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이 망명할때 건넌 강은 패수가 아니며 황하(黃河)의 지류인 추수(溴水)라는 곳이다
즉, 추수溴水란 제원현濟源縣에 있는 강이라는 것입니다. 위 첨부한 지도를 보시면 추수溴水가 보입니다. 이 지도는 중국역사지리집의 명나라때 지도인데... 서안(西安)의 동쪽으로 추수溴水가 보입니다. 그리고 좀더 동쪽으로 가면 기수(淇水)가 보이고 좀더 동쪽으로 가면 패현(沛縣)이 보이는데 이곳에 흐르는 강은 패수(沛水)일 것입니다. 본 지도에서는 패현 옆에 봉현(丰縣)이 있어서 봉수(丰水)라고 했으나 패수(沛水)라고도 불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하의 아래쪽에 서화(西華)가 있는데 이 곳은 바로 기자(箕子)가 가 있으면서 인사도 안받았다는 곳이라고 환단고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서화의 북쪽은 조선의 땅이며 서화는 지나의 땅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위치를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하여 위 첨부한 지도를 보세요.
추 수(溴水), 기수(淇水), 패현(沛縣) 모두 태행산맥 남단으로 기자의 망명으로 인하여 그 영토가 넓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곳입니다. 대부분 이해하기를 기자가 그냥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지만, 기자는 은나라 제후입니다. 따라서 그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면 그 땅도 같이 조선에 떠다가 바쳤을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회남자에 보입니다.
淮南鸿烈集解 권12
昔武王伐紂, 破之牧野, 乃封比干之墓, 表商容之閭, 柴箕子之門. (紂死, 箕子亡之朝鮮, 舊居空, 故柴護之也.)
옛날에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고 그를 목야에서 깨트렸다. 이에 비간을 그 묘지에 봉하고, 상용을 그 이문에 표했으며, 기자를 그 문에서 지키게 했다(주왕이 죽자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했다. 오래도록 공지에 살았는데 옛 시호이다.)
기 자에게 문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석에 기자는 공지(空地)에서 살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나의 가장 동북쪽 요새 밖에 조선과 지나 사이의 공지를 말하는 것일겁니다. 이를 아래 주석에서 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淮南子集釋 권 12
昔武王伐紂, 破之牧野, 乃封比干之墓, 表商容之閭, 柴箕子之門. (紂死, 箕子亡之朝鮮, 舊居空, 故柴護之也. 莊逵吉云, 柴護之者, 設軍士護之也. 柴卽俗塞. 曾國藩云, 後漢書楊震傳, 柴門謝客, 三國志, 以萬兵柴道, 與比柴字義同, 卽塞也.)
장규길이 말하기를 시호라는 것은 군사들을 보호하는 것이니 곧 세속에서 말하는 성채(城砦)이다. 증국번은 말하기를 후한서 양진전에서 시문은 손님을 맞는 곳이라 하였고 삼국지에서 말하기를 모든 병사로 길을 보호하는것이라 하였으니, 시(柴)자와 같은 뜻을 갖는 것이므로 시(柴)란 즉 새(塞)이다라고 하였다.
즉, 기자는 그냥 망명한 것이 아니라 은나라와 조선 사이의 경계에 있는 성채 밖 공지를 가지고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기자가 망명한 후에 이곳의 땅은 조선의 땅이 되었으며 그 경계는 저 지도에 보이듯이 추수(溴水), 기수(淇水), 패현(沛縣) 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만조선도 두번째 지도에 표시한 영토를 기자조선으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자가 망명 한 뒤 살았던 곳은 어디로 추정되는가?
회 남자의 기록대로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였지만 그 몸둥이가 조선으로 간 것이 아니라 기자가 살던 땅의 동북변경지대에 살면서 조선에 망명한 것입니다. 즉, 기자가 살던 땅은 기자가 은나라로부터 받았던 땅의 변경지대라는 것이죠. 그러면 기자가 어디에 살았는지 알면 그 동북 변경이 바로 고조선 땅 중에 기자의 봉국이 되는 것입니다.論語類考卷二
元按箕國亦子姓子爵其地本古箕伯之國商以封箕子耳姓纂云箕在商之畿内春秋僖公三十三年秋晉人敗狄於箕杜元凱謂太原陽邑有箕城在今太原府大谷縣東三十五里此又非商之畿内國矣遼東榆社東南三十里有古箕城或以箕子封朝鮮之後乃有此名而瑯琊之箕國則漢宣帝封城陽侯荒之子文為箕侯非商時箕子之國也
기자가 살던 곳이 하두 많아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있는데 눈에 제가 주장하는 것과 살던 곳이 비슷한 곳이 나옵니다.
春秋僖公三十三年秋晉人敗狄於箕杜元凱謂太原陽邑有箕城在今太原府大谷縣東三十五里此
춘추 희공 33년 가을에 진인晉人이 고조선사람(狄)을 기두(箕杜)에서 깨뜨렸다고 했는데 이곳은 태원太原 양읍陽邑인데 기성箕城이 현재 태원부 태곡현 동 35리에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즉, 제가 첨부한 두번째 지도에 태원의 35리 동남쪽에 바로 기자가 살던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북쪽은 고조선 봉국인 기자조선의 땅이고 이 땅으로 위만이 망명할때 건넌 강은 평양성에 흐르는 패수(浿水)이어서는 안되고 추수(溴水), 기수(淇水), 패현(沛縣)에 흐르는 패수(沛水) 이어야 할 것입니다.
위만조선 멸망후 한나라 군현과의 관계
위만이 이와 같이 추수(溴水)를 건넌 후 한나라의 술책에 망하게 되며 위만조선은 5명의 제후가 나누어 갖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따라 5명의 제후가 나누어 갖은 땅을 찾아봅시다. 그 땅은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위 지도를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위만이 건넜다던 추수(溴水)의 동북쪽과 기자가 살았다던 태원의 동쪽 땅이 바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5명의 제후가 나누어 갖은 땅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이는 위만이 건넌 강은 추수(溴水)이고 기자는 태원의 동쪽 땅을 고조선에 바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자조선은 난하유역도 아니고, 평양유역도 아닌, 태행산맥의 동쪽 그리고 추수(溴水)의 동북쪽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