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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박사 칼럼) 느시를 기다리며 : 한반도의 느시 2
부르칸
2015. 4. 3. 11:35
느시를 기다리며 : 한반도의 느시
(2) 한반도 느시의 과거와 기록
느시. 생소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느시는 크낙새, 원앙사촌 등 이미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몇 종을 제외하고 남한에 도래하는 멸종위기 조류 중 가장 드물게 관찰되는 종이다. 느시는 아직 멸종상태에 이르지 않았지만 남한에서는 2005년 이후로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느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 적었을 뿐더러 그들 대부분도 단편적인 지식만을 공유하고 있기에 이들에 대한 지식은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다. 어쩌면 느시는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라 몇 십 년 전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 이후 이미 개체수가 격감한 것으로 알려진 느시는 해방 후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반도 생태계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이번에는 느시에 대해 얘기해 보자.
훈민정음에도 등장하는 ‘너새’
생뚱맞게 등장한 ‘너새’라는 이름에 당황한 독자들이 있을 거 같아 설명하는데 너새는 느시의 다른 이름이다. (이외에도 능에, 들칠면조 등으로 불리고 북한에서는 너화라고 부른다.) 사실 느시는 한반도에서 그 유래가 깊을뿐더러 자생 생물들에 대해 상당히 빈곤한 기록을 가진 우리 역사의 현실에 비춰볼 때 비교적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새다. 문헌상 느시의 최초 등장은 훈민정음 해례본 (1446)에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鴇 (능에. 보)를 ‘너’로 표기했다. 이후에도 1748년 동문유해에서 ‘너새’, 19세기 쓰여진 별주부전과 별토전에서 각각 ‘너시’와 ‘느시’로 등장한다. 19세기에 가서야 등장한 ‘느시’란 이름은 너새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너새라는 명칭은 비교적 늦게까지인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걸픠여기(역어유해, 1690년) 걸퓌여기(동문유해, 1748년), 걸푸역이(광재물보, 19세기)’ 같은 ‘너새’와는 전혀 연관성 없는 형태들도 보인다.
느시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연산군 때 일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 41권, 7년(1501) 11월 25일 2번째기사) “ 전교하기를, 너새[鴇] 한 쌍을 경기도에 명하여 산 채로 잡아 진상하게 하라.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이 느시 한 쌍을 산채로 바치도록 한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느시에 대한 기록은 다른 생물 종에 비해 가장 빠른 편에 속하고 자료도 풍부하다.(비록 명칭뿐이지만.) 이를 근거로 조선시대에는 느시가 흔한 종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근대시기에 느시
느시는 해방 전 까지 전국 각지에 다수가 도래, 월동하였다. 1918년 Y.Kurodasms에 기록에 따르면 경기도 난지도, 파주, 한강,임진강 하구의 평야, 양천군 읍내, 부평 평야, 수원 군포장, 영등포 부근, 덕정역 등지에서 4~5개를 볼 수 있었다고 하고 동아시아 아종을 학계에 보고한 폴란드의 Taczanowski는 1888년 "겨울철 ‘느시’를 서울과 만주 사이에서 100여마리 이상 만날 수 있었다”며 “그렇지만 서울의 이남과 여름철에는 이 새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영국의 Campbell은 1887~1889년 겨울에 느시를 다수 포획했으며, 30~40 마리의 느시 무리를 흔히 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후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대부분의 생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일제 강점 (1910)이후 그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7년 4월 15일 동아일보 '다시 찾아온 희귀조 너새'에서는 '너새의 고기는 칠면조보다 훨씬 맛이 있어 일제 때는 일본인 사냥꾼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고 일제 시기 개체수 감소 원인을 설명했다. 하지만 일제 때 까지만 해도 비교적 전국적으로 일정한 개체수가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느시 개체수는 6. 25를 기점으로 개체수가 격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6.25 이후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전후에 느시
전후 남한에 도래하는 느시는 이전까지 일정한 개체군이 도래했던 것과는 달리 1~2마리가 간헐적으로 도래하는 희귀새가 되었다. 도래지역은 주로 경기도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19세기 Taczanowski가 서울 이남에서는 관찰할 수 없다고 한 것과 달리 경상도 지역, 낙동강 하구 평야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50년대에는 56년 김포에서 1월 7일 암컷 1마리가 채집되었고 58년 1월 28일에는 서울 남동쪽 4~5마일 한강변에서 1개체가, 12월에는 수컷 1마리가 채집되었다.
느시 발견, 채집 기록은 60년대 들어서 조금 증가했다. 1960년 1월 21일에 부산 낙동강에서 수컷 1마리가 채집된 것을 시작으로 62년 경북 성주에선 10월 1일 1개체, 11월 1일 1개체가 각각 채집되었다. 경북 고령군에선 1964년 12월 23일 1개체가 채집되었고 김해 평야에서는 1967년 11월 25일 수컷 1개체가 채집되었다. 50년대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 60년대 느시 채집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언론보도에서는 느시 발견기록이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 1968년에서야 처음으로 동아일보가 속초 지방에서 발견된 느시 4마리에 대해 보도했다.
(1968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너새 재출현’ 속초에서 발견된 느시 4마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느시는 전후 남한에 도래하는 개체수가 크게 감소해 경기 지방이나 낙동강 해안 지방에 1~2마리 씩 찾아오는 새가 되었다. 위에 기사는 전후 언론에 등장한 최초에 느시 발견 기사지만 이전에도 느시는 적게나마 경기와 낙동강 하구에 도래했다. .)
(1968년 2월 26일 동아일보 기사. ‘너새 수난 악질 사냥꾼이 남획’ 느시 4마리 중 2마리나 밀렵당했다.)
1968년 2월, 강원도 속초에 느시 4마리(수 1 암 3)가 나타났지만 이들 느시는 3일 후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포월리에서 밀렵꾼에 의해 2마리가 희생되고 말았다. 같은 해 5월 30일에는 종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이 본격적인 경제성장으로 접어든 70년대는 어땠을까? 1970년 2월 10일 한 마리가 채집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 29일엔 외국인이 강화도에서 남하 중인 7개체 (수4 암3)를 목격했다. 1974년 1월 연평도에서 생포된 개체는 창경원으로 보내졌으나 사육 도중 죽었다. 1976년 2월 26일엔 경기도 안중에서 수컷 1개체가 포획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77년 3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원안3리에 사는 박영순씨(당시 26)는 자신의 논에서 앞가슴과 날개죽지에 심한 상처를 입은 새를 잡았다. 박씨는 15일동안 냉이 등을 먹으며 키웠으나 곧 죽고 말았다. 박씨는 죽은 새를 박제로 만들었고 경희대 조류연구소장인 원병오 박사에게 기증했다. 다음 얘기는 말안해도 알겠지만 그 새는 느시였다. 원 박사는 그 느시가 철조망이나 전선에 걸려 다친 것으로 추측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2마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1977년 4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다시 찾아온 희귀조 너새’ 기사는 자취를 감춘 지 10년만에 찾아왔다고 소개했지만 위에서도 봤듯이 그건 낭설이었다. )
이후 느시는 1982년 1월 낙동강 하구 김해 평야에서 1마리가 관찰된 이후 쭉 소식이 없었다. 1981년 8월 14일자 경향신문 ‘종의 위기. 느시’에선 ‘10여년전만 해도 낙동강 하류 철새도리지인 사자등, 가덕도 건너편 사구에 어렵지 않게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고 소개했지만 관찰기록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물론 오류다.)
(2005년 11월 20일 철원에서 발견된 남한 마지막 느시. 암컷으로 추정된다. 이후 누구도 남한에서 느시를 볼 수 없었다.)
느시는 1982년 1월 낙동강 하구 김해 평야에서 1마리가 관찰된 이후 쭉 소식이 없었다. 1981년 8월 14일자 경향신문 ‘종의 위기. 느시’에선 ‘10여년전만 해도 낙동강 하류 철새도리지인 사자등, 가덕도 건너편 사구에 어렵지 않게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고 소개했지만 관찰기록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물론 오류다.)
이후 느시는 16년간 소식이 없다가 1998년 철원평야에서 4마리가 관찰되었고 이후에도 2001년 겨울철 철원 민통선 내에서 정보장교인 신명식씨가 한 마리 발견하여 촬영에 성공했다. 2003년에도 철원에 느시 2마리가 도래했으며, 2005년 11월 20일 한국두루미보존네트워크 이기섭 박사 일행이 철원평야에서 2마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누구도 남한에서 느시를 볼 수 없었다. 2011년 11월경 철원평야에서 느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희귀한 새가 되었다.’ - 북한에 느시
북한 원로조류학자인 원홍구 박사(1888-1970)의 저서, “조선 조류의 분포와 그 경제적 의의(1956)‘에서는 느시를 ’너홰‘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능에‘는 평안북도 지방 방언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국내에서 다수가 월동한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후 ’조선 조류지‘ 등에선 ’개체 수가 많이 줄었다.‘ , ’지금은 아주 희귀한 새가 되었다.‘고 서술하는 등 남한과 마찬가지로 전후 느시 개체수가 감소 추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텃새가 아니라 겨울철새인 느시 특성상 당연한 것이다. 1980년 1월에는 평안남도 너화가 천연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윤승흠이 조선문학 (1973년 5월호)에 기재한 ‘푸르른 숲 속에 너화 떼가 날아온다.’를 보자. ‘산좋고 물맑은 금수강산에 너화 떼가 훨훨 날아든다. 높은 산 깊은 골 그 어디나 좋아 너화 떼가 무리지어 내린다. … 한 무리, 또 한 무리... 세상의 모든 너화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듯..’ 이외 내용은 ‘금수강산을 만들어주신 수령님께 감사하다.’는 전형적인 북한 시다. 이 시가 발표된 것은 1973년으로 시기적으로 주목해 볼만한 시다. 이 시기 남한에선 이미 몇 년에 한 번씩 1~2마리가 드물게 관찰되는 등 아주 희귀한 새가 되었는데 이 시에 등장하는 ‘세상의 모든 너화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듯’이라는 표현은 느시가 무리지어 많은 수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1~2마리 보고 세상의 모든 너화라고 지칭하진 않았을 테니) 시의 내용을 볼 때 과거를 회상하는 글은 아닌 듯하나 작가에 과거 경험에 의존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창작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위에 시가 아니더라도 북한에는 비교적 늦게까지 느시가 무리지어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평안남도에서만 해도 1960~1970년동안 온천군 증산벌에 4개체가 도래했고, 문덕군 룡오리에선 1994년 3월 18~26일동안 17개체가 도래했다. 청천강 하구에선 1992,1993,1995년 2~15개체가 관찰되어 북한은 90년대까지도 느시가 무리 지어 월동했음을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엔 남한에서 느시를 볼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공식적인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느시 복원 사업을 주도했던 이일범 대전동물원 종보존센터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까지는 날아오는 느시가 남한에는 오지 않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근데 느시 복원 사업은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동물박사 칼럼은 2013년 7월 15일부터 다시 연재됩니다.
안녕하세요. 동물박사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다시 칼럼을 휴재하여 7월 15일 월요일부터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느시 편이 원래는 2편 분량으로 기획했는데 3편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한 주제를 끝마치지 못하고 휴재하는 게 꺼림칙 하기도 해서 이번 편에 다 써볼려고 했는데 그러면 중심이 흐트려져서 다음 편에 다시 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 한반도 느시의 과거와 기록
느시. 생소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느시는 크낙새, 원앙사촌 등 이미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몇 종을 제외하고 남한에 도래하는 멸종위기 조류 중 가장 드물게 관찰되는 종이다. 느시는 아직 멸종상태에 이르지 않았지만 남한에서는 2005년 이후로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느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 적었을 뿐더러 그들 대부분도 단편적인 지식만을 공유하고 있기에 이들에 대한 지식은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다. 어쩌면 느시는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라 몇 십 년 전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 이후 이미 개체수가 격감한 것으로 알려진 느시는 해방 후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반도 생태계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이번에는 느시에 대해 얘기해 보자.
훈민정음에도 등장하는 ‘너새’
생뚱맞게 등장한 ‘너새’라는 이름에 당황한 독자들이 있을 거 같아 설명하는데 너새는 느시의 다른 이름이다. (이외에도 능에, 들칠면조 등으로 불리고 북한에서는 너화라고 부른다.) 사실 느시는 한반도에서 그 유래가 깊을뿐더러 자생 생물들에 대해 상당히 빈곤한 기록을 가진 우리 역사의 현실에 비춰볼 때 비교적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새다. 문헌상 느시의 최초 등장은 훈민정음 해례본 (1446)에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鴇 (능에. 보)를 ‘너’로 표기했다. 이후에도 1748년 동문유해에서 ‘너새’, 19세기 쓰여진 별주부전과 별토전에서 각각 ‘너시’와 ‘느시’로 등장한다. 19세기에 가서야 등장한 ‘느시’란 이름은 너새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너새라는 명칭은 비교적 늦게까지인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걸픠여기(역어유해, 1690년) 걸퓌여기(동문유해, 1748년), 걸푸역이(광재물보, 19세기)’ 같은 ‘너새’와는 전혀 연관성 없는 형태들도 보인다.
느시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연산군 때 일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 41권, 7년(1501) 11월 25일 2번째기사) “ 전교하기를, 너새[鴇] 한 쌍을 경기도에 명하여 산 채로 잡아 진상하게 하라.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이 느시 한 쌍을 산채로 바치도록 한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느시에 대한 기록은 다른 생물 종에 비해 가장 빠른 편에 속하고 자료도 풍부하다.(비록 명칭뿐이지만.) 이를 근거로 조선시대에는 느시가 흔한 종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근대시기에 느시
느시는 해방 전 까지 전국 각지에 다수가 도래, 월동하였다. 1918년 Y.Kurodasms에 기록에 따르면 경기도 난지도, 파주, 한강,임진강 하구의 평야, 양천군 읍내, 부평 평야, 수원 군포장, 영등포 부근, 덕정역 등지에서 4~5개를 볼 수 있었다고 하고 동아시아 아종을 학계에 보고한 폴란드의 Taczanowski는 1888년 "겨울철 ‘느시’를 서울과 만주 사이에서 100여마리 이상 만날 수 있었다”며 “그렇지만 서울의 이남과 여름철에는 이 새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영국의 Campbell은 1887~1889년 겨울에 느시를 다수 포획했으며, 30~40 마리의 느시 무리를 흔히 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후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대부분의 생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일제 강점 (1910)이후 그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7년 4월 15일 동아일보 '다시 찾아온 희귀조 너새'에서는 '너새의 고기는 칠면조보다 훨씬 맛이 있어 일제 때는 일본인 사냥꾼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고 일제 시기 개체수 감소 원인을 설명했다. 하지만 일제 때 까지만 해도 비교적 전국적으로 일정한 개체수가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느시 개체수는 6. 25를 기점으로 개체수가 격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6.25 이후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전후에 느시
전후 남한에 도래하는 느시는 이전까지 일정한 개체군이 도래했던 것과는 달리 1~2마리가 간헐적으로 도래하는 희귀새가 되었다. 도래지역은 주로 경기도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19세기 Taczanowski가 서울 이남에서는 관찰할 수 없다고 한 것과 달리 경상도 지역, 낙동강 하구 평야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50년대에는 56년 김포에서 1월 7일 암컷 1마리가 채집되었고 58년 1월 28일에는 서울 남동쪽 4~5마일 한강변에서 1개체가, 12월에는 수컷 1마리가 채집되었다.
느시 발견, 채집 기록은 60년대 들어서 조금 증가했다. 1960년 1월 21일에 부산 낙동강에서 수컷 1마리가 채집된 것을 시작으로 62년 경북 성주에선 10월 1일 1개체, 11월 1일 1개체가 각각 채집되었다. 경북 고령군에선 1964년 12월 23일 1개체가 채집되었고 김해 평야에서는 1967년 11월 25일 수컷 1개체가 채집되었다. 50년대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 60년대 느시 채집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언론보도에서는 느시 발견기록이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 1968년에서야 처음으로 동아일보가 속초 지방에서 발견된 느시 4마리에 대해 보도했다.
(1968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너새 재출현’ 속초에서 발견된 느시 4마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느시는 전후 남한에 도래하는 개체수가 크게 감소해 경기 지방이나 낙동강 해안 지방에 1~2마리 씩 찾아오는 새가 되었다. 위에 기사는 전후 언론에 등장한 최초에 느시 발견 기사지만 이전에도 느시는 적게나마 경기와 낙동강 하구에 도래했다. .)
(1968년 2월 26일 동아일보 기사. ‘너새 수난 악질 사냥꾼이 남획’ 느시 4마리 중 2마리나 밀렵당했다.)
1968년 2월, 강원도 속초에 느시 4마리(수 1 암 3)가 나타났지만 이들 느시는 3일 후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포월리에서 밀렵꾼에 의해 2마리가 희생되고 말았다. 같은 해 5월 30일에는 종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이 본격적인 경제성장으로 접어든 70년대는 어땠을까? 1970년 2월 10일 한 마리가 채집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 29일엔 외국인이 강화도에서 남하 중인 7개체 (수4 암3)를 목격했다. 1974년 1월 연평도에서 생포된 개체는 창경원으로 보내졌으나 사육 도중 죽었다. 1976년 2월 26일엔 경기도 안중에서 수컷 1개체가 포획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77년 3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원안3리에 사는 박영순씨(당시 26)는 자신의 논에서 앞가슴과 날개죽지에 심한 상처를 입은 새를 잡았다. 박씨는 15일동안 냉이 등을 먹으며 키웠으나 곧 죽고 말았다. 박씨는 죽은 새를 박제로 만들었고 경희대 조류연구소장인 원병오 박사에게 기증했다. 다음 얘기는 말안해도 알겠지만 그 새는 느시였다. 원 박사는 그 느시가 철조망이나 전선에 걸려 다친 것으로 추측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2마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1977년 4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다시 찾아온 희귀조 너새’ 기사는 자취를 감춘 지 10년만에 찾아왔다고 소개했지만 위에서도 봤듯이 그건 낭설이었다. )
이후 느시는 1982년 1월 낙동강 하구 김해 평야에서 1마리가 관찰된 이후 쭉 소식이 없었다. 1981년 8월 14일자 경향신문 ‘종의 위기. 느시’에선 ‘10여년전만 해도 낙동강 하류 철새도리지인 사자등, 가덕도 건너편 사구에 어렵지 않게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고 소개했지만 관찰기록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물론 오류다.)
(2005년 11월 20일 철원에서 발견된 남한 마지막 느시. 암컷으로 추정된다. 이후 누구도 남한에서 느시를 볼 수 없었다.)
느시는 1982년 1월 낙동강 하구 김해 평야에서 1마리가 관찰된 이후 쭉 소식이 없었다. 1981년 8월 14일자 경향신문 ‘종의 위기. 느시’에선 ‘10여년전만 해도 낙동강 하류 철새도리지인 사자등, 가덕도 건너편 사구에 어렵지 않게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고 소개했지만 관찰기록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물론 오류다.)
이후 느시는 16년간 소식이 없다가 1998년 철원평야에서 4마리가 관찰되었고 이후에도 2001년 겨울철 철원 민통선 내에서 정보장교인 신명식씨가 한 마리 발견하여 촬영에 성공했다. 2003년에도 철원에 느시 2마리가 도래했으며, 2005년 11월 20일 한국두루미보존네트워크 이기섭 박사 일행이 철원평야에서 2마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누구도 남한에서 느시를 볼 수 없었다. 2011년 11월경 철원평야에서 느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희귀한 새가 되었다.’ - 북한에 느시
북한 원로조류학자인 원홍구 박사(1888-1970)의 저서, “조선 조류의 분포와 그 경제적 의의(1956)‘에서는 느시를 ’너홰‘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능에‘는 평안북도 지방 방언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국내에서 다수가 월동한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후 ’조선 조류지‘ 등에선 ’개체 수가 많이 줄었다.‘ , ’지금은 아주 희귀한 새가 되었다.‘고 서술하는 등 남한과 마찬가지로 전후 느시 개체수가 감소 추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텃새가 아니라 겨울철새인 느시 특성상 당연한 것이다. 1980년 1월에는 평안남도 너화가 천연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윤승흠이 조선문학 (1973년 5월호)에 기재한 ‘푸르른 숲 속에 너화 떼가 날아온다.’를 보자. ‘산좋고 물맑은 금수강산에 너화 떼가 훨훨 날아든다. 높은 산 깊은 골 그 어디나 좋아 너화 떼가 무리지어 내린다. … 한 무리, 또 한 무리... 세상의 모든 너화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듯..’ 이외 내용은 ‘금수강산을 만들어주신 수령님께 감사하다.’는 전형적인 북한 시다. 이 시가 발표된 것은 1973년으로 시기적으로 주목해 볼만한 시다. 이 시기 남한에선 이미 몇 년에 한 번씩 1~2마리가 드물게 관찰되는 등 아주 희귀한 새가 되었는데 이 시에 등장하는 ‘세상의 모든 너화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듯’이라는 표현은 느시가 무리지어 많은 수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1~2마리 보고 세상의 모든 너화라고 지칭하진 않았을 테니) 시의 내용을 볼 때 과거를 회상하는 글은 아닌 듯하나 작가에 과거 경험에 의존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창작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위에 시가 아니더라도 북한에는 비교적 늦게까지 느시가 무리지어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평안남도에서만 해도 1960~1970년동안 온천군 증산벌에 4개체가 도래했고, 문덕군 룡오리에선 1994년 3월 18~26일동안 17개체가 도래했다. 청천강 하구에선 1992,1993,1995년 2~15개체가 관찰되어 북한은 90년대까지도 느시가 무리 지어 월동했음을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엔 남한에서 느시를 볼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공식적인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느시 복원 사업을 주도했던 이일범 대전동물원 종보존센터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까지는 날아오는 느시가 남한에는 오지 않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근데 느시 복원 사업은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동물박사 칼럼은 2013년 7월 15일부터 다시 연재됩니다.
안녕하세요. 동물박사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다시 칼럼을 휴재하여 7월 15일 월요일부터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느시 편이 원래는 2편 분량으로 기획했는데 3편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한 주제를 끝마치지 못하고 휴재하는 게 꺼림칙 하기도 해서 이번 편에 다 써볼려고 했는데 그러면 중심이 흐트려져서 다음 편에 다시 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