경우는 더욱더 그러한 것입니다.
이미 패수(浿水)를 백제가 관할하기 때문에, 이런 패수(浿水)가의 매복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강단(講壇)에서 이야기하듯 패수(浿水)가 대동강이라면, - 하하 - 백제가 남의 영역에서 그곳도 선박이 왔다갔다하는 곳에 매복해 있기는 힘들다고 봅니단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마.  아신왕 때 광개토태왕과의 전쟁

아신왕 4년(395) 봄 2월에 살별[星]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眞武)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軍)을 돌려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四年 春二月 星于西北 二十日而滅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 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勞軍士

[참고 의견]
여기에 등장하는 청목령(靑木嶺)의 청목(靑木)은 사철나무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철나무는 바로 고정차(苦丁茶)를 뜻하는 것으로 좌계는 봅니다.
양자강 최대 지류인 한수(漢水) 위에 태백산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이런 ‘고정차(苦丁茶) 나무’ 단지가 있었다는 가설을 품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좌계가 이곳에 차(茶)와 백제수도를 연관시켜 해석하는 연장선에서 “고구리(高句麗) 차(茶)가 고정차(苦丁茶)가 아닐까?”하는 상상력에서 취해진 가설(假說)입니다.
아무튼 아신왕은 이미 패수(浿水)에서 광개토태왕과의 싸움에서 졌는데, - 이 대목이 광개토태왕비에서 “왜가 낙랑계를 범하고...”하는 구절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아무튼 아신왕께서 권토중래(捲土重來)하였으나. 폭설(暴泄)로 태백산 구지(衢地)를 못 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  성왕(聖王)때 고구리와의 전쟁

성왕(聖王)은 이름이 명농(明)이고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무령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일컬어 성왕이라 하였다.
(**)성왕원년(523년)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
聖王 諱明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첨가 의견]

성왕(聖王)께서 보병과 기병(騎兵) 1만명을 거느리고 출발한 곳이 산동백제라고 추측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민 광개토 태왕때 패수(浿水)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즉 성왕은 기벌포로 빠져나가 황해(黃海)로 우회, - 왜냐하면 당시 고구리가 이미 황하 입구의 철옹성인 관미성(關彌城)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패수(浿水)로 들어가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  광개토태왕 때의 백제와의 전쟁

[참고] 지금부터 ‘고구려본기’를 정성일 선생께서 인용.

(**)광개토왕 4년(394년)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백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베었다. (**)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 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참고 의견]
광개토태왕께서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황하 입구의 관미성(關彌城)을 원년(元年)에 이미 점령을 한 후...백제로 하여금 패수(浿水)에 접근하는 것을 하남 위례성에서 분하(汾河)를 타고 올라와서 태원시(太原市)근처에서 다시 패수(浿水)로 ‘브이(V)’자로 물류(物流)를 운송하는 것만 허락하다가, 4년 후에 이 패수(浿水)까지를 점령하는 전략적 천재성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단.  

아.  평원왕 때 사냥기록

평원왕 13년(571년) 봄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패하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8월, 궁실을 중수하는 도중에 메뚜기 떼가 생기고 날씨가 가물어 공사를 중단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陳>朝貢. 秋七月, 王 於<浿河>之原, 五旬而返. 八月, 重修宮室, 蝗旱, 罷役.

자.  영양왕 때 수(隋)와의 전쟁
(**) 영양왕 23년6월(612년) (수나라)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

차.  보장왕때 당(唐)과의 전쟁

(**)보장왕20년(661년) 가을 8월, 소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7.  검토의 부탁을 드리며..

정훈 님.
선생께서는 우리측 사서(史書) 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史書)를 포괄해서 패수(浿水)의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서(史書)를 감안할 때, ‘패수(浿水)=청장하(淸漳河)+자아하(子牙河)’라는 좌계의 생각이 모순이 있는지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동학(同學)들께서도 보완(補完)하는 증빙 자료를 ‘댓글’이나 ‘답글’로 올려주길 바랍니다.  또한 문제가 있는 논리나 위치비정에서 잘못된 모순을 기탄(忌憚)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패수(浿水)의 문제는 ‘아시아 역사’를 규명함에 있어서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간청을 드립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5)


김성겸 (2007-05-30 22:46:07)  
결국 위의 기록에 나타나는 전쟁터는 대략 현 河北省의 안팎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후대에 唐의 장군 아무개가 七重河를 北에서 南쪽의 방향으로 건너서 新羅에 쳐들어가는데,
그 七重河도 현 黃河의 中河流지역 어느 부분에 일곱 개의 물줄기가 중첩되어 흐르던 그런 곳이겠지요?
좌계 (2007-05-31 14:04:07)  
/사천(史穿) 김성겸 님.

네. ‘청장하(淸漳河)-자아하(子牙河)’를 패수(浿水)로 보고, 하북성(河北省)을 좌하(左下)에서 오늘날 천진(天津)방향으로 우중상(右中上)으로 패수가 흐르기 때문에, 정확히 모든 전쟁기사는 오늘날 하북성(河北省)으로 보입니다.
관미성(關彌城) - 칠중하(七重河)는 황하(黃河) 입구에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황하(黃河)가 흘러나오다가 일곱 갈래로 흩어진 모양으로 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오늘날 지리학 용어로 ‘델타(delta: 삼각주(三角洲)’인 것이지요.
그런데, 삼국사기 광개토태왕 원년(元年) 조(條)에 보면, ‘관미성(關彌城) 기성사면초절(其城四面峭絶) 해수환요(海水環繞)’ - “관미성(關彌城)은 사면(四面)이 가파른 절벽이고, 해수(海水)가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을 보아서, 이 관미성(關彌城)이 독립되고 가파른 절벽으로 된 성(城)이고, 그 밑에 해수(海水)가 들어오되, 여섯 개의 델타(delta)가 있으므로, 결국은 칠중하(七重河)가 되는 모양새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미성(關彌城)이 들어선 ‘독립된 가파른 섬’ 밑에 과연 지리학적으로 볼 때, 여섯 개의 델타가 들어설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단 황하의 흐름이 수없이 방향을 꺽었는데, 삼국시절에는 그 방향이 거의 오늘날의 황하의 흐름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국기록에는 황하(黃河)와 엑스(X)자 모양으로 흐르는 제수(濟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차점(交叉點)이 대략 양산박(梁山泊) 혹은 거야택이라고 칭하는 곳으로 추정하는 것 같습니다.

좌계 의견으로는 관미성 밑의 ‘여섯개의 델타’와 관미성 사이로 이 제수(濟水)가 흘렀다고 추측합니다.

이런 가정을 할 때, 광개토태왕의 원년(元年)에 “일곱길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했다.”는 것과 관련해서 태왕께서는 “델타지역을 먼저 공격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관미성(關彌城) 자체도 험준해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이지만, 이 델타 지역의 칠중하(七重河)사이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매복(埋伏) 군사들이 들어서기 좋은 지형이니깐 말입니다.

따라서 태왕께서는 먼저 매복한 델타 지역을 섬멸한 후에, 관미성을 공격했다고 봅니다.

정확한 관미성(關彌城)의 위치는 제수(濟水)의 흐름을 사서(史書)나 수경주(水經注)를 비롯한 지리서(地理書)에서 찾고, 현장(現場)의 지리 조사를 배경으로 하면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김성겸 (2007-05-31 17:44:24)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좌계 (2007-06-04 12:05:01)  
/정훈 님의 패수(浿水)에 대한 의견

: 이 글은 패수(浿水)에 대한 ‘정훈 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좌계와 패수(浿水)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으나, 정훈 님께서 이 패수(浿水)에 대한 사학적 접근을 많이 해 오셨고, 또 존중한 의견이기 때문에 옮겼습니다.

쓰신 분 : 정훈 (2007-06-02 19:04:09, Hit : 282, Vote : 2)

제목 : 패수? 그리 어려운게 아닙니다.

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수경주(水經注) 권14
-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또 패수는 서한초기 浿水爲界 "동쪽 진번조선과 한漢 지간에 경계선이 설치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패수 검증

1),패수란 진번조선과 한 지간의 경계선이라면? 그 강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든다고 하였음으로 한반도의 동해이거나 한국의 서해인 발해에 드는 것입니다.

2)검증에서 지금의 황하는 4세기전까지 산동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산동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든다.
1}서한 때 위만(옛 연에서)은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서 진번조선에 귀하합니다.
2}그런데 진번조선왕 준準은 위만 에게 공탈당하고 좌우 궁인들만 대동하고 급히 동쪽 바다를 건너서 한의 군왕(마한)을 칭했다고 하였다.
3}위만은 옛 연(낙양의 동부)에서 동쪽으로 패수라는 강하나를 건너서 진번에 오고 바톤을 이어 받아 준왕은 진번조선에서 동쪽 바다를 건너서 마한에 망명하였다.
한반도 마한과 고대연(한의 낙양동부) 지간에는 우리의 서해 바다(발해)와 패수라는 강이 있다. 강과 바다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패수가 먼저있고 그다음 발해다. 그렇다면 패수라는 강은 지금의 서해 서쪽에 있는 것ㅇ다.

수경주가 말한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이 패수란 황하가 남행하는 강명(진번강명), 이거나 그 인근의 또다른 강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낙랑은 발해서안 서부지역이며 낙랑의 동쪽에 진번조선이 있는데 "패수는 발해 서안의 서부 낙랑의 남부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진번조선의 서계(서계의 서쪽은 중원)와 한漢의 중원의 동계를 이루며, 진번의 남계를 이루고 동쪽 발해로 든다는 사실을 가히 알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패수란 지금의 황하 하류와 같지는 않지만 유사 형태라는 것입니다.

질문에 답이 될 지

<‘댓글’을 주신분들의 ‘글’>

1. 玄濟 (2007-06-02 19:08:56)

정훈님.. 차분하게 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정훈 (2007-06-02 19:16:48)

위만은 고대 연(낙양동부)에서 탈출 동쪽의 강하나(패수)를 건너서 진번조선에 도달하고 진번조선왕 준準은 위만의 바톤을 받아(위만에 공탈당하고) 진번의 동쪽 바다(발해)를 건너서 한반도 마한(백제 고지)에 망명하였다. 패수란 지금의 황하 하류와 산동의 북부로 흐르는 강이다.



3. 좌계 (2007-06-02 19:32:27)

/정훈 님

감사합니다.
좌계는 이미 며칠 전에 ‘아래’와 같은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 이하 ‘아래’ -

<<< [re] [개인 공지] (정훈님) 패수(浿水)에 대한 의견, 모루(牟婁)및 고모루(古牟婁)와 관련

좌계의 글이 ‘네티즌 코너’의 ‘공지사항’에 옮겨진 줄 모르고, 몹시 당황했습니다.
남당(南堂) 유고(遺稿) 관련 글은 그곳에 전부 옮겨져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글은 패수(浿水)의 문제에 관한 ‘정훈님’께 좌계가 하는 질문이고,

또 여기에 대한 의견이 계신 많은 동학(東學)들이 계시기 때문에, 패수(浿水)에 관한 여러 의견을 그곳에서 ‘댓글’로 달아주시길 앙청(仰請)합니다.

따라서 위 제목과 똑같은 글에 ‘정훈 님’께서는 댓글로 의견을 달아주시기 부탁합니다. >>>


- ‘아래’ 끝 -

정훈님께서는 번거로우실런지 모르지만, ‘네티즌-코너’의 ‘남당(南堂)박창화’ 란(欄)의 좌계의 글을 읽으시고, 그곳에다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정보 소통이 한곳에 쌓여야 여러 동학(同學)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좌계 (2007-06-02 19:36:07)

/정훈 님
원래의 좌계의 부탁은 좌계의 추론(推論)에 하자(瑕疵)가 있으면, 지적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령 “낙랑군 누방현의 위치가 어디이다. 따라서 좌계의 논리는 문제가 있다.”는 등의 말씀입니다.
만약에 오늘 올리신 글 이외의 더 이상의 의견이 없으시면, 좌계는 ‘정훈 님’의 이 글 자체를 ‘네티즌 코너’의 ‘남당(南堂) 박창화’란(欄)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좌계 (2007-06-06 17:34:04)  
패수(浿水) 확인! - ‘송 나라 우적도 원본 및 복원도’에서


좌계가 ‘(정훈님) 패수(浿水)에 대한 의견, 모루(牟婁)및 고모루(古牟婁)와 관련’이란 글을 쓴 후에,

“혹시 고지도(古地圖)에 패수(浿水)가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싸이트(site) 좌측에 표기된 ‘고지도 모음’ 란(欄)에 들어가서 ‘송 나라 우적도 원본 및 복원도’라는 지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래 [2]를 클릭한 후, [36 송나라 우적도 원본 및 복원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송나라 우적도’를 보면, 오늘날 천진(天津)쪽으로 황하(黃河)가 흘러가는데, 이 황화 위에서 기수(祺水)가 거의 바닷가 부분에서 합수(合水)되는 지류(支流)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좌계가 예측한 대로 브이(V)자 모양으로 그것도 꺽이는 자리에 정확히 자(磁)란 명칭이 나오고, 그 밑에 패수(浿水)라고 적혀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좌계가 사서(史書)를 바탕으로 한 해석(解釋)이 틀리지 않음이 확인이 된 것입니다.
동학(同學)들 께서도 ‘송나라 우적도’에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좌계 (2007-06-07 17:29:46)  
위 글은 운영자이신 ‘송준희 선생’께서 올려주신 원본 크기를 보니 패수(浿水)로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항수<洹水>임이 밝혀졌습니다.
좌계 (2007-06-07 17:30:33)  
다음과 같이 ‘정훈 님’께서 패수(浿水)에 관한 문헌적 정보를 모아서 해석하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동학(同學)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쓰신 분 : 정훈 (2007-06-07 13:00:41, Hit : 144, Vote : 1)

제목 : 패수론 (敎)


패수론
패수에 대하여는 잡다한 대동강 패수설 등이 많습니다. 믿을만한 사료로서는

한서 낙랑군 조에 의하면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縣二十五:朝鮮,[二]邯,[三]浿水,出西 至增地入海 [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낙랑군 패수현 서쪽으로부터 증지현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든다. 패수는 낙랑군에서 발원한다는 사실은 정확하다고 봅니다.

한서 낙랑군조에 의하면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一]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縣二十五:朝鮮,[二]邯,[三]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
[四]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蟬,[五]遂成,增地,莽曰增土.帶方,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昭明,南部都尉治.鏤方,提奚,渾 彌,[六]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東,[七]不而,東部都尉治.蠶台,[八]華麗,邪頭昧,[九]前莫,夫租 [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패수는 낙랑군의 남부 증지현을 지나서 동쪽 발해로 든다,
패수는 낙랑의 남부에서 발원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중원의 수계의 전문지인 수경 원문에 의하면
수경주의 패수조에 의하면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渤)海.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水經注 卷十四浿水]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발원하여 낙랑의 임패현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동쪽 바다로 든다고 하고 또 낙랑 루방현을 지나 동쪽바다로 든다고 하였다. 패수는 낙랑의 패수현, 루방현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발해)로 든다는 기록으로서 가장 정확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사기에서 위 패수 사료의 뒷받침을 하는데
漢 興 , 為 其 遠 難 守 , 復 修 遼 東 故 塞 , 至 浿水 為 界
한나라가 서고 연의 장새는 진번조선에 점령당하고 철수하여 옛 요동(고대 연과 진번지간, 낙양동부) 고새를 수리하여 요새로 삼고 패수 경계선을 설치하였는데 이 최초 연요동이나 패수는 구연과 그동쪽 발해서안 남부 진번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패수는 낙랑 패수현에서 발원하여 루방현을 거쳐서 동쪽 발해 서안 남부 진번과 서쪽 한의 경계를 이루면서 동남쪽의 바다로 드는 것이다.
패수는 낙랑과 그동남쪽 지금의 하북성 남부를 지나는 강이라는 것이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검증
(眞番)朝鮮[一]王滿者,故燕人也.[二]自始全燕時[三]嘗略屬真番朝鮮,[五]為置吏,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 塞,至浿水為界,[六]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七]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八]稍役屬真番、朝鮮 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史記/列傳/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1),“自始全燕時[三]嘗略屬真番朝鮮”
연나라 전성기 연은 진번조선을 치고 장새를 쌓았다.

2),“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
중원의 한은 동쪽 진번과 패수를 경계선으로 삼았다.

3),“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上下鄣,[八]稍役屬真番朝鮮
위만은 천여 명을 이끌고 진번조선에 망명하였는데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탈출- 패수-를 건너서 진번조선의 상하장(鄣塞),에 정착하였다.
낙랑의 남부를 지나서 남쪽으로 흐르는 패수를 위만이 건넜음으로 낙양으로부터 진번조선은 동쪽이 되며, 산동의 인근 북쪽

고대 연의 위치만 확인하면 진번조선의 위치는 알게 된다.
고대 연과 한은 동쪽 진번조선과 패수를 경계선으로 삼았다.

패수라는 강은 낙랑의 남부를 지나고 동남쪽으로 흐르는 동안 연,한의 동쪽 경계선이며, 진번조선의 서쪽경계선임으로 이를 만족 시킬 패수의 위치로서는 낙양 동부(연), 산동, 산동 근북방 진번조선 3꼭지 점이 서로 만나는 지금 산동의 인근 서쪽으로 보아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연나라 위치에 관해서는 스스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공의 잡다한 지도에 속아서는 역사를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주의할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