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고사에 왜 심양이 언급되고 위치는 어디인가?
단기고사 전조선기 벌음 단군 28년에 심양태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28년에 임금께서 심양태수(瀋陽太守)를 불러 이르시기를 “경(卿)이 심양을 지키면서부터 오늘까지 헐뜯는 말이 끊이지 않으나 내가 사람을 시켜 심양을 살피니, 밭과 들이 크게 개발되었으며, 백성은 잘 살고 소와 말이 많이 번식되었으니. 이것은 경이 내 좌우(左右) 신하에게 아첨하지 않은 까닭이라.”하시고 벼슬을 높이고 상을 주셨다.
청해태수(靑海太守)를 불러 이르시기를 “경이 청해를 지키면서 오늘까지 칭찬의 소리가 끊이지 않으나 내가 사람을 보내어 청해를 살펴보니, 밭과 들이 황폐해지고 백성은 가난하여 가축이 번식하지 않으니, 이것은 경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자랑했기 때문이라. 겉모양만 내는 사람은 세상이 다 미워하는데 하물며 군주(君主)된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내가 이미 경의 재능을 알았으니, 경이 일부러 한 일이 아니니, 다시 청해에 가서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라.”하시고 청해로 보내셨다.창해태수(滄海太守)를 불러 “경이 창해를 지키면서 오늘까지 칭찬도 없고 헐뜯는 말도 없으니, 관원된 도리는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있으니, 책임을 잊고 벼슬자리를 빼앗아 녹(祿)을 탐하는 자는 신하가 할 일이 아니다. 경은 명심하라.”하시고 창해로 보내니, 이때부터 모든 관직에 거짓 자리를 차지하고 먹고 사는 자가 없었다.
심양태수와 청해태수와 창해태수를 불러놓고 그들이 얼마나 고을을 잘 다스렸는지에 대하여 벌음 단군이 평가하는 것이다.
청해는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창해는 분명 오늘날 천진 남쪽으로 창주시(滄州市)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곳은 벌음단군 시절에 서쪽 변방으로서 벌음 단군이 변방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리라. 따라서 청해와 심양은 모두 오늘날 창주시 근방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심양은 요하 근처이고 요하 근처의 심양은 원나라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단기고사에 나오는 심양은 과연 어디일까?
사료에 기록을 찾아보면 이곳은 河間이다.
<<前漢書卷十五上>>
號諡名 호시명 |
屬 소속 |
始封位次 처음 봉한 년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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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陽侯自爲 심양후 자위(自爲가 스스로 올랐다는 말인지 심양후의 호칭인지 알 수 없다) |
河間獻王子 하간 헌왕의 아들 |
不得封年 알 수 없음 |
勃海 발해(군?) |
河間府
獻縣. 在府城南六十里, 本漢樂成縣地, 屬河間國. 東漢改樂陵縣. 三國魏又改樂城縣. 隋改廣成縣, 又改樂夀縣, 屬瀛州. 唐屬深州. 宋屬河間府, 以景城縣省入. 金改夀州, 尋改獻州. 元因之. 本朝改為獻縣. 編戸二十七里.
하간부
헌현. 하간부성의 남쪽 60리에 있다. 원래 漢국의 낙성현 땅이고 하간국에 속하였었다. 후한에서는 낙릉현으로 바꾸었었다. 삼국의 魏국에서는 낙성현으로 바꾸었다. 隋국에서는 광성현으로 바꾸었고 또한 낙수현으로 바꾸었는데 영주(瀛州)에 속한다. 唐국에서는 심주에 속하였었다. 宋국에서는 하간부에 속하였었는데 경성현을 없애고 편입시켰었다. 金에서는 수주로 하였다가 곧이어 헌주로 바꾸었다. 元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明국에서는 헌현으로 바꾸었다. 編戸二十七里.
公署長蘆都轉運鹽使司, 在滄州冶東南. 河間衛, 在府治南永樂中建. 瀋陽中屯衛, 在府治東南. 大同中屯衛, 在府治西俱永樂元年建. 天津衛. 天津左衛. 天津右衛...이하생략...
공서장로도전운염사사, 창주(滄州)의 치소 동남쪽에 있다.
하간위, 하간부의 치소 남쪽에 있다. 영락 연간에 설치하였다.
심양 중둔위, 하간부 치소 동남쪽에 있다.
대동중둔위, 하간부 치소 서쪽에 있는데 영락 원년에 설치하였다.
천진위. 천진좌위. 천진우위...이하생략...
단기고사에 심양은 지금의 심양이 아니라 창주시 서쪽의 하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