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제15대 미천대제기 26년 이후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9. 04:45
○ 26년{단기2658년/AD325}을유, 하4월, <방부>를 <낙랑왕>으로, <재생>을 태보로, <오맥남>을 좌보로, <명림섭>을 우보로, <우린>을 <남소>태수로 삼았다.  [2월,] <석륵>이 <우문걸득귀>에게 관작을 올려주고는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외>는 세자인 <모용황>・<색두>・<단국>을 함께 보내어 <석륵>의 <걸득귀>를 치게 하였고, <요동>재상 <배억>을 우익으로 <모용인>을 좌익으로 삼았다. <걸득귀>는 <연수>를 거점으로 하여 <황>에게 대적하면서, 형의 아들인 <실발웅>을 보내어 <인>에게 대적하게 하였다. <인>은 <실발웅>을 쳐서 목을 베고 승승하였으며, <황>과 합쳐 <걸득귀>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걸득귀>는 군대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였다. <황>과 <인>은, <우문>의 국성으로 들어가서는, 가볍게 무장한 군병으로 하여금 <걸득귀>를 쫓게 하였더니, 그 나라 땅을 3백여 리나 지났다가 돌아왔다. 중기{무거운 전쟁도구}와 가두어 기르던 짐승을 모조리 노획하였더니 100만이나 되었으며, 투항하여 온 백성도 수만이나 되었다. [3월,] <단말배>가 죽어, 동생 <단아>가 섰다.  5월, <유요>가 <석호>와 <팔특판>에서 싸웠다. <유요>는, 군졸들이 까닭 없이 놀래어 달아나고 무너져서, <장안>으로 돌아갔으며, 이에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어 병이 생겼다.  10월, <백제>의 하늘에서는 풍랑이 서로 부딪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11월, <비류>가 <구원>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손수 사슴을 쏘았다.  계사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二十六年乙酉, 夏四月, <方夫><楽浪王>, <再生>太輔, <烏陌南>[左]輔, <松巨>右輔, <明臨涉>「西部」于台, <于璘><南蘇>太守.  [二月,] <石勒>, 加<宇文乞得皈>官爵使之擊<慕容廆>. <廆>, 遣世子<皝>・<索頭>・<段國>共擊之, 以<遼東>相<裴嶷>爲右翼, <慕容仁>爲左翼. <乞得皈>, 據<渷水>以拒<皝>, 遣兄子<悉拔雄>拒<仁>. <仁>, 擊<悉拔雄>斬之, 乘勝, 與<皝>攻<乞得皈>大破之. <乞得皈>棄軍走. <皝>・<仁>進入其國城, 使輕兵追<乞得皈>, 過其國三百餘里而還, 盡獲其國重器・畜産以百萬計, 民之降附者數萬. [三月,] <段末柸>卒, 弟<牙>立. 五月, <劉曜>與<石虎>戰于<八特阪>. <曜>軍, 無故大驚, 士卒奔潰, 乃皈<長安>, 憤恚成疾.  十月, <百濟>, 天有聲如風浪相激. 十一月, <比流>, 獵于<狗原>北, 手射鹿.   癸巳朔, 日食.

○ 26년{단기2658년/AD325}을유, 하4월, <방부>를 <낙랑왕>으로, <재생>을 태보로, <오맥남>을 좌보로, <명림섭>을 우보로, <우린>을 <남소>태수로 삼았다.  [2월,] <석륵>이 <우문걸득귀>에게 관작을 올려주고는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외>는 세자인 <모용황>・<색두>・<단국>을 함께 보내어 <석륵>의 <걸득귀>를 치게 하였고, <요동>재상 <배억>을 우익으로 <모용인>을 좌익으로 삼았다. <걸득귀>는 <연수>를 거점으로 하여 <황>에게 대적하면서, 형의 아들인 <실발웅>을 보내어 <인>에게 대적하게 하였다. <인>은 <실발웅>을 쳐서 목을 베고 승승하였으며, <황>과 합쳐 <걸득귀>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걸득귀>는 군대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였다. <황>과 <인>은, <우문>의 국성으로 들어가서는, 가볍게 무장한 군병으로 하여금 <걸득귀>를 쫓게 하였더니, 그 나라 땅을 3백여 리나 지났다가 돌아왔다. 중기{무거운 전쟁도구}와 가두어 기르던 짐승을 모조리 노획하였더니 100만이나 되었으며, 투항하여 온 백성도 수만이나 되었다. [3월,] <단말배>가 죽어, 동생 <단아>가 섰다.  5월, <유요>가 <석호>와 <팔특판>에서 싸웠다. <유요>는, 군졸들이 까닭 없이 놀래어 달아나고 무너져서, <장안>으로 돌아갔으며, 이에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어 병이 생겼다.  10월, <백제>의 하늘에서는 풍랑이 서로 부딪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11월, <비류>가 <구원>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손수 사슴을 쏘았다.  계사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慕容廆>, 與<段>氏・<方睦>, 為<段牙>謀, 使之徙都. <牙>從之, 則去<令支>, 國人不楽. <段疾陸眷>之孫<遼>, 欲奪其位, 以徙都爲<牙>罪, 十二月, 帥國人攻<牙>殺之, 自立. <段>氏, 自<務勿塵>以來, 日益彊盛, 其地西接<漁陽>, 東界<遼水>. 所統<胡>・<晉>三萬餘戶, 控弦四五萬騎.  <代>王<賀傉>卒, 弟<紇那>立.

○ <모용외>가 <단>씨 및 <방목>과 더불어 <단아>를 위한 모의를 하고는 그에게 도읍을 옮기라 하였더니, <단아>는 즉각 그 결정을 따라 <령지>로 갔더니,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은 반갑지 않아 하였다. <단질육권>의 손자인 <료>는, <단아>의 지위를 빼앗고 자, 도읍을 옮긴 것을 <단아>의 죄로 삼고는, 12월에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을 동원하여 <단아>를 죽이고, 스스로 위에 올랐다. <단>씨는 <무물진> 이래로 날이 갈수록 강성하여져서, 그들의 땅은 서쪽으로는 <어양{漁陽}>에 접하고 동쪽 경계는 <요수{遼水}>이었다. <호>인과 <진>인을 합쳐 3만 호를 통솔하였기에 공현{騎射兵}이 4, 5만이나 되었다.  <대>의 왕 <하녹>이 죽고, 동생인 <흘나>가 섰다.

◎ 二十七年丙戌, 春正月, <周>皇后生女<輝陽>.  三月, 皇后, 與皇太子<斯由>, 如<龍山>「溫湯」.  <石勒>夜微行檢察諸營.  五月, <仙發>「中部」沛者.  十月, <石勒>, 用<程遐>之謀, 營<鄴宮>, 使世子<弘>鎭<鄴>. <石虎>, 自以功多, 無去<鄴>之意, 而怨<程遐>.

○ 27년{단기2659년/AD326}병술, 춘정월, <주>황후가 딸 <휘양>을 낳았다.  3월, 황후가 황태자 <사유>를 데리고 <용산>의 <온탕>에 갔다.  <석륵>은 야간에 모든 영을 미행하여 검찰하였다.  5월, <선발>을 「중부」패자로 삼았다.  10월, <석륵>은, <정하>의 책략을 따라, <업궁>을 짓고, 세자 <홍>을 시켜 <업>에 진을 두게 하였다. <석호>는, 자신은 공적이 많아서 <업>으로 갈 생각이 없었기에, <정하>를 원망하였다.

◎ 二十八年丁亥, 夏五月, 上, 與太子・皇后, 如<西川>, 勧民耕種, 宴民父老.  七月, <濟>有雲如赤烏夾日.  九月, 內臣佐平<優福>據<北漢城>反, <比流>發兵討之.  是歲, <石虎>擊<代>王. <紇那>戰于<句注><陘北>. <紇那>, 兵敗, 徙都<大寗>以避之. <代>王<鬱律>之子<翳槐>居於其舅<賀蘭>部, <紇那>遣使求之, <賀蘭>大人<藹頭>擁護不遣. <紇那>, 與<宇文>部, 共擊<藹頭>, 不克.

○ 28년{단기2660년/AD327}정해, 하5월, 상이 태자와 황후를 데리고 <서천>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농사짓기를 권장하고, 민간의 부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7월, <백제>에서는 붉은 까마귀처럼 생긴 구름이 해를 감쌌다.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에서 반란하여, <비류>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이 시절에, <석호>가 <대>의 왕 <흘나>를 공격하니, <구주{句注}><형북{陘北}> 땅에서 맞아 싸웠다. <흘나>는 군병이 패하자 도읍을 <대녕>으로 옮기어 피하였다. <대>의 왕이었던 <울률>의 아들 <예괴>는 장인의 <하란>부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흘나>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내어달라 하였더니, <하란>대인 <애두>가 감싸고 보호하여 보내주지 않았다. <흘나>가, <우문>부와 함께, <애두>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二十九年戊子, 春正月, <角>氏生太子女<豆>氏. 太子, 與<周>皇后, 如「溫湯」.  二月, 太輔<再生>死. <烏陌南>代之, 以<緣>后爲妾, <烽上帝>皇后也. <松巨>左輔, <仙述>右輔, <祖文><安平>太守, <棤><新城>太守, <芙莢>大注簿. 寒微功臣連登三輔鼎任, 人以為鰍龍同穴.  五月, <芙>太后崩. <尙宝>妻, 生<草>后, 得寵封太后, 車駕出入依於<乙>太后. <乙>太后崩, 獨專太后. 上, 聼其所為<芙>氏大昌, 于是時, 年六十六. 其父<布>, <沸流>神豪, 出於<芙芬奴>, 云.

○ 29년{단기2661년/AD328}무자, 춘정월, <각>씨가 태자의 딸 <두>씨를 낳았다. 태자가 <주>황후를 모시고 온탕에 갔다.  2월, 태보 <재생>이 죽었다. <오맥남>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봉상제>의 황후였던 <연>후를 첩으로 두게 되었다. <송거>를 좌보로, <선술>을 우보로, <조문>을 <안평>태수로, <석>을 <신성>태수로, <부협>을 대주부로 삼았다. 한미한 출신의 공신들이 연이어 3보의 자리에 올라 세 발 솥처럼 정사를 담당하니, 사람들은 미꾸라지가 용과 한 구멍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5월, <부>태후가 죽었다. <상보>의 처로, <초{草}>후를 낳아서 총애를 받더니, 태후로 봉함을 받았었다. 바퀴 달린 가마로 출입하며 <을{乙}>태후를 의지하였었으나, <을>태후가 죽자 혼자서 태후로 있어왔다. 상이 <부>씨들이 융성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돌보아 준 것이었는데, 올해로 나이가 66살이었다. 부친 <포>는 <비류>에서 유별난 호걸이었으며, <부분노>의 후손이라고 한다.

◎ 七月, <石虎>, 帥衆四萬自<軹關>西入, 擊<趙><河東>. 應之者五十餘縣, 遂進攻<蒲阪>. <趙>主<曜>, 遣<河間>王<述>, 發<氐>・<羌>之衆, 屯<秦州>以備<張駿>・<楊難敵>, 自将中外精銳水陸諸軍以救<蒲阪>, 自<衛關>北濟. <虎>懼引退, <曜>追之. 八月, 及於<高候>與<虎>戰, 大破之, 斬<石瞻>. 枕尸二百餘里, 收其資仗億計. <虎>犇<趙歌>. <曜>, 濟自<大陽>, 攻<石生>于<金墉>, 決<千金堨>以灌之. 分遣諸将攻<汲郡>・<河內>, <後趙><榮陽>太守<尹矩>・<野王>太守<張進>等, 皆降之. <襄國>大震. <張駿>, 治兵, 欲乘虛襲<長安>. 理曹郞中<索詢>, 諫, 曰;“<劉曜>雖東征, 其子<胤>守<長安>, 未易輕也. 借使小有所獲, 彼若釋東方之圖, 還與我校, 禍難之期未可量也.” <駿>乃止.

○ 7월, <석호>가 무리 4만을 이끌고 <지관>서쪽으로 들어와서 <조>의 <하동>을 쳤다. 50여 현이 호응하여서 <포판>으로 진공하였다. <조{前趙}>주 <유요>는, <하간>왕 <술>을 보내서 <저>・<강>의 무리를 이끌고 <진주>에 주둔하여 <장준>과 <양난적>에 대비케 하였으며, 자신은 중외의 정예 수・륙군 들을 이끌고 <포판>을 구원하려 <위관>에서 북쪽으로 하{河}를 건넜다. 이에 <석호>는 두려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물러났고, <유요>는 그들을 추격하였다. 8월엔 <고후>의 땅에 이르러 <석호>와 싸워 크게 이기고 <석첨>의 목을 쳤다. 널려있는 시체가 200여리에 달하였고, 수거한 물자와 병장기의 숫자가 억에 다다랐다. <석호>는 허둥지둥 <조가{趙歌}>로 도망하렸다. <유요>는 <대양>에서 <하>를 건너 <금용>에 있는 <석생>을 공격하으며, <천금제>를 터뜨려서 <금용>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서 <급군>과 <하내>를 쳤더니 <후조>의 <영양>태수 <윤구>와 <야왕>태수 <장진> 등은 모두 항복하였고, <양국{<後趙>의 都邑}>이 크게 흔들렸다. {<후조>의} <장준>이 군병을 추슬러서 허술함을 틈타 <장안>을 공격하려 하였더니, 이조낭중 <색순>이 간하길; “<유요>가 비록 동쪽 정벌에 나섰으나, 그의 아들 <윤>이 <장안>을 지키고 있으니, 가벼이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가령 얻는 것이 조금 있다고 하여도, 동방 정벌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우리를 교정하려 든다면, 그 화를 겪는 어려움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장준>은 <장안>탈취를 그만두었다.

◎ 十一月, <後趙>王<勒>欲自将救<洛陽>, 僚佐<程遐>等固諫曰;“<劉曜>懸軍千里, 勢不支久. 大王, 不宜親動, 動無萬全.” <勒>, 大怒按劒叱<遐>等出. 乃赦<徐光>, 召而謂之, 曰;“<劉曜>, 乘一戰之勝, 圍守<洛陽>. 庸人之情, 皆謂其鋒不可當. <曜>, 帶甲十萬攻一城而百日不克, 師老卒怠. 以我初銳擊之, 可一戰而擒也. 若<洛陽>不守, <曜>必送死<冀州>. 自<河>已北席卷而来, 吾事去矣. <程遐>等不欲吾行. 卿, 以為何如.” 對曰;“<劉曜>, 乘<高候>之勢不能進臨<襄國>, 更守<金墉>. 此, 其無能為可知也. 以大王威略臨之, 彼必望旗奔敗. 平定天下在今一擧, 不可失也.” <勒>笑, 曰;“<光>言是也.” 乃使內外戒嚴, 有諫者斬. 命<石堪>・<石聰>及<豫州>刺史<挑豹>等各統見衆會<滎陽>. <石虎>, 進據<石門>. <勒>, 自統步騎四萬, 趣<金墉>濟自<大堨>. <勒>謂<徐光>, 曰;“<曜>, 盛兵<成皐關>, 上策也. 阻<洛水>, 其次也. 坐守<洛陽>, 此成擒耳.”

○ 11월, <후조>왕 <석륵>이 친히 군병을 이끌고 <낙양>을 구하려 하자, 신하인 <정하> 등이 굳게 막아 간하길; “<유요>의 군병은 천리를 떠나와 있으니, 그 군세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몸소 움직이시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움직이는 것은 만전을 기함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이에 <석륵>이 대노하여 칼을 잡고 <정하> 등을 질책하여 밖으로 내쫒았다. 그러고 나서 <서광>을 풀어주고는 불러서 이르길; “<유요>는 한 번 싸워 이긴 것으로 <낙양>을 둘러싸서 지키고 있소. 용렬한 인간들의 정리로는 <유요>의 사기가 예리함을 들어 당적하기가 불가하다 하고 있소. <유요>는 십만 갑병을 펼쳐서 성 하나를 100일이 되도록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으니, 장수들도 지쳤을 것이고 병졸들도 나태하여졌을 것이오. 우리가 초기의 예리함으로 그들을 친다면 한 번 싸움으로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낙양>이 떨어지면 <유요>는 필시 죽기를 무릅쓰고 <기주>로 물러날 것이오. 그가 <하>에서부터 북쪽으로 석권하여 온다면, 내 일은 끝장이오. <정하> 등은 내가 일을 내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길; “<유요>는, <고후>땅에서의 승세를 가지고도 <양국>으로 진격하여 차지하지 못하고, 다만 <금용>을 지키는 신세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로 <유요>가 무능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왕의 위협적인 책략으로 맞붙으시면, <유요>의 군대는 필시 대왕의 깃발을 보기가 무섭게 도망하고 패할 것입니다. 천하를 평정함이 이번 한 번의 거동에 달렸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석륵>은 웃으면서 “<서광>의 말이 옳다.”라 말하였고, 내외에는 엄하게 일러서, 말리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석감>・<석총> 및 <예주>자사 <도표> 등에게 명하여, 각자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무리들을 통솔하여 <형양>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석호>는 진격하여 <석문>에 거점을 잡았고, <석륵>은 자신이 보병과 기병 4만을 통솔하여 <금용>으로 방향을 잡고 <대제>에서 물을 건넜다. <석륵>은 웃으면서 <서광>에게 이르길; “<유요>는, 병력을 <성고관>으로 집결시키는 것이 상책이고, <낙수>를 막는 것이 차선책인데, <낙양>에서 눌러앉아 지킨다면 사로잡힐 것이야.”라 하였다.

◎ 十二月, 乙亥, <後趙>諸軍集于<成皐>, 步卒六萬・騎二萬七千. <勒>, 見<趙>無守兵, 大喜, 擧手指天, 復加額, 曰;“天也.” 卷甲御枚, 詭道兼行, 出于<鞏>・<訾>之間. <趙>王<曜>, 專[與]嬖臣, 飮[博]不撫士卒. 左右或諫, <曜>怒以為妖言斬之. 聞<勒>已濟<河>, 始議增<滎陽>戌・杜<黃馬關>. 俄而<洛水><候>者與<後趙>前鋒交戰擒<羯>送之. <曜>問; "大胡自來邪, 其衆幾何.” <羯>曰;“王自來, 軍勢甚盛.” <曜>, 色變, 使攝<金墉>之圍, 陣于<洛>西, 衆十餘萬南, 北十餘里. <勒>, 望見益喜, 謂左右, 曰;“可以賀我矣.” <勒>, 帥步騎四萬, 入<洛陽城>. 己卯, <中山公><虎>, 引步卒三萬, 自城北而西, 攻<趙>中軍. <石堪>・<石聦>等, 各以精騎八千, 自城西而北, 擊<趙>前鋒. 大戰于<西陽門>.

○ 12월, 을해일, <후조>의 모든 군대가 <성고>에 집결하였다. 보졸이 6만에 기병이 2만 7천이었다. <석륵{後趙}>은, <조{前趙}>의 군대에 망을 보는 병사가 없는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상금을 다시 올리면서 “하늘이 돕는다.”라 말하고는, 갑옷을 벗어 말아놓고{가볍게 무장하고} 말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소리 내지 않게=적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위험한 길을 재촉하여{보통행군의 두 배 빠르기로} <공>・<자>의 사이로 나갔다. <조>왕 <유요>는 오로지 폐신과 함께 술 마시고 노름에만 정신을 팔고 장수와 병졸들을 위무하지는 않았으며, 좌우{ 신하}가 혹여 간하기라도 하면 <유요>는 화를 내며 요망스런 말이라 하며 목이나 쳤었다. <석륵>이 이미 <하>를 건넜다는 소릴 듣자 <형양>의 수비군을 늘리고 <황마관>을 막을 논의를 하였다. 잠시 후, <락수>의 <후>라는 자가 <후조>의 전봉과 교전하여 <갈>을 사로잡아 보냈다. <요>가 묻기를; “대호{북쪽 큰 오랑캐, <석륵>} 자신이 왔는가? 무리는 얼마나 되는가?”라 하였더니, <갈>이 답하기를; “왕이 친히 왔으며, 군세는 아주 성하다.”고 하였다. 이에 <요>는 낯빛이 변하였으며, <금용>을 둘러싸서 지키던 군대를 끌어와서 <락양>의 서쪽에 진을 치게 하였다. 10만중을 남북으로 10여리에 깔아놓았다. <석륵>이, 건너다보고는 더욱 즐거워하며 좌우에게 이르길; “나를 축하함이 가할 것이다.”라 하였다. <석륵>은 보병과 기병 도합 4만을 이끌고 <낙양성>으로 들어갔다. 기묘일에 <중산공><석호>가 보졸 3만으로 성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조{前趙}>의 중군을 공격하고, <석감>・<석총> 등이 각기 정예 기병 8천씩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조{前趙}>의 전봉을 공격하였더니, <서양문>에서 크게 싸움이 벌어졌다.

◎ <勒>, 躬貫甲冑, 出自<閶闔門>, 夾擊之. <曜>, 少而嗜酒, 末年尤甚, 将戦, 飮酒數斗. 常乘赤馬無故跼頓. 乃乘小馬. 比出, 復飮酒斗餘. 至<西陽門>, 揮陣就平. <石堪>因而乘之, <趙>兵大潰. <曜>, 昏醉退走, 馬陷石渠, 墜于氷上, 被瘡十餘. 通中者三, 為堪所執. <勒>, 遂大破<趙>兵, 斬首五萬餘級. 下令曰;“所欲擒者一人耳, 今已獲之.” 其敕将士抑鋒止銳, 縱其皈命之路. <曜>, 見<勒>, 曰;“<石>王, 頗憶「重門之盟」, 否.” <勒>, 使<徐光>謂之, 曰;“今日之事, 天使其然, 復云何邪.” 乙酉, <勒>, 班師, 使征東将軍<石邃>将兵衛送<曜>. <邃>, <虎>之子也.

○ <석륵>도 친히 갑옷을 걸치고 <창합문>을 나서서 협격하였다. <유요>는 어릴 적부터 술을 좋아하였는데, 말년엔 더욱 심하였다. 곧 싸움이 벌어질 판인데도 여러 말의 술을 들이 켰다. 늘 붉은 말을 탔었는데 {오늘엔} 까닭 없이 오그라져 넘어져 있었다. 이에 작은 말을 올라타고는, 싸우러 나갈듯 하더니만, 다시금 한 말 여의 술을 더 마시고서, <서양문>에 다다르더니 진을 지휘하여 평지로 나아갔다. <석감>은 이를 기회로 잡았고, <조>병은 와르르 무너졌다. <유요>는, 정신이 오락가락 취하여 뒤로 내달리다가, 말이 돌로 만든 수로에 빠져들자, 빙판으로 나뒹굴었다. 열 군데나 상처를 입었는데, 세 군데가 심하여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윽고, <석륵{<후조><고조>}>은 <조{<전조>}>병을 크게 쳐부수고 5만 여의 목을 베었고, 하명하여 이르길; “사로잡고 싶은 자는 하나였고, 지금 이미 그 자를 붙잡았소.”라 하고는, 장수와 병사들을 타일러서 예봉을 거두게 하여, {적들이} 명령에 귀복할{항복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유요>가 <석륵>을 쳐다보고 말하길; “<석>왕은 「중문지맹{때늦게 남몰래 한 맹서}」을 꽤나 생각하고 있음이오. 아니오?”라 하였다. <석륵>이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을 전하길; “오늘 일은 하늘이 그리 한 것이니, 다시 말해 무엇 하겠소?”라 하였다. 을유일에 <석륵>은 군대를 돌렸고, 정동장군 <석수>에게 명하여, 병사들로 하여 <유요>를 에워싸서 호송하게 하였다. <석수>는 <석호>의 아들이었다.

◎ <曜>瘡甚, 載以馬輿, 使醫<李永>與同載. 己亥, 至<襄國>, 舍<曜>於<永豐>小城, 給其妓妾, 嚴兵圍守. 遣<劉岳>・<劉震>等從男女盛服以見之. <曜>曰;“吾謂卿等久爲灰土, <石>王仁厚, 乃全宥至今邪. 我殺<石佗>, 愧之多矣. 今日之禍, 自其分耳.” 留宴終日而去. <勒>使<曜>與其太子<熙>書, 諭令速降. <曜>但敕<熙>與諸大臣;“匡維社稷, 勿以吾易意也.” <勒>見而惡之久之乃殺<曜>. [明年春正月,] <曜>子<熙>, 聞之, 大惧不能保<長安>, 而與其兄<胤>, 奔<上邽>. 諸征鎭, 皆棄守而從之, <關中>大亂. 将軍<蔣英>・<辛恕>, 擁衆數十萬據<長安>, 遣使降于<勒>. <勒>, 命<石生>帥<洛陽>之衆赴之.

○ <요>는 창상이 심하여 마차에 실렸고, 의원 <이영>을 함께 태웠다. 기해일, <양국{後趙의 都城}>에 도착하여서는 <유요>를 <영풍>의 작은 성에 가두어 놓고, 그의 기녀와 첩을 넣어주고는 군병으로 엄히 지키게 하였다. <유악>・<유진> 등 따르던 남녀를 성장을 시켜서 보내어 <유요>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유요>가 말하길; “나는 경들이 회토가 된 지{죽은 지} 오래인 줄 생각하였는데, <석>왕이 어질고 후덕하여서, 온전하게 용서하여 주어 금일에 이른 것 이구만! 내가 <석타>를 죽이고서 매우 부끄러웠었소. 오늘날 당하고 있는 화는 그 때문이었소.”라 하였다. 머물면서 종일토록 먹고 마신 연후에 돌아갔다. <석륵>이 <유요>에게 시키길 <유희>에게 속히 투항하라고 글로 써서 명하여 타이르게 하였더니, <유요>는 단지 <유희>와 모든 대신들에게 이르길; “사직을 새로이 닦으라. 나 때문에 뜻을 바꾸지 말라.”하는 조서를 썼다. <석륵>이 그것을 보고나서 <유요>를 오래도록 미워하더니 끝내는 <유요>를 죽였다. [명년춘정월,] <유요>의 아들 <유희>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움이 큰 나머지, <장안>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형 <유윤>과 함께 <상규>로 도망하였다. 정벌하여 얻었던 모든 진들도 지키기를 포기하고 <유희>를 따라나서니, <관중>땅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장군 <장영>과 <신서>가 무리 수십만을 끌어안고 <장안>에 머무르며, 사람을 보내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석륵>은 <석생>에게 명하여 <장안>의 무리들을 데려 오게 하였다.

◎ 三十年己丑, 二月, <于>小后(<莘>妹<潛>)生<琳>太子. <于卓>子<達>之女也. <達>, <乙>太后出, 故上寵愛之, 納其女<潛>為宮人, 至是, 生<琳>, 封后.  東宮妃<腆>生子<允>. <腆>, 與其前夫<再逢>密通, 而生, 故皃猶於<逢>. <周>后欲廢<腆>. 上, 以<乙>太后命, 不許. 東宮, 亦庇<腆>, 而諫其母<周>后, 曰;“<允>猶我. 母, 何疑之.”  三月, 左輔<松巨>病免. <乙良>代之. <良>, 以<乙>太后弟, 治<北部>二十余年, 德化行焉. 入相百日而薨, 年六十三. 其妻, <于豊>妹也. 以貞潔自守, 見<良>之沒, 而恐失節而殉之. 時俗, 三輔之妻, 以上命, 継為輔室者多故也. 人言<乙良>之善政, 多由於此夫人, 云. 只有一子一女. 女為<免柯>妻. 子<恭>, 以為無才而不仕, 只祀祖神而畜牛馬羊, 見人則恭之而已, 故人不知其賢. <靑見>左輔.

○ 30년{단기2662년/AD329}기축, 2월, <우>소후가 <림>태자를 낳았는데, <우탁> 아들 <달>의 딸이었다. <달>은 <을>태후의 소생이어서, 상은 그를 총애하였고 그의 딸 <잠>을 궁인으로 거두었고, 이때가 되어 <림>을 낳으니 후로 봉하였다. 동궁비 <전>이 아들 <윤>을 낳았다. <전>이 옛 남편 <재봉>과 밀통하다가 낳았는데, 용모도 <재봉>을 닮았다. <주>후가 <전>을 폐하려 하자, 상은 <을>태후의 명이라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동궁 역시, <전>의 잘못을 덮어주며, 자기의 모후인 <주>후에게 “<윤>은 저를 닮았습니다. 모친께서는 어찌 그리 의심하십니까?”라고 간하였었다.  3월, 좌보 <송거>가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을량>이 대신하게 하였다. <을량>은 태후의 남동생으로 <북부>를 20여 년 동안 다스렸는데, 덕이 실현되었다 하였다. 들어와 상{좌보}의 자리에 100일 있다가 나이 63살에 죽었다. 그의 처는 <우풍>의 여동생이었는데, 정숙하여 깔끔하게 자신을 지켰고, <을량>의 죽음을 보더니만 정절을 잃을까를 걱정하여 따라죽었다. 그 시절 풍속으론, 3보들의 처는 상의 명에 따라 계속하여 3보의 내실이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을량>의 선정이 이 부인에게서 비롯됨이 많았다 하였다. 단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남겼다. 딸은 <면가>의 처가 되었다. 아들 <공>은, 재능이 없다하고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며, 조상신에게 제사나 올리며 소와 말과 양을 쳤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든 공손하게 대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가 현자임을 몰라보았다.  <청견>이 좌보가 되었다.

◎ <晉><溫嶠>死. <王導>, 爲政, 自<江陵>至<建康>三千里. 流民萬計, 人心洶洶如有外變內患之兆.  八月, <曜>子<胤>, 見<長安>将失, 悔斬<胡勳>, 帥衆數萬, 自<上邽>趣<長安>, <隴東>・[<武都>]・<安定>・<新平>・<北地>・<扶風>・< 始平>諸郡<戎>・<夏>皆起兵應之. <胤>軍于<仲橋>, <石生>嬰城自守, <石虎>帥騎二萬救之. 九月, <虎>破<胤>於<義渠>, <胤>奔還<上邽>. <虎>, 乘勝追擊, 枕尸千里, <上邽>潰, 執<熙>・<胤>及[其]将・王・公卿・校以三千余人皆殺之, 進攻<秦>・<隴>悉平. <氐>王<蒲洪>・<羌>酋<姚弋仲>, 俱降于<虎>. <虎>納<劉曜>幼女. 初, <隴西><鮮卑><乞伏述延>, 居于<苑川>, 侵幷鄰部, 士馬彊盛. 及<曜>亡, <述延>, 惧, 遷<麥田>而卒, 子<傉大寒>孫<司繁>相継.  <賀蘭>部及諸大人共立<翳槐>, <紇那>奔<宇文>部. <翳槐>質弟<什翼健>于<勒>.  <吐延>, 雄勇多猜忌, <姜>酋<姜聦>刺之. <吐延>, 不抽釼, 召其将<紇扢埿>, 使輔其子<葉延>, 保于<白蘭>, [抽劍而死]. <葉延>孝而好學, 以為禮以王父字爲氏, 國號<吐谷渾>.

○ <진>의 <온교>가 죽자, <왕도>가 정사를 위하여 <강릉>에서 <건강>으로 3천리를 거쳐서 왔는데, 떠도는 백성이 만 명에 이르고 인심이 흉흉하여, 밖으로는 변란을 안으로는 우환을 일으킬 조짐이 있는 것 같았다.  8월, <유요>의 아들 <유윤>이 <장안>이 곧 빼앗길 것을 알게 되자, <호훈>의 목을 벤 것을 후회하며, 수만 중을 이끌고 <상규>를 떠나 <장안>을 향하니 <롱동>・[<무도>]・<안정>・<신평>・<북지>・<부풍> 및 <시평> 제군의 <융>인들과 <하>인들도 군병을 일으켜 뜻을 같이하였다. <유윤>이 <중교>에 군진을 쳤더니, <석생>은 성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었고, <석호>가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석생>을} 구원하였다.  9월, <석호>가 <유윤>을 <의거>에서 깨뜨리니, <유윤>은 <상규>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석호>가 승승하여 추격하니, 누운 시체가 천리에 널렸다. <상규>를 궤멸하고, <유희>와 <유윤>은 물론 장수들과 왕 그리고 공경들과 교{위}들을 잡아들이니 3천이나 되었다. 모조리 죽이고, <진>과 <롱>의 땅까지 진격하여 모두를 평정하였다. <저>의 왕 <포홍>과 <강>의 추장 <요익중>도 모두 <석호{후조}>에게 투항하였다. <석호>가 <유요>의 어린 딸을 거두었다. 애초에 <롱서>의 <선비>는 <걸복술연>이 <원천>에서 살면서 인근의 부락들을 쳐서 병합하여 군세가 강성하였었는데, <유요{전조}>가 망하게 되자, <술연>은 두려운 나머지 <맥전>으로 옮겨가 살다 죽었다. 이에 아들 <녹대한>과 손자 <사번>이 서로 대를 이었다. <하란>부와 여러 대인들이 합심하여 <예괴>를 {왕으로} 세우자, {<대>왕} <흘나>는 <우문>부로 달아났고, <예괴>는 동생 <십익건>을 <석륵>에게 인질로 잡혔다. <토연>은 포부는 크고 용맹하였으나, 남을 시기하기를 잘하여, <강>족 추장 <강총>이 칼질하여 죽였다. <토연{<전조><하남왕>}>은 칼을 뽑지 않고 그의 장수 <흘골이>를 불러, 자기의 아들 <섭연>을 보좌하면서 <백란>에서 지키라 하였더니, [<흘골이>가 칼을 뽑아 죽인 것이었다]. <섭연>은 효성이 있었고 열심히 학문하였기에, 왕이었던 부친{<토연>}의 이름{字}를 씨{氏}로 삼는 것이 예의라 여겨, 나라의 이름을 <토곡혼>으로 하였다.

◎ 三十一年庚寅, 正月, 皇后・東宮・<發陽>公主如「溫湯」. 上, 朦宮  行政事于<溫宮>. 東宮, 以<長莫思>為右輔. <靑見>太輔, 以<緣>后妻之.  九月, <石勒>稱帝, 遣使來貢, 請共伐<慕容>, {賜}珠玉三事・經籍・{匹假}・藥物百種.  十一月, 遣<尙能>・<龍發>于<勒>, 致㹮弓十張, 而議討<鮮卑>. <勒>, 大喜, 以宝馬一雙・紅玉尺三柄・靑錦段七疋, 答之, 曰;“東方之事, 唯王主之. 西方之事, 唯朕主之.”  <羅>, 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 31년{단기2663년/AD330}경인, 정월, 황후・동궁・<발양>공주가 온탕에 갔다.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온궁」에서 정사를 보라고 하였다. 동궁이 <장막사>를 우보로 삼았고, <청견>에게는 태보의 자리를 주고 <연>후를 처로 딸려주었다.  9월, <석륵>이 칭제하고는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모용>집안을 함께 정벌하자고 청하였다. 주옥 세 개와 비단 필 및 약물 100종을 {하사하였다}.  11월, <상능>과 <룡발>을 <석륵>에게 보내 맥궁 열 자루를 건네주고 <선비>토벌을 협의하게 하였다. <석륵>은, 크게 기뻐하며, 보마 한 쌍과 청색 비단 일곱 필로 답하면서, “동방의 일은 왕께서 도맡으시오. 서방의 일은 짐이 도맡겠소.”라 하였다.  <신라>는 <벽골지>를 열었다. 둑의 길이는 1,800보였다.

◎ 三十二年辛卯, 正月, <石勒>, 大宴我國使, 以黃金緞, 送于<周>后. 上, 笑, 曰;“奴養虎于家中, 其亡非朝卽夕. 敢窺人家也.”  二月, 上, 疾篤, 召太子至前, 授神釼(<光明>所傳其釼或云<最彘>宝釼), 曰;“<烽上>無道, 吾以次子得位. 汝雖継我, 無道則不徒失國亦難保身. 無失宗戚之望而興軍民之怒. 與汝母幷政, 婦人多偏私易失, 汝宜執中得正. 勿與<慕容>爭利, 固城守界. 勿以土木勞民俾失農時. 簿賦歛, 而勧民以勤儉忠孝, 養老敬賢, 任才使能. 雖或好色節而無過. 以汝父為鑑可也(上{過}勞得疾,故其敎如是). 葬, 宜儉實, 無為玉棺金椁埋, 以珍玩使盜掘之. 汝母鄕之山水, 甚好. 宜葬我於<美川>石窟, 待汝母之從我以合封. 戒畢而崩, 春秋五十四.

○ 32년{단기2664년/AD331}신묘, 정월, <석륵>이, 우리의 사신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황금과 비단을 <주>후에게 보내왔더니, 상이 웃으며 이르길; “놈{석륵}은 집안에서 범을 기르고 있으니, 그는 머지않아서 망할 것이다. {그러니} 감히 남의 집들을 였보고 있음이다.”라 하였다.  2월, 상은 병이 위독하여지니 태자를 불러서 눈앞에 다다르게 하더니 신검(<광명>소전기인.혹운<최체>보인)을 주고는, “<봉상>이 무도하여, 차자인 내가 보위에 올랐다. 네가 비록 나의 뒤를 잇게 되었으나, 무도하면 나라를 잃을 뿐만 아니라 네 몸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척들의 기대도 저버리지 말고, 군대와 백성들의 노여움도 키우지 마라. 네 어미와 함께 정치할 것인데, 여인네들은 사사로움에 치우침이 많아 실수하기 쉬우니, 너는 필히 중심을 잡아 바르게 되도록 하라. <모용>집안과는 서로 간에 이익을 다투지 말고, 성을 든든히 하고 경계를 지켜라. 토목 노역으로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고, 부렴{세금}을 적게 하고, 백성을 근검과 충효로써 가르치고, 노인을 봉양하고 현자를 공경하고, 재주 있는 이를 임용하여 일을 감당하게 해라. 설사 호색할지라도 조신하여 지나치지는 말 것이다. 네 아비가 일찍 죽게 된 것을 거울로 삼아도 될 것이다(상과로득질,고기교여시). 장사는 검소하고 실속 있게 치를 것이며, 옥으로 만든 관과 금으로 치장한 곽을 쓰지 말 것이다. 귀한 물건을 함께 묻으면 도둑들이 파헤치게 된다. 네 어미 고향동네의 산수가 아주 좋으니, 의당 나를 <미천>의 석굴에 장사하고, 네 어미가 나를 따라 오게 되거든, 함께 묻어다오.”라고 하여, 타이르기를 마치고는 숨을 거두었다. 춘추 54세였다.

◎ <周>后, 抱東宮卽位於殯前, 受三輔之朝. 百官山呼於殯宮之庭. 東宮哀號失音, <周>后止之而不聼. <周>后命太輔<靑見>諫之. <靑見>奏, 曰; “天子之喪, 異於庶人. 陛下, 今為萬民父母, 不可以私毁身忘棄天下. 哀毁小節, 士人之行也. 天子, 當飮酒食肉, 娛以聲色, 涵養浩氣, 然後, 可以臨大政, 決難事.” 上, 素重<靑見>, 故乃抑慟, 攝酒, 勉從其請. <周>后命, 進絲竹, 而自與綠眼, 裸舞呈喜. 諸妃次苐如之. 上, 命却之, 放聲大哭, 口吐血淚. <周>皇后, 驚, 救引入其室, 經夜無音. <腆>妃亦不得入焉.

○ <주>황후가 동궁을 안아 일으켜 시신 앞에서 즉위하여 3보들의 조례를 받게 하였다. 백관들이 빈궁의 뜰에서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동궁이 슬피 울부짖어 목이 가라앉으니, <주>황후가 그만 그치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주>후가 태보인 <청견>에게 간하라 하였더니, <청견>이 상주하길; “천자의 상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폐하께는 지금 만민의 부모가 되셨으니 사사로이 용체를 훼손하여 천하를 저버리시면 아니 됩니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몸을 야위게 하는 것{=哀毁骨立}은 작은 예절이며, 선비{또는, 무사}들의 행실인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당연히 술과 고기도 드시고, 성색도 취하시어서, 호기를 함양하시고, 그런 연후에 큰 정사에 임하시고 어려운 일을 처결하셔야 할 것입니다.”라 하니, 상은 평소에 <청견>을 중히 여긴지라, 슬픔을 억누르고 술도 마시면서, 그의 청을 좇으려 애를 썼다. <주>황후가 악기들을 들이라 하여, 스스로 록안{碧眼; 西域 여인}의 무희들과 함께 라무를 추어 즐겁게 하여보려고 하였고, 여러 비빈들이 이를 이어서 그와 같이 하였더니, 상이 그리하지 못하게 물리고는, 방성통곡하다가 구토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이에 <주>황후가 기겁하여 상을 자기의 방안으로 들였는데, 밤새도록 기척이 없었다. <전>비 역시도 그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 <慕容廆>・<石勒>, 聞大行之崩, 皆遣使来吊, 厚送賻儀. 上, 親接其使, 恪盡賓禮. 使皈語其主, 曰;“新君勝於旧君.” <勒>, 歎, 曰;“<乙弗>有子其祚可久. 予於愔愔, 何.” 盖其子<弘>懦弱, 故不能安心也. 上, 聞之, 謂左右;“奴, 以小技發身, 敢自尊大, 不思賣奴之時, 敢以其賤比我<東明聖國>. 可不誅乎. 我國, 大位一定, 不復二言. <羯>・<胡>, 自相殘滅, 非復人道. 是固禽獸也.”

○ <모용외>와 <석륵>이 대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사신을 보내와서 조문하고 부의도 후하게 보내왔다. 상이 이 사신들을 친히 맞이하여 삼가하며 빈례를 다하였더니, 사신들은 돌아가 자기의 주인에게 “새로 선 임금이 먼저 번의 임금을 능가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석륵>은 “<을불>은 사직을 오래도록 할 아들이 있소. 나도 아무 일이 없어 보이지만, 어찌 할꼬?”라 한탄하였다. 개략 그의 아들 <홍>은 나약하여 안심할 수 없었음이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좌우들에게 “놈들은 곁가지에 삐져나온 주제에 감히 큰 가지 출신인양 스스로를 높이면서, 몸을 팔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그 비천 것들이 감히 우리 <동명성국>에 견주려 하고 있소. 죽여서 없애지 않아도 되겠소? 우리나라는 대위를 한 번 세우면, 다시는 두 말 한 적이 없는데, <갈>과 <호>는, 서로를 죽이며 멸하고, 인간의 도리를 돌이키지 못하고 있소. 이것들은 정말로 금수들이오.”라 일렀다.

※ 論曰; 『<美川>, 以
弱齡出奔, 辛苦八年, 而皈登宝位.
積知于外, 施仁于內, 德化大行, 官民樂焉.
倉廩實羊豕豊, 鍊兵拓地復舊增新.
<燕>・<趙>慴服, <濟>・<羅>子来,
<晉>・<越>来貢, <索頭>献誠, 太平無事.
坐享富貴, 黃金滿地, 美女盈, 室家家歌舞, 人人膏粱.
勸桑織絹繡緞萬金, 皇后褒翟価値千萬, 織女爭献不備一錢.
牛馬滿山自殖自蓄, 取而用之無盡藏焉.
粟麥豆梁肥腴可食, 魚鼈獐鴨亦不可盡.
地廣人少四方皈之, 聚抃于野爱此樂土, 忠君之心油然勃興.
上,
任能使能, 問民疾苦, 病者治之, 愚者敎之.
舟楫之運車馬之載, 萬里相連千里酬應.
有無相換無有不便, 采供雖薄大府盈溢.
上,
雖有<小白>之誚不奪民女, 后妃不多後宮常空, 過愛失攝且喜龍陽.
不無<牛金>・<道兒>之幣, 是乃白玉之瑕而聖德之累.
盖其, 師敎不全, 時俗染汚.
且有, 行樂之性, 豪俠之氣, 徃徃使帝王致此不亦可惜乎.
若使<美川>能知聖人之道, 而與學敎民, 蔑以加矣.
<孟軻>不至<儒>者, 賤焉. 徒事弓馬, 唯知食色而己.
生於是, 長於是, 而能如<美川>則亦不失賢主之名矣.
然, 其功其過, 果何重而何輕乎.』

※ 찬자가 살피길;
○『<미천>은
어린 나이로 피해나가 매섭게 고생하다,
8년 만에 돌아와서 임금 자리 오르더니,
밖에서 쌓은 배움을 안에서 어질게 베풀었고,
덕이 크게 행하여져 관민이 즐겼더라.
창고는 가득하고 양 돼지도 풍성하며,
군병을 조련하여 땅을 넓혔더니, ※옛 것은 되찾았고 새로이 넓혔도다.
<연>과 <조>는 두려워서 굴복하고,
<백제>와 <신라>는 자식들이 찾아왔으며,
<진>과 <월>은 찾아와 조공하고, <색두>가 정성을 다하였으니,
태평하고 무사하여, 앉아서 부귀를 누렸더라.
누런 금덩어리 온 누리에 가득하고, 미녀들이 방방에 넘쳐나니,
집집마다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마다 고량진미 즐겼더라.
누에치고 비단 짜기 권장하여 만금 비단 쌓여있어,
황후의 너른 옷이 천만금의 값이 되도,
직녀들이 비단을 다투어 바쳐오니,
비단 옷엔 돈 한 푼도 들어갈 일 없었다네.
소와 말도 온 산에 가득하며 절로 낳고 길렀으니,
아무리 먹고 써도 다함없이 많았으며,
속・맥・두・량 살진 고기 먹기에 충분하고,
어・별・장・압 또한 끊이지 않았다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사방에서 귀부하고,
벌판에다 마을 이뤄 즐거이 살아가며 이 낙원을 사랑하니,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 구름처럼 피어났네.
임금은 좋은 사람 잘도 부려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내어 잘도 살펴주고,
병든 이는 고쳐주고 우매한 이는 가르쳐 주었다.
짐 실은 배와 짐마차가 만 리를 서로 잇고,
천리에서 모인 손님 한데모여 술잔을 돌리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간에 바꾸었더니 불편함도 없었으며,
공물은 조금씩을 거두어도 큰 관청 차고도 넘쳐났다.
임금은 비록
<소백>이 꾸짖을 일은 있었어도 민간 부녀 빼앗지 않았었고,
후비들도 많지 않아 후궁은 맨 날 비었었지만,
사랑함이 지나쳐서 섭생을 잃었었고,
남색을 즐겼으니 <우금>과 <도아>의 폐단이 없지는 않았었다.
옥중의 티끌이고 성덕의 허물이었다.
개략, 스승의 가르침이 온전치 않거나, 시속에 물들거나,
행락지성과 호협지기가 있거나 하여
왕왕 제왕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또한 애석한 일 아니겠는가?
<미천>이 성인 도리를 깨닫게 하고, 학문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가>도 유학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여 천하게 살았더라면, 무리지어 말 타고 활쏘기나 일삼았을 것이고, 오로지 식과 색을 삶의 모두로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자라나서, 능히 <미천>과 같았었다면,
그 역시 현군이란 일컬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적과 과오를, 과연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
  원문출처 :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찬자의 영토에 관한 얘기는, <고구리>의 시국처에 관련된 견해가 달랐기에 나타나는 구절이니, 집착함이 없길 바랍니다.」


김영채 (2007-11-10 22:36:04)  
(1) 26년 기사 : “以<遼東>相<裵嶷>爲右翼” -> “以<遼東>相<裴嶷>爲右翼”, “十二月, 師國人” -> “十二月, 帥國人”
(2) 27년 기사 : “五月, <先發><中部>沛者” -> “五月, <仙發><中部>沛者”
(3) 29년 기사 : “鼎仕人以爲鰍龍同穴” -> “鼎任人以爲鰍龍同穴”, “七月, <石虎>師衆四萬” -> “七月, <石虎>帥衆四萬”, “理曹郞中<索訽>諫曰” -> “理曹郞中<索詢>諫曰”, 기사 해석 중 “이조낭중 <색구>가 간하길” -> “이조낭중 <색순이> 간하길”
(4) 29년 11월 기사 : “攻一城二百日不克” -> “攻一城而百日不克”, 해석 중 “십만 갑병을 펼쳐서 성 하나를 2백일이 되도록 떨어뜨리지” -> “십만 갑병을 펼쳐서 성 하나를 백일이 되도록 떨어뜨리지”
(5) 29년 12월 기사 : “<勒>使步騎四萬入<洛陽城>” -> “<勒>帥步騎四萬入<洛陽城>”, “諸征鎭, 皆其棄守而從之” -> “諸征鎭, 皆棄守而從之”, “<勒>命<石生>師<洛陽>之衆赴之” -> “<勒>命<石生>帥<洛陽>之衆赴之”
(6) 30년 기사 : “<乙良>代之. 太后弟” -> “<乙良>代之. <良>以<乙>太后弟”, “師衆數萬” -> “帥衆數萬”, “<石虎>師騎二萬救之” -> “<石虎>帥騎二萬救之”, “<吐延>不抽劍” -> “<吐延>不抽釼”, 해석 중 “그의 장수 <흘글이>를 불러” -> “그의 장수 <흘골이>를 불러”
(7) 31년 기사 : “皇后∇宮” -> “皇后∇宮”, “上, 朦宮行政事于溫宮” -> “上, 朦宮行政事于溫宮”, “答之; “東方之事” -> “答之 曰; “東方之事”
(8) 32년 기사 : “授神劍(光明所傳其劒或云最彘宝劒)曰” -> “授神釼(光明所傳其釼或云最彘宝釼)曰”, “無爲玉棺金{槨}埋以珍玩使盜掘之” -> “無爲玉棺金{椁}埋以珍玩使盜掘之”, “放聲大哭, 吐血” -> “放聲大哭, 口吐血淚”, “奴, 以小枝發身, 敢自尊大, 不思賞” -> “奴, 以小技發身, 敢自尊大, 不思賣”
(9) ※ 論曰: 기사 : “所而用之無盡藏焉” -> “取而用之無盡藏焉”, “魚鼈獐押亦不可盡” -> “魚鼈獐鴨亦不可盡”, “聚抃于野愛此樂土” -> “聚抃于野爱此樂土”, “行棄之性豪俠之氣” -> “行樂之性豪俠之氣”, “而與學校民蔑以加矣” -> “而與學敎民蔑以加矣”, “<孟軻>不及<儒>者” -> “<孟軻>不至<儒>者”
김성겸 (2007-11-11 13:31:33)  
김영채 님/
힘든 일 계속하여 주시니, 고맙습니다. 찜찜한 것이 많이 줄었다는 생각입니다.

프로그램 상에 몇 몇 글자는 그대로 옮겨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東 -> 印 /∇, 石 -> 石, 朦 ->朦 등등입니다.
강영구 (2008-01-31 18:04:17)  
·26년 :盡獲其國重器畜産以百萬計 중기{무거운 전쟁도구}와 가두어 기르던 짐승 도합 200만두를 모조리 노획하였으며 =>200만두가 아니군요.
·憤志成疾 =>志->恚(성내다 에)
·<務勿塵><무물록> =><무물진>
·29년 :寒微功臣連登三輔, 鼎任人以爲鰍龍同穴. 한미한 출신의 공신들이 연이어 3보의 자리에 오르니, 요직에 나아갈만한 사람들은 미꾸라지와 용이 한 굴 구멍에 사는 것으로 여겼다. =>鼎任은 세 발 솥처럼 세 사람이 삼보의 임무를 맡았다는 뜻입니다.
‘한미한 출신의 공신들이 연이어 삼보의 자리에 올라 정사를 담당하니 사람들은 추룡동혈한다 했다.’
·7월, 11월, 12월 조문은 제가 찾아보니 <자치통감>에서 그대로 베껴 쓴 글입니다. <통감>에 근거해서 교정할까 합니다.
·<趙>主<曜>遣<河間>王<述>, 發<氐>·<羌>之衆, 屯<秦州>以備<張駿楊>, 難敵, =>여기에서 <張駿楊>, 難敵은 <장준>과 <양난적>으로 두 사람의 인명입니다. ‘<조>주 <요>는 <하간>왕 <술>을 보내 <저>와 <강>의 무리 중에서 징발하여 <장준>과 <양난적>을 대비하게 했다.
·自將中外精銳水陸諸軍以救<蒲阪>, 自<衛關>北濟 =>여기서 濟는 ‘강을 건너다’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자신은 중외의 정예 수·륙의 여러 군대를 이끌고 <포판>을 구하기 위해 <위관>에서 북으로 (황하를) 건넜다.’
·<虎>犇<趙歌>, <曜>, 濟自<大陽>, 攻<石生>于<金墉>, 決<千金>>以灌之 =><조가>는 지명입니다. 場으로 쓴 것은 실은 堨(방죽, 제방 알)입니다. ‘<호>가 <조가>로 달아나자 <요>는 <대양>에서 건너 <금용>의 <석생>을 공격했다. <천금> 둑을 터뜨려 (금용으로) 흐르게 했다.’ 이것은 조조가 관우가 지키던 하비를 함락시킨 水攻과 같습니다.
·借使小有所獲,작은 까닭이 있다하여 저쪽을 쳐서 얻었을 때,=>‘설령 조금 획득한 것이 있더라도’
·11월 :懸軍千里, =>懸軍은 ‘먼 거리를 파견한 군대’를 말합니다. 즉 본국과 천리의 거리가 되는 먼 곳에 온 군대라는 뜻이지, 천리 간에 쫙 깔린 군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無萬全 =>萬全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만전을 기하다’의 ‘만전’과 같습니다. 즉 ‘만일의 경우가 없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庸人之情,봉록 받아먹는 인간들의 정리로는 =>庸人은 ‘평범한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때로는 ‘용렬한 사람’을 이르기도 합니다. ‘범용한 자들의 생각으로는’
·若<洛陽>不守, <曜>必送死<冀州>. 自<河>已北席卷, 而來吾, 事去矣. <낙양>이 떨어지면, <요>는 필시 죽어서 <기주>로 보내질 것이오. <하>에서부터 이미 북쪽을 석권하였는데, 당신이 내게 오자, 그 일을 그만두었었소. =>送死는 삼국지에서 적벽대전 직전에 오나라에 항복을 요구하자 주유가 조조가 죽으려고 왔는데 맞서 싸우지 않겠느냐 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즉 자기가 죽기 위해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若<洛陽>不守, <曜>必送死<冀州>. 自<河>已北席卷而來 吾事去矣. ‘만일 <낙양>을 지켜내지 못하면 <요>는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기주>로 진격할 것이오. (그가) <하>에서 북으로 석권하면서 온다면 나의 사업은 끝장이 날 것이오.’
·<劉曜>, 乘<高候>之勢, 不能進臨<襄國>, 更守<金墉> =>‘<유요>는 <고후>에서의 승세를 타고 <양국>으로 진격하지 않고 단지 <금용>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아직 <금용>을 함락한 상태가 아닙니다.)
·此其無能爲 可知也.=>‘이것으로 그가 무능함을 알만 하다.’
·各統見衆會<滎{榮}陽>각자 자기의 무리들을 모으고 통솔하여 <형양{영양?}>으로 집결하라고 하였다. =>‘각자 현재의 무리를 이끌고 <형양>에 집결하도록 명했다.’
·濟自<大場> =>여기도 場을 堨로 바꾸어야겠습니다. ‘<대알>(큰 방죽)로부터 건너갔다.’
·<曜>盛兵<成皐關>. 上策也, 阻<洛水>. 其次也, 坐守<洛陽>. 此成擒耳 <요>의 병력이 몰려있는 곳은 <성고관>이니, 상책으로는 <낙수>를 막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낙양>에 눌러앉아서 지키는 것이다. 이리하면 {<유요>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석륵>의 말은 <유요>가 전술을 폈을 때를 가정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유요>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요>가 <성고관>에 병력을 집결시켜 지키는 것이 상책이고, <낙수>에서 저지하는 것은 차선책이며, <낙양>에 눌러앉아 지킨다면 이는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12월 :<勒>見<趙>無守兵 <석륵{後趙}>이 <조{前趙}>의 군대에 망을 보는 병사가 없는 것을 보고는 =>‘<륵>이 <조>가 지키는 병사를 두지 않은 것을 보고’, 즉 <유요>가 상책을 쓰지 않은 것이죠.
·卷甲御枚 갑옷을 벗어 말아놓고{가벼이 무장하고}=>御枚는 말 입에 막대기를 끼우고 재갈을 물려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詭道兼行 주변을 꼼꼼히 살피면서 위험한 길을 재촉하여 =>詭道는 전쟁 시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지름길이나 길 아닌 길로 가는 것을 말하고, 兼行은 이틀 갈 길을 하루에 가는 정도로 속행한다는 의미입니다.
·<趙>王<曜>專嬖臣, 飮慱不撫士卒. =><통감>에는 專과 嬖 사이에 與가 있군요. 博은 노름을 말합니다.
<趙>王<曜>專與嬖臣飮博 不撫士卒. ‘<조>왕 <요>는 오로지 폐신과 함께 술 마시고 노름만 할 뿐 사졸들을 위무하지 않았다.’
·聞, <勒>已濟<河>, 始議增<榮陽{滎陽?}>戌<杜黃>·<馬關> <석륵>이 이미 <하>를 건넜으며 <영양{형양?}>을 어찌하여 빼앗고 <두황>·<마관>의 땅을 어찌하여 지킬 것인가를 의론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석륵>이 <하>를 이미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영양>의 수비병을 늘려 <황마관>을 막을 것을 의논하였다.’
·<曜>問大胡自來邪 其衆 幾何. <요>가 대호{북쪽 큰 오랑캐, <석륵>} 자신이 왔는가와 무리의 어지러움이 어떠한 지를 물으니, =>‘<요>가 대호가 스스로 왔는지, 그 무리는 얼마나 되는지를 묻자’
·使攝<金墉>之圍, 陣于<洛>西, =>‘<금용>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를 거두어서 <낙>의 서쪽에 진을 치게 했다.’
·出自<閶闔門>來擊之. =>來->夾 ‘<창합문>에서 나와 협격하였다.’
·常乘赤馬無故, 跼{頗}乃乘小馬, =>남당 선생의 원문을 보면 頗는 頓입니다. <통감>에 의하면 跼頓이 아니라 停頓으로 되어 있습니다.
常乘赤馬無故停頓,乃乘小馬 ‘평소 타던 적마를 이유 없이 놔두고 작은 말에 올라탔다.’
·揮陣就平<石堪>. 因而乘之,<석감>을 평정하려고 진을 지휘하였다. 일이 이리되니 <조>병은 와르르 무너졌다. =>揮陣就平 <石堪>因而乘之 ‘진을 지휘하여 평지로 나아가려 하자 <석감>은 이것을 기회로 공격했다.’
·石渠 =>‘돌로 만든 수로’
·“所欲擒者一人耳, 今已獲之. 其敕將士, 抑鋒止銳, 縱其歸命之路.” “사로잡고 싶은 놈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 이미 그 놈을 붙잡았다. 그 놈이 그 놈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싸움을 접으라 하였으니, 그 놈의 장수와 병사들은 놓아주어 명령된 길로 돌아가게 하라.”고 하였다.
=>‘사로잡고 싶은 자는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지금 이미 잡았다. 장군과 병사에게 칙령을 내려 격렬하게 싸우지 말고 항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라.’
·<石>王, 頗憶重門之盟否? <석>왕은 「중문지맹{때늦게 남몰래 한 맹서}」을 잘못 기억하는 것 아니오? =>‘<석>왕은 <중문의 맹세>를 기억하지 못하는가?’(그런데 중문의 맹세가 무엇인가요?)
·今日之事, 天使其然. 復云何邪 오늘 일은 하늘이 시킨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 {하늘의 뜻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가? =>‘오늘의 일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다시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吾謂卿等久爲灰土, <石>王仁厚, 乃全宥至今邪? 我殺<石佗>, 愧之多矣. 今日之禍, 自其分耳” 留宴終日而去 내가 경들에게 말하길 <회토>의 <석>왕은 어질고 후덕하다 한 지 오래되었고, 모든 것을 너그러이 보아 넘겼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나를 속이고 <석타>를 죽였소. 부끄럽기 짝이 없소. 오늘 당한 화는 분수를 따른 것이니, 함께 있으면서 종일토록 맘껏 먹고 마신 연후에 돌아가시오. =>‘“내 생각에는 경들은 오래전에 진토가 되었어야 할 텐데(죽임을 당했을 것인데) <석>왕이 인후하여 지금 모두들 석방된 것인가? 내가 <석타>를 죽였던 일이 매우 부끄럽구나. 오늘의 화는 그일(인정을 베풀지 않고 살해한 일)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루 종일 머무르며 연회를 하고 떠났다.’
·<曜>但敕<熙>與諸大臣, “匡維社稷. 勿以吾易意也.” =><요>는 <희>와 여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오직 사직을 바로 잡아라. 나 때문에 뜻을 바꾸지 말아라.”고 했다.
·<勒>見而惡之 久之乃殺<曜> =>‘<륵>이 그것을 보고 미워하더니 얼마 지나 <요>를 죽였다.’
·30년 :見人則恭之, 而已故 =>見人則恭之而已 故
·自<上邽>趣<長安>, <隴東>·<安定>·<新平>·<北地>·<扶風>, <始平>諸郡, <戎>·<夏> 皆起兵應之 =>‘<상규>에서 <장안>으로 향하자 <농동>, <안정>, <신평>, <북지>, <부풍>, <시평> 등 여러 군에서 <융>(오랑캐)와 <하>(한족)이 모두 기병하여 조응했다.’
·<胤>軍于<仲橋>, <石生>嬰城自守. =>‘<윤>의 군대가 <중교>에 주둔하자 <석생>은 <영성>에서 수비하였다.’
·子<傉>大寒, 孫<困>繁, 相繼. =>困은 司가 맞습니다.
子<傉大寒> 孫<司繁> 相繼 ‘아들 <녹대한>, 손자 <사번>이 차례로 계승하였다.’
·<姜酋>·<姜聰>刺之. =><통감>을 보니 姜酋가 羌酋(강족의 추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듯합니다.
·<吐延>不抽釼, 召其將<紇{杚}埿>, 使輔其子<葉延>保于<白蘭>. =>‘<토연>은 칼을 뽑지 않고 그 장수 <紇扢泥(흘흘니)>를 불러 자신의 아들 <엽연>을 보좌하게 하고 <백란>을 보존하라고 했다.’
·以爲禮, 以王父字爲氏, 國號<吐谷渾> 예의를 배웠고, 왕이 되어서는 부친{<토연>}의 이름(字)을 씨(氏)로 삼고, 나라의 이름을 <토곡혼>으로 하였다. =>‘왕의 아버지의 자를 씨로 삼는 것이 예라고 여겨 국호를 <토곡혼>이라고 했다.’
·32년 :奴養虎于家中, 其亡非朝卽夕. 敢窺人家也 =>也->耶 ‘~감히 다른 사람의 집안을 훔쳐보는가?’
·授神釼 =>‘신검’이라 읽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不徒失國亦難保身 =>‘나라를 잃을 뿐만 아니라 네 몸도 보존하기 어렵다.’
·與汝母幷政. 婦人多偏私易失, 汝宜執中得正. 네 어미와 힘을 합쳐 정사를 살펴라. 부인이 많으면 사리에 치우쳐 잃기 쉬울 것이니, 너는 마땅히 이미 거느리고 있는 여인들 중에서 정실을 택하라. =>‘네 어미와 함께 정치할 것인데, 여인네들은 대부분 사사로운 데 기울어 (정도를) 잃기 쉬우니 너는 반드시 중정을 지키도록 하라.’
·簿賦, 歛而勸民. 以勤儉忠, 孝養老, 敬賢任才使{能}. =>簿賦歛而勸民以勤儉 忠孝養老, 敬賢任才使{能}. ‘부렴(세금)을 적게 하고, 백성을 근검과 충효로써 가르치고, 노인을 봉양하고, 현명한 이를 공경하며, 재주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리도록 하라.’
·哀毁小節, 士人之行也. =>‘哀毁는 小節로서 士人의 行입니다.’
·予於愔愔, 何” 盖其子<弘>懦弱, 故不能安心也. =>‘나는 조용할 뿐이니 어떻게 할까?’ 대개 그 아들 <홍>이 나약하여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愔愔은 ‘화평하고 조용한 모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똑똑한 아들이 없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奴, 以小技發身, 敢自尊大, 不思賣. 奴之時, 敢以其賤比我<東明聖國>, 可不誅乎놈들이 작은 가지에서 몸을 일으켜 감히 자신들을 큰 것인 양 높여왔으니, 배신할 것을 생각하지는 않겠소. 놈들이 힘깨나 쓴다 하여 저희들의 그 천한 나라를 감히 우리의 <동명성국>에 견주었으니, 죽이지 아니하고 어찌하겠소? =>‘놈이 잔가지 출신 주제에 감히 자신을 존대하는 건가! 날품팔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하고(다른 나라의 신하였을 때) 감히 그 비천함으로 우리의 동명의 신성한 나라에 견주는가! 가히 주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론왈>은 나중에 봐야겠습니다.
강영구 (2008-02-01 11:36:03)  
몇 글자 오식이 있고, 구두에 오류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해석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소백, 우금, 도아의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문맥 상 파악하기로는 사람 이름이지 않나 생각해서 그렇게 풀이했습니다.

論曰: 『<美川>, 以弱齡出奔, 辛苦八年, 而歸登宝位. 積智于外 施仁于內, 德化大行官民樂焉.
논한다. “<미천>은 어린 나이에 달아나 8년 동안 고생한 후 돌아와 보위에 올랐다. 밖을 돌아다닐 때는 지혜를 쌓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인을 베풀었으니, 덕화가 크게 행해져 관민이 이를 즐겼다.
倉廩實羊豕豊. 鍊兵拓地復舊增新. <燕>·<趙>慴服, <濟>·<羅>子來, <晉>·<越>來貢, <索頭>獻誠,
창고는 가득하고 양과 돼지는 풍성하며, 군사를 조련하고 땅을 개척하여 옛 땅을 회복하고 새로이 넓혔다. <조>와 <연>은 두려워 복종하고, <백제>와 <신라>는 자식 입장에서 찾아오고, <진>과 <월>은 조공을 보냈으며, <색두>는 정성을 바쳤다.
太平無事坐享富貴, 黃金滿地美女盈室, 家家歌舞 人人膏粱. 勸桑織絹繡緞萬金, 皇后衣翟価値千萬, 織女爭獻不備一錢.
태평 무사하여 앉아서 부귀를 누렸고, 황금은 온 땅에 가득하고, 미녀는 집을 가득 채웠다. 집집마다 노래하며 춤추고, 사람마다 고량진미를 즐겼다. 누에치기와 비단 짜기를 권장하니 비단이 만금만큼 많아졌고, 황후가 천만금 가치의 적의를 입어도 베 짜는 여인들이 다투어 헌상하니 한 푼도 들지 않았다.
牛馬滿山自殖自蓄, 取而用之無盡藏焉. 粟麥豆粱肥腴可食, 魚鼈獐鴨亦不可盡. 地廣人少四方歸之, 聚抃于野爱此樂土, 忠君之心油然勃興.
소와 말은 산을 가득 채워 저절로 번식하니 갖다 써도 다 쓸 수 없었고, 조(또는 쌀)와 보리, 콩과 기장은 알차서 먹기에 좋았으며, 물고기, 자라, 노루, 오리 또한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사방에서 귀부하여 들판에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 낙원을 사랑하므로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이 유연히 발흥하였다.
上, 任能使能 問民疾苦, 病者治之 愚者敎之. 舟楫之運車馬之載, 萬里相連千里酬應, 有無相換無有不便, 采供雖薄大府盈溢.
상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임용하였고, 백성의 질고를 물어 병든 자들은 치료해주고,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교육을 시켰다. 배를 통한 운송과 마차를 이용한 짐수레로 만 리가 서로 연결되고 천리가 서로 응하니, 유무를 상호 교환하여 불편함이 없었다. 거두고 바치는 것이 비록 적어도 큰 창고가 차 넘쳤다.
上, 雖有小白之誚不奪民女, 后妃不多後宮常空, 過愛失攝 且喜龍陽. 不無牛金道兒之幣, 是乃白玉之瑕而聖德之累
상이 비록 소백의 꾸짖음이 있었지만 민간의 여인들을 빼앗지 않았고, 후비는 많지 않아 후궁이 항상 비었다. 사랑함이 지나쳐 섭생을 잃었고, 또한 용양(남색)을 즐겨 우금과 도아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 이것이 옥에 티이고 성덕의 허물이다.
盖其師敎不全 時俗染汚 且有行樂之性 豪俠之氣, 往往使帝王致此, 不亦可惜乎.
대개 그에게 스승의 가르침이 온전하지 못하고 시속에 오염되었으며 또한 행락하는 성품과 호협하는 기질이 있어서 때때로 제왕을 이런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또한 애석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若使<美川>能知聖人之道, 而興學敎民 蔑以加矣. <孟軻>不至<儒>者, 賤焉. 徒事弓馬, 唯知食色而己. 生於是, 長於是, 而能如<美川>則亦不失賢主之名矣.
만일 <미천>으로 하여금 성인의 도를 알게 하고 학문을 일으켜 백성을 가르쳤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가>도 유자에 이르기 전에는 천하여 단지 궁마를 일삼고 오로지 식과 색만 알 뿐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자라나 능히 <미천>과 같을 수 있다면 또한 현명한 임금이라는 이름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然, 其功其過 果何重而何輕乎.』
그러므로 그 공적과 그 과오에서 과연 어떤 것이 무겁고 어떤 것이 가벼운 것일까?”
김성겸 (2008-02-01 18:03:03)  
강 선생님,
길고 긴 여정을 힘든다고 마다치 않으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 스스로도 차분하게 처음부터 살펴서
선생님 들께서 흘리신 땀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계속 지켜보아 주시길 간청합니다.
김성겸 (2008-02-01 18:29:47)  
강 선생님,

"重門之盟"은 지금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 해에 인터넷에게 검색해 봤더니
약간의 설명이 있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보이질 않습니다.
맹세를 같이 할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중문을 나가다가 뒤늦게 혼자서 한 맹세? 그런 것이었던 기억입니다.
강영구 (2008-02-01 19:12:31)  
使能은 '능력있는 사람을 부린다'라는 관용어입니다.
皇后褒翟에서 남당 선생의 원문이 확실치 않지만 褒보다는 衣를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采供雖簿大府盈溢에서 簿가 아니라 薄(엷은, 얕은 박)입니다.

사실 저도 한문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어서 실력이 일천하고 축적된 지식도 깊지 못합니다. 다만 분수를 잠시 잊고 감히 교정한다는 명색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정 속에도 사실 적지 않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천 선생님께서 이것을 책으로 엮는다고 하셨습니다. 한번 책으로 완성되면 시위를 떠난 살이 되어 혹 그 후에 오점을 발견하여도 어찌하기 참으로 여렵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최소한의 오류를 가진 최대한의 좋은 책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감히 제 경험과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한문을 번역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되고 이해가 잘 가는 책은 원문에 가장 가깝게 직역한 책이었습니다. 저는 사천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알아보기 힘들어서 짐작으로 넣은 글자나 요즘 사람들이 쓰지 않은 용어여서 다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나 한문 어투가 요새 사람들의 어문법과 많이 달라 직역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따로 주를 달아 설명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한 번 훑어보는 데만 근 1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알아보기 힘든 남당 선생의 글을 따로 옮기고 일일이 해석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고, 아울러 경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공은 산을 옮기겠다고 큰 소리만 쳤지만, 선생님은 실제로 산을 옮기셨으니 대단한 분이십니다. 앞으로 지금 하시는 작업을 순조롭게 이루셔서 좋은 책으로 엮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저는 계속 관심을 가질 것이고 또 다른 이견이 생기면 기탄없이 글을 올리겠습니다.)
김성겸 (2008-02-01 21:22:02)  
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름대로 담담하게 직역하려고 애는 썼지만,
원문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한글의 문법체계에가 맞추기가 매우 난감한 것이 많았습니다.
1음절어를 2음절어로 번역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아는 것이 좀 있다면,
남이 해놓은 것에 가감하며, 해석과 해설을 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여하튼, 누군가 일을 벌여놓지 않으면, 아예 진해이 되지 않아서,
그 자체가 낭패인 경우도 많습니다.
저야 역사학계에서 생활을 벌어먹는 이가 아니었기에,
남들이 말하는 객기? 만용?까지도 부려보았습니다.
이제는 집안의 생활도 좀 더 살피면서
약간의 여유를 좀 부리며, 감상하듯이 교필을 하여 볼 계획입니다.
역사적인 지명이나 인명 등을 그냥 풀어서 번역하였거나, 또는 반대의 경우도 많을 수 있어
그것을 먼저 살필 생각입니다.

강 선생님께서도, 혹 쉬시는 동안이라도 언뜻 스치는 것이 있으시다면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댓글을 남겨주시길 앙청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