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21:41
2. 沸流王(비류왕)

優台王長子, 爲人柔仁孝友.
우태왕의 장자로써 심성이 착하고 인자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있었다.

元年癸卯正月沸流東行南渡帶水至彌鄒忽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芽西南行而渡浿河亦會于彌鄒忽, 立沸流爲王. 五月立東明廟. 七月類利以松化爲后. 阿爾妬之與太后欲奔皈彌鄒忽. 乙音諫之曰小不忍亂大, 謀爲后之道莫若承順夫王之. 乙音者優台母乙氏通其私夫而生者也. 沈重有識見曾諫召西奴之追. 朱蒙爲夫又諫納類利至是留占都以慰太后.

원년(B.C.18) 계묘 1월 비류가 동쪽으로 가다 남으로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는 오간, 마려(아)와 더불어 서남으로 가다가 패하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만났다. 비류를 세워 왕으로 하였다. 5월 동명묘(사당)를 세웠다. 7월 유리가 송화를 (왕)후로 삼았다. 아이(후)가 그것을 시샘하여 태후와 함께 미추홀로 (달아나서) 돌아가자고 했다. 을음이 간하여 말하기를 참지 않음이 작으면 어지러워짐이 커지므로, (왕)후를 위한 계책이라면 남편 왕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길 외에는 없다고 하였다. 을음이라는 사람은 우태의 모인 을씨가 샛서방과 통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생각이 깊고 침착하며 식견(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일찍이 간하면 소서노가 따랐다. 주몽을 남편으로 삼으라고 하였고 또 유리에게 간언하였는데 도읍에 남아서 계속 머물도록 함에 이르러 이 때문에 태후를 위로하였다.

二年甲辰三月太后與乙音歸彌鄒忽, 是年正月王以末曷在北界勇而多詐欲繕兵績穀以究拒守之討, 群臣皆曰若非乙音不可乃召乙音爲右輔太后亦以此機歸我而重其勢篤臣之奔來者陸續不絶. 乙音總執內外兵馬事. 王以親妹甘兒妻王弟溫祚, 甘兒朱蒙王之女也. 能騎馬善射, 類利欲通之爲後宮, 阿爾后曰我已見欺悔之無及汝宜從太后歸依胞兄, 甘兒亦心鄙類利無義多詐, 從太后歸彌鄒忽至, 是與溫祚相婚於東明樹下, 大宴君臣太后飮酒樂之命王與后起舞而歌, 其歌曰奉吾母爲王, 吾大愛吾弟爲拖, 吾妹願我子孫樂無窮而不盡, 後人掄孝反者必以比, 歌爲訓.
2년(B.C.17) 갑진 3월 태후와 을음이 미추홀로 돌아왔다. 이해 1월에 왕이 말갈이 북쪽 경계에 있으므로 (말갈사람들이)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아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아서 마땅히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을음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하니 이내 을음을 불러 우보로 삼고, 태후 역시 이번 기회로 우리에게 돌아오니, 그 세력이 많은 자 중에 믿음직하고 성실한 많은 신하들이 달아나 육지로 오는 자가 계속 끊이지 않았다. 을음에게 거느리게 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나라의 병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왕이 친누이 감아를 동생 온조의 처로 삼았는데, 감아는 주몽왕의 딸이다. 능히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한다. 유리가 욕보이기 위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아이후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속이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뉘우침이 없고 너에게 이르렀다, 마땅히 태후(소서노)를 모시고 같은 어머니의 오빠에게 의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유리는 감아의 같은 아버지의 오빠). 감아 역시 유리가 의롭지 못하고 속임이 많아서 마음이 더러웠다. (감아가) 태후를 모시고 미추홀에 이르렀는데 이때 온조와 더불어 동명수 아래에서 혼인을 하였다. 큰 잔치를 벌여 군신들과 태후가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였는데 왕과 황후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가사는 나의 어머니를 왕으로 받들고, 나는 나의 동생을 매우 사랑하여 이끌어주고, 나의 여동생에게 우리들의 자손들을 끊임없이 이어짐이 즐겁다. 후인들아 효를 반하는 자는 반드시 비교하여 선택하라. 노래를 가르침으로 삼았다.

三年乙巳五月甘兒生子多婁時王后碧蘿生三女而無子太后命取多婁爲王子妻以碧蘿之女蛙氏. 九月末曷來侵北界王命溫祚擊退之甘兒亦被甲從之, 選勁師出間道忽擊大破之, 賊之生還者十之一二. 王乃賞王弟王妹曰好吾弟妹國之雙宝也. 夕食于太后宮. 十一月類利迷使獻方物於太后而請還都, 太后曰聞汝王喪松花而更娶禾雉兩女以傷吾女之心, 如此好色之人, 吾不願見也. 先王英雄無比, 而惟與我好不用他色, 汝王其宜知之, 使者恐懼而歸.
3년(B.C.16) 을사 5월 감아가 다루를 낳았는데 이때 왕후 벽라도 셋째 딸을 낳았는데 아들이 없어 태후가 다루를 왕의 아들로 삼으라고 명하여 벽라의 딸 와씨를 처로 삼았다.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왕이 온조에게 말갈을 물리치도록 명하였는데, 감아 역시 갑옷을 입고 온조를 따랐다. 굳센 장수를 선택하여 출병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적을 만나) 적을 크게 쳐 부셨다. 적들 중에 살아 돌아간 자는 열 명중 한두 명이었다. 왕이 곧 온조와 감아에게 상을 주며 말하기를 좋구나! 나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나라의 쌍 보배로다 하였다. 저녁식사는 태후궁에서 (함께) 하였다. 11월 유리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로써 태후를 미혹하여 도읍으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의 왕이 송화의 상을 당했다고 하더니 (이번엔) 화씨와 치씨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이 때문에 나의 딸이 마음이 다쳤다. 이런 호색한 같으니 나는 (두 번 다시)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선왕(주몽)은 나무랄 대 없는 영웅이다. 나와 함께 같이 가려면 다른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 너의 왕은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신은 놀라고 두려워서 돌아갔다.

四年丙午春夏大旱而民饑, 且疾王與后巡撫部落而慰恤之. 八月遣使于樂浪而修好. 樂浪者辰韓也. 在我東南界, 共拒末曷而事馬韓故也.
4년(B.C.15) 병오 봄과 여름에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또 (전염)병이 돌아 왕과 왕후가 부락(백성들이 사는 곳)을 돌며 어루만지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휼했다. 8월에 사신을 보내어 낙랑과 수교를 하였다. 낙랑은 진한이다. 우리나라의 동남 경계에 있으면서 함께 말갈을 막았는데 마한을 섬긴 까닭이다.
≪해설≫ 이 당시의 도읍인 미추홀은 박창화님의 고구려사략에서는 흑룡강성 밀산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낙랑은 러시아의 연해주이어야 한다. 백제서기가 백제가 역사를 기록하지 않다가 근초고왕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하니 구전기록을 수백 년이 지난 후에 기록하면서 착오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五年丁未四月遣王弟溫祚於馬韓借地. 時馬韓政衰畏末曷樂浪加耶之漸威, 欲使王制末曷樂浪, 乃許東北百里之地, 旦(但의 오자?)許採鐵鑄兵戈, 優待王弟而歸. 十月王巡撫北邊獲神鹿. 十一月馬韓使來請王女王謝以年幼, 馬韓君臣耽樂不恤國民, 樂浪加耶年年納美女, 侵入其封疆, 疆域日縮, 而不以爲意. 甘兒生子馬婁.
5년(B.C.14) 정미 4월 왕제 온조를 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이때 마한 정부는 쇠락하여 말갈, 낙랑, 가야가 점점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왕을 부리어 말갈과 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여, 아침에 철을 캐내어 병사의 창을 주조하는 일을 허락하고, 온조가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다가 신록을 잡았다. 11월 마한이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왕녀를 보내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딸의) 나이가 어리다고 사죄하며 돌려보냈다. 마한의 임금과 신하들이 주색을 즐기고 국민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낙랑과 가야는 해년마다 미녀를 바치며 그 정해진 경계를 침입하여 강역이 날마다 줄어들었는데, (마한의 왕과 신하들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없었다. 감아가 아들 마루를 낳았다.

七年戊申王后碧蘿薨. 王痛哀之, 群臣請納繼后, 王不忍之曰, 夫婦之道宜相從, 雖不得相從, 安忍昔未冷而忽復再娶乎. 太后聞而悲之曰吾有罪於沸流矣, 溫祚慰之曰母之再嫁豈其罪哉, 兄之不再娶者亦何賞?善之善哉. 盖其愛嫂之情猶有未已故也. 碧蘿以荇人王女有傾國之色, 而太妊之德孝友戀愛能使沸流徠捨于心. 當大難而不惑, 南來以後親執饋事以慰將士, 夙奧夜寢疲勞, 盖忍遂得疾以薨. 故群臣上下莫不痛之, 春秋三十四有三女皆絶美, 馬韓王數遣使求之而不許, 以溫祚子多婁爲子, 欲傅其國, 臨薨. 謂王曰我死勿更娶,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 時王長女葱姬年已十六, 能代后視內事故也. 三月王與葱姬北巡郡邑以慰戍卒. 命甘兒入內視事.
6년(B.C.13) 임신년 왕후 벽라가 죽었다. 왕이 원통하고 슬퍼하였다. 군신들이 (왕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왕후를 새로 모시도록 청하였다. 왕이 참지 못하여 말하기를 부부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따름이 도가 있다, 비록 따름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마음이 식지 않았는데 동정심도 없이 갑자기 장가들라고 하느냐 라고 하였다. 태후가 듣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죄는 비류보다는 나에게 있다고 하였다. 온조가 어머니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재혼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이 재혼을 하지 않은 것은 또한 선중의 선이다(숭상하고 본받아야 할 일이다). 형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덮는 것은  오히려 이미 아님이 있는 까닭이다(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형이 하고자 하는 대로 두는 게 좋겠다). 벽라는 행인국의 왕녀로써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이 있고 태임지덕이 있으며 효도하고 우애 있고 연애에 능하여 능히 비류를 부릴 수 있고 위로하고 마음을 비울 수 있도록 하였다. 큰 어려움을 당하여 미혹당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친히 밥을 먹이는 일을 처리하고, 이로 인하여 장사(장졸)를 위로하였는데, 일찍부터 밤에 잠잘 때까지 나라 안의 일을 하여 피로(과로가 겹친 상태)하였는데, 덮고 참고 견디어 마침내 병을 얻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돌아가셨다. 이런 까닭으로 군신의 위아래 없이 마음아파 할 수 밖에 없었다. 춘추(나이)가 34세, 딸 셋을 낳았고, 딸 셋 모두 아름다웠다. 마한 왕이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딸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온조의 아들 다루를 아들로 삼아, 마한이 후견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다루를 보내려고 하였으나) 임하여 (벽라가) 죽었다. (벽라가) 설명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다시 장가들지 말라, 이 때문에 만약 아이들의 문제에 관한 국정은 온조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안일에 관한 모든 것과 여자에 관한 문제는 왕이 허락하였는데, 이때 왕의 장녀 총희가 이미 16살이 되었기 때문에, 능히 왕후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3월 왕과 총희가 더불어 북쪽의 군과 읍을 돌며 이로써 경비병들을 위무 했다. 감아에게 들어와서 집안일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해설≫ 1. 60간지와 왕의 기년이 1년 차이가 난다.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2. 태임[太任] : 주(周) 나라 왕계(王季)의 비(妃)이며 문왕(文王)의 어머니. 상(商) 나라 사람으로 지국(摯國)의 중녀(仲女)로서 임(任)씨 성을 가짐. 태임의 성품은 바르고 곧으며 참되고 엄격하여 오로지 덕(德)을 행하였다고 함. 문왕을 임신했을 때는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거만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하여, 태교(胎敎)를 말할 때 인용됨.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서는 주실(周室)의 삼모(三母)로서 태임 외에 태강(太姜)·태사(太姒)를 들고 있음. 태임(太姙)이라고도 함.

八年庚戌二月末曷三千來圍慰禮城, 王經旬閉門不出, 待其糧盡而歸簡銳卒追及大斧峴殺虜五百余人. 七月築馬首城甁山柵與樂浪失和.
8년(B.C.11)년 경술 2월 말갈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10일 동안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식량이 다하기를 기다려 돌아가자 날랜 군사를 뽑아 추격하여 대부현에 이르러 5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7월에 마수성일 쌓고 병산책을 세웠는데 낙랑과 우호를 잃었다.

≪참고문≫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B.C.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十年壬子王出獵獲神鹿以送馬韓. 十月末曷寇北境王遣兵二百拒戰於昆彌川上而敗, 積依靑木山而自保, 王親帥精騎一百出烽峴救之賊乃退.
10년(B.C.9) 임자년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여 왕이 병사 200명을 보내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청목산에 의지하여 (병사를) 모아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장수가 되어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아가 구하니 적이 이내 물러갔다.

十一年癸丑四月樂浪唆末曷襲破甁山柵殺掠百余人. 七月設禿山狗川兩柵以塞樂浪來侵之路.
11년(B.C.8) 계축 4월 낙랑이 말갈을 부추겨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명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7월 독산과 구천의 두 (목)책을 세워 이로써 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十三年乙卯二月嫗化爲男, 五虎入城. 王禳之於東明樹. 王未幾, 太后得疾而薨, 春秋六十一. 國人立召西奴祠而祀之后. 以延陁勃大王第三女身長而美旦有推數養卵人與優台王經營卒本國得人心, 旦與朱蒙王經營高句麗國亦得衆聖及類利背叛不與之爭妥之. 以國又與二子南渡經營百濟國, 太后三國人皆尊之始神.
13년(B.C.6) 을묘 2월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이 동명수 아래에서 제사(푸닥거리를 하고)를 지내고 (왕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태후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61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소서노의 사당을 세우고 (태)후의 제사를 지냈다. 연타발왕의 셋째 딸로 키가 크고 아름다우며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힘(동명과 뜻이 일치함)이 있어 수차례 유망주들을 키워 모셨는데, 우태와 더불어 졸본을 다스리며 백성의 마음을 얻었고, 떠오르는 태양 주몽왕과 고구려를 다스리며 역시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 받았으며, 유리가 배반함에 이르자 다투지 않음이 타당하다. 이로써 나라를 또 다시 아들 둘과 남쪽으로 물을 건너 백제를 다스렸는데, 태후는 세 나라의 백성들에게 모두 존경받는 시조(신)이 되었다.
≪해설≫ 未幾 : 얼마 지나지 않아

몇번을 포기할까 고민도 많았지만 일단 마무리를 짓고 나니 후련합니다.
잠시 고구려쪽으로 외도를 하였지만 백제의 사서가 워낙 빈약하여 도움을 얻을까 하였는데 기대만큼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저도 송준희 선생님, 김성겸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즉,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닙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늘 역사 연구에 미쳐있어서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과 같이 역사를 같이 공부하는 날이 올 수 있을려는지요.
다음은 백제왕기의 앞부분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옛날 손으로 쓴 옥편을 보니 우리가 무슨 한자인지 몰랐던 것들이 한자씩 눈에 보입니다.
헌책방에서 그런 옥편을 구입하여 보시면 해석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글2002 프로그램에 있는 한자사전은 일부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다시 고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5)


정성일 (2007-05-26 11:51:15)  
조금 문구를 수정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은 백제왕기 앞부분을 해석하려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거의 유사하여 쉽기는 하지만 전에 제가 남긴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60년이라는 백제왕력이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대해 미리 연구해 두시면 백제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좌계 (2007-05-26 12:20:04)  
/정성일 님.

비류왕(比流王) 편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1. 비류왕(比流王)의 사료를 해석해주어 고마움을 표합니다.

비류왕(比流王) 편은 ‘고구리와 백제’ 사이의 초기의 역사에 모호한 점을 밝혀주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인 것 같습니다.
좌계가 세심히 뜯어보고 있습니다.
‘비류백제설’ 등등 비류왕에 대한 사료(史料)가 부족해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가설(假說) 위에 여러 가지 역사추정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가라앉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처럼 비류왕에 대한 사료가 부족한 ‘틈새’를 메꾸기 위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가설’을 씻을수 있는 귀한 사료(史料)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미 연구하신 선생의 관점을 확연하게 들어내고, ‘비류왕’에 대한 사료가 없어서 야기된 ‘역사의 공백’에 스며든 가설(假說)을 시원스럽게 씻어내는 글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

2. 초기 인척관계에 대한 초보적 질문

삼국초기의 인척 관계가 좌계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리 : 주몽 + 예씨
온조 : 주몽 + 소서노
비류 : 우태 + 소서노
감아 : 주몽 + 소서노
아이 : 우태 + 소서노

만약 맞다면, 결국 온조(溫祚)와 감아(甘兒)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같이 하는 형제인지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대로 확인키 위해서 질문합니다.
정성일 (2007-05-26 12:42:54)  
백제서기(백제왕기 뒤편)와 고구려사초(또는 사략)에서 말하는 인척관계가 약간 상이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도 누구의 자식이 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여기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쪽 역사서에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하고, 백제서기에서는 우태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게 더 알쏭달쏭한 일입니다.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드리겠습니다.

1. 고구려사략(사초)
유리 : 주몽 + 예씨
온조 : 주몽 + 소서노
비류 : 주몽 + 소서노
감아 : 주몽 + 소서노 (언급이 없음, 온공주로 대체된 것으로 추정)
아이 : 우태 + 소서노 (유리의 처)
재사 : 주몽 + 예씨 (온조의 처)

2. 백제서기(백제왕기 뒤편)
유리 : 주몽 + 예씨
온조 : 우태 + 소서노
비류 : 우태 + 소서노
감아 : 주몽 + 소서노 (온조의 처)
아이 : 우태 + 소서노 (유리의 처)
재사 : 주몽 + 예씨 (언급이 없음)

온조와 감아가 친형제라는 것은 백제서기와 고구려사초(또는 사략)을 엉뚱하게 결합한 결과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백제서기대로라면 감아는 온조와는 어머니가 같고, 유리와는 아버지가 같습니다.
太祖聖武高皇帝 (2007-05-26 12:43:26)  
백제서기를 책으로 출판해 주세요..........
모든 사람에게 읽힐 수 있도록...........
대단한 반향이 일어날 겁니다...
좌계 (2007-05-26 14:22:30)  
/정성일 선생님.

좌계 개인의 삶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좌계 역시 ‘학술’은 하나 - 사학(史學)이라기보다는 아시아 고대의 ‘경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만, - 송준희 선생, 사천(史穿) 선생, 또 정성일 선생님처럼 생업(生業)을 끌고가기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님의 글 뒷부분에 나오는 개인적 이야기를 읽고, 의외로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좌계가 ‘국제학술대회’에 자주 불려 다니는 이유는 ‘좌계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분야’를 - 그것이 ‘고래’가 되었던, 화백이 되었던 간에....- 연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필요로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또 가끔 강의를 하긴 하나, 초청이나, 좌계 스스로 기획해서 ‘시민 강좌’였지, 안전한 보수를 보장받은 가운데 ‘연구와 강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천(史穿) 선생님이나 정성일 님의 글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과 존경심을 지닌 까닭은 동병상련(同病相憐)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늘 그러하듯이, 이번의 비류왕(比流王)의 사료(史料)를 한번 훑어 본 바에 의하면, 경악스런 내용이 가득함에 놀라게 됩니다.
늘 날카로운 직관과 분석력을 지닌 정성일 님께 다시금 고마움을 표합니다.
정성일 (2007-05-26 19:47:48)  
제가 너무 역사공부에 몰두해 있으면서 직장과 가정일을 병행하여야 하므로 어느 것도 열심히 할 수 없기에 직장일을 벗어나 같이 열심히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담았으므로 오해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