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정정(訂定) :고구리(高句麗)와 부여(夫餘)의 ‘피스-메이커(peace-maker)’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29
이미 해석을 올리신 글 - 에本紀新編列傳(p54) - 갈사태후-에 대해서, 좌계의 솔직한 견해(見解)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문(原文)에 번호를 붙여서 하나씩 뜯어가면서, 음미함이 필요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 갈사왕(曷思王)과 갈사태후(曷思太后)는 고구리 초기 역사에 부여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1) 曷思太后曷思王女也.
2) 柳花生金蛙子曷思王解素(?)明王在扶余時曷思王庇護之及南來承嗣.
3) 帶素立數窘明王,
4) 曷思王諫止之且又, 以曷思太后送之作親.
5) 戊申生再思後又生公主五人而明王崩欲殉之,
6) 松太后止之曰汝若殉之兩國不睦乃使大武神王復娶之而生好童太子及公主五人而卄四年丙申崩7) 春秋七十七國祖立追尊爲曷思宮神太后.

각 번호별로 ‘정성일 선생’의 해석을 그대로 옮기되, 좌계가 생각하는 견해(見解)를 보완해서 올리는 식으로 해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曷思太后曷思王女也.
: 갈사태후는 갈사왕의 딸이다.

2) 柳花生金蛙子曷思王解素(?)明王在扶余時曷思王庇護之及南來承嗣.

보완(補完) 해석 :
“유화와 금와왕 사이에 태어난 갈사왕 해소는 (유리)명왕이 부여에 있을 때 갈사왕이 비호했을뿐만 아니라, (유리명왕)이 남쪽으로 와서 후계자를 승계하도록 (영향을) 미치었다.(=급(及)”로 봅니다.

보완(補完) 이유(理由) :

즉 남하(南下)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유리명왕이고, 이처럼 무사(無事)히 남하(南下)하고, 또 고구리(高句麗) 초기에 비류-온조를 제치고 유리-명왕이 고주몽-동명성왕을 이어서 계승하도록 도움을 미치게 한 것이지요.  이는 결국 갈사왕 ‘해소’가 철저한 유리명왕의 후원자(後援者)임이 들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후원자로써의 영향력은 바로 갈사왕(曷思王)자신이 유화(柳花)와 금와왕 사이에서 난 사람이고,  즉 고주몽과는 동모제(同母弟)인 특수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3) 帶素立數窘明王,
이 문장은 ‘대소립 삭군명왕(帶素立數窘明王)’으로 읽어야 한다고 좌계는 봅니다.
삭(數)은 ‘자주’라는 뜻입니다.  군(窘)은 “군색(窘塞)하게 하다.”, “괴롭히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보완(補完) 해석)
대소(帶素)가 ‘부여의 왕’으로 세워지자,  ‘유리명왕’을 수시(隨時)로 자주 괴롭혔다.  

4) 曷思王諫止之且又, 以曷思太后送之作親.

보완(補完)해석
: 갈사왕(曷思王)이 대소(帶素)에게 간(諫)하여 ‘유리명왕을 괴롭히는 것’을 멈추게 했으며, 또한 ‘자주’ 갈사태후(曷思太后)를 보내서 ‘부여’와 ‘고구리’를 친(親)하게 하였다.  

보완(補完)이유 :

‘정성일 선생’께서는 “갈사왕이 간언하기를 멈추었는데 다시 용서하였다. 이런 까닭에 갈사태후를 보내어 다시 친하여졌다.”로 해석하였지만, 차(且)는 영어의 and의 개념이고, 우(又)는 ‘또’, ‘자주’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유화(柳花)와 금와(金蛙)의 소생인 갈사왕(曷思王)은 이러한 특수관계를 활용해서 ‘고구리’와 ‘부여’의 피스-메이커(peace-maker)역할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5) 戊申生再思後又生公主五人而明王崩欲殉之,
: (갈사태후(曷思太后)는)  무신(戊申)년 재사(再思)를 낳은 후에 공주를 5명 낳았는데, (유리)명왕이 돌아가시자 따라 죽으려고 했다
- 이는 ‘정성일 선생’의 해석이 완벽합니다. 중요한 것은 ‘따라 죽으려고 한 사람’이 갈사태후(曷思太后)라는 점입니다.  

6) 松太后止之曰汝若殉之兩國不睦乃使大武神王復娶之而生好童太子及公主五人而卄四年丙申崩

보완(補完) 해석 :

송태후(宋太后)가 (죽으려는 갈사태후(曷思太后)를 )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순사(殉死 -따라서 죽는것)을 하면, 양국(兩國) 즉 고구리와 부여가 불목(不睦)하게한다.”하고, 이 갈사태후(曷思太后)를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다시 시집가게 해서(=使大武神王復娶之)’ 호동(好童) 태자와 공주5인을 낳기에 이르렀고, 24년 병신(丙申)에 돌아가셨다.

보완(補完) 이유 :
즉 갈사태후(曷思太后)가 바로 태자인 호동(好童)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또 나중에 ‘신선명선제’가 되는 재사(再思)는 이 호동(好童)의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유리명왕 사이에 낳은 재사(再思)는 고구리-황제가 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7) 春秋七十七國祖立追尊爲曷思宮神太后.

보완(補完) 해석(解釋)
: (갈사태후(曷思太后)가 돌아가실때의) 춘추(春秋)가 77이었으며, 국조묘(國朝廟)를 건립(建立)할 때, 갈사궁(曷思宮) 신태후(神太后)로 추존(追尊)되었다.

보완(補完) 이유
: 사서(史書)에서 “누구를 무엇으로 임명하였다.”를 쓸 때에는 “명(命)+누구+위(爲)+직위(職位)” 혹은 “누구+위(爲)+직위(職位)”의 문장구조로써 흔히들 씁니다.
그런데, 국조묘(國朝廟)를 세울 때에는 ‘누구’가 숨은 목적어로 이미 나와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추존(追尊) 위(爲)’가 나오고 그 다음에 직위(職位)에 ‘갈사궁(曷思宮)의 신태후(神太后)’로 모셔진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즉 갈사태후(曷思太后)는 고구리, 부여 양쪽에서 국조묘(國朝廟)에 모실 정도로 극도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고구리와 부여 사이에 ‘피스-메이커’와 유리명왕(瑠璃明王)의 후원자인 갈사왕(曷思王)과 갈사태후(曷思太后)가 있음을 분명하게 거론(擧論)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입니다.  

귀중한 사료(史料)를 올려주신 ‘정성일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傳)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박정길 (2007-05-11 21:39:42)  
좌계선생님 저 박정길입니다.

제 이메일 주소를 남김니다

lamusu@naver.com

연락 주셔요..
좌계 (2007-05-12 19:10:10)  
정정(訂定)합니다.
본문(本文) 가운데, ‘5) 戊申生再思後又生公主五人而明王崩欲殉之’을 번역함에 있어,
“무신(A.D.48)년 재사(신선명선제 : 태조대왕의 부친)를 낳은 후에 공주를 5명을 낳았는데...”를 “무신(戊申)년 재사(再思)를 낳은 후에 공주를 5명 낳았는데”로 고칩니다.

좌계가 남당(南堂)선생의 ‘대무신대제기’를 읽어보니 호동(好童)이 동복(同腹) 형(兄)이고, 나중에 태조대왕의 부친이 되는 재사(再思) 즉 ‘신명선제’가 오히려 동복(同腹) 동생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따라서 갈사태후가 낳은 재사(再思)는 결국 2인이며, 유리명왕 사이에서 낳은 재사(再思)는 고구리 황제가 못되고, 대무신왕 사이에서 낳은 재사(再思) 즉 호동(好童)의 동복 동생이 황제가됨을 확인하였습니다.

유리명왕 사이에 낳은 재사(再思)는 고구리-황제가 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무신대제기’에 의하면, 호동 왕자를 낳기전에 당시 ‘갈사왕’이었던 산해(山海)가 그 딸을 바친 것으로 나오고, 1년 후, 호동 왕자를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죽은 후에, 순사(殉死)하려고 해서 송 태후의 말리는 말에, 그만두고, 대무신왕의 부인이 되지만, 이 사이에 순사(殉死)에 해당하는 소도(蘇塗)에 들어가는 ‘의식(儀式)적인 죽음’은 한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갈사태후의 삶과 ‘고구리의 소도(蘇塗)와 선(仙) 문화’에 대한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좌계 (2007-05-12 19:31:58)  
****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 ****

‘정성일 선생’께서 소개한 ‘本紀新編列傳(p54) - 갈사태후’에는
5) 戊申生再思後又生公主五人而明王崩欲殉之’로써 무신(戊申)년에 재사를 낳고, 유리명왕이 죽자 순사(殉死)할려고 했는데...

‘김성겸 선생’이 소개한 ‘高句麗史略卷之一/第三世<大武神大帝>紀’에는
1) 六年癸巳, 正月, <思曷>后生子<好童>.
2) 二十一年戊申, 四月, <曷思>后生<再思>태자.로 각기 호동(好童)과 재사(再思)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本紀新編列에는 동일한 갈사태후인데, 재사(再思)를 똑같은 무신(戊申)년에 낳고, 이는 60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더 신기한 것은
이런 시차(時差) 이외에 갈사-태후가 낳은 자식은 항시 1남 5년의 룰(rule)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5) 戊申生再思後又生公主五人而明王崩欲殉之,
: (갈사태후(曷思太后)는) 무신(戊申)년 재사(再思)를 낳은 후에 공주를 5명 낳았는데, (유리)명왕이 돌아가시자 따라 죽으려고 했다
에서 1남5녀이고

6) 大武神王復娶之而生好童太子及公主五人
나중에 대무신왕과 결혼해서 먼저 호동(好童), 그 다음에 재사(再思)를 낳으나, 결국 호동이 자살하게 되므로, 재사(再思)와 5녀가 되어 역시 1남 5녀입니다.

왜 이런 ‘동일한 1남 5녀’이야기가 있는지,
또 ‘유리왕’과 ‘대무신왕’ - 부자 관계임 - 두 왕에 대한 황후(皇后)로써 꼭 1남 5녀를 낳은자로써 자리매김되는지?
순사(殉死)를 대신한 ‘소도(蘇塗)의 의식적인 죽음’ 등등에 대해, 무척 신비한 어떤 제도를 느끼게 하는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