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남당유고 고구려사략 고구려사초 제4대 민중제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5. 13:24

민중제기

민중제의 이름은 해읍주이고 광명제의 막내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태후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하였고 현명한 사람을 좋아했다. 대무신제가 부여를 정벌할때에 민중은 도읍을 잘지켰기에 인정받았고 선제(先帝)가 죽을때에 큰 일을 맡았었다. 신하들도 모본이 불초하므로 해읍주를 제위에 올렸다. 난대에서 즉위하였다. 해우(즉 모본)을 태자로 세우고 선한 방법으로 그를 타일렀다.

원년(AD64)은 갑자년이다.

크게 사면하였다. 군신들이 연호를 바꾸자 청하였으나, 그럴만한 덕이 없다 하며 고사하였다.  <오>후를 황후로 삼고, <해우>를 후사로 정하였다.  이 해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과 <구양>을 공격하였다.  <한{東漢}>은 <음려화{<광무제><유수>의 두 번째 처}>가 죽자, <흉노>와 저자를 함께 열었다.

2년(AD65)은 을축년이다

3월에 「서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5월, 「동부」에 큰물이 났다. 상이 황후와 함께 백성들을 안부를 살피고 굶는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었다.  9월, <오>황후가 <학>공주를 낳았다. <오>후의 오빠 <오불>을 우보로 삼았다.
<한>의 <도요영>이 남북<로>들의 교통을 끊었다.

○ 3년(단기2399년/AD66)병인, 7월, <오>황후와 함께 동쪽으로 몰이사냥{군사조련 사냥}을 나갔다. 흰 노루를 잡았기에 먹이를 주어 길렀다.  <백제>가 <와산>을 {<신라>로부터} 빼앗고 수자리 200명을 두었으나, 다시 빼앗겼다.  「동도」에 눈이 오지 않았다.  <한>의 <양>이 동생 <형>을 죽였다. <형>은, {아비인} <수{광무제}>와 모습이 비슷하였으며, 나이 삼십이면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기병하려 하였다가 죄를 받았던 것이다. 동생...이하는 해독 번역 불능...
<오>후의 남동생 <오희>를 중외대부로, <마경>을 태보로, <송보>를 좌보로 삼았다.



<高句麗>史略卷之二 <고구려>사략권지이

04. 第四世<閔中帝>紀 제4세<민중제>기

                                                    원문출처 ;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帝, 諱<解邑朱>, <光明帝>之季子也. 母, <松>太后. 性, 寬厚好賢.  <大武>之伐<扶余>時, 守都得宜故信其能, 而臨崩, 寄以大事. 群臣, 以<慕本>為不肖, 而立之. 卽位於<鸞臺>.  以<解憂>為太子, 戒之以善.

제의 휘는 <해읍주>이며, <광명제>의 막내아들이고, 모친은 <송>태후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현명한 이를 좋아했다. <대무>가 <부여>를 정벌할 때, <민중>은 도읍을 {잘} 지켜내었기에 마땅히 그 능력을 인정받았었고, 선제가 임종할 때 큰 일{나라 다스리는 일}을 맡았다. 군신들도, <모본>이 불초한 까닭에, <해읍주{민중}>를 보위에 세웠다. <란대>에서 즉위하였다. <해우{<모본>}>를 태자로 세우고, 선{善}한 방도로 그를 타일렀다.

◎ 元年甲子, 十一月, 大赦. 群臣請改元, 辭以無德.  以<烏>后為皇后, <解憂>為嗣.  是年, <濟>攻<羅><蛙山>․<狗壤>.  <漢>, <陰麗華>死, 與<匈奴>合市.

○ 원년{단기2397년/AD64}갑자, 11월, 크게 사면하였다. 군신들이 연호를 바꾸자 청하였으나, 그럴만한 덕이 없다 하며 고사하였다.  <오>후를 황후로 삼고, <해우>를 후사로 정하였다.  이 해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과 <구양>을 공격하였다.  <한{東漢}>은 <음려화{<광무제><유수>의 두 번째 처}>가 죽자, <흉노>와 저자를 함께 열었다.

◎ 二年乙丑, 三月, 宴群臣於「西 都」.  五月, 「東部」大水. 上, 與皇后, 問民賑飢.  九月, <烏>皇后生<鶴>公主. 以后兄<烏芾>為右輔.
<漢><度遼營>斷南北<虜>.

○ 2년{단기2398년/AD65}을축, 3월, 「서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5월, 「동부」에 큰물이 났다. 상이 황후와 함께 백성들을 안부를 살피고 굶는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었다.  9월, <오>황후가 <학>공주를 낳았다. <오>후의 오빠 <오불>을 우보로 삼았다.
<한>의 <도요영>이 남북<로>들의 교통을 끊었다.

◎ 三年丙寅, 七月, 與<烏>皇后, 東狩. 獲白獐, 飼之.  <濟>, 取<蛙山>, 置戌二百人, 尋失.  「東都」無雪.  <漢><昜>殺其弟<荊>. <荊>, 以皃類於<秀>, 言三十得天下, 欲起兵而伏罪. 弟莫好佛■■助<■>.
以后弟<烏希>為, 中畏大夫, <麻勁>太輔, <松宝>左輔.

○ 3년(단기2399년/AD66)병인, 7월, <오>황후와 함께 동쪽으로 몰이사냥{군사조련 사냥}을 나갔다. 흰 노루를 잡았기에 먹이를 주어 길렀다.  <백제>가 <와산>을 {<신라>로부터} 빼앗고 수자리 200명을 두었으나, 다시 빼앗겼다.  「동도」에 눈이 오지 않았다.  <한>의 <양>이 동생 <형>을 죽였다. <형>은, {아비인} <수{광무제}>와 모습이 비슷하였으며, 나이 삼십이면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기병하려 하였다가 죄를 받았던 것이다. 동생...이하는 해독 번역 불능...
<오>후의 남동생 <오희>를 중외대부로, <마경>을 태보로, <송보>를 좌보로 삼았다.

◎ 四年丁卯, 四月, 與<烏>后, 田于<閔中原>, 祀<烏伊>祠. 七月, 又田, 見石窟而謂<烏>后, 曰;“吾死, 宜葬于此.” 后曰;“粗殘, 奈何.” 上, 曰;“<東明>茅茨不剪, <松讓>朽木為宮. 吾安敢奢其死骨哉. 汝亦從我于斯, 可也.” 后笑, 曰;“女必從夫. 陛下雖無言, 妾當自從.”  <解憂>太子遊三賢古基, 尋<熊心山>聖母古宅, 名其地曰<慕本原>.  九月, <東海>使人<高朱利>献鯨目于<烏>后. 夜有光當燭. 時, <烏>后又産<悅>公主. 上謂后, 曰;“<解憂>改過, 而孝我夫妻. 可以傳位. 與汝為仙, 何如.” 后曰;“<解憂>, 雖吾出, 其心未可測. 待我産一男子傳之未晩.” 上, 笑, 曰;“汝亦老矣. 安能久産哉.” 后不悅.  <扶余>內亂, 命<再思>・<麻[樂]>等, 率<達賈>・<穆卓>・<杜魯>徃鎭之.  <羅>, 以<順貞>為伊飡, 委政.
<漢>置五經師. 羽林通<■經>. <匈奴>入學.

○ 4년{단기2400년/AD67}정묘, 4월, <오>후와 함께 <민중원>으로 가서 사냥하고, <오이>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7월, 다시금 사냥을 나갔다가 석굴을 발견하자, <오>후에게 이르길; “내가 죽거든 꼭 이곳에 나를 장사하여 주시오.”라고 하였더니, <오>후가 답하길; “조악하고 헐었는데, 괜찮겠습니까?”라 하자, 상이 “<동명>께서는 갈대로 지붕을 잇고 끝도 다듬지 않으셨고, <송양>은 썩은 나무로 궁을 지었소. 내 어찌 감히 내 죽은 몸을 호사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도 나를 따라 이곳으로 왔으면 하오.”라 하였더니, 후가 웃으며 답하길; “여필종부입니다. 폐하의 말씀이 없으셔도, 첩은 응당 알아서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해우>태자가 세 현신{재사, 무골, 묵거}의 옛터에서 노닐다가, <웅심산>의 성모고택을 찾아보고는 그곳을 <모본원>이라 이름 붙였다.  9월, <동해>의 사인 <고주리>가 <오>후에게 고래의 눈알을 바쳤는데, 밤이 되면 빛이 나서 촛불을 켠 것 같았다. 이때 <오>후가 또 <열>공주를 낳자, 상이 <후>에게 이르길; “<해우>가 개과하여 우리 내외에게 효도를 하고 있으니, 임금 자리를 물려줘도 될 것 같소. 당신과 선(仙)이나 했으면 하는데, 어떻겠소?”라 하였다. 이에, 후가 “<해우>는 제가 낳긴 하였어도 그 속내는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내자식 하나를 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 답하자, 상이 웃으면서; “당신 역시 이미 나이가 많은데, 어찌 능히 오래도록 낳을 수 있겠소?”라 말하였더니, 후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여>에서 내란이 일어, <재사>와 <마[락]> 등에게 <달가>・<목탁>・<두로>를 데리고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신라>는 <순정>을 이찬으로 삼아서 국정을 맡겼다.  <한>이 ‘오경사’를 두었다. 우림들이 <■경>에 통달하였고, <흉노>도 입학하였다.

◎ 五年戊辰, 正月, <扶余>亂平. <再思>請娶<王文>女, 許之.  五月, 上崩[于]「東都」, 春秋六十二. 遺命立<解憂>太子. 太子, 卽位於東都神宮, 改元<慕本>, 葬帝于石窟. 群臣欲作陵, <烏>后曰;“吾止禪位之事, 以違夫志. 且作新陵, 是重違夫志也. 吾亦死, 當皈此. 使後人知帝之儉德, 而為皇后者勿違夫志, 可也.” 群臣拜伏.

○ 5년{단기2401년/AD68}무진, 정월, <부여>의 내란이 수습되었다. <재사>가 <왕문>의 딸과 혼인하고자 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5월, 상이 「동도」에서 춘추 62세에 죽었다. <해우>태자를 임금으로 세우라고 명을 남겼다. 태자는 「동도」 신궁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모본>으로 바꿨으며, 제를 석굴에 장사했다. 여러 신하들이 새로이 릉을 만들려 하자, <오>후가 이르길; “나는 양위하시겠다는 것을 말려 지아비의 뜻을 어긴 바 있소. 새로이 릉을 만들게 되면 지아비의 뜻을 또 다시 어기는 것이 되오. 나 역시 죽으면 응당 이곳으로 올 것이오. 후세 사람들에게 선제의 검소하신 덕을 알게 하고, 황후가 되는 이들도 지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게 하시오.”라 하였다. 신하들이 절하며 엎드렸다.

※ 論曰;“<閔中>, 受顧命, 行「伊周之事」以傳位於<慕本>, 則賢矣. 不識其詐則惛矣. 戒之以善則好矣. 不擇師以敎之設官以制之, 則欠矣.”

※ 찬자가 살피기를; “<민중>이 고명을 받아, 「이주지사」를 행하여 <모본>에게 보위를 물려 준 것은 현명한 것이었고,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음은 혼미하였음이었다. 선한 방도로 타일렀던 것은 잘 한 일이었으나, 적절한 스승을 두어 가르치지도 관리를 두어 견제하지도 않은 것은 흠이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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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伊周之事」; <周{주}> 초기에 <太甲{태갑}>이 不肖{불초}하자, <伊尹{이윤}>이 대신하여 정치를 이끌고 있다가, 그가 반성하자 자리를 물려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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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채 (2007-10-06 17:34:47)  
2년 5월 기사 : "東都" -> "東部" 입니다.
김성겸 (2007-10-06 23:55:13)  
감사합니다.
강영구 (2008-01-24 11:35:41)  
·3년 :言三十得天下, 欲起兵, 而伏罪 =>罪에서 끊어야 할 것입니다. ‘30이면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기병하려다 복죄(죄에 대한 형벌을 받음)하였던 것이다.’
·론 :或之以善, 則好矣 =>或을 戒로 바꾸고 맞추어 해석해야겠군요.
김성겸 (2008-01-24 19:35:23)  
강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