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 지리지 남경도
남경석진부 (南京析津府)
남경석진부는 원래 옛날 기주(冀州)의 땅이다. 고양(髙陽)씨는 유릉(幽陵)이라고 하였고 도당(陶唐)씨는 유도(幽都)라고 하였으며 우순(虞舜)씨는 이를 쪼개어 유주(幽州)라고 하였다. 상국(商)에서는 유주를 기주에 병합하였고 주국(周)에서는 병주(并)을 나누어 유주로 하였다. 직방(職方)에서 말하기를 동북쪽은 유주인데 진산(鎭山) 은 의무려(醫巫閭)이고, 덤불진 늪[澤藪]으로는 혜양(豯養)이 있으며, 큰하천[川]으로는 하수(河)와 제수(泲)가 있고, 저수지[浸]로는 치(菑)와 시(時)가 있다. 그곳에서는 생선과 소금으로 이익을 얻으며 그곳에서 기르는 가축으로는 말과 소와 돼지가 있고 그곳에서 자라는 곡식으로는 기장과 쌀이 있다. 무왕(武王)은 태보(太保)소공석(奭)을 연(燕)에 봉하였다. 진(秦)은 그 땅을 어양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5개 군으로 삼았다. 한(漢)에서는 연국(燕國)으로 삼았는데 대대로 장다(臧茶)와 로관(盧綰)과 류건(劉建)과 류택(劉澤)과 류단(劉旦)을 봉하였으며 일찍이 탁군(涿郡)과 광양국(廣陽國)을 설치하였었다. 후한(後漢)에서는 광평국(廣平國)과 광양군(廣陽郡)을 두었었는데 영역을 상곡(上谷)에 합쳤다가 되돌이어서 유주(幽州)에 설치하였었다. 후주(後周, 951~960) 에서는 연(燕)과 범양군(范陽郡)을 설치하였었고 수(隋)에서는 유주총관(幽州總管)으로 하였었다. 당(唐)에서는 대도독부(大都督府)을 두었다가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로 고치었다. 안록산(安禄山) 사사명(史思明) 이회선(李懐仙) 주도(朱滔) 류평(劉怦) 류제(劉濟) 등이 서로 계승하여 할거하였었다. 류총(劉總)은 당(唐)으로 귀부하였다. 장중무(張仲武)와 장윤중(張允仲)에 이르러서는 以正得民하였었다. 류인공(劉仁恭) 의 아버지와 아들이 간사하게 다투니 드디어 5대의 시대가 되었다. 후당(唐)으로부터 후진(晉)에 이르러 고조(髙祖, 석경당)는 요국(遼)이 나라를 세우는데 돕는 노고가 있음으로 인하여 유주(幽州) 등 16개의 주를 분할하여 바치었다. 태종(太宗)은 이를 승격시켜 남경으로 삼았고 또한 연경(燕京)이라고 하였다.
南京析津府. 本古冀州之地. 髙陽氏謂之幽陵, 陶唐曰幽都, 有虞析為幽州. 商併幽於冀. 周分并為幽. 職方, 東北幽州, 山鎮醫巫閭,
澤藪豯養, 川河泲, 浸菑時. 其利 魚 鹽, 其畜馬牛豕, 其榖黍稷稻. 武王封太保奭于燕. 秦以其地為 漁陽 上谷 右北平 遼西 遼東
五郡. 漢為燕國, 歴封 臧茶 盧綰 劉建 劉澤 劉旦, 常置涿郡廣陽國. 後漢為廣平國廣陽郡., 或合于上谷, 復置幽州.
後周置燕及范陽郡, 隋為幽州總管. 唐置大都督府, 改范陽節度使. 安禄山 史思明 李懐仙 朱滔 劉怦 劉濟 相繼割據. 劉總歸唐. 至
張仲武 張允仲, 以正得民. 劉仁恭父子僣爭, 遂入五代. 自唐而晉, 髙祖以遼有援立之勞, 割幽州等十六州以獻. 太宗升為南京, 又曰燕京.
성은 방 36리이고 높이는 3 장(丈)이며 문의 너비[衡廣]는 1장 5척이다. 적루(敵樓)와 전로(戰櫓)를 갖추었다. 8개의 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동쪽 문은 안동(安東)과 영춘(迎春)이라 하고, 남쪽 문은 개양(開陽)과 단봉(丹鳯)이라고 하며, 서쪽 문은 현서(顯西)와 청진(清晉)이라고 하고, 북쪽 문은 통천(通天)과 공진(拱辰)이라고 한다. 대내(大内)가 서남쪽 귀퉁이에 있다. 황성(皇城)의 안쪽에는 경종(景宗)과 성종(聖宗)의 어용전(御容殿)이 2개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선화(宣和)라 하고 남쪽에 있는 것은 대내(大内)라고 한다. 내문(内門)을 선교(宣教)라고 하였지만 원화(元和)로 고쳤으며, 외문(外門) 3개는 남단(南端)과 좌액(左掖)과 우액(右掖)이라고한다. 좌액(左掖)은 만춘(萬春)이라고 고쳤고, 우액(右掖)은 천추(千秋)라고 고쳤다. 문에는 루각(樓閣)이 있고, 구장(毬場)이 그 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영평관(永平館)이라고 한다. 황성(皇城)의 서쪽 문을 현서(顯西)라고 하는데 설치한 후로 열지 않았다. (황성의) 북쪽 문은 자북(子北)이라고 한다. 서성(西城)의 산꼭대기[巔]에는 량전(涼殿)이 있고 동북쪽 귀퉁이에는 연각루(燕角樓)가 있다. 방시(坊市)와 해사(廨舍)와 사관(寺觀) 등은 모두 책에 기록하지 않는다[蓋不勝書]. 그 밖의 것으로는 거용관(居庸)과 송정관(松亭)과 유림관(榆林)이 있고, 고북구(古北口)가 있으며 상건하(桑乾河)와 고량하(髙梁河)와 석자하(石子河)와 대안산(大安山)과 연산(燕山)이 있다. (연산의)의 한 복판에는 옥으로 된 언덕[瑶嶼]이 있다. 부(府)는 유도(幽都)라 하고, 군(軍)은 노룡(盧龍)이라고 하는데 개태(開泰) 원년에 군액(軍額)을 감소시켰다. 관할하는 주가 6개이고 현은 11개이다.
城方三十六里, 崇三丈, 衡廣一丈五尺. 敵樓 戰櫓具. 八門.., 東曰 安東 迎春, 南曰 開陽 丹鳯, 西曰 顯西 清晉, 北曰 通天
拱辰. 大内在西南隅. 皇城内有景宗聖宗御容殿二, 東曰宣和, 南曰大内. 内門曰宣教, 改元和., 外三門曰 南端 左掖 右掖.
左掖改萬春, 右掖改千秋. 門有樓閣, 毬場在其南, 東為永平館. 皇城西門曰顯西, 設而不開., 北曰子北. 西城巔有涼殿,
東北隅有燕角樓. 坊市 廨舍 寺觀 蓋不勝書. 其外, 有 居庸 松亭 榆林 之關, 古北之口, 桑乾河 髙梁河 石子河 大安山 燕山 —
中有瑶嶼. 府曰幽都, 軍號盧龍, 開泰元年落軍額. 統州六縣十一
1) 석진현. 원래 진국(晉)의 계현(薊縣)인데 계북현(薊北縣)으로 고쳤다가 개태(開泰)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연(燕)이 별자리로 석목(析木)의 진(津)에 해당하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가구수는 2,0000이다.
析津縣. 本晉薊縣, 改薊北縣, 開泰元年更今名. 以燕分野旅寅為析木之津, 故名. 户二萬.
2) 완평현. 본래 진국(晉)의 유도현(幽都縣)이다, 개태(開泰)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고 가구수는 2,2000이다.
宛平縣. 本晉幽都縣, 開泰元年改今名. 户二萬二千.
3) 창평현. 본래 한국(漢)의 군도현이며, 후한국(後漢)에서는 광양군에 속했으며, 진국(晉)에서는 연국에 속하였고, 북위(元魏)에서
동연군(東燕郡)과 창평현(昌平縣)을 설치하였다. 군을 폐하고 현을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남경에서 북쪽으로 90리에 있으며
가구수는 7000이다.
昌平縣. 本漢軍都縣, 後漢屬廣陽郡, 晉屬燕國, 元魏置東燕郡 及昌平縣. 郡廢, 縣隸幽州. 在京北九十里. 户七千.
4) 양향현(良鄉縣). 연국(燕)에서는 중도현(中都縣)이라고 하였고, 한국(漢)은 고쳐 량향현(良鄉縣)으로 하였는데 옛날의
탁군(涿郡)에 속한다. 북제(北齊) 천보(天保) 7년에 폐하여 계현(薊縣)으로 편입하였으며 무평(武平) 6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당(唐) 성력(聖厯) 원년에 고쳐 고절진(固節鎮)이라고 하였고, 신룡(神龍) 원년에 다시 량향현(良鄉縣)이라고 하였다.
류수광(劉守光)이 옮겨 이곳에서 다스렸다. 남경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가구수는 7000이다.
良鄉縣. 燕為中都縣, 漢改良鄉縣, 舊屬涿郡, 北齊天保七年省入薊縣, 武平六年復置. 唐聖厯元年改固節鎮, 神龍元年復為良鄉縣, 劉守光徙治此. 在京南六十里. 户七千.
5) 로현(潞縣). 원래 한국(漢)의 옛 현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했었다. 당국(唐) 무덕(武徳)2년에 원주(元州)를 설치하였고,
정관(貞觀) 원년에 주를 폐하였다가 다시 현으로 삼았다. 로수(潞水)가 있다. 남경에서 동쪽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潞縣. 本漢舊縣, 屬漁陽郡. 唐武徳二年置元州, 貞觀元年州廢, 復為縣. 有潞水. 在京東六十里. 户三千.
6) 안차현(安次縣). 원래 한국(漢)의 옛 현으로 어양군에 속하였었다. 당국(唐) 무덕(武徳)4년에 동남쪽 50리의
석량성(石梁城)으로 옮겼다가 정관(貞觀) 8년에 또다시 지금의 현의 서쪽 50리에 있는 상도성(常道城)으로 옮겼으며 개원(開元)
23년에 또다시 경취교(耿就橋) 행시(行市)의 남쪽으로 옮겼다. 남경에서 남쪽으로 120리에 있다. 가구스는 1,2000이다.
安次縣. 本漢舊縣, 屬漁陽郡. 唐武徳四年徙至東南五十里石梁城, 貞觀八年又徙今縣西五里常道城, 開元二十三年又徙耿就橋行市南. 在京南一百二十里. 户一萬二千.
7) 영청현(永清縣). 본래 한국(漢) 익창현(益昌縣)이다. 수국(隋)에서는 통택현(通澤縣)을 설치하였고 당국(唐)에서는
무륭현(武隆縣)을 설치하였다. 회창(會昌)으로 고쳤다가 천보(天寳) 초기에 영청현(永清縣)이라고 하였다. 남경에서 남쪽으로
150리 떨어져 있고 가구수는 5000이다.
永清縣. 本漢益昌縣, 隋置通澤縣, 唐置武隆縣, 改會昌, 天寳初為永清縣. 在京南一百五十里. 户五千.
8) 무청현(武清縣). 전한국(前漢) 옹노현(雍奴縣)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했었다. 수경주에서 기록하기를 옹노(雍奴)라는 것은
수택(藪澤)의 이름인데 사면에 물이 있으므로 옹(雍)이라 하고 흐르지 않기에 노(奴)라고 하였다 한다. 당국(唐) 천보(天寳)
초기에 무청(武清)으로 고쳤다. 남경에서 동남쪽으로 150리에 있다. 가구수는 1,0000이다.
武清縣. 前漢雍奴縣, 屬漁陽郡. 水經.., 雍奴者, 藪澤之名, 四面有水曰雍, 不流曰奴. 唐天寳初改武清. 在京東南一百五十里. 户一萬.
9) 향하현(香河縣). 원래 무청손촌(武清孫村)이다. 요국(遼)에서 신창(新倉)에 교염원(榷鹽院)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아 살게
하였다가 무청현(武清)과 향하현(香河)과 로현(潞)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남경에서 동남쪽으로 120리 떨어져 있다. 가구수는
7000이다.
香河縣. 本武清孫村. 遼於新倉置榷鹽院, 居民聚集, 因分 武清 香河 潞 三縣户置. 在京東南一百二十里. 户七千.
10) 옥하현(玉河縣). 원래 천산(泉山)의 땅이다. 류인공(劉仁恭)이 대안산(大安山)에서 비로소 궁궐을 형상을 바라보고 방사(方士)
왕약눌(王若訥)에게 師煉丹羽化之術하여, 계현(薊縣)을 나누어 설치하고 옥하현(之)에 공급하였다. 남경에서 서쪽으로 40리에 있고
가구수는 1000이다.
玉河縣. 本泉山地. 劉仁恭於大安山創宫觀, 師煉丹羽化之術于方士王若訥, 因割薊縣分置, 以供給之. 在京西四十里. 户一千.
11) 곽음현(漷隂縣). 원래 한국(漢)의 천산(泉山)의 곽촌진(霍村鎮)이다. 요국(遼)은 매해 늦은 봄에 연방정(延芳淀)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백성들이 성읍을 이루고 성을 쌓았으므로 곽음진(漷隂鎮)이라 하다가 후에 현으로 고쳤다. 남경에서 동남쪽으로 90리에
있다. 연방정(延芳淀)은 방 100리이다. 봄에는 거위와 오리가 모여들고 여름과 가을에는 마름과 가시연[菱芡]이 많다.
국주(國主)들은 봄에 사냥하고, 위사(衛士)들은 모두 검푸른 옷을 입고 각기 련추(連鎚)와 매의 밥과 거위를 찌를 송곳을 지니고
줄을 서는데 서로 57보를 떨어진다. 상풍(上風)이 북을 치니 놀란 거위가 수면으로 조금 올라온다. 국주(國主)가 친히 해동의
푸른 송골매를 풀어 사냥한다. 거위가 떨어져 송골매를 두려워 이기지 못하니 줄을 선 자들은 송곳으로 거위를 찔러 그 뇌를 취하여
송골매에게 준다. 거위의 머리를 얻는 자는 예법에 따라 은과 비단을 상으로 준다. 국주(國主)와 황족(皇族)과 군신(郡臣)들은
각기 그들의 땅이 있다. 가구수는 5000이다.
漷隂縣. 本漢泉山之霍村鎮. 遼每季春, 弋獵於延芳淀, 居民成邑, 就城故漷隂鎮, 後改為縣. 在縣東南九十里. 延芳淀方數百里, 春時鵝鶩所聚, 夏秋多菱芡. 國主春獵, 衛士皆衣墨緑, 各持連鎚 鷹食 刺鵝錐, 列水次, 相去五七歩. 上風擊皷, 驚鵞稍離水面. 國主親放海東青鶻擒之. 鵞墜, 恐鶻力不勝, 在列者以佩錐刺鵞, 急取其腦飼鶻. 得頭鵞者, 例賞銀絹. 國主 皇族 郡臣 各有分地. 户五千.
宋 王曽 上契丹事曰.., 自雄州白溝驛渡河四十里至新城縣, 古督亢亭之地. 又七十里至涿州. 北渡范水 劉李河 六十里至良鄉縣. 渡盧溝河六十里至幽州, 號燕京. 子城就羅郭西南為之. 正南曰啟夏門, 内有元和殿, 東門曰宣和. 城中坊閈皆有樓. 有閔忠寺, 本唐太宗為征遼陣亡將士所造., 又有開泰寺, 魏王耶律漢寧造. 皆遣朝使遊觀. 南門外有裕悦王廨, 為宴集之所. 門外永平館, 舊名碣石館, 請和後易之. 南即桑乾河.
송(宋) 왕증(王曽)의 상거란사(上契丹事)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웅주(雄州) 백구역(白溝驛)으로부터 강을 건너는 40리 길을 가면 신성현(新城縣)에 이르는데 옛날 독항정(督亢亭)의 땅이다. 또한 70리를 가면 탁주(涿州)에 이른다. 북쪽으로 범수(范水)와 류리하(劉李河)를 건너는 60리의 길을 가면 량향현(良鄉縣)에 이른다. 로구하(盧溝河)를 건너는 60리의 길을 가면 유주(幽州)에 이르는데 연경(燕京)이라고 부른다. 자성(子城)은 나성(羅郭)의 서남쪽까지 뻗어나갔다. 정남쪽은 계하문(啟夏門)이라고 하며 안쪽에는 원화전(元和殿)이 있고 동쪽 문은 선화(宣和)라고 한다. 성 안의 동네로 들어가는 문에는 모두 누각이 있다. 민충사(閔忠寺)가 있는데 원래 당국(唐) 태종(太宗)이 요(遼)를 정벌하다 죽은 자를 위하며 만든 것이다. 또한 개태사(開泰寺)가 있는데 위왕(魏王) 야률한녕(耶律漢寧)이 지은 것이다. 모두 조공하러 보내진 사신들이 놀던 곳이다. 남쪽 문 밖에는 유열왕해(裕悦王廨, 혹은 우월왕해于越王廨)가 있는데 잔치를 여는 곳이다. 문 밖에는 영평관(永平館)이 있는데 옛날 이름은 갈석관(碣石館)이며 화친을 청한 후에 바꾸었다. 남쪽은 즉 상건하(桑乾河)이다.
12) 순주(順州), 귀화군(歸化軍), 中, 刺史. 진국(秦)에서는 상곡군(上谷)이었고, 한국(漢)에서는 범양(范陽)이었으며, 북제(北齊)에서는 귀덕군(歸徳郡) 지경이었다. 수국(隋) 개황(開皇) 년간에 속말말갈이 고구려와 더불어 싸워 이기지 못하자 궐계부장(厥稽部長) 돌지계(突地稽)는 8부와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와서 부여성 서북으로부터 부락을 들어 내부하니 순주(順州)를 설치하고 살게하였다. 당국(唐) 무덕(武徳) 초기에 연주(燕州)로 고쳤고 회창(會昌) 년간에 귀순주(歸順州)로 고쳤으며 당국(唐) 말기에는 또한 순주(順州)라고 하였다. 온유하(温榆河)와 백수하(白遂河)가 있다. 조왕산(曹王山)이 있는데 조조(曺操)가 항상 이곳에 말과 군대를 머물게 하였다. 서곡산(黍谷山)이 있는데, 추연(鄒衍)이 피리를 불던 곳이다. 남쪽은 북제(齊)의 장성이 있다. 성의 동북쪽에는 화림(華林)과 천주(天柱) 등 2개의 별장(莊)이 있다. 요국(遼)에서 량전(涼殿)을 세웠는데 봄에는 꽃이 피며 여름에는 서늘하다. 처음에 군(軍)을 귀녕(歸寧)이라고 하였다가 후에 고쳤다. 현은 한 개이다.
- 회유현(懐柔縣). 당(唐) 정관(貞觀) 6년에 설치하였고 오류성(五柳城)에서 다스린다. 고쳐서 순의현(順義縣)으로 하였다. 개원(開元) 4년에 송막부탄한주(松漠府彈汗州)를 설치하였다. 천보(天寳) 원년에 귀화현(歸化縣)으로 고쳤다. 건원(乾元)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되돌렸다. 가구수는 5000이다.
順州, 歸化軍, 中, 刺史. 秦上谷, 漢范陽, 北齊歸徳郡境. 隋開皇中, 粟末靺鞨與髙麗戰不勝, 厥稽部長突地稽率八部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舉落内附, 置順州以處之. 唐武徳初改燕州, 會昌中改歸順州, 唐末仍為順州. 有 温榆河., 白遂河., 曹王山,
曺操常駐軍于此., 黍谷山, 鄒衍吹律之地, 南有齊長城. 城東北有 華林 天柱 二莊, 遼建涼殿, 春賞花, 夏納涼. 初軍曰歸寧,
後更名. 統縣一.
- 懐柔縣. 唐貞觀六年置, 治五柳城, 改順義縣. 開元四年置松漠府彈汗州. 天寳元年改歸化縣. 乾元元年復今名. 户五千.
13) 단주(檀州), 무위군(武威軍), 下, 刺史. 원래 연(燕)의 어양군(漁陽郡) 땅이다. 한(漢)은 백단현(白檀縣)이라고 하였다.
위서(魏書)에서 기록하기를 조공(曺公)이 백단(白檀)을 지나서 오환(烏丸)을 유성(柳城)에서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속한서(續漢書)에서 기록하기를 백단(白檀)은 우북평(右北平)에 있다고 했다. 북위(元魏)는 밀운군(密雲郡)을 만들어
안주(安州)에 아울러 설치하였다. 후주(後周)는 원주(元州)로 고쳤다. 수(隋) 개황(開皇) 18년에는 연락(燕樂)과
밀운(密雲) 2개의 현을 쪼개서 단주(檀州)를 설치하였다. 당(唐) 천보(天寳) 원년에는 밀운군(密雲郡)이라고 고쳤고
건원(乾元) 원년에는 다시 단주(檀州)라고 하였다. 요(遼)에서는 지금의 군호(軍號)를 더하였다. 상계(桑溪)와
포구산(鮑丘山)과 도화산(桃花山)과 라산(螺山)이 있다 현은 2개이다.
- 밀운현(密雲縣). 원래 한(漢)의 백단현(白檀縣)이고 후한(後漢)이 근해(斤奚, 제해)라고 하였다. 북위(元魏)는
밀운군(密雲郡)을 두어 백단(白檀) 요양(要陽) 밀운(密雲) 등 3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북제(髙齊)에서는 군과 2개의 현을
폐하고 내속하였다. 가구수는 5000이다.
- 행당현(行唐縣). 원래 정주(定州) 행당현(行唐縣)이다. 태조(太祖)가 정주(定州)를 노략질하고 행당(行唐)을 파하여
그 백성들을 모두 몰아 북쪽으로 단주에 이르러 살만한 땅을 가리어 거주토록 하였다. 대략 10개의 채(寨)를 설치하고 또한
행당현(行唐縣)으로 이름하였다. 창민궁(彰愍宫)에 속한다. 가구수는 3000이다.
檀州, 武威軍, 下, 刺史. 本燕漁陽郡地, 漢為白檀縣. 魏書, 曺公歴白檀, 破烏丸於柳城. 續漢書, 白檀在右北平. 元魏創密雲郡, 兼置安州. 後周改為元州. 隋開皇十八年割 燕樂 密雲 二縣置檀州. 唐天寳元年改密雲郡, 乾元元年復為檀州. 遼加今軍號. 有 桑溪 鮑丘山 桃花山 螺山. 統縣二.
- 密雲縣. 本漢白檀縣, 後漢以居斤奚. 元魏置密雲郡, 領 白檀 要陽 密雲 三縣. 髙齊廢郡及二縣, 來屬. 户五千.
- 行唐縣. 本定州行唐縣. 太祖掠定州, 破行唐, 盡驅其民, 北至檀州, 擇曠土居之, 凡置十寨, 仍名行唐縣. 隸彰愍宫. 户三千.
14) 탁주(涿州), 영태군(永泰軍), 上, 刺史. 한(漢) 고조(髙祖) 5년에 연(燕)을 나누어 탁군(涿郡)을 설치하였고, 위(魏)
문제(文帝)는 범양군(范陽郡)으로 고쳤으며, 진(晉)은 범양국(范陽國)이라고 하였고, 북위(元魏)는 다시 범양군이라고 되돌렸다.
수(隋) 개황(開皇) 2년에 군을 파하고 유주에 속하게 하였고, 대업(大業) 3년에 유주를 탁군으로 삼았다. 당(唐)
무덕(武徳) 원년에 군을 폐하고 탁현으로 삼았고 7년에 범양현으로 고쳤으며 대력(大厯) 4년에 탁주(涿州)를 설치하였다.
석진(石晉)은 태조(太祖) 에게 귀속시켰다. 대방산(大房山)과 륙빙산(六聘山)과 탁수(涿水)와 루상하(樓桑河)와
횡구하(横溝河)와 례손하(禮遜河)와 기구하(祁溝河)가 있다. 현은 4개이다.
- 범양현(范陽縣). 원래 한(漢)의 탁현(涿縣)이다. 당(唐) 무덕(武徳) 년간에 범양현(范陽縣)으로 고쳤다. 탁수(涿水)와 범수(范水)가 있다. 가구수는 1,0000이다.
- 고안현(固安縣). 원래 한(漢) 방성현(方成縣)이다. 그 전에는 광양국(廣陽國)에 속하였었다. 수(隋) 개황(開皇)
9년에 역주(易州) 래수현(淶水縣)으로부터 옮겨 설치하여 유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 고안현(故安縣)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당(唐) 무덕(武徳) 4년에 북의주(北義州)에 속하게 하였다가 옮기어 장신보(章信堡)에서 다스렸다. 정관(貞觀) 2년에는
의주(義州)일 폐하고 지금 다스리는 곳으로 옮겨서 유주에 속하게 하였다. 주의 동남쪽 90리에 있다. 가구수는 1,0000이다.
- 신성현(新城縣) 원래 한(漢)의 신창현(新昌縣)이다. 당(唐) 대력(大厯) 4년에 고안현(固安縣)을 쪼개어 설치하였다가
후에 없앴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4년에 다시 되돌리어 범양현(范陽縣)을 쪼개어 설치하였다.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가구수는 1,0000이다.
- 귀의현(歸義縣) 원래 한(漢)의 역현(易縣) 땅이다. 제(齊)에서는 막현(鄚縣)에 병입하였다. 당(唐) 무덕 5년에
북의주를 설치하였다가 주를 폐하였고 현을 다시 설치하여 내속하였다. 백성들은 거마하 남족에 살았는데 신성(新城)에 붙이어
다스렸다. 가구수는 4000이다.
涿州, 永泰軍, 上, 刺史. 漢髙祖六年分燕置涿郡, 魏文帝改范陽郡, 晉為范陽國, 元魏復為郡. 隋開皇二年罷郡, 屬幽州, 大業三年以幽州為涿郡. 唐武徳元年郡廢, 為涿縣, 七年改范陽縣, 大厯四年置涿州. 石晉以歸太祖. 有 大房山 六聘山 涿水 樓桑河 横溝河 禮遜河 祁溝河. 統縣四.
- 范陽縣. 本漢涿縣. 唐武徳中, 改范陽縣. 有 涿水 范水. 户一萬.
- 固安縣. 本漢方成縣, 先屬廣陽國. 隋開皇九年, 自易州淶水縣移置, 屬幽州, 取漢故安縣名. 唐武徳四年屬北義州, 徙治章信堡. 貞觀二年義州廢, 移今治, 復屬幽州. 在州東南九十里. 户一萬.
- 新城縣. 本漢新昌縣. 唐大厯四年析固安縣置, 後省. 後唐天成四年復析范陽縣置. 在州南六十里. 户一萬.
- 歸義縣. 本漢易縣地. 齊併入鄚縣. 唐武徳五年置北義州, 州廢, 復置縣來屬. 民居在巨馬河南, 僑治新城. 户四千.
15) 역주, 고양군, 上, 刺史. 한(漢)에서는 역현(易)과 고안현(故安)의 땅이었다. 수(隋)에서는 역주(易州)를 설치하였다가
수(隋)의 말기에 상곡군(上谷郡)으로 삼았다. 당(唐) 무덕(武徳) 4년에 역주(易州)로 되돌렸다. 천보(天寳) 원년에 또한
상곡군(上谷郡)으로 삼았다. 건원(乾元) 원년에 다시 고쳐 역주(易州)로 삼았다. 오대(五代)에서는 정주절도사(定州節度使)에
예속되었었다. 회동(會同) 9년에 손방간(孫方簡)이 그 땅을 가지고 내부하였다. 응력(應厯) 9년에 주(周) 세종(世宗)이
가졌다가 후에 송(宋)에 속하게 되었다. 통화(統和) 7년에 공격하여 이기고 고양군(髙陽軍)으로 승격시켰다. 역수(易水)와
래수(淶水)가 있고 랑산(狼山)과 태녕산(太寧山)과 백마산(白馬山)이 있다. 현은 3개이다.
- 역현(易縣). 원래 한국(漢)의 현이었고 옛 성은 지금 현은 동남쪽 60리에 있다. 북제(齊) 천보(天保) 7년에
없앴다. 수(隋) 개황(開皇) 16년에옛 안성(故安城) 서북쪽 귀퉁이에 현을 설치하였는데 즉 지금의 현의 치소이다. 가구수는
2,5000이다.
- 래수현(淶水縣). 원래 한국(漢)의 도현(道縣) 인데 지금 래수현의 북쪽 1리에 옛날의 도성(道城)이 있는데 이곳이다.
북위(元魏)는 옛 성의 남쪽에 이주를 시켰었는데 즉 지금의 현을 다스리는 곳이다. 주(周) 태상(太象) [2년에 없앴고 수(隋)
개황(開皇)] 18년에 래수현(淶水縣)으로 고쳤다. 역주(易州) 동쪽 40리에 있다. 가구수는 2,7000이다.
- 용성현(容城縣). 원래 한국(漢)의 현으로 옛날에는 탁군(涿郡)에 속했었다. 옛 성은 웅주(雄州)의 서남쪽에 있다.
당(唐) 무덕(武徳) 5년에는 북의주(北義州)에 소속시켰었다. 정관(貞觀) 원년에 돌아와 내속하였다. 성력(聖厯) 3년에
전충현(全忠縣)으로 고쳤다. 천보(天寳) 원년에는 다시 되돌려 용성현(容城縣)이라고 하였다. 역주에서 동쪽으로 80리에 있다.
백성들은 모두 거마하 남쪽에 사는데 탁주(涿州)의 신성(新城)에 붙여서 다스린다. 가구수는 5000이다.
易州, 髙陽軍, 上, 刺史. 漢為 易 故安 二縣地. 隋置易州, 隋末為上谷郡. 唐武徳四年復易州. 天寳元年仍上谷郡. 乾元元年又改易州. 五代隸定州節度使. 會同九年孫方簡以其地來附. 應厯九年為周世宗所取, 後屬宋. 統和七年攻克之, 升髙陽軍. 有 易水 淶水 狼山 太寧山 白馬山. 統縣三.
- 易縣. 本漢縣, 故城在今縣東南六十里. 齊天保七年省. 隋開皇十六年於故安城西北隅置縣, 即今縣治也. 户二萬五千.
- 淶水縣. 本漢道縣, 今縣北一里故道城是也. 元魏移於故城南, 即今縣置. 周太象[二年省隋開皇]十八年改淶水縣. 在州東四十里. 有淶水. 户二萬七千.
- 容城縣. 本漢縣, 先屬涿郡, 故城在雄州西南. 唐武徳五年屬北義州. 貞觀元年還來屬. 聖厯三年改全忠縣. 天寳元年復名容城縣. 在州東八十里. 户民皆居巨馬河南, 僑治涿州新城. 户五千.
16) 계주(薊州), 상무군(尚武軍), 上, 刺史. 진국(秦)의 어양군(漁陽)과 우북평군(右北平)의 땅이다. 수(隋) 개황(開皇)
년간에 옮겨서 현주총관부(玄州總管府)에서 다스렸다가 양제(煬帝)가 어양군(漁陽郡)으로 바꾸었다. 당(唐) 무덕(武徳) 원년에
폐하고 유주(幽州)로 편입시켰고 개원(開元) 18년에 계주(薊州)로 나누어 세웠다. 현은 3개이다.
- 어양현(漁陽縣). 원래 한(漢)의 현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했었는데 진(晉)에서 없앴다가 다시 설치하였다.
북위(元魏)에서 없앴다. 당(唐)에서는 유주(幽州)에 소속시켰다가 개원(開元) 18년에 계주(薊州)를 설치하였다.
포구수(鮑丘水)가 있다. 가구수는 4000이다.
- 삼하현(三河縣). 원래 한(漢)의 림구현(臨胊縣) 땅이다. 당(唐) 개원(開元) 4년에 로주(潞州)를 쪼개어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3000이다.
- 옥전현(玉田縣). 원래 춘추(春秋) 시대의 무종자국(無終子國)이다. 한(漢)은 무종현(無終縣)을 설치하여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소속시켰다. 북위(元魏)는 어양군(漁陽郡)의 치소로 하였다가 없앴다. 당(唐) 무덕(武徳) 2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정관(貞觀) 초기에 없앴고 건봉(乾封) 년간에 다시 설치하였다.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이름을 옥적으로 바꾸어
유주(幽州) 에 소속시켰다. 개원(開元) 4년에 다시 돌아와 유주(幽州)에 소속시켰다가 8년에 영주(營州)에 소속시켰으며
11년에 다시 영주(營州) 에 소속시켰고 18년에 내속하였다. 수신기(捜神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옹백(雍伯)은 락양(洛陽)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죽자 무종산에 장사지냈는데 산의 높이는 80리였다. 위에는 물이 없으므로 옹백이 물마실 곳을
설치하였다. 물마시러 가는 자들이 돌 1되를 가져다 놓았더니 옥이 생겨났으므로 옥전이라고 하였다.” 가구수는 3000이다.
薊州, 尚武軍, 上, 刺史. 秦漁陽右北平二郡地. 隋開皇中, 徙治玄州總管府, 煬帝改漁陽郡. 唐武徳元年廢入幽州, 開元十八年分立薊州. 統縣三.
- 漁陽縣. 本漢縣, 屬漁陽郡. 晉省, 復置. 元魏省. 唐屬幽州, 開元十八年置薊州. 有鮑丘水. 户四千.
- 三河縣. 本漢臨胊縣地. 唐開元四年析潞州置. 户三千
- 玉田縣. 本春秋無終子國. 漢置無終縣, 屬右北平郡. 元魏屬漁陽郡治, 省. 唐武徳二年復置. 貞觀初省, 乾封中復置. 萬歳通天元年更名玉田, 屬幽州. 開元四年還屬幽州, 八年屬營州, 十一年又屬營州, 十八年來屬. 捜神記.., 雍伯, 洛陽人, 性孝, 父母没, 葬無終山. 山髙八十里, 上無水, 雍伯置飲. 人有就飲者, 與石一斗種, 生玉, 因名玉田. 户三千.
17) 경주(景州), 청안군(清安軍), 下, 刺史. 원래 계주(薊州) 준화현(遵化縣)이다. 중희(重熙) 년간에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3000이다.
- 준화현(遵化縣). 원래 당국(唐) 평주(平州) 매마감(買馬監)이었는데 현으로 하여 내속하였다.
景州, 清安軍, 下, 刺史. 本薊州遵化縣, 重熙中置. 户三千.
- 遵化縣. 本唐平州買馬監, 為縣來屬.
평주 요흥군 (平州 遼興軍)
평주(平州), 요흥군(遼興軍), 上, 節度. 상국(商)에서는 고죽국(孤竹國)이었고 춘추(春秋) 시대에는 산융국(山戎國)이었으며 진국(秦)에서는 요서군과 우북평군의 땅이었는데 한국(漢)에서는 이를 따랐다. 한국(漢)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점거하였는데 아들 공손강과 손자 공손연에 이르러 위(魏)로 편입되었다. 수(隋) 개황(開皇) 년간에 평주(平州)로 고치었고, 대업(大業) 초기에 다시 군으로 삼았다. 당(唐) 무덕(武徳) 초기에 주로 고치었고, 천보(天寳) 원년에 또한 북평군(北平郡)으로 하였다가. 후당(後唐)에서는 다시 평주(平州)로 삼았다. 태조(太祖) 천찬(天贊) 2년에 이곳을 취하여 정주(定州)의 포로들로 이 땅에 섞이어 살게 하였다. 주는 2개이고 현은 3개이다.
平州, 遼興軍, 上, 節度. 商為孤竹國, 春秋山戎國, 秦為遼西右北平二郡地. 漢因之. 漢末公孫度據有, 傳 子康 孫淵, 入魏.
隋開皇中改平州, 大業初復為郡. 唐武徳初改州, 天寳元年仍北平郡. 後唐復為平州. 太祖天贊二年取之, 以定州俘户錯置其地. 統州二 縣三.
1) 노룡현(盧龍縣). 원래 비여국(肥如國)이다. 춘추(春秋) 시대 진(晉)이 비(肥)를 멸하자 비자(肥子)는 연(燕)으로 달아났는데
이곳에 봉지를 받았다. 한(漢)과 진(晉)에서는 료서군(遼西郡)에 속하였다. 북위(元魏)는 군의 치소로 삼는 동시에
평주(平州)를 세웠다. 북제(北齊)는 북평군(北平郡)에 소속시켰다. 수(隋) 개황(開皇) 년간에 비여현을 없애고 신창현(新昌)에
소속시켰다. 18년에는 신창현을 고쳐 노룡현이라고 하였다. 당(唐)에서는 평주(平州)로삼았고 뒤에도 이를 따랐다. 가구수는
7000이다.
盧龍縣. 本肥如國. 春秋晉滅肥, 肥子奔燕, 受封於此. 漢晉屬遼西郡. 元魏為郡治, 兼立平州. 北齊屬北平郡. 隋開皇中省肥如, 入新昌. 十八年改新昌曰盧龍. 唐為平州, 後因之. 户七千.
2) 안희현. 원래 한국(漢國)의 영지현(令支縣)의 땅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太祖)가 정주(定州) 안희현(安喜縣)의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평주(平州)에서 동북쪽으로 60리에 있다. 가구수는 5000이다.
安喜縣. 本漢令支縣地, 乆廢. 太祖以定州安喜縣俘户置. 在平州東北六十里. 户五千.
3) 망도현(望都縣). 원래 한국(漢國) 해양현(海陽縣)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太祖)가 정주(定州) 망도현(望都縣)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해양산(海陽山)이 있다. 현은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望都縣. 本漢海陽縣, 乆廢. 太祖以定州望都縣俘户置. 有海陽山. 縣在州南三十里. 户三千.
4) 난주(灤州), 영안군(永安軍), 中, 刺史. 원래 옛날 황락성(黄洛城)인데. 난하(灤河)가 고리처럼 두르고 있으며
노룡산(盧龍山) 남쪽에 있다. 제(齊) 환공(桓公)이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산신(山神) 유아(俞兒, 혹은 俞鬼)를 보았는데 곧
이곳이다. 진(秦)에서는 우북평군(右北平)이 되었다. 한(漢)에서는 석성현(石城縣)으로 삼았는데 후에 이름을
해양현(海陽縣)이라고 하였다. 한(漢)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가졌던 곳이다. 진(晉) 이후로는 요서(遼西)에 속했다.
석진(石晉)을 땅을 나누어 (……했는데), 평주(平州)의 지경에 있다. 태조(太祖)가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란주(灤州)는 산을
등지고 강이 띠처럼 두루고 있으니 삭한(朔漢, ??)의 형승을 하고있는 땅이다. 부소천(扶蘇泉)이 있는데 아주 맛이 감미로우며
진(秦)의 태자 부소(扶蘇)가 북쪽으로 장성을 쌓고 일찍이 이곳에서머물렀었다. 임유산(臨榆山)이 있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천여 길이나 되고 아래에는 임유하(臨榆河)가 있다. 현은 2개이다.
- 의풍현(義豐縣). 본래 옛날 황락성(黄洛城)이다. 황락수(黄洛水)가 노룡산(盧龍山)을 북쪽으로 나가 흘르다가 남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한(漢)에서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는데 오래전에 폐하였다. 당(唐) 말기에 거란(契丹)에
편입되었고, 세종(世宗)이 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4000이다.
- 마성현(馬城縣). 원래 노룡현(盧龍縣) 땅이다. 당(唐) 개원(開元) 28년에 쪼개어 현을 설치하여 물길로 운반이
가능하도록 했다. 동북쪽에는 천금야(千金冶)가 있고, 동쪽에는 무향진(茂鄉鎮)이 있다. 요국(遼)에서 나누어 난주(灤州)에
예속시켰다. 난주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 석성현(石城縣). 한(漢)이 설치하여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소속시켰는데 오래전에 폐하였다. 당(唐) 정관(貞觀) 년간에
이곳에 임유현(臨榆縣)을 설치하였고,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석성현(石城縣)으로 바꾸었다. 난주(灤州) 남쪽 30리에 있다.
당(唐) 의봉(儀鳳) 년간에 새긴 비석이 있다. 지금의 현은 또한 그 남쪽 50리에 있는데 요(遼)에서 옮겨 설치하여
취염관(就鹽官)으로 하였다. 가구수는 3000이다.
灤州, 永安軍, 中, 刺史. 本古黄洛城. 灤河環繞, 在盧龍山南. 齊桓公伐山戎, 見山神俞兒, 即此. 秦為右北平. 漢為石城縣, 後名海陽縣. 漢末為公孫度所有. 晉以後屬遼西. 石晉割地, 在平州之境. 太祖以俘户置. 灤州負山帯河, 為朔漢形勝之地. 有扶蘇泉, 甚甘美, 秦太子扶蘇北築長城常駐此., 臨榆山, 峰巒崛起, 髙千餘仞, 下臨榆河. 統縣二.
- 義豐縣. 本黄洛故城. 黄洛水北出盧龍山, 南流入於濡水. 漢屬遼西郡, 乆廢. 唐季入契丹, 世宗置縣. 户四千.
- 馬城縣. 本盧龍縣地. 唐開元二十八年析置縣, 以通水運. 東北有千金冶, 東有茂鄉鎮. 遼割隸灤州. 在州西南四十里. 户三千.
- 石城縣. 漢置, 屬右北平郡, 乆廢. 唐貞觀中於此置臨榆縣, 萬歳通天元年改石城縣. 在灤州南三十里. 唐儀鳯石刻在焉. 今縣又在其南五十里, 遼徙置以就鹽官. 户三千.
5) 영주(營州), 닌해군(隣海軍), 下, 刺史. 원래 상(商) 고죽국(孤竹國)이다. 진(秦)에서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한(漢)은 창려군(昌黎郡)으로 삼았었다.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은 이곳에 도읍을 옮겼었다. 북위(元魏)는 영주(營州)를
세우고 창려(昌黎) 건덕(建徳) 요동(遼東) 낙랑(樂浪) 익양(翼陽) 영구(營丘) 등 6개의 군을 다스렸다. 후주(後周)때에는
고보녕(髙寳寧)이 점고한 곳이었다. 수(隋) 개황(開皇) 년간에 주를 설치하였고 대업(大業) 년간에 요서군(遼西郡)으로 고쳤다.
당(唐) 무덕(武徳) 원년에 영주(營州)로 고쳤고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처음으로 거란의 땅이 되었다. 성력(聖厯) 2년에는
어양군에 붙여서 다스렸다. 개원(開元) 5년에 돌아와 유성(柳城)에서 다스렸다. 천보(天寳) 원년에 유성군(柳城郡)으로 고쳤다.
후당(後唐)에서는 다시 영주(營州)로 삼았다. 태조(太祖)가 정주(定州)의 포로들이 살도록 하였다. 현은 한 개이다.
- 광녕현(廣寧縣). 한(漢)의 유성현(柳城縣)인데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동북쪽으로는 해(奚)와 거란(契丹)과 맞붙어
있다.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거란 이만영(李萬營)의 손으로 들어갔다. 신룡(神龍) 원년에 유주(幽州)의 경계로 이주하였다.
개원(開元) 4년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요(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가구수는 3000이다.
營州, 隣海軍, 下, 刺史. 本商孤竹國. 秦屬遼西郡. 漢為昌黎郡. 前燕慕容皝徙都于此. 元魏立營州, 領 昌黎 建徳 遼東 樂浪 翼陽 營丘 六郡. 後周為髙寳寧所據. 隋開皇置州, 大業改遼西郡. 唐武徳元年改營州, 萬歳通天元年始入契丹. 聖厯二年僑治漁陽. 開元五年還治柳城. 天寳元年改曰柳城郡. 後唐復為營州. 太祖以居定州俘户. 統縣一.
- 廣寧縣. 漢柳城縣, 屬遼西郡. 東北與 奚 契丹 接境. 萬歳通天元年入契丹李萬營. 神龍元年移幽州界. 開元四年復舊地. 遼改今名. 户三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