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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내 천도의 시기와 배경
부르칸
2015. 4. 3. 11:47
高句麗는 압록강 중상류의 산간지대에서 흥기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이러한 국가적 발전을 이룩하면서 卒本에서 國內(서기 3년), 國內城에서 平壤(427년 :
平壤城 -> 長安城, 586년) 등 크게 두 차례 遷都를 단행했고, 그밖에도 임시 遷都로 볼만한 사료가 다수
전한다(209년 丸都城 移都, 247년 平壤城 移都, 342년 丸都城 移居, 343년 平壤東黃城 移居 등).
이로 인해 고구려사 연구의 시작과 더불어 遷都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각 都城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1960년대 이래 중국과 북한에서 고고학 발굴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리하여 卒本은 渾江유역의 桓仁盆地, 國內城은 集安盆地의 國內城址와 山城子山城, 平壤은 평양시 동북방의 안학궁(또는 청암리토성)과 대성산성, 長安城은 평양시가지 등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고구려 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외적의 침입 등에 따른 他意가 아니라 고구려인 스스로의 意志에 따라 단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구려가 장기적인 국가발전 방향을 고려하면서 遷都를 단행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고구려 천도 문제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遷都 전후의 국내상황과 국제정세 등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遷都의 대내외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遷都는 고구려사의 발전방향을 가늠할 핵심적인 연구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종래에도 이러한 점에 유의한 연구성과가 몇 몇 제출되어, 427년 평양천도는 南進政策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이를 통해 경제기반을 확보하고 귀족세력을 견제하여 왕권강화를 이룩한 사실이 규명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北魏의 침공에 대비하여 평양천도를 단행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6세기 중후반 長安城 건설과 천도가 신라의 북상에 대비한 조치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 렇지만, 고구려 천도의 대내외 배경 특히 장기적인 국가발전 방향은 충분히 규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卒本에서 國內로의 遷都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천도 시기를 둘러싸고 논란 중이며, 대내외 배경은 거의 검토되지 않았다. 더욱이 卒本에서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고구려 초기의 왕계 및《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기사의 신빙성 문제까지 얽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 체로 山上王代 천도설을 주장한 일본학자들이 산상왕대 이전의 초기 왕계와 고구려본기 기사를 취신하지 않는데 비해, 琉璃王代 천도설을 주장하는 한국학자나 중국학자들은 초기 왕계 및 고구려본기 기사를 신빙하는 입장이다.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고구려 초기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다양한 논의를 바탕으로 卒本에서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검토한 다음, 遷都의 대내외 배경을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漢의 邊郡政策 변화와 이에 따른 동방지역의 정세 변화와 긴밀히 연관시켜 國內 遷都의 국제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고구려가 國內 遷都를 통해 이룩하려 했던 국가발전 방향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관련 자료가 너무 영성하기 때문에 논리 전개상 많은 비약을 범했을 것이다. 아낌없는 질정을 부탁드린다.
이로 인해 고구려사 연구의 시작과 더불어 遷都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각 都城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1960년대 이래 중국과 북한에서 고고학 발굴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리하여 卒本은 渾江유역의 桓仁盆地, 國內城은 集安盆地의 國內城址와 山城子山城, 平壤은 평양시 동북방의 안학궁(또는 청암리토성)과 대성산성, 長安城은 평양시가지 등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고구려 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외적의 침입 등에 따른 他意가 아니라 고구려인 스스로의 意志에 따라 단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구려가 장기적인 국가발전 방향을 고려하면서 遷都를 단행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고구려 천도 문제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遷都 전후의 국내상황과 국제정세 등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遷都의 대내외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遷都는 고구려사의 발전방향을 가늠할 핵심적인 연구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종래에도 이러한 점에 유의한 연구성과가 몇 몇 제출되어, 427년 평양천도는 南進政策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이를 통해 경제기반을 확보하고 귀족세력을 견제하여 왕권강화를 이룩한 사실이 규명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北魏의 침공에 대비하여 평양천도를 단행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6세기 중후반 長安城 건설과 천도가 신라의 북상에 대비한 조치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 렇지만, 고구려 천도의 대내외 배경 특히 장기적인 국가발전 방향은 충분히 규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卒本에서 國內로의 遷都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천도 시기를 둘러싸고 논란 중이며, 대내외 배경은 거의 검토되지 않았다. 더욱이 卒本에서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고구려 초기의 왕계 및《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기사의 신빙성 문제까지 얽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 체로 山上王代 천도설을 주장한 일본학자들이 산상왕대 이전의 초기 왕계와 고구려본기 기사를 취신하지 않는데 비해, 琉璃王代 천도설을 주장하는 한국학자나 중국학자들은 초기 왕계 및 고구려본기 기사를 신빙하는 입장이다.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고구려 초기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다양한 논의를 바탕으로 卒本에서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검토한 다음, 遷都의 대내외 배경을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漢의 邊郡政策 변화와 이에 따른 동방지역의 정세 변화와 긴밀히 연관시켜 國內 遷都의 국제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고구려가 國內 遷都를 통해 이룩하려 했던 국가발전 방향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관련 자료가 너무 영성하기 때문에 논리 전개상 많은 비약을 범했을 것이다. 아낌없는 질정을 부탁드린다.
1. 國內 遷都의 시기
1) 山上王代 ‘更作新國’의 의미
고구려가 본래 卒本(訖升骨城)에서 흥기한 사실은《삼국사기》뿐 아니라, 고구려 당대에 건립된
<광개토왕릉비>나 435년 고구려를 방문했던 北魏 李傲의 견문을 토대로 찬술된《魏書》고구려전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244년 曹魏의 毌丘儉이 침공했을 무렵, 고구려의 도성은 卒本이 아니라 丸都 곧 <毌丘儉紀功碑>가 발견된
오늘날의 集安盆地 일대였다. 고구려가 卒本地域에서 흥기한 다음, 3세기 중반 이전 어느 시기에 오늘날의 集安盆地 일대로 천도를
단행한 사실은 명확하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서기 3년)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하고 尉那巖城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에 한국학계와 중국학계는 대체로 이 기사를 근거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三國志》에는 이와 상반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기사가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서기 3년)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하고 尉那巖城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에 한국학계와 중국학계는 대체로 이 기사를 근거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三國志》에는 이와 상반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기사가 나온다.
ⓐ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駮位居是也. 其後復擊玄菟, 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三國志》魏書 권30 東夷傳 고구려조)
주지하듯이 상기 기사와 관련된 사료는《三國史記》고구려본기 산상왕 즉윈년조에도 나온다. 양자를
대비하면, 상기 기사의 伊夷模는 故國川王의 次弟로서 山上王으로 즉위한 延優, 拔奇는 고국천왕의 長弟인 發歧에 해당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상기 기사에 따르면 왕위에 즉위하지 못한 拔奇는 消奴部와 더불어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沸流水 유역으로
還住하였다고 한다. 이에 伊夷模도 ‘更作新國’을 했는데, 今日의 所在 곧 244년 관구검이 침공했을 당시의 도성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伊夷模의 ‘更作新國’의 ‘國’을 도성 내부의 특정한 성곽이 아니라 도성 전체를 지칭한다고 보면, 이 기사는 卒本에서 丸都 곧 國內로의 천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에 일본학자들은 丸都와 國內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도성에 대한 異稱으로 파악하면서, 卒本에서 國內(丸都)로의 천도가 산상왕대에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산상왕대 이전까지는 고구려 도성이 沸流水 일대의 卒本地域에 위치했는데, 왕위계승전을 통해 즉위한 산상왕이 국내지역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 ‘國’은 도성 전체가 아니라 도성 내부의 특정한 성곽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중국학자들은 국내성=평지성, 환도성=산성으로 보면서 ‘更作新國’을 대체로 國內地域 내부에서의 移居로 파악하고 있다.
상기 기사만 놓고 본다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상정할 수 있다. 그러면 ‘更作新國’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 나오는 遷都나 移居 관련 기사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주요 내용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伊夷模의 ‘更作新國’의 ‘國’을 도성 내부의 특정한 성곽이 아니라 도성 전체를 지칭한다고 보면, 이 기사는 卒本에서 丸都 곧 國內로의 천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에 일본학자들은 丸都와 國內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도성에 대한 異稱으로 파악하면서, 卒本에서 國內(丸都)로의 천도가 산상왕대에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산상왕대 이전까지는 고구려 도성이 沸流水 일대의 卒本地域에 위치했는데, 왕위계승전을 통해 즉위한 산상왕이 국내지역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 ‘國’은 도성 전체가 아니라 도성 내부의 특정한 성곽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중국학자들은 국내성=평지성, 환도성=산성으로 보면서 ‘更作新國’을 대체로 國內地域 내부에서의 移居로 파악하고 있다.
상기 기사만 놓고 본다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상정할 수 있다. 그러면 ‘更作新國’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 나오는 遷都나 移居 관련 기사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주요 내용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서기 3년(유리왕 22) 10월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하고 尉那巖城 축조
ⓒ-① 198년(산상왕 2) 2월 丸都城 축조
② 209년(산상왕 13년) 10월 丸都로 移都
③ 246년(동천왕 20) 10월 毌丘儉의 침입으로 丸都城 파괴
④ 247년(동천왕 21) 2월 丸都城이 파괴로 인해 수도로 복구 불가능,
平壤城을 축조하여 백성과 宗廟⋅社稷을 옮김.
ⓓ-① 336년(고국원왕 4) 8월 平壤城 증축
② 342년(고국원왕 12) 2월 丸都城 수리, 國內城 축조
③ 342년(고국원왕 12) 8월 丸都城으로 移居
④ 342년(고국원왕 12) 11월 전연 慕容皝의 침입으로 丸都城 파괴
⑤ 343년(고국원왕 13) 7월 平壤東黃城으로 이거.
ⓔ-①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遷都
ⓒ-① 198년(산상왕 2) 2월 丸都城 축조
② 209년(산상왕 13년) 10월 丸都로 移都
③ 246년(동천왕 20) 10월 毌丘儉의 침입으로 丸都城 파괴
④ 247년(동천왕 21) 2월 丸都城이 파괴로 인해 수도로 복구 불가능,
平壤城을 축조하여 백성과 宗廟⋅社稷을 옮김.
ⓓ-① 336년(고국원왕 4) 8월 平壤城 증축
② 342년(고국원왕 12) 2월 丸都城 수리, 國內城 축조
③ 342년(고국원왕 12) 8월 丸都城으로 移居
④ 342년(고국원왕 12) 11월 전연 慕容皝의 침입으로 丸都城 파괴
⑤ 343년(고국원왕 13) 7월 平壤東黃城으로 이거.
ⓔ-①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遷都
평양천도 이전 국내성⋅환도성 관련 사료는 3세기 전반의 ⓒ와 342~343년의 ⓓ로 대별할 수
있다. 두 부류의 기사는 시기적으로 1세기 이상 차이가 나며, ⓒ가 50여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있는 반면 ⓓ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사료는 시기나 기간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지만, 기사에 나타난 양상은 거의
유사하다. ⓒ에는 환도성 축성 → 환도성으로의 移都 → 魏 毌丘儉에 의한 환도성 함락 → 평양으로의 移民, ⓓ에도 丸都城 修葺 →
환도성으로의 移居 → 前燕 慕容皝에 의한 환도성 함락 → 평양성으로의 移居 등 거의 동일한 일련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
사 료 ⓓ의 경우,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각 사건 사이에 밀접한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고구려와 前燕은 3세기 말 이래 요동지역 및 길림방면의 부여지역을 둘러싸고 오래 동안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319년 前燕이 요동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 주도권을 장악하는듯 하였으나, 333~336년경 고구려가 前燕의 내분을 틈타 부여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양측의 역관계는 다시 팽팽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336년 내분을 평정한 前燕 慕容皝은 339년 고구려의 新城을 침공하고, 341년에는 慕容恪을 渡遼將軍에 임명하여 平郭에 주둔시키는 등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에 고구려도 338년 後趙와 연결하여 前燕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고, 340년에는 前燕에 태자를 파견하는 등 和戰兩面 작전을 구사하였다. 340년경 고구려와 전연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고, ⓓ-④의 對前燕戰은 예견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의 환도성 修葺과 환도성에로의 移居는 前燕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으로 추정된다. 환도성은 평상시 거성이 아니라 비상시의 군사방어성이었던 것이다.
사 료 ⓒ의 사건은 198년~247년이라는 긴 기간에 일어났으므로 사건 상호간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을 지도 모른다. 2세기 말경 後漢의 통제력이 쇠퇴하자, 요동지역에서는 公孫氏 세력이 흥기하였다. 190년경 遼東地域을 장악한 公孫度는 요동군을 나누어 遼西郡⋅中遼郡을 만드는 한편,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라 칭하면서 낙랑군까지 세력하에 넣었다. 204년 公孫度를 이은 公孫康은 낙랑군 屯有縣 이남의 땅을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고 韓濊를 정벌하는 한편, 建安 年間(196~219년)에는 고구려 國都를 함락시켰다. 2세기 말 이래 고구려와 공손씨 세력 사이에는 긴장이 점증되었고, 이는 公孫康의 고구려 침공으로 현실화되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197년 고국천왕 사후 왕위계승전으로 내분에 휩싸였다. 이 때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發岐가 公孫氏에게 투항하여 공손씨 세력에게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환도성을 축성하던 198년경(ⓒ-①), 고구려는 내적으로 왕위계승전에 따른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공손씨 세력의 침공에 대비해야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①․②의 환도성 축성과 환도성으로의 移都 역시 ⓓ처럼 외침에 대한 대비책이었고, 내분수습을 위한 국정쇄신책이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환도성도 비상시 군사방어성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다만 위의 상황으로 보아 ⓒ-①․②의 조치는 毌丘儉이 아니라 公孫氏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추정된다.
그 렇다면 ⓒ-①과 ⓒ-③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공손씨 세력이 요동지역에 웅거하면서 압박을 가해오자, 고구려는 다양한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다. 특히 중국이 魏⋅蜀⋅吳 등 三國으로 분립된 다음, 고구려는 233년경 公孫氏에게 배신당한 吳와 연결을 모색하다가, 234년에는 魏와 화친을 맺었다. 236년 오 사신을 참수하여 위에 보내고, 237년 위에 사신을 보내는 등 魏와의 관계를 강화하다가, 238년에는 魏 司馬宣王을 도와 公孫氏 세력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요동지역을 점령한 위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압박을 가해오자, 고구려는 242년 西安平을 선제 공격하였다.
이처럼 建安 연간의 公孫康 침공 이래 毌丘儉 침입시까지 고구려와 요동지역을 둘러싼 대외정세는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公孫康 침공 이후에도 환도성을 王城으로 삼아 외침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①이 비록 공손씨의 침공을 대비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③의 관구검 침공에 대한 대비책이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 단기간 入居하려는 의도로 丸都城으로 移居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50여년에 이르는 긴 기간 丸都城을 왕성으로 삼게 되었다.
이처럼 丸都城은 비상시의 군사방어거점이었다. 丸都城이 험준한 군사방어거점이었다는 사실은 魏 毌丘儉이 頳峴을 넘은 다음, ‘束馬縣車’하여 환도성을 함락하였다는 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丸都城은 본래 山名에서 유래한 명칭으로서 국도 전체를 지칭하기 보다는 국도 내부의 특정한 군사방어성만을 가리킨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 1905년 集安縣 小板石嶺(小板盆嶺)에서 <毌丘儉紀功碑>가 발견됨으로써《삼국지》관구검전의 환도산이 소판석령에서 현재의 산성자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일대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丸都城은 현재 집안분지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伊夷模가 ‘更作新國’했다는 ‘國’은 國內라는 都城 전체가 아니라, 산상왕 2년(198년) 공손씨 침공에 대비하고 국정쇄신을 단행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방어성인 丸都城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때 移都한 다음 대내외 정세로 인해 평상시 거점으로 還居하지 못하고 244년 관구검이 침공해 丸都城을 함락시킬 무렵까지 장기간 丸都城을 왕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伊夷模의 ‘更作新國’은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가 아니라, 國內地域의 평상시 거점에서 군사방어성인 丸都城으로 移居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관련해 다음 사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 료 ⓓ의 경우,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각 사건 사이에 밀접한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고구려와 前燕은 3세기 말 이래 요동지역 및 길림방면의 부여지역을 둘러싸고 오래 동안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319년 前燕이 요동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 주도권을 장악하는듯 하였으나, 333~336년경 고구려가 前燕의 내분을 틈타 부여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양측의 역관계는 다시 팽팽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336년 내분을 평정한 前燕 慕容皝은 339년 고구려의 新城을 침공하고, 341년에는 慕容恪을 渡遼將軍에 임명하여 平郭에 주둔시키는 등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에 고구려도 338년 後趙와 연결하여 前燕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고, 340년에는 前燕에 태자를 파견하는 등 和戰兩面 작전을 구사하였다. 340년경 고구려와 전연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고, ⓓ-④의 對前燕戰은 예견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의 환도성 修葺과 환도성에로의 移居는 前燕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으로 추정된다. 환도성은 평상시 거성이 아니라 비상시의 군사방어성이었던 것이다.
사 료 ⓒ의 사건은 198년~247년이라는 긴 기간에 일어났으므로 사건 상호간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을 지도 모른다. 2세기 말경 後漢의 통제력이 쇠퇴하자, 요동지역에서는 公孫氏 세력이 흥기하였다. 190년경 遼東地域을 장악한 公孫度는 요동군을 나누어 遼西郡⋅中遼郡을 만드는 한편,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라 칭하면서 낙랑군까지 세력하에 넣었다. 204년 公孫度를 이은 公孫康은 낙랑군 屯有縣 이남의 땅을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고 韓濊를 정벌하는 한편, 建安 年間(196~219년)에는 고구려 國都를 함락시켰다. 2세기 말 이래 고구려와 공손씨 세력 사이에는 긴장이 점증되었고, 이는 公孫康의 고구려 침공으로 현실화되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197년 고국천왕 사후 왕위계승전으로 내분에 휩싸였다. 이 때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發岐가 公孫氏에게 투항하여 공손씨 세력에게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환도성을 축성하던 198년경(ⓒ-①), 고구려는 내적으로 왕위계승전에 따른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공손씨 세력의 침공에 대비해야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①․②의 환도성 축성과 환도성으로의 移都 역시 ⓓ처럼 외침에 대한 대비책이었고, 내분수습을 위한 국정쇄신책이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환도성도 비상시 군사방어성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다만 위의 상황으로 보아 ⓒ-①․②의 조치는 毌丘儉이 아니라 公孫氏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추정된다.
그 렇다면 ⓒ-①과 ⓒ-③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공손씨 세력이 요동지역에 웅거하면서 압박을 가해오자, 고구려는 다양한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다. 특히 중국이 魏⋅蜀⋅吳 등 三國으로 분립된 다음, 고구려는 233년경 公孫氏에게 배신당한 吳와 연결을 모색하다가, 234년에는 魏와 화친을 맺었다. 236년 오 사신을 참수하여 위에 보내고, 237년 위에 사신을 보내는 등 魏와의 관계를 강화하다가, 238년에는 魏 司馬宣王을 도와 公孫氏 세력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요동지역을 점령한 위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압박을 가해오자, 고구려는 242년 西安平을 선제 공격하였다.
이처럼 建安 연간의 公孫康 침공 이래 毌丘儉 침입시까지 고구려와 요동지역을 둘러싼 대외정세는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公孫康 침공 이후에도 환도성을 王城으로 삼아 외침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①이 비록 공손씨의 침공을 대비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③의 관구검 침공에 대한 대비책이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 단기간 入居하려는 의도로 丸都城으로 移居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50여년에 이르는 긴 기간 丸都城을 왕성으로 삼게 되었다.
이처럼 丸都城은 비상시의 군사방어거점이었다. 丸都城이 험준한 군사방어거점이었다는 사실은 魏 毌丘儉이 頳峴을 넘은 다음, ‘束馬縣車’하여 환도성을 함락하였다는 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丸都城은 본래 山名에서 유래한 명칭으로서 국도 전체를 지칭하기 보다는 국도 내부의 특정한 군사방어성만을 가리킨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 1905년 集安縣 小板石嶺(小板盆嶺)에서 <毌丘儉紀功碑>가 발견됨으로써《삼국지》관구검전의 환도산이 소판석령에서 현재의 산성자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일대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丸都城은 현재 집안분지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伊夷模가 ‘更作新國’했다는 ‘國’은 國內라는 都城 전체가 아니라, 산상왕 2년(198년) 공손씨 침공에 대비하고 국정쇄신을 단행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방어성인 丸都城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때 移都한 다음 대내외 정세로 인해 평상시 거점으로 還居하지 못하고 244년 관구검이 침공해 丸都城을 함락시킬 무렵까지 장기간 丸都城을 왕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伊夷模의 ‘更作新國’은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가 아니라, 國內地域의 평상시 거점에서 군사방어성인 丸都城으로 移居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관련해 다음 사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八年,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見國壤於地下.
若群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三國史記》고구려본기5 동천왕 8년조)
상기 기사는 고구려 초기 娶嫂婚 제도의 변화와 관련해 주목받은 바 있다. 취수혼이 일반적
婚俗인 사회에서는 아내가 남편 사후 그의 형제와 몇 차례 거듭 혼인을 하였어도 그녀가 죽으면 고부(故夫) 곧 첫 남편에게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상기 사료에서는 우씨가 이러한 취수혼의 관행과 달리 산상왕에게로 돌아갔다. 이에 우씨의 첫 남편이었던
고국천왕의 死靈(國壤)이 분노했으며 일국의 왕으로 처가 없게 되어 國人들을 보기에 창피하다며 왕릉을 가려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고구려 초기 취수혼제의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 사료에서는 國壤 곧 고국천왕의 死靈이 于氏가 산상왕릉 곁에 묻히는 것을 보고, 우씨의 死靈과 다투다가 고국천왕릉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 구도는 고국천왕릉과 산상왕릉이 동일 지역에 있어야 비로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국천왕릉이 산상왕릉과 더불어 국내지역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나아가 고국천왕대의 도성도 국내지역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삼국지》고구려전의 ‘更作新國’ 기사를 근거로 산상왕대 초반에 卒本地域에서 國內地域으로 천도했다고 파악하는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이 상과 같이 파악하면, 산상왕대 國內地域에는 군사방어성인 환도성 이외에 평상시 거점이 별도로 존재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國內 遷都와 함께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무신왕 11년조에 따르면 尉那巖城은 ‘巖石之地’에 위치하였고, 이 때 漢軍이 침입하자 대무신왕은 持久戰을 전개하자는 左輔 乙頭智의 주장을 받아들여 “入尉那巖城, 固守數旬”하였다고 한다. 尉那巖城은 ‘巖’이라는 표현처럼 험준한 巖山에 위치하였으며, 평상시 거성이라기 보다는 비상시 군사방어성의 면모가 강했던 것이다. 이처럼 國內 遷都와 더불어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이 비상시 군사방어성이었다면, 평상시 거점은 별도로 존재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卒本地域과 관련된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초기 취수혼제의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 사료에서는 國壤 곧 고국천왕의 死靈이 于氏가 산상왕릉 곁에 묻히는 것을 보고, 우씨의 死靈과 다투다가 고국천왕릉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 구도는 고국천왕릉과 산상왕릉이 동일 지역에 있어야 비로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국천왕릉이 산상왕릉과 더불어 국내지역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나아가 고국천왕대의 도성도 국내지역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삼국지》고구려전의 ‘更作新國’ 기사를 근거로 산상왕대 초반에 卒本地域에서 國內地域으로 천도했다고 파악하는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이 상과 같이 파악하면, 산상왕대 國內地域에는 군사방어성인 환도성 이외에 평상시 거점이 별도로 존재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國內 遷都와 함께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무신왕 11년조에 따르면 尉那巖城은 ‘巖石之地’에 위치하였고, 이 때 漢軍이 침입하자 대무신왕은 持久戰을 전개하자는 左輔 乙頭智의 주장을 받아들여 “入尉那巖城, 固守數旬”하였다고 한다. 尉那巖城은 ‘巖’이라는 표현처럼 험준한 巖山에 위치하였으며, 평상시 거성이라기 보다는 비상시 군사방어성의 면모가 강했던 것이다. 이처럼 國內 遷都와 더불어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이 비상시 군사방어성이었다면, 평상시 거점은 별도로 존재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卒本地域과 관련된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①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皇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즉위년조)
② 于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于忽本東罡, 履龍頁昇天.(⌈광개토왕릉비⌋)
② 于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于忽本東罡, 履龍頁昇天.(⌈광개토왕릉비⌋)
사료 ⓖ에는 朱蒙集團이 卒本에서 건국하는 과정이 설화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卒本地域은 대체로 渾江유역의 桓仁盆地로 비정되는데, 이 일대에는 수십개의 소하천이 있고, 비옥한 충적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大甸子 銅劍墓 등 청동기유적을 비롯하여 고구려 초기 積石墓群도 다수 분포되어 있다. 또한 환인분지는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분지 내에는 험준한 산들이 곳곳에 우뚝 솟아 있다. 특히 환인분지에서 가장 험준한 五女山 정상에는 고구려 시기 산성이 남아
있다. ⓖ-①의 ‘土壤肥美, 山河險固’라는 표현처럼 환인분지 즉 卒本지역은 실제 생산활동과 군사방어에 적합한 지형조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①에는 주몽집단이 卒本川 유역에 정착하여 沸流水上에 터를 잡았다고 기술된 반면, ⓖ-②에는 沸流谷 忽本 서쪽 山上에 建都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卒本川과 忽本, 沸流水와 沸流谷은 동일 지명에 대한 異稱인데, ⓖ-②의 ‘沸流谷 忽本’이라는 표현처럼 卒本(忽本)은 沸流谷에 소속된 특정 지역이고, 卒本川은 卒本地域을 흐르는 沸流水에 대한 특칭이다. 두 사료는 표기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朱蒙의 정착지역 또는 건도지역의 위치가 ⓖ-①에는 ‘水上’ 곧 沸流水 연안의 충적평원으로 기술된 반면, ⓖ-②에는 ‘山上’ 곧 忽本(卒本) 서쪽 산위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東明王篇>에 따르면, 朱蒙은 沸流水 유역에 정착하여 松讓國의 항복을 받는 등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하늘의 도움을 받아 鶻嶺에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조영하였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①의 ‘水上’은 최초의 정착지역, ⓖ-②의 ‘山上’은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建都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朱蒙集團이나 그를 이은 桂婁集團은 이 지역 盟主로 등장한 이후 卒本 서쪽 山上에 성곽을 축조하고 이를 도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忽本 서쪽 山上에 구축하였다는 城은 紇升骨城으로도 전해지는데, 대체로 五女山城으로 비정된다. 五女山城은 환인분지에서 가장 험준한 천혜의 요새지로서 戰國 燕 계통의 선철제주조도끼가 출토될 정도로 이른 시기부터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주몽집단이나 그를 이은 桂婁集團이 渾江연안과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의 맹주권을 장악한 다음 五女山城에 建都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五女山城이 자리잡은 정상부는 남북 1000m, 동서 300m인 평탄한 개활지이고, 항상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어 평상시에 거주하기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렇지만, 해발 820m인 오녀산은 경사가 조금 완만한 동쪽 산기슭을 제외하면, 사방이 깍아지른 수직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군사방어거점으로는 천혜의 요새지이지만, 일상적으로 거주하기 위한 도성으로는 주변 배후지와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다. 따라서 ⓖ-①의 ‘水上’을 최초의 정착지역, ⓖ-②의 ‘山上’을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都城으로 구분하여 보기는 힘들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水上’과 ‘山上’이라는 입지조건의 차이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卒本으로 비정되는 桓仁일대는 수도의 입지조건인 생산활동과 군사방어에 적합한 자연지형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水上’과 ‘山上’은 이러한 입지조건을 기능에 따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水上’이 농경⋅어로⋅수렵 등 생산활동에 적합한 자연지형을 반영한다면, ①-㉡의 ‘山上’은 군사요충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몽집단과 그를 이은 계루집단은 ‘水上’에 정착하였다가 ‘山上’으로 도성을 옮긴 것이 아니라, 都城이 기능에 따라 ‘水上’과 ‘山上’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경제활동 중심지인 충적평원 곧 ‘水上’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山上’을 방어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②의 서술방식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받을 수 있다. ⓖ-②에서 ‘忽本’은 建都하였다는 ‘山上’이나 朱蒙이 승천하였다는 ‘東罡’의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는 기준점이다. 특히 ‘忽’이라는 고구려어는 ‘고을’이나 ‘城’을 뜻하므로 忽本은 평지에 자리잡은 평상시 거점을 지칭한다고 여겨진다. 다만 ‘卒本’이나 ‘忽本’이라는 명칭만으로는 평지에 성곽을 축조하였는지 여부를 명확하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이 부분은 추후 고고학 조사발굴의 진전에 따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첫 번째 도성인 졸본지역에 ‘水上’과 ‘山上’으로 상징되는 평상시 거점과 비상시 군사방어성이 분화되어 있었다면, 國內로 천도한 이후에도 당연히 평상시 거점과 군사방어성으로 구성된 도성체계를 구축했을 것이다. 國內 천도와 더불어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이 비상시에 入居해 籠城하는 군사방어성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잘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산상왕대에 축조한 丸都城은 군사방어성이고, ‘更作新國’의 ‘國’도 國內 전체가 아니라 군사방어성인 丸都城만을 지칭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①에는 주몽집단이 卒本川 유역에 정착하여 沸流水上에 터를 잡았다고 기술된 반면, ⓖ-②에는 沸流谷 忽本 서쪽 山上에 建都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卒本川과 忽本, 沸流水와 沸流谷은 동일 지명에 대한 異稱인데, ⓖ-②의 ‘沸流谷 忽本’이라는 표현처럼 卒本(忽本)은 沸流谷에 소속된 특정 지역이고, 卒本川은 卒本地域을 흐르는 沸流水에 대한 특칭이다. 두 사료는 표기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朱蒙의 정착지역 또는 건도지역의 위치가 ⓖ-①에는 ‘水上’ 곧 沸流水 연안의 충적평원으로 기술된 반면, ⓖ-②에는 ‘山上’ 곧 忽本(卒本) 서쪽 산위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東明王篇>에 따르면, 朱蒙은 沸流水 유역에 정착하여 松讓國의 항복을 받는 등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하늘의 도움을 받아 鶻嶺에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조영하였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①의 ‘水上’은 최초의 정착지역, ⓖ-②의 ‘山上’은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建都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朱蒙集團이나 그를 이은 桂婁集團은 이 지역 盟主로 등장한 이후 卒本 서쪽 山上에 성곽을 축조하고 이를 도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忽本 서쪽 山上에 구축하였다는 城은 紇升骨城으로도 전해지는데, 대체로 五女山城으로 비정된다. 五女山城은 환인분지에서 가장 험준한 천혜의 요새지로서 戰國 燕 계통의 선철제주조도끼가 출토될 정도로 이른 시기부터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주몽집단이나 그를 이은 桂婁集團이 渾江연안과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의 맹주권을 장악한 다음 五女山城에 建都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五女山城이 자리잡은 정상부는 남북 1000m, 동서 300m인 평탄한 개활지이고, 항상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어 평상시에 거주하기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렇지만, 해발 820m인 오녀산은 경사가 조금 완만한 동쪽 산기슭을 제외하면, 사방이 깍아지른 수직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군사방어거점으로는 천혜의 요새지이지만, 일상적으로 거주하기 위한 도성으로는 주변 배후지와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다. 따라서 ⓖ-①의 ‘水上’을 최초의 정착지역, ⓖ-②의 ‘山上’을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都城으로 구분하여 보기는 힘들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水上’과 ‘山上’이라는 입지조건의 차이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卒本으로 비정되는 桓仁일대는 수도의 입지조건인 생산활동과 군사방어에 적합한 자연지형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水上’과 ‘山上’은 이러한 입지조건을 기능에 따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水上’이 농경⋅어로⋅수렵 등 생산활동에 적합한 자연지형을 반영한다면, ①-㉡의 ‘山上’은 군사요충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몽집단과 그를 이은 계루집단은 ‘水上’에 정착하였다가 ‘山上’으로 도성을 옮긴 것이 아니라, 都城이 기능에 따라 ‘水上’과 ‘山上’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경제활동 중심지인 충적평원 곧 ‘水上’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山上’을 방어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②의 서술방식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받을 수 있다. ⓖ-②에서 ‘忽本’은 建都하였다는 ‘山上’이나 朱蒙이 승천하였다는 ‘東罡’의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는 기준점이다. 특히 ‘忽’이라는 고구려어는 ‘고을’이나 ‘城’을 뜻하므로 忽本은 평지에 자리잡은 평상시 거점을 지칭한다고 여겨진다. 다만 ‘卒本’이나 ‘忽本’이라는 명칭만으로는 평지에 성곽을 축조하였는지 여부를 명확하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이 부분은 추후 고고학 조사발굴의 진전에 따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첫 번째 도성인 졸본지역에 ‘水上’과 ‘山上’으로 상징되는 평상시 거점과 비상시 군사방어성이 분화되어 있었다면, 國內로 천도한 이후에도 당연히 평상시 거점과 군사방어성으로 구성된 도성체계를 구축했을 것이다. 國內 천도와 더불어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이 비상시에 入居해 籠城하는 군사방어성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잘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산상왕대에 축조한 丸都城은 군사방어성이고, ‘更作新國’의 ‘國’도 國內 전체가 아니라 군사방어성인 丸都城만을 지칭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2) 國內 천도와 東海․南海의 설정
이상과 같이 산상왕대에 축조한 丸都城이 군사방어성이고, 평상시 거점이 별도로 존재했다면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는 산상왕대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학자들의 산상왕대 천도설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러면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는《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유리왕 22년(서기 3)에 이루어진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우선 國內 遷都와 더불어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尉那巖城이 사료상 ⓑ-①과 대무신왕 11년조에만 나오고, 그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國內라는 명칭도 유리왕 22년 이후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342년에 다시 나온다. 문헌기록상 유리왕 22년 기사만을 근거로 이때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했다고 단정짓기는 힘든 것이다.
卒 本에서 國內로의 천도시기는 다른 여러 자료를 종합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리왕대와 태조왕대의 수렵지를 비교 검토한 연구성과가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의 다른 왕에 비해 유리왕이나 태조왕대에는 수렵 기사가 유난히 많으며, 수렵 지역도 거의 유사하다고 한다. 더욱이 國內地域의 대표적 수렵지인 箕山이 유리왕의 국내 천도 이전에 이미 왕의 수렵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유리왕대 수렵 기사는 태조왕대의 수렵 기사를 소급하여 분식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리왕대에는 기록상 국내 천도 이후인 유리왕 37년에 익사한 王弟의 시신을 沸流人이 찾는 등 졸본지역에 도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료 ⓑ-①만을 근거로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가 유리왕 22년(서기 3)에 단행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국내 천도는 언제 단행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태조왕대의 다음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러면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는《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유리왕 22년(서기 3)에 이루어진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우선 國內 遷都와 더불어 축조했다는 尉那巖城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尉那巖城이 사료상 ⓑ-①과 대무신왕 11년조에만 나오고, 그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國內라는 명칭도 유리왕 22년 이후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342년에 다시 나온다. 문헌기록상 유리왕 22년 기사만을 근거로 이때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했다고 단정짓기는 힘든 것이다.
卒 本에서 國內로의 천도시기는 다른 여러 자료를 종합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리왕대와 태조왕대의 수렵지를 비교 검토한 연구성과가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의 다른 왕에 비해 유리왕이나 태조왕대에는 수렵 기사가 유난히 많으며, 수렵 지역도 거의 유사하다고 한다. 더욱이 國內地域의 대표적 수렵지인 箕山이 유리왕의 국내 천도 이전에 이미 왕의 수렵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유리왕대 수렵 기사는 태조왕대의 수렵 기사를 소급하여 분식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리왕대에는 기록상 국내 천도 이후인 유리왕 37년에 익사한 王弟의 시신을 沸流人이 찾는 등 졸본지역에 도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료 ⓑ-①만을 근거로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가 유리왕 22년(서기 3)에 단행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국내 천도는 언제 단행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태조왕대의 다음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①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4년조)
②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태조대왕 46년조)
③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태조대왕 55년조)
④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태조대왕 62년조)
⑤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같은책 서천왕 7년조)
⑥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目 夜有光. 秋八月 王東狩獲白鹿. 冬十一月 王至自新城.(같은책 서천왕 19년조)
②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태조대왕 46년조)
③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태조대왕 55년조)
④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태조대왕 62년조)
⑤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같은책 서천왕 7년조)
⑥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目 夜有光. 秋八月 王東狩獲白鹿. 冬十一月 王至自新城.(같은책 서천왕 19년조)
사료 ⓗ-①에 따르면 태조왕대 초반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벌함에 따라 고구려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滄海’ 곧 동해안 일대, 남쪽으로는 ‘薩水’ 곧 청천강 일대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위 개념은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나 졸본지역(환인지역)을 놓고 볼 때 설정할 수 있는 구도이다.《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의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이라는 표현도 이를 보여준다. 남쪽 접경지인 朝鮮은 古朝鮮故地로서 ⓗ-①의 ‘南至薩水’라는
표현에 비견되며, ‘東與沃沮’는 동옥저 정벌로 동쪽 영역이 滄海까지 확장되었다는 ⓗ-①의 기사와 부합된다.
그러므로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를 놓고 보면, 남쪽은 대체로 한반도 서북부, 동쪽은 동해안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사료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방위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기사가 있어 주목된다. ⓗ-③․④의 ‘東海谷守’와 ‘南海’라는 표현이다. 물론 ⓗ-③의 ‘東海’를 현재의 동해안 일대, ⓗ-④의 ‘南海’를 서북한의 앞바다 곧 지금의 서해를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태조왕대에는 서북한 일대에 낙랑군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왕이 서북한 앞바다를 巡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 기 기사를 오류라고 파악하지 않는 한, 東海와 南海 모두 당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동해안 방면으로 설정해야 한다. ‘東海’라는 지명은 <광개토왕릉비>의 舊民 수묘인연호조에도 등장한다. 舊民 수묘인연호조에 등장하는 지명은 대략 ㉠賣句余民⋅東海賈⋅敦城民⋅于城⋅碑利城의 함경도 지역, ㉡平穰城의 평안도 지역, ㉢梁谷⋅梁城⋅安夫連⋅改谷⋅新城⋅南蘇城의 요동방면 등 세 그룹으로 나뉘는데, 함경도 지역인 ㉠그룹에 東海賈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따라서 상기 기사의 ‘東海谷守’가 <광개토왕릉비>의 ‘東海賈’와 연관된 지명이라면, 현재의 동해안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지역만 지칭할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賣句余民은 買溝로서 置溝婁라고도 불린 北沃沮 지역을 지칭한다. 북옥저는 동옥저에서 800여리 거리로서 두만강 하류 일대로 비정되며, 고구려 후기에는 柵城으로 불렸다. 東海賈 다음의 敦城은 3세기 후반 동해안 방면에 축조한 ‘東北 新城’이다. 이 新城이 해변에 위치한 사실은 ‘서천왕이 新城에 행차했을 시에 海谷太守가 鯨魚目을 헌상했다’는 ⓗ-⑥을 통해서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東海賈는 두만강 하구의 賣句余와 ‘동북 신성’인 敦城 사이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東海賈가 함경도 지역의 동해안 일대 가운데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창녕비>에도 나오는 碑利城은 함경남도 안변 일대로 비정되는데, 원래 동예 지역으로서 후한말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于城을 함흥일대의 동옥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당시 동옥저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감안할 때 타당한 견해라 하겠다. <광개토왕릉비> 구민 수묘인연호조의 賣句余民⋅東海賈⋅敦城民⋅于城⋅碑利城 등은 대체로 함경도의 동해안 일대로 비정된다.
그런데《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동옥저를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를 비롯하여 함경도 산간지대의 행인국⋅개마국 등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동옥저를 경유하지 않고 함경도 산간지대의 교통로를 통하여 두만강 하류 일대의 북옥저를 정벌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교통로로 보아 압록강을 거슬러 혜산진에 이른 다음 마천령산맥을 넘어 길주로 나아가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를 정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② ‘東巡柵城’은 압록강을 거슬러 동쪽 방향으로 柵城을 순수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③이나 <광개토왕릉비>의 ‘東海賈’가 동해안 가운데 특정 지역을 지칭한다면, 이러한 방위관념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集安盆地 곧 國內地域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東沃沮는 동쪽이라기 보다는 남쪽에 훨씬 가깝다.《삼국사기》에는 관구검의 침공을 받은 동천왕이 ‘南沃沮’로 피신했다고 나오는데, ‘남쪽에 위치한 옥저’라는 뜻으로 함흥일대의 동옥저를 가리킨다. 현재의 교통로로 보아 집안분지(국내지역)를 출발해 동옥저로 나아갈 경우 독로강을 거슬러 낭림산맥을 넘었다고 추정되는데, 주요 경로의 방향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다. ⓗ-④의 ‘王南巡南海’라는 표현은 바로 국내지역을 출발해 남쪽으로 동옥저 지역을 순행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①의 ‘東至滄海’라는 표현처럼 동해안 방면이 동쪽이라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되지만, 國內地域(집안분지)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압록강 중상류를 거슬러 마천령산맥을 넘어 길주로 나아가는 ‘東海’와 독로강을 거슬로 낭림산맥을 넘어 함흥지역으로 나아가는 ‘南海’로 분리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③․④의 ‘東海’와 ‘南海’라는 표현은 국내지역을 기준으로 하는 방위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함경도 해안지대를 남해와 동해로 양분하는 방위개념은 卒本에서 國內地域으로 천도한 이후에나 성립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
이 렇게 본다면, 태조왕대에는 두 계통의 방위인식이 혼재하고 있었다. 태조왕대 초반에 해당하는 ⓗ-①이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 또는 졸본 기준의 방위개념이라면, 태조왕대 중반 곧 2세기 초경에 해당하는 ⓗ-③․④는 國內라는 특정 지역을 기준으로 한 방위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태조왕 초반-중반 곧 1세기 중반-2세기 초경에 國內 기준의 방위개념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태조왕대 초반~중반에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가 단행되고, 이에 따라 國內 기준의 방위인식이 확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 시기는 기원을 전후한 유리왕대보다는 태조왕대인 1세기 중후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를 놓고 보면, 남쪽은 대체로 한반도 서북부, 동쪽은 동해안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사료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방위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기사가 있어 주목된다. ⓗ-③․④의 ‘東海谷守’와 ‘南海’라는 표현이다. 물론 ⓗ-③의 ‘東海’를 현재의 동해안 일대, ⓗ-④의 ‘南海’를 서북한의 앞바다 곧 지금의 서해를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태조왕대에는 서북한 일대에 낙랑군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왕이 서북한 앞바다를 巡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 기 기사를 오류라고 파악하지 않는 한, 東海와 南海 모두 당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동해안 방면으로 설정해야 한다. ‘東海’라는 지명은 <광개토왕릉비>의 舊民 수묘인연호조에도 등장한다. 舊民 수묘인연호조에 등장하는 지명은 대략 ㉠賣句余民⋅東海賈⋅敦城民⋅于城⋅碑利城의 함경도 지역, ㉡平穰城의 평안도 지역, ㉢梁谷⋅梁城⋅安夫連⋅改谷⋅新城⋅南蘇城의 요동방면 등 세 그룹으로 나뉘는데, 함경도 지역인 ㉠그룹에 東海賈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따라서 상기 기사의 ‘東海谷守’가 <광개토왕릉비>의 ‘東海賈’와 연관된 지명이라면, 현재의 동해안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지역만 지칭할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賣句余民은 買溝로서 置溝婁라고도 불린 北沃沮 지역을 지칭한다. 북옥저는 동옥저에서 800여리 거리로서 두만강 하류 일대로 비정되며, 고구려 후기에는 柵城으로 불렸다. 東海賈 다음의 敦城은 3세기 후반 동해안 방면에 축조한 ‘東北 新城’이다. 이 新城이 해변에 위치한 사실은 ‘서천왕이 新城에 행차했을 시에 海谷太守가 鯨魚目을 헌상했다’는 ⓗ-⑥을 통해서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東海賈는 두만강 하구의 賣句余와 ‘동북 신성’인 敦城 사이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東海賈가 함경도 지역의 동해안 일대 가운데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창녕비>에도 나오는 碑利城은 함경남도 안변 일대로 비정되는데, 원래 동예 지역으로서 후한말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于城을 함흥일대의 동옥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당시 동옥저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감안할 때 타당한 견해라 하겠다. <광개토왕릉비> 구민 수묘인연호조의 賣句余民⋅東海賈⋅敦城民⋅于城⋅碑利城 등은 대체로 함경도의 동해안 일대로 비정된다.
그런데《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동옥저를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를 비롯하여 함경도 산간지대의 행인국⋅개마국 등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동옥저를 경유하지 않고 함경도 산간지대의 교통로를 통하여 두만강 하류 일대의 북옥저를 정벌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교통로로 보아 압록강을 거슬러 혜산진에 이른 다음 마천령산맥을 넘어 길주로 나아가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를 정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② ‘東巡柵城’은 압록강을 거슬러 동쪽 방향으로 柵城을 순수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③이나 <광개토왕릉비>의 ‘東海賈’가 동해안 가운데 특정 지역을 지칭한다면, 이러한 방위관념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集安盆地 곧 國內地域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東沃沮는 동쪽이라기 보다는 남쪽에 훨씬 가깝다.《삼국사기》에는 관구검의 침공을 받은 동천왕이 ‘南沃沮’로 피신했다고 나오는데, ‘남쪽에 위치한 옥저’라는 뜻으로 함흥일대의 동옥저를 가리킨다. 현재의 교통로로 보아 집안분지(국내지역)를 출발해 동옥저로 나아갈 경우 독로강을 거슬러 낭림산맥을 넘었다고 추정되는데, 주요 경로의 방향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다. ⓗ-④의 ‘王南巡南海’라는 표현은 바로 국내지역을 출발해 남쪽으로 동옥저 지역을 순행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①의 ‘東至滄海’라는 표현처럼 동해안 방면이 동쪽이라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되지만, 國內地域(집안분지)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압록강 중상류를 거슬러 마천령산맥을 넘어 길주로 나아가는 ‘東海’와 독로강을 거슬로 낭림산맥을 넘어 함흥지역으로 나아가는 ‘南海’로 분리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③․④의 ‘東海’와 ‘南海’라는 표현은 국내지역을 기준으로 하는 방위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함경도 해안지대를 남해와 동해로 양분하는 방위개념은 卒本에서 國內地域으로 천도한 이후에나 성립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
이 렇게 본다면, 태조왕대에는 두 계통의 방위인식이 혼재하고 있었다. 태조왕대 초반에 해당하는 ⓗ-①이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 또는 졸본 기준의 방위개념이라면, 태조왕대 중반 곧 2세기 초경에 해당하는 ⓗ-③․④는 國內라는 특정 지역을 기준으로 한 방위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태조왕 초반-중반 곧 1세기 중반-2세기 초경에 國內 기준의 방위개념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태조왕대 초반~중반에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가 단행되고, 이에 따라 國內 기준의 방위인식이 확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卒本에서 國內로의 천도 시기는 기원을 전후한 유리왕대보다는 태조왕대인 1세기 중후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진다.
2. 國內 遷都의 배경
1) 국제정세 변동과 東沃沮 진출
桓仁으로 비정되는 卒本지역은 요동방면에 가까워 漢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기에는 유리했지만, 漢과
대립관계가 형성될 경우에는 군사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지형조건이었다. 반면 集安으로 비정되는 國內지역은 老嶺山脈이라는 자연장애물로
인해 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리한 지형조건이었다. 주지하듯이 前漢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다음 압록강 중류일대에 玄菟郡을 설치했지만,
서기전 75년 이 지역의 주민집단에 의해 蘇子河 방면으로 퇴축되었다. 그 이후 前漢은 烏桓 평정과 匈奴 쇠퇴를 계기로 대외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며, 압록강 중류일대에 대해서도 분리통제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한 후반기를 통해 지속되었다.
이처럼 전한이 압록강 중류일대에 대해 분리통제책을 시행할 무렵, 이 지역의 중심지는 제2현토군 치소와 가까이 위치한 졸본이었다. 주지하듯이 처음에는 졸본지역에 자리잡았던 消奴部세력이 연맹주 역할을 수행했고,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부여방면에서 남하한 주몽집단이 소노부 대신 새로운 연맹주로 부상했다.
그런데 王莽이 新을 건국한 직후 고압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압박하자, 주변의 제국이 일제히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대륙도 대혼란에 빠졌는데, 後漢을 건국한 光武帝는 서기 24년 冀州-幽州 일대를 석권하면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확보했다. 光武帝는 이 과정에서 上谷․漁陽 일대 군사의 도움을 받는 한편, 幽州 10郡의 突騎를 동원해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등 동방지역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고구려 역시 新末~後漢 初期에 제2玄菟郡과의 통교를 지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32년 고구려왕이 후한에 사신을 파견해 朝貢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그런데,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後漢의 대내외 정세는 잇따른 匈奴 토벌 실패로 다시 불안정해졌다. 특히 서기 36년경부터 匈奴가 烏桓․鮮卑와 연계하여 後漢의 동북방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이에 後漢이 이들의 침공을 방어했으나 쉽게 평정되지 않았다. 이 무렵, 光武帝는 隴右와 蜀 지역을 평정하여 중원대륙을 통일한 다음, 오랜 전쟁과 그에 따른 疲耗를 싫어해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軍旅를 이야기하지 못하게 했다. 光武帝는 匈奴․烏桓․鮮卑의 연계로 인해 동북방 일대의 국제정세가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강경책보다는 유화책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41년 祭彤이 遼東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는 遼東太守 부임 초기에는 烏桓이나 鮮卑의 침공을 무력으로 방어하다가, 49년경부터 무력보다 財利나 恩信으로써 주변 족속을 위무했다고 한다. 가령 49년 鮮卑 大都護 偏何가 귀화를 청하자, 匈奴人을 참수하여 首級을 가져오면 賞賜하겠다고 약속해 흉노를 약화시키고 鮮卑와 烏桓을 모두 入朝시켰다고 한다. 後漢이 강경한 정벌책보다는 財貨를 앞세운 유화책을 구사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화책은 遼東太守인 祭彤 개인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匈奴의 갑작스러운 쇠퇴를 계기로 後漢의 조정 차원에서 구체화된 대외정책이었다. 匈奴는 46년경 가뭄과 병충해 등 극심한 자연재해를 입고 사람과 가축 태반이 죽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烏桓의 공격까지 받자 匈奴는 북쪽으로 멀리 도망갔다. 이에 따라 匈奴가 할거하던 幕南이 텅비어 군사방어의 필요성이 감소하게 되자, 後漢은 邊郡에 詔書를 내려 亭候와 吏卒을 혁파하는 한편 烏桓에 대해서는 幣帛으로 招降하도록 했다. 후한의 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49년 遼西 烏桓이 대거 漢에 內屬하였으며, 烏桓校尉를 復置해 이들을 통령하는 한편 鮮卑에 대한 賞賜, 質子, 互市 등을 관장하도록 했다.
光武帝가 중원대륙을 평정한 다음 피력했던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흉노의 쇠퇴를 계기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遼東太守 祭彤도 광무제의 뜻을 받들어 유화책을 시행하여 상당한 실효를 거두어 鮮卑와 烏桓를 모두 入朝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46년경 後漢이 財利를 앞세운 회유책을 시행하자 동북방 일대의 족속이 모두 後漢에 입조했다. 그런데 고구려지역의 경우 이와 다른 분위기가 간취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처럼 전한이 압록강 중류일대에 대해 분리통제책을 시행할 무렵, 이 지역의 중심지는 제2현토군 치소와 가까이 위치한 졸본이었다. 주지하듯이 처음에는 졸본지역에 자리잡았던 消奴部세력이 연맹주 역할을 수행했고,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부여방면에서 남하한 주몽집단이 소노부 대신 새로운 연맹주로 부상했다.
그런데 王莽이 新을 건국한 직후 고압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압박하자, 주변의 제국이 일제히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대륙도 대혼란에 빠졌는데, 後漢을 건국한 光武帝는 서기 24년 冀州-幽州 일대를 석권하면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확보했다. 光武帝는 이 과정에서 上谷․漁陽 일대 군사의 도움을 받는 한편, 幽州 10郡의 突騎를 동원해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등 동방지역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고구려 역시 新末~後漢 初期에 제2玄菟郡과의 통교를 지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32년 고구려왕이 후한에 사신을 파견해 朝貢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그런데,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後漢의 대내외 정세는 잇따른 匈奴 토벌 실패로 다시 불안정해졌다. 특히 서기 36년경부터 匈奴가 烏桓․鮮卑와 연계하여 後漢의 동북방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이에 後漢이 이들의 침공을 방어했으나 쉽게 평정되지 않았다. 이 무렵, 光武帝는 隴右와 蜀 지역을 평정하여 중원대륙을 통일한 다음, 오랜 전쟁과 그에 따른 疲耗를 싫어해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軍旅를 이야기하지 못하게 했다. 光武帝는 匈奴․烏桓․鮮卑의 연계로 인해 동북방 일대의 국제정세가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강경책보다는 유화책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41년 祭彤이 遼東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는 遼東太守 부임 초기에는 烏桓이나 鮮卑의 침공을 무력으로 방어하다가, 49년경부터 무력보다 財利나 恩信으로써 주변 족속을 위무했다고 한다. 가령 49년 鮮卑 大都護 偏何가 귀화를 청하자, 匈奴人을 참수하여 首級을 가져오면 賞賜하겠다고 약속해 흉노를 약화시키고 鮮卑와 烏桓을 모두 入朝시켰다고 한다. 後漢이 강경한 정벌책보다는 財貨를 앞세운 유화책을 구사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화책은 遼東太守인 祭彤 개인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匈奴의 갑작스러운 쇠퇴를 계기로 後漢의 조정 차원에서 구체화된 대외정책이었다. 匈奴는 46년경 가뭄과 병충해 등 극심한 자연재해를 입고 사람과 가축 태반이 죽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烏桓의 공격까지 받자 匈奴는 북쪽으로 멀리 도망갔다. 이에 따라 匈奴가 할거하던 幕南이 텅비어 군사방어의 필요성이 감소하게 되자, 後漢은 邊郡에 詔書를 내려 亭候와 吏卒을 혁파하는 한편 烏桓에 대해서는 幣帛으로 招降하도록 했다. 후한의 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49년 遼西 烏桓이 대거 漢에 內屬하였으며, 烏桓校尉를 復置해 이들을 통령하는 한편 鮮卑에 대한 賞賜, 質子, 互市 등을 관장하도록 했다.
光武帝가 중원대륙을 평정한 다음 피력했던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흉노의 쇠퇴를 계기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遼東太守 祭彤도 광무제의 뜻을 받들어 유화책을 시행하여 상당한 실효를 거두어 鮮卑와 烏桓를 모두 入朝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46년경 後漢이 財利를 앞세운 회유책을 시행하자 동북방 일대의 족속이 모두 後漢에 입조했다. 그런데 고구려지역의 경우 이와 다른 분위기가 간취되고 있어 주목된다.
ⓘ-① 二十三年冬,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 詣樂浪內屬.(《後漢書》권85 東夷傳 고구려조)
② (鮮卑)異種滿離高句麗之屬, 遂駱驛款塞, 獻貂裘好馬, 帝培賞賜.(《後漢書》권20 祭彤전)
③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彤以恩信招之, 皆復款塞.(《後漢書》권85 東夷傳 고구려조)
② (鮮卑)異種滿離高句麗之屬, 遂駱驛款塞, 獻貂裘好馬, 帝培賞賜.(《後漢書》권20 祭彤전)
③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彤以恩信招之, 皆復款塞.(《後漢書》권85 東夷傳 고구려조)
상기 사료는 匈奴가 쇠퇴하고 後漢이 회유책을 구사할 무렵, 고구려지역의 동향을 잘 보여준다.
ⓘ-③에 따르면 遼東太守 祭彤이 49년 右北平~太原을 침공한 句麗를 恩信으로 招誘하자 모두 다시 款塞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지역에서도 烏桓이나 鮮卑와 마찬가지로 동북방 일대의 불안정한 정세를 틈타 後漢의 邊境을 침공하다가 漢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에
따라 다시 內屬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료 ⓘ-①이나 ⓘ-②은 고구려지역에서 이와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먼저 ⓘ-①에 따르면 압록강 중류일대의 한 세력집단인 蠶支落의 大加 戴升이 47년 만여인을 이끌고 樂浪郡에 內屬했다고 한다. 萬餘人이라는 인구규모는 대체로 당시 압록강 중류일대에 산재했던 那國에 해당한다. 蠶支落 大加 戴升의 낙랑 內屬은 압록강 중류일대에 산재한 여러 단위정치체 가운데 특정 세력이 樂浪郡에 內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②에 따르면 49년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鮮卑 계통의 滿離集團도 祭彤의 회유책을 좇아 遼東郡에 이르러 款塞하고 있다.
즉 匈奴의 쇠퇴와 後漢의 유화책으로 인해 烏桓, 鮮卑 등 동북방의 여러 족속이 後漢에 內屬하거나 款塞할 무렵,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인 전체가 아니라 특정 세력집단 또는 그에 예속된 異種族 일부가 後漢에 內屬(款塞)하는 상황이 진행되었다. 그것도 고구려지역을 통제하던 제2玄菟郡이 아니라 樂浪郡이나 遼東郡에 內屬(款塞)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지역에서는 烏桓이나 鮮卑 지역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後漢은 고구려지역에 대해서도 제2玄菟郡을 통해 財利로써 회유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관철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에 後漢의 유화책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좇는 일부 세력집단이나 이종족이 제2玄菟郡이 아닌 樂浪郡이나 遼東郡 등 제3의 邊郡으로 內屬(款塞)하였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後漢의 유화책이 구체화된 46년 무렵, 고구려지역에서는 제2玄菟郡의 분리 통제책이 더 이상 관철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더욱이 압록강 중류일대의 특정 집단이나 고구려에 예속된 이종족이 개별적으로 樂浪郡, 遼東郡 등에 內屬(款塞)한 것을 상기하면, 개별 집단의 대외 교섭권을 강력히 통제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세기 중반을 전후해 고구려와 제2玄菟郡의 교섭이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상기 사료를 제외하면, 49년 이후 105년까지 고구려와 후한의 교섭기사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더욱이 105년 후한과의 교섭도 태조왕이 遼東지역을 공격하는 형태로 재개된다. 따라서 제2玄菟郡과의 교섭이 단절된 이후, 後漢과 고구려지역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감돌았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後漢은 匈奴의 쇠퇴를 계기로 유화책을 추진하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당시 동북방 邊郡의 母郡에 해당하는 遼東郡 太守 祭彤이 財利로써 주변 족속을 회유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後漢은 고구려지역에 대해서도 財貨를 앞세운 회유책을 계속 추진했다고 추정된다. 後漢은 고구려와의 교섭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이를 복구하기 위한 회유책을 시도했다고 여겨진다. 玄菟郡이 ‘東界’에 幘溝婁를 설치해 그곳에 朝服․衣幘을 두면, 고구려인들이 歲時마다 와서 가져갔다는 상황은 바로 이를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1세기 중반경, 고구려가 한의 유화책을 틈타 내부 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함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관계가 심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술하였듯이 桓仁盆地로 비정되는 卒本은 요동방면 특히 제2玄菟郡이 위치한 蘇子河 유역에 가까워 군사방어상 불리했다. 따라서 고구려 왕실은 玄菟郡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기 위해 卒本에 비해 군사적으로 유리한 國內지역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 와 관련해 당시 後漢의 邊郡政策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後漢은 서기 30년 각지의 縣을 줄이고 官吏를 대폭 감원하는 한편, 郡國의 都尉官을 혁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동방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낭림산맥 동쪽의 원산만 일대를 관장하던 樂浪郡 東部都尉가 폐지되어 이 지역에 대한 後漢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東部都尉가 폐지된 이후, 후한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渠帥를 縣候로 삼아 간접적인 통제를 시도했지만 곧바로 夷狄이 서로 攻伐하는 대혼란이 전개되었다.
바로 이러한 와중에 고구려가 沃沮를 臣屬시켰다. 後漢의 소극적인 邊郡政策으로 동해안 방면이 힘의 공백지대가 되고, 後漢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낮아지자, 고구려는 제2玄菟郡과의 교섭을 단절한 채 沃沮 방면을 전격적으로 정복한 것이다. 1세기 중반경 고구려는 후한과의 대외관계를 단절한 채, 동해안 방면에 배후기지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발전전략을 수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환인분지의 졸본지역은 요동방면으로 치우쳐 있어 동옥저 방면으로 진출하거나 이를 경영하기에는 부적합했다. 漢과의 관계뿐 아니라 태조왕대부터 본격화된 동옥저 진출을 위해서도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는 대체로 1세기 중반경 후한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고 나아가 한의 변군정책 변화로 힘의 공백지대가 된 동옥저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卒本에서 國內地域으로 천도를 단행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태조왕대 초반 國內 遷都에 따라 國內를 기준으로 하는 南海와 東海라는 방위 개념이 확립되었다는 앞절의 추론과 대체로 부합한다. 특히 國內 기준의 방위 개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國內지역 남쪽의 東沃沮를 '南海'로 인식하는 것인데, 이는 고구려인들이 동옥저 경영을 중시하였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국제정세와 연관시켜 본다면 국내 천도는 후한의 분리통제책 봉쇄와 더불어 동옥저 진출이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먼저 ⓘ-①에 따르면 압록강 중류일대의 한 세력집단인 蠶支落의 大加 戴升이 47년 만여인을 이끌고 樂浪郡에 內屬했다고 한다. 萬餘人이라는 인구규모는 대체로 당시 압록강 중류일대에 산재했던 那國에 해당한다. 蠶支落 大加 戴升의 낙랑 內屬은 압록강 중류일대에 산재한 여러 단위정치체 가운데 특정 세력이 樂浪郡에 內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②에 따르면 49년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鮮卑 계통의 滿離集團도 祭彤의 회유책을 좇아 遼東郡에 이르러 款塞하고 있다.
즉 匈奴의 쇠퇴와 後漢의 유화책으로 인해 烏桓, 鮮卑 등 동북방의 여러 족속이 後漢에 內屬하거나 款塞할 무렵,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인 전체가 아니라 특정 세력집단 또는 그에 예속된 異種族 일부가 後漢에 內屬(款塞)하는 상황이 진행되었다. 그것도 고구려지역을 통제하던 제2玄菟郡이 아니라 樂浪郡이나 遼東郡에 內屬(款塞)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지역에서는 烏桓이나 鮮卑 지역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後漢은 고구려지역에 대해서도 제2玄菟郡을 통해 財利로써 회유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관철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에 後漢의 유화책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좇는 일부 세력집단이나 이종족이 제2玄菟郡이 아닌 樂浪郡이나 遼東郡 등 제3의 邊郡으로 內屬(款塞)하였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後漢의 유화책이 구체화된 46년 무렵, 고구려지역에서는 제2玄菟郡의 분리 통제책이 더 이상 관철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더욱이 압록강 중류일대의 특정 집단이나 고구려에 예속된 이종족이 개별적으로 樂浪郡, 遼東郡 등에 內屬(款塞)한 것을 상기하면, 개별 집단의 대외 교섭권을 강력히 통제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세기 중반을 전후해 고구려와 제2玄菟郡의 교섭이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상기 사료를 제외하면, 49년 이후 105년까지 고구려와 후한의 교섭기사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더욱이 105년 후한과의 교섭도 태조왕이 遼東지역을 공격하는 형태로 재개된다. 따라서 제2玄菟郡과의 교섭이 단절된 이후, 後漢과 고구려지역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감돌았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後漢은 匈奴의 쇠퇴를 계기로 유화책을 추진하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당시 동북방 邊郡의 母郡에 해당하는 遼東郡 太守 祭彤이 財利로써 주변 족속을 회유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後漢은 고구려지역에 대해서도 財貨를 앞세운 회유책을 계속 추진했다고 추정된다. 後漢은 고구려와의 교섭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이를 복구하기 위한 회유책을 시도했다고 여겨진다. 玄菟郡이 ‘東界’에 幘溝婁를 설치해 그곳에 朝服․衣幘을 두면, 고구려인들이 歲時마다 와서 가져갔다는 상황은 바로 이를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1세기 중반경, 고구려가 한의 유화책을 틈타 내부 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함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관계가 심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술하였듯이 桓仁盆地로 비정되는 卒本은 요동방면 특히 제2玄菟郡이 위치한 蘇子河 유역에 가까워 군사방어상 불리했다. 따라서 고구려 왕실은 玄菟郡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기 위해 卒本에 비해 군사적으로 유리한 國內지역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 와 관련해 당시 後漢의 邊郡政策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後漢은 서기 30년 각지의 縣을 줄이고 官吏를 대폭 감원하는 한편, 郡國의 都尉官을 혁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동방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낭림산맥 동쪽의 원산만 일대를 관장하던 樂浪郡 東部都尉가 폐지되어 이 지역에 대한 後漢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東部都尉가 폐지된 이후, 후한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渠帥를 縣候로 삼아 간접적인 통제를 시도했지만 곧바로 夷狄이 서로 攻伐하는 대혼란이 전개되었다.
바로 이러한 와중에 고구려가 沃沮를 臣屬시켰다. 後漢의 소극적인 邊郡政策으로 동해안 방면이 힘의 공백지대가 되고, 後漢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낮아지자, 고구려는 제2玄菟郡과의 교섭을 단절한 채 沃沮 방면을 전격적으로 정복한 것이다. 1세기 중반경 고구려는 후한과의 대외관계를 단절한 채, 동해안 방면에 배후기지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발전전략을 수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환인분지의 졸본지역은 요동방면으로 치우쳐 있어 동옥저 방면으로 진출하거나 이를 경영하기에는 부적합했다. 漢과의 관계뿐 아니라 태조왕대부터 본격화된 동옥저 진출을 위해서도 卒本에서 國內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는 대체로 1세기 중반경 후한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고 나아가 한의 변군정책 변화로 힘의 공백지대가 된 동옥저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卒本에서 國內地域으로 천도를 단행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태조왕대 초반 國內 遷都에 따라 國內를 기준으로 하는 南海와 東海라는 방위 개념이 확립되었다는 앞절의 추론과 대체로 부합한다. 특히 國內 기준의 방위 개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國內지역 남쪽의 東沃沮를 '南海'로 인식하는 것인데, 이는 고구려인들이 동옥저 경영을 중시하였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국제정세와 연관시켜 본다면 국내 천도는 후한의 분리통제책 봉쇄와 더불어 동옥저 진출이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2) 國家體制 정비와 鴨綠江 水路網 장악
전술한 것처럼 고구려는 1세기 중반을 전후해 후한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함과 더불어 압록강
중류일대의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桂婁部와 더불어 고구려 초기 국가체제를 운영하던 또다른 축인 비류나부, 연나부,
관나부, 환나부 등의 4那部는 태조왕대 초반에 모두 등장한다. 또한 태조왕 20년과 22년 藻那와 朱那가 고구려에 통합된 이후
‘那’라는 명칭은 이 4那部에만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왕대 초반경 압록강 중류일대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집단이 桂婁部와 그의 통제를 받는 하부단위정치체인 4나부로 통합되었음을 반영한다. 즉 태조왕대 초반경에 계루부와 4나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태조왕대 초반에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면, 계루부는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인 교통망도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다음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왕대 초반경 압록강 중류일대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집단이 桂婁部와 그의 통제를 받는 하부단위정치체인 4나부로 통합되었음을 반영한다. 즉 태조왕대 초반경에 계루부와 4나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태조왕대 초반에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면, 계루부는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인 교통망도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다음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美川王(一云好壤王), 諱乙弗(或云憂弗), 初, 烽上王疑弟咄固有異心, 殺之,
子乙弗畏害出遁. (중략) 周年乃去, 與東村人再牟販鹽. 乘舟抵鴨淥, 將鹽下寄江東思收村人家. 其家老嫗請鹽, 許之斗許, 再請不與.
其嫗恨恚, 潛以屨置之鹽中. 乙弗不知, 負而上道. 嫗追索之, 誣以庾屨, 告鴨淥宰. 宰以屨直, 取鹽與嫗, 決笞放之. 於是, 形容枯槁,
衣裳藍縷, 人見之, 不知其爲王孫也. 是時, 國相倉助利將廢王, 先遣北部祖弗․東部蕭友等, 物色訪乙弗於山野. 至沸流河邊見一丈夫在船上,
雖形貌憔悴, 而動止非常. 蕭友等疑是乙弗.(《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미천왕 즉위년조)
상기 기사는 압록강 중류일대의 교통망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미천왕 을불이 백부인 봉상왕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할 때 소금장수를 했는데,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을불의 이동 경로를 보면 ‘압록’ 곧 압록강 본류와 ‘비류하’ 곧 압록강 지류인 혼강 일대가 모두 포괄되어 있으며, 그때 ‘배를
타고 압록에 도착했다’거나 ‘비류하 강변의 배 위에 있었다’고 한다. 즉 을불이 수로를 이용해 압록강 본류에서 그 지류인 혼강
일대까지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는 고구려 초기에 압록강과 그 지류를 연결하는 수로 교통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측면은 고구려 초기 묘제인 적석묘 분포양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는 100여곳 가까운 고분군이 발견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압록강과 그 지류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특히 이른 시기의 적석묘는 대부분 강변의 자연제방을 따라 조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압록강 중류일대의 주민집단이 험준한 산간지대를 왕래하는 교통수단으로 육로보다 수로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압록강변에 위치한 산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通化의 자안산성은 서남쪽 정문으로 통하는 골짜기에 판석을 깔아 아래쪽은 배수구, 위쪽은 통로로 사용했는데, 이는 渾江의 水路와 통하던 길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압록강 상류의 동마록촌고성의 남문터 아래쪽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1층 臺地 통해 압록강으로 나아가던 통로라고 한다. 이러한 유적은 고구려인들이 압록강 중상류 일대 각지에 성곽을 축조하며 수로교통로를 활용하던 상황을 보여준다고 파악된다.
이렇게 본다면, 태조왕대 초반경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수로망 장악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압록강 중상류 일대 전체를 놓고 보면, 환인분지로 비정되는 졸본지역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반면 집안분지로 비정되는 국내지역은 압록강 본류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혼강을 제외하면 충만강, 독로강, 자성강 등 다른 지류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수로교통로의 요충지이다.
더욱이 현재까지 확인된 고구려 초기 고분군 가운데 혼강유역에 분포한 것은 20-30%에 불과하며, 나머지 70-80%는 압록강 본류와 그 지류인 독로강, 자성강 등에 분포해 있다. 따라서 계루부왕권이 태조왕대 초반 후한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고, 압록강 중류일대의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압록강 수로망을 확고히 장악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압록강 수로망에서 한쪽에 치우친 卒本보다 요충지인 國內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동해안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서도 國內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다. 가령 태조왕대에 ‘東海’로 인식했던 두만강 하류~함경북도 일대에서 수취한 물자는 길주에서 육로로 마천령산맥을 넘어 혜산에 도착한 다음 압록강 수로를 이용해 운반했을 것이다. 또한 ‘南海’로 인식했던 동옥저 방면에서 수취한 물자는 육로로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지역에 도착한 다음 독로강 수로를 이용해 운송했을 것이다. 두 지역 모두 수로상으로 卒本보다 國內로 운반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더욱이 혜산이나 강계에서 國內지역으로 운송할 경우에는 노동력이 적게 소요되는 하류방면인 방면, 卒本지역까지 운송하려면 혼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상으로 보아 고구려는 태조왕대 초반경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동해안 방면에서 수취한 물자를 원활하기 운송하기 위해 압록강 수로망의 요충지인 국내지역으로 천도하였다고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 초기에 압록강과 그 지류를 연결하는 수로 교통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측면은 고구려 초기 묘제인 적석묘 분포양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는 100여곳 가까운 고분군이 발견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압록강과 그 지류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특히 이른 시기의 적석묘는 대부분 강변의 자연제방을 따라 조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압록강 중류일대의 주민집단이 험준한 산간지대를 왕래하는 교통수단으로 육로보다 수로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압록강변에 위치한 산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通化의 자안산성은 서남쪽 정문으로 통하는 골짜기에 판석을 깔아 아래쪽은 배수구, 위쪽은 통로로 사용했는데, 이는 渾江의 水路와 통하던 길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압록강 상류의 동마록촌고성의 남문터 아래쪽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1층 臺地 통해 압록강으로 나아가던 통로라고 한다. 이러한 유적은 고구려인들이 압록강 중상류 일대 각지에 성곽을 축조하며 수로교통로를 활용하던 상황을 보여준다고 파악된다.
이렇게 본다면, 태조왕대 초반경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수로망 장악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압록강 중상류 일대 전체를 놓고 보면, 환인분지로 비정되는 졸본지역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반면 집안분지로 비정되는 국내지역은 압록강 본류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혼강을 제외하면 충만강, 독로강, 자성강 등 다른 지류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수로교통로의 요충지이다.
더욱이 현재까지 확인된 고구려 초기 고분군 가운데 혼강유역에 분포한 것은 20-30%에 불과하며, 나머지 70-80%는 압록강 본류와 그 지류인 독로강, 자성강 등에 분포해 있다. 따라서 계루부왕권이 태조왕대 초반 후한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고, 압록강 중류일대의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압록강 수로망을 확고히 장악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압록강 수로망에서 한쪽에 치우친 卒本보다 요충지인 國內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동해안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서도 國內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다. 가령 태조왕대에 ‘東海’로 인식했던 두만강 하류~함경북도 일대에서 수취한 물자는 길주에서 육로로 마천령산맥을 넘어 혜산에 도착한 다음 압록강 수로를 이용해 운반했을 것이다. 또한 ‘南海’로 인식했던 동옥저 방면에서 수취한 물자는 육로로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지역에 도착한 다음 독로강 수로를 이용해 운송했을 것이다. 두 지역 모두 수로상으로 卒本보다 國內로 운반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더욱이 혜산이나 강계에서 國內지역으로 운송할 경우에는 노동력이 적게 소요되는 하류방면인 방면, 卒本지역까지 운송하려면 혼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상으로 보아 고구려는 태조왕대 초반경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동해안 방면에서 수취한 물자를 원활하기 운송하기 위해 압록강 수로망의 요충지인 국내지역으로 천도하였다고 추정된다.
맺 음 말
종래 국내 천도 시기에 대해서는 크게 산상왕대설과 유리왕대설로 양분되어 있었다. 山上王代說을 주장한 일본학자들이 산상왕대 이전의 초기 왕계와 고구려본기 기사를 취신하지 않는데 비해, 琉璃王代說을 주장하는 한국학자나 중국학자들은 초기 왕계 및 고구려본기 기사를 신빙하는 입장이다. 國內로의 遷都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고구려 초기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산 상왕대설의 가장 중요한 논거는 ‘伊夷模(산상왕)가 更作新國했다’는《삼국지》고구려전의 기사이다. 그런데 제반 사료를 검토한 결과, 이 기사는 도성 전체를 새로 건설했다는 것이 아니라, 도성 내의 군사방어성인 환도성이라는 특정 성곽을 축조하고 이곳으로 移居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을 파악했다. 산상왕대설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편 유리왕대 기사만을 근거로 유리왕대에 천도했다고 단정짓기도 힘들다. 더욱이 유리왕대의 수렵지와 태조왕대의 수렵지가 거의 겹친다는 점에서 유리왕대의 기사는 상당 부분 태조왕대의 기사를 소급하여 분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태조왕대 초반에는 동해안 일대를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하다가, 중반경에 국내지역을 기준으로 南海와 東海로 양분하여 인식하는 방위개념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방위개념은 국내 천도에 따라 성립되었을 것이므로 대체로 태조왕 초반-중반 사이에 천도가 단행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1세기 중반경 후한의 대외정책은 소극적이고 유화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후한이 소극적인 邊郡政策을 시행함에 따라 동해안 방면은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으며, 財利를 앞세운 유화책을 시행함에 따라 군사적 대응의 가능성도 낮아졌다. 이에 고구려는 후한과의 교섭을 단절한 채 沃沮 방면을 정복하여 배후기지를 건설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태조왕대 초반에 요동방면에 치우친 졸본에서 동옥저 방면에 가까운 국내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시기에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일대의 세력집단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며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압록강 중류일대 전체를 아우르는 교통망을 구축해야 했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험준한 산악을 넘는 육로보다 수로를 훨씬 더 많이 이용했다. 그런데 압록강 수로망을 놓고 본다면, 졸본지역이 한쪽으로 치우친 반면 국내지역은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더욱이 동해안 방면에서 수취한 물자를 운송하는 데도 국내지역이 훨씬 더 편리했다. 따라서 대내적으로 수로망 장악을 통해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국내 천도는 한의 변군정책 변화에 따라 힘의 공백지대가 된 동옥저 진출, 그리고 한이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틈을 타서 국가체제를 정비하려는 목적에서 단행되었다. 고구려의 국내천도는 국제정세 변화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국가발전 방향을 성취하기 위해 단행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