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 요수는 백하
수경주는 수경에다가 주석을 붙인 책입니다.
그런데 수경주의 대요수 편을 보면 첫머리부터 이상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수경]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대요수(大遼水)는 새(塞) 밖의 위백평산(衛白平山) 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새(塞)로 들어간 후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난다.
[주]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료
수(遼水)는 또한 지석산(砥石山)에서 나와서 새(塞) 밖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료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 서쪽과
만나는데(直) 왕망이 장설(長説)로 고쳤다. 굽어서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 진(秦)
시황(始皇) 22년 연(燕)을 멸하고 료동군(遼東郡)을 두었는데 양평현(此)을 다스렸다. 한(漢) 고제(髙帝) 8년에
기통(紀通)을 봉하여 후국(侯國)이 되게 하였는데 왕망이 창평(昌平)으로 바꾸었으며 옛 평주(平州) 가 다스린다.
[수경]에서는 대요수가 위백평산(衛白平山) 을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수경주]에는 요수가 지석산(砥石山)을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수경주의 저자는 발원지가 다른 것에 대하여 일절 주석이나 의견도 없이 그냥 진술해갑니다.
뭔가가 틀렸다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죠.
[수경]의 저자가 말하는 위백평산(衛白平山)....
이는 산해경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해경에서도 요수는 衛臯의 동쪽을 나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臯는 [수경]에서 말한 白平이 위아래로 한글자가 된 것이지요.
<<산해경>> 권13 , 海内東經
潦水出衛臯東東南注渤海入潦陽
요수(潦水)는 위고(衛臯) 동쪽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渤海)에 물을 대는데 요양(潦陽)으로도 들어간다.
그런데 보면 遼자가 다르죠. 산해경에서는 潦를 썼습니다.
아마도 [수경주] 저자가 말하고 있는 遼水(요수)와 [수경]의 저자와 산해경에서 말하고 있는 潦水(요수)는 다른 강일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발원되는 산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潦水(요수)를 찾아보면 상고시대의 요수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潦水(요수)는 遼나라 서경도에서 발견됩니다.
<<遼史>> 권 41 서경도(西京道)
奉聖州....
龍門縣, 有龍門山, 石壁對峙, 高數百尺, 望之若門, 徼外諸河及沙漠潦水, 皆於此趣海. 雨則俄頃水踰千仞, 晴則清淺可渉, 實塞北控扼之衝要也. 在州東北二百八十里户四千.
봉 성주 용문현에는 용문산이 있다. 석벽(石壁)이 서로 마주보고 우뚝 솟았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고 서로 바라보기를 문과 같다. 요(徼) 밖의 여러 강들 즉 사수(沙水), 막수(漠水), 요수(潦水) 등이 모두 용문산에서 바다를 향해 간다. 비가 갑자기 잠간이라도 내리면 강이 넘쳐 1000길이나되고 날씨가 개이면 (강물이) 얕아서 건널 수 있다. 실로 새(塞) 북쪽에서 (적들을) 진압하는 요충지이다. . 용문현은 봉성주의 동북쪽 280리에 있고 가구수는 4000이다.
봉 성주 용문현은 대개 지금의 大馬群山 근처로 樺皮嶺이라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이곳이 아마 산해경에서 말하는 위고산(衛臯山) 혹은 위백평산(衛白平山)일 가능성이 높으며 산해경에서는 潦水(요수)가 발해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大馬群山 樺皮嶺에서 발원하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은 현재 白河(백하)밖에 없으므로 [수경]의 대략의 저작연도를 참고하여 적어도 3세기 이전에는 요수가 바로 현재의 白河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