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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정성일 님)의 고구리 사략(유류왕) 해석과 해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21:40
원문(原文)
十月帶素欲得松江(通江)而率五万兵來侵遇大雪七日進退不能凍死者十八九不戰而退歸謂解素曰不聽汝言而致此.

해석(解釋)
10월 대소(帶素)가 송강(松江)(통강)을 얻기를 바라여 병사 5만을 이끌고 와 침입했는데 우연히 7일 동안 큰 눈이 내려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전쟁을 하지 않고 물러났는데 돌아왔다.  대소(帶素)가 해소(解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아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했다.

원문(原文)
十九年庚申 八月託利斯卑逐郊豕至長屋澤(小興㲪?)中斷其脚筋, 上怒命坑二人, 而不豫皇后與巫謝之. 以淹포(원문:물수변+호랑이호)沛者武骨左輔, 高婁太子右輔.

주(注) : 교시(郊豕)
이는 고구리(高句麗)에서 제천(祭天)때 쓰는 돼지를 뜻함.  교제(郊祭)는 고대의 제천(祭天)을 나타내는 용어임.  

주(注) : 불예(不豫)
이는 ‘임금의 몸이 불편함’을 뜻하는 전문용어임.
【용례】임금이 드디어 흥례부에 행차하여, 대화루에 나아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 임금이 몸이 편치않았다. 기사에 동경으로부터 돌아왔다. ; 遂行興禮府 御大和樓 宴群臣 捕大魚於海中 王不豫 己巳 至自東京 [고려사절요 권제2, 56장 앞쪽, 성종 16.9]

해석(解釋)
19년(B.C. 1)경신년 8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교시(郊豕)가 (**) (달아나) 장옥택(長屋澤)(소흥등?)에 이르러 (제물로 쓸) 돼지의 다리와 힘줄을 잘라 (상하게 하여), 왕(王)이 노하여 그 두 명을 땅에 묻으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왕의 몸이 불편하게 되자 예 황후와 함께 무당의 힘을 빌어서 잘못을 빌고 사죄하였다.(**)  엄포(또는 호)를 패자(沛者)로, 무골(武骨)을 좌보(左輔)로, 고루(高婁)태자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원문(原文)
二十年辛酉 正月都㘦太子自柵城歸未幾薨. 五月松后生豆公主, 沸流太子薨上與皇后擧哀減食. 以曼公主爲都助太子妃陜父太輔.

주(注) 거애(擧哀)
이는 ‘정성일 님의 주(注)’임. 정확함.

= 擧哀 : 상례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고 나서 상제가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 초상난 것을 알림. 또는 그런 절차. ≒발상(發喪)

해석(解釋)
20년(A.D. 1)신유년 1월 도근(도절)태자가 책성(柵城)에서 돌아오기 전에 죽었다. 5월 송후(宋后)가 두(豆)공주를 낳았다. 비류(沸流)태자가 죽었다. 왕(王)이 황후(皇后)와 더불어 발상하고 감식하였다. 만(曼)공주(계후의 딸, 비류태자의 처)를 도조(都助)태자에게 재가(再嫁)시키고 협부(陜夫)를 태보(太輔)로 삼았다.

원문(原文)
二十一年壬戌 三月掌牲薛支遂逸豕至國內尉那岩(烏屯河古城南?),見山水深險?地宜五穀多麋鹿魚鼈勸上移都. 四月畋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

해석(解釋)
21년(A.D. 2)임술년 3월 제사 희생물을 담당하는 자 설지(薛支)가 도망간 돼지를 쫓아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오둔하 고성남?)에 이르러 산수가 깊고 험하여 또한 오곡이 잘되고 고라니,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아 왕에게 도읍(都邑)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4월 위중림(尉中林)(위나암 근처에 있다)에서 사냥하였다.

원문(原文)
九月如國內相都而還有丈夫坐於沙勿澤(湍湖)畔石上請爲臣賜姓位氏名沙勿.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生多婁.

해석(解釋)
9월 같이 가서 국내(國內)를 자세히 살펴보고 도읍으로 돌아오다가 사물택(沙勿澤)(단호)의 물가의 돌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왕이 청하여 신하로 삼고 성을 위(位), 이름을 사물(沙勿)이라는 하사하였다. 현(玄)공주를 작(鵲)태자(주몽과 작씨(시길의 딸)사이에 낳은 아들)의 비로 삼았다. 재사(再思)공주(주몽과 예씨의 소생, 온조의 비)가 다루(多婁)를 낳았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작(鵲)태자를 신라 석탈해로 임을 고증(考證)해 냈음.
이에 대한 글이 이곳 싸이트(site)에 ‘신라 석탈해는 누구인가?’라는 이름으로 정성일 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 좌계가 댓글을 ‘[re] 용성국(龍城國)과 적녀국(積女國)의 미스테리 풀리다.’로 올린 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本) ‘고구리 사략(유류왕)’의 ‘二十三年甲子’에는 삼국사기와 대비해서 ‘정성일 선생’께서 일일이 추론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예감을 지니고 이 글을 읽으면 좋을 듯 합니다.

본문(本文)
二十二年癸亥 十月移居于尉那岩徵河北河南民築城是爲北都. 作朱留新宮於銀川岺下(鶴立).
22년(A.D. 3)

해석(解釋)
계해년 10월 위나암(尉那巖)으로 옮겨 살았는데 하북과 하남의 백성들을 불러 성을 짓게 하고 이곳을 북도(北都)로 삼았다. 은천령(銀川岺)아래에(학립) 주류신궁(朱留新宮)을 지었다.

본문(本文)
十二月田于質山陰(綏化)五日不返太輔陜父諫之不聽罷爲司園小兄, 陜夫以瓢浮海入新羅.


해석(解釋)
12월 질산음(質山陰: 수화)에서 사냥을 했는데 5일동안 돌아오지 않아 태보(太輔) 협부(陜夫)(협보)가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 직책을 파면하여 정원(庭園)을 관리하는 소형(小兄)(직책명)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협부가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이 때 신라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참고하고자 삼국사기에 있는 내용을 발췌했다.”고 말하면서, <참고문>으로써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다음 구절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박혁거세 거서간 (B.C57~A.D.4 재위기간 61년)
60년(A.D.3)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A.D.4) 봄 3월, 거서간이 붕어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정성일 선생’이 신라본기와 관련해서 고구리(高句麗)의 ‘협부(陜夫)’가 신라로 들어간 것은
‘박혁거세’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관련성’때문인 것이 드러납니다.
검토하고 유의해봐야할 점 같습니다.

본문(本文)
二十三年甲子 二月以解明太子爲正胤以珍公主爲妃置東宮, 僚及領地衛軍大赦國內, 上與皇后率東宮及妃如溫湯宴卒本戚臣沸流戚臣三十人. 松后生無恤太子于朱留宮有鶴盤回岺上.

해석(解釋)
23년(A.D. 4)갑자년 2월 해명(解明)태자를 정윤(正胤: 후계자)로 삼고 진(珍)공주(유리와 아이후의 소생)를 비로 삼아 동궁(東宮)에 두었다. (**) 동료(同僚)들에게도 영지(領地)를 주고 군(軍)으로 호위(護衛)하게 했다. (**)  국내(國內)에 있는 죄수를 크게 사면했다.
왕(王)과 황후(皇后)가 동궁(東宮: 해명태자)과 동궁비(東宮妃: 진(珍)공주)를 데리고 온탕(溫湯)에 가서 졸본척신(卒本戚臣: 소서노 계열)과 비류척신(沸流戚臣 : 송양계열) 30명과 잔치를 열었다. 송후(松后)가 학반회령(鶴盤回岺) 꼭대기에 있는 주류궁(朱留宮)에서 무휼(無恤)태자를 낳았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이 ‘23년(A.D. 4)갑자년’기사에서 고구리(高句麗) 사초(史抄)와 관련 비교해서 누락되어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1) 작(鵲)태자가 신라로 간 배경, 낙랑과 신라의 지리적 관계

= 이 부분에 누락되어 있는 중요한 부분이 고구려사초에 있다. 바로 작(鵲)태자(주몽과 작씨(鵲氏: 낙랑왕 시길(祡吉)의 딸)의 소생)가 신라(新羅)로 갔다는 내용이다. ‘박창화 님’의 두 유고를 종합하면 해명(解明)태자와 진(珍)공주의 결합으로 동궁(東宮)이 강해져서 더 이상 작(鵲)태자로서는 어떤 희망도 없게 되므로 신라로 떠나게 되는데 이 시기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또 한 가지 사실은 낙랑(樂浪)과 신라(新羅)는 근접거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의 신라는 지금의 경주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고, 진한과 낙랑과 신라는 매우 가까운 거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 고구리 사초(史抄)를 참조해 본 ‘작(鵲)태자의 신라 이동’
‘정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이 고구리(高句麗) 사초(史抄)를 인용해서 작(鵲)태자가 신라로 들어가는 과정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 참고문 :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인용
[원문(原文)]
二十三年甲子,二月,以<解明>爲東宮. 算十七. 母<宋>后夢鸞乘日而出. 性英明好勇,形 亦多肖. 上故以皇后女<珍>公主妻之, 大赦國中. <宋>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炤室,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故名岺曰<鶴岺>. <鵲>太子浮海入<新羅>.

[해석(解釋)]
23년(단기2337년/AD4)갑자, 2월, <해명(解明)>이 동궁(東宮)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다. 모친 <송후(宋后)>가 란(鸞)새가 날아오르고 해가 뜨는 꿈을 꾸었었다. 성품은 영명하고 씩씩함을 좋아하고, 얼굴도 닮은 데가 많았다. 상(上)은 그리하여 황후(皇后)의 딸인 <진(珍)>공주를 (해명(解明)의) 처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송후(宋后)>는 <은천(銀川)> 신궁(新宮)에서 <무휼(無恤)>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밝혀주었다 하여 궁의 이름을 <주류(朱留)>라 불렀고, 흰 학이 고개를 선회하였다 하여 상(上)이 고개 이름을 <학령(鶴岺)>이라 불렀다. <작(鵲)>태자는 <신라>로 흘러들어갔다.

(3) 작(鵲)태자의 ‘석탈해’로 변신(變身)과정에 등장하는 ‘낙랑(樂浪)군(軍)’

‘정성일 선생’은 작(鵲)태자가 신라의 ‘석탈해’로 변하는 과정에 ‘낙랑(樂浪)’의 군대가 등장함을 다음과 같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 참고문 :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조
2. 남해 차차웅 (A.D. 4~24 재위기간 21년)
남해 차차웅[차차웅을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충은 방언으로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혁거세의 적자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아루 부인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원년(A.D.4)가을 7월, 낙랑(樂浪) 군사(軍士)가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이 측근에게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王位)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측근들이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원문(原文)
二十四年乙丑 九月田于箕山得羽人爲司園小兄有畜戰神術大嘉之妻以鱒公主賜姓名羽澤, 以穆公主妻黙親居子也.

주(注) : 처(妻)의 개념
위 원문(原文)을 보면, 우택(羽澤)에게 처(妻)를 두 명 주는데, 준(鱒)공주는 ‘아내’이고, 목(穆)공주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처(妻)의 개냄은 오늘날과 같이 ‘아내’만 의미하지 않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여인’의 총칭(總稱)의 개념인듯 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해석(解釋)
24년(A.D. 5)을축년 9월 기산(箕山)에 사냥을 나갔다가 날개를 달린 사람을 얻어 정원을 사원소형(司園小兄: 정원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삼았는데 ‘가축으로 전쟁하는 신기한 기술’을 지니고 있어 준(鱒)공주(유리와 평씨(한소의 딸)의 소생)를 처(妻)로 주고 성명을 하사하여 우택(羽澤)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목(穆)공주(유리와 송비의 소생)를 처(妻)로 주어 암묵적으로 친하여 아들처럼 살았다.

원문(原文)
二十六年丁卯 四月松后生解邑朱.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鱒公主生子眞.

해석(解釋)
26년(A.D. 7)정묘년 4월 송후(松后)가 해읍주(海邑朱)를 낳았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소(帶素)의 여덟 형제가 왕위(王位)를 다투면서 서로를 죽였다. 준(鱒)공주가 아들 眞을 낳았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축전신술(畜戰神術)- ‘가축을 전쟁에 동원하는 기술’을 지닌 우택(羽澤)에 대해서 유리명왕(瑠璃明王)의 남다른 애정을 지적하고,  이러한 전쟁기술이 당시대에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와 또 ‘거래’에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 외손자까지 낳은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택이라는 사람에 대한 유리왕의 신임이 남달랐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남당 박창화 선생인의 고구려사초에는 유리명왕이백제가 마한을 정벌하는데 군사를 지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또한 고구려가 3년간 군사를 지원해 준 댓가로 고구려내에 존재하는 백제의 지분과 맞바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정성일 선생’은 이러한 우택(羽澤)의 축전신술(畜戰神術)에 의해서 마한(馬韓)이 멸망했을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사료(史料)를 통해, 그 가능성을 가설(假設)로 세우고 있습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 가설(假說)은 중요하고, “특히 ‘고래’를 전쟁무기로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의 시원(始源)이 우택(羽澤)의 축전신술(畜戰神術)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한(馬韓)은 ‘아시아 최대의 해운국(海運國)’인데, 거의 흡수통합이라고 칭할 정도로 저항없이 간단히 제압되는 것으로 사서(史書)에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래’를 축전신술(畜戰神術)로 부리는 것을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명랑법사의 ‘문두루 대법’이라고 했는데, 그 시조(始祖)는 아무래도 우택(羽澤)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래’를 전쟁에 활용했다는 것에 관련된 글은 좌계가 이곳 싸이트(site) ‘(*) 고래: 우리 민족의 최초의 가축, 하이테크(high-tech)의 문(門)’란 제목으로 올린 글이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정성일 선생’께서는 이런 우택(羽澤)의 축전신술(畜戰神術)과 마한(馬韓)의 멸망가능성을 예리한 직관으로 1차, 2차에 걸쳐서 참고문을 제시하여 연결시켜서 관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가설(假說)이라고 생각되고, ‘정성일 선생’의 원문(原文)을 그대로 옮깁니다.  

<1차 참고문 >
= 참고문 :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원문(原文)]
二十六年丁卯,四月,<解邑朱>生.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遣兵及粮于<溫祚>以助伐<韓>,三年繼之.
[해설(解說)]
26년(단기2340년/AD7)정묘, 4월, <해읍주>가 태어났다. <온조>가 <한산>으로 거쳐를 옮겼다. <대소>의 형제 여덟이 왕위를 다투면서 서로를 죽였다. <온조>에게 병사와 식량을 보내주어 <한>을 정벌하는 것을 도왔는데, 3년을 계속하였다.
= 참고문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차 참고문 >
온조왕(B.C.18~A.D.28.재위기간 46년)
24년(A.D.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A.D.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26년(A.D.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A.D.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원문(原文)
二十七年戊辰 三月東宮解明太子立槍於礪津東原走馬飛躍觸死, 是年二十一. 初太子好勇烏伊獻强弓太子折之曰非我有力也弓不勁矣, 烏伊大慙, 上在北都聞之大怒曰黃龍王國之元勳也, 豈可如是, 命賜刃自裁 旣而悔之葬于東原而立廟號曰槍原, 國人哀之曰勇子必死. 是年新羅以女妻陜夫云. 溫祚遷都于漢山. 都助太子薨.

해석(解釋)
27년(A.D. 8)무진년 3월 동궁 해명(解明)태자가 여진 동원(東原)에서 창(槍)을 세워놓고 달리는 말에서 날아서 뛰어내려 죽었다. 이때 나이 21세였다. 처음에 태자는 힘쓰기를 좋아하여 오이(烏伊)가 강궁(强弓)을 바치자 태자가 강궁을 부러뜨리며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튼튼하기 못하다.” 오이(烏伊)가 크게 수치스러워하였다.
왕이 북도(北都)에서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화내며 말하기를 “황룡왕(黃龍王)은 나라의 으뜸 공신이다,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칼을 내려 명(命)하기를 “스스로 헤아리라.”고 했으나 (그러는 동안에 해명이 이미 자살하여) 후회하여 동원(東原)에서 장사를 지냈고 묘(廟)를 세웠는데 창원(槍原)이라고 불렀다.
나라사람들이 슬퍼하여 “용감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이해에 신라(新羅)가 왕녀(王女)를 협부(陜夫)의 처(妻)로 삼았다고 한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를 했다. 도조(都祖)태자가 죽었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위 원문(原文)에서 ‘是年新羅以女妻陜夫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세밀하게 분석한 후, 협부(陜夫)라기 보다는 작(鵲)태자 였을 개연성이 높음을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 이 부분은 고구려사초가 훨씬 자세하다. 하지만 신라의 왕녀와 결혼한 사람이 협부와 작태자로 상이하게 되어있는데 나이를 따졌을 때 협부가 석탈해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조태자의 죽음에 관한 사항이 자세하게 나오니 고구려사초를 다시 한번 인용한다. 만공주는 계후의 딸로써 비류태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조태자에게 재가를 했다. 형인 도조태자보다는 동생인 해명태자의 처가가 훨씬 영향력이 있다. 작태자가 서기전19년생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와는 16년차이가 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년이 맞다면 작태자와 석탈해는 동일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신라본기에도 문제가 있다. 대보라는 직책은 왕 다음의 직책인데 겨우 15세이고, 신라의 왕녀와 결혼한 것도 13세가 되기 때문이다.

‘정성일 선생’은 해명(解明) 태자의 죽음과 관련 보다 상세한 그 원인(原因)이 “‘노신(老臣)’과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무시했다.”는 세평(世評)에 대한 저항(抵抗)이었음을   고구리(高句麗) 사초(史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참고문 :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원문(原文)]
二十七年戊辰,三月,賜<解明>死,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 弓授<解明>,<解明>折之曰:"非我有力也,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曰:"<解明>不愛其妻,而侮辱國老. 陛下何不責之." 上乃召<解明>,責之曰:"不愛<珍>女違父母也. 侮辱國老輕社稷也. 交通後宮淫亂之兆也. 寧其生不若死." <解明>悲憤立槍於<礪津(八虎力河支流)>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해석(解釋)]
27년(단기2341년/AD8)무진, 3월, <해명>에게 자진하라 했다. 이때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황룡>왕<오이(烏伊)>가 보궁(寶宮)을 <해명>에게 건네자, <해명>이 이를 부러뜨리고 나서는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고 활이 튼튼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이>는 크게 참담하였다. 황후(皇后)인 진(秦)이 "<해명>은 자기 처(妻)를 아끼지도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해명>을 나무라지 않으십니까?" 하고 아뢰니, 상(上)은 <해명>을 불러 책망하길 "<진(珍)>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고, 나라의 노신(老臣)을 모욕함은 사직(社稷)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후궁(後宮)과 서로 오감은 음란할 조짐이다. 사람들을 편안케 하려면 죽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하여 창을 <려진(礪津)>(땅)에 세워놓고는 (창 위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용감하게 자진함’을 좋게 여겼다.

[원문(原文)]
<新羅>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安圖)>. 七月,<都助>太子薨,年二十四,<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 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해석(解釋)]
<신라>는 <작(鵲)>태자에게 왕녀를 처로 삼아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안도)>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都助)>태자가 죽었다. (<도조(都助)>는) <해명(解明)>의 동복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인 <송양(宋讓)>을 닮았다.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었는데도, <해명>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자신이 동궁이 되었으면 싶어, 자기 처인 <만>공주에게 상께 청해보라고 하였다.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이나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스스로 불타올라 덥다." 말하더니,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음뿐이었다."고 말하였다.

‘정성일 선생’은 이처럼 작(鵲)태자가 ‘석탈해’로 변신하는 과정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를 인용하면서 그 근거를 명백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 참고문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남해 차차웅 (A.D. 4~24 재위기간 21년)
5년(A.D.8), 봄 정월,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A.D.10) 가을 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본문(本文) 원문(原文)

二十九年庚午 六月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與其子多婁來朝上命巫禱多婁福五日歸上親送於汗南公主揮淚而去. 新羅以陜夫爲太輔. 穆公主改嫁乙芳.

해석(解釋)
29년(A.D. 10)경오년 6월, 모천(茅川)(위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여 무찔렀는데, 사람들이 대소(帶素)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再思)공주가 그 아들 다루(多婁)와 더불어 조정에 왔기에 상(上)이 무당에게 명하여 다루(多婁)에게 복(福)을 기원했다. 5일후에 돌아갔는데 왕(王)이 손수 한남(汗南)까지 배웅하였는데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협부(陜夫)(협보)가 신라(新羅)의 태보(太輔)가 되었다. 목(穆)공주가 을방(乙芳)에게 개가했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신라의 태보(太輔)가 된 것이 협부(陜夫)와 작(鵲)태자와 서로 혼란된 기사(記事)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 고구려사초에는 작태자가 대보(태보)에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참고문 :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원문(原文)]
二十九年庚午,六月,赤蛙攻黑蛙于茅川(□沙河), □之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子爲<新羅>太輔.

[해석(解釋)]
29년(단기2343년/AD10)경오, 6월, <모천(□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는데, □의 사람들은 <대소>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공주가 궁에 왔다가 돌아갔다. <작>태자가 <신라>의 태보가 되었다.

원문(原文) :
三十一年壬申 七月漢人田譚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召西奴之侄子)擊譚殺之譚不遜故也. 又有嚴尤者來寇, 紫蒙勾鄒自將擊之虜其將卒二千余,馬伏無數印顆十二拓地七百余里. 十月乙豆智妃皐頭薨以陽公主乙豆智妃.

해석(解釋)
31년(A.D.12)임신년 7월 한인(漢人)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싸웠는데, 구추(句鄒)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구추(句鄒)는 연비(延丕)(소서노의 조카)를 보내었는데 전담(田譚)을 쳐서 그를 죽였는데 불손(不遜)했던 까닭이다.
또 엄우(嚴尤)라는 자가 있어 쳐들어와서 노략질 하므로, 자몽국(紫蒙國)과 구추(句鄒)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엄우(嚴尤)를) 쳐서 그 장졸 2천여 명을 포로로 잡고, 숨겨진 말이 수없이 많았고 인과(印顆: 흙덩이로 만든 도장)가 12개, 땅도 칠백여리를 넓혔다.
10월 을두지(乙豆智)의 비(妃) 고두(皐頭)가 죽었다. 이 때문에 양(陽)공주를 을두지(乙豆智)의 비(妃)로 삼았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이 ‘31년(A.D.12)임신년’의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人物)에 대해서 상세히 조명(照明)하고, 싸움의 전개에 따른 ‘전략적 제휴’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분석, 해설하고 있습니다.

= 이 때 당시 구추(句鄒)의 직책은 고구려(高句麗) 현토(玄免)태수이고 그 이전에는 을음이 현토태수였다. 을음은 백제서기(우태의 모 을씨의 소생)와 고구려사략(소서노의 외형)에 약간은 상이하게 나오지만 연비(延丕)는 을음의 아들로 추정된다.
= 자몽국은 선비족으로 ‘서부여의 모체’가 되므로 중국25사에 후한서와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나오는 나라이므로 관심을 가져야 할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정성일 선생’은 “‘선비족’과 ‘부여’의 동계(同系)가 아니겠는가?”는 가설(假說)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것이 다음의 기록입니다.  

비류국의 송양, 비리국의 소노 또한  북부여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있는데 자몽국 마저 부여의 후손이라 자칭하고 있음은 선비족과 우리민족은 예전에는 같은 땅에 살던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성일 선생’은 ‘31년(A.D.12)임신년 7월’의 원문(原文)에서 자몽국(紫蒙國)과 고구리(高句麗)가 현토(玄免)태수로 임명한 구추(句鄒)의 ‘연합(聯合)군’ 형성이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구원(舊怨)이 있음에도 결합한 형태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 냅니다.

= 자몽국(紫蒙國)왕 섭신(涉臣)은 딸 고두(皐頭)를 을두지(乙豆智: 추모와 화비(황룡국 보득의 딸)의 소생)에게 주어 화친을 하였으나, 섭신(涉臣)의 아들의 혼사(婚事)로 유리에게 “딸을 달라.”고 하였으나 “딸이 어리다.”는 이유로 혼담을 거절하여 화친을 잃었으나 이 시기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참고문>으로 ‘삼국사기 고구리 본기 유리왕’조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 참고문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1년(A.D.12), 한(漢) 나라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 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王莽)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貊)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요동과 현토의)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嚴尤)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嚴尤)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 나라 서울로 보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王莽)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 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원문(原文)
三十七年戊寅 四月解術溺死礪津不得其尸沸流人祭須得之葬于王骨岺(八虎力下畔向陽山), 賜須金十斤田十頃, 解術禾氏出也性如婦女, 慕解明及珍公主而死. 七月黃龍王烏伊薨, 宝得子毛獜代之烏伊之女婿也. 烏伊柵城褥薩烏文之子也. 慷慨有大志事東明爲元勳, 以解明事傷心至是又見解術事得疾, 累夢解明羊吉而驚劇而終年八十三.

주(注) 오이(烏伊)의 강개(慷慨)함
‘정성일 선생’은 오이(烏伊)의 강개(慷慨)한 기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注)를 달았음.
= 慷慨 : 1. 의분이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함, 2. 뜻을 잃은 모양, 3. 의기가 넘치고 감격하기 쉬운 성질

해석(解釋)
37년(A.D.18)무인년 4월 해술(解術)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여 그 시체를 찾지 못했다, 비류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왕골령(王骨岺)(팔호력하반향양산)에 장사 지내고, 제수(祭須)에게는 금 열 근과 밭 십 경을 주었다. 해술(解術)은 화씨(禾氏)의 자로 성품이 부녀자 같아서,
(**)해명(解明)을 사모했으며, 급기야 진(珍)공주(해명의 처)이 죽자 따라 죽었다.(**)
7월 황룡왕(黃龍王) 오이(烏伊)가 죽어, 보득(寶得)의 아들 모린(毛獜)이 섰는데, 오이(烏伊)의 딸의 남편이다. 오이(烏伊)는 책성(柵城)욕살(褥薩)(태수) 오문(烏文)의 자이다. 동명(東明)의 으뜸 공신으로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슬퍼하고 한탄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명(解明)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이에 또 해술(解術)의 일을 보고 병을 얻었다. 해명(解明)과 양길(羊吉)의 꿈이 누적되어 심하게 놀라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위 원문(原文) 기사(記事)가 있는 해에 삼국사기에서는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사망한 것으로 나옴을 대비(對比)시키고 있습니다.

= 이 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유리명왕이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다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내용이다.
2. 유리명왕(B.C.19~A.D.18.재위기간 37년)
37년(A.D.18) 여름 4월, 왕자 려진(礪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王骨岺)에 장사지내고, 제수(祭須)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豆谷)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 하였다.

원문(原文)
三十八年己卯 正月北都大震移于東都. 默居太輔.

해석(解釋)
38년(A.D.19) 기묘년 1월 북쪽 도성에 큰 지진이 있어 동쪽 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묵거(黙居)를 태보(太輔)로 삼았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묵거(黙居)가 태보(太輔)로 되던 때에 ‘백제의 백성’이 귀순해온 사건과 연관시켜 음미하고 있음.  태보(太輔)가 화백회의에서 왕(王)을 대신해서 ‘왕(王) 턱’을 잡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주몽-동명성왕과 같이 한 묵거(黙居)에게는 고구리(高句麗)라는 ‘거죽’보다 소도(蘇塗)를 통한 천독(天毒)들이 ‘흘러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면에서 이러한 분석은 큰 의미가 있어보입니다.

= 이해에 백제의 백성이 귀순하여 온 사건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보충한다.
3.대무신왕(A.D.18~A.D.44.재위기간 27년)
2년(A.D.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원문(原文)
三十九年庚辰 三月立東明神廟于龍山中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多婁正胤冠刃以蘚苩兩公主妻之. 九月田于骨句川(黑河者?遜河), 東宮得神馬狀如巨婁. 上大喜曰天賜巨婁於汝東明之業可復興也. 十月東扶餘來獻赤烏一頭二身, 倂合兆云.
39년(A.D.20)경진년 3월 용산중령(龍山中岺)(발리묘령)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공주와 다루(多婁)가 조정에 들어와서 (백제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관모와 보검을 내렸다. 이런 까닭에 선(蘚)과 백(苩)공주 둘을 다루(多婁)의 처로 주었다.
9월 골구천(骨句川)(흑하는 손하를 일컫는다)에서 사냥했는데, 동궁(東宮: 무휼)이 거루(巨婁)를 닮은 신마(神馬)를 얻으니, 왕(王)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거루(巨婁)를 너에게 내린 것은 ‘동명(東明)의 사업(事業)’이 다시 일어날 징조로다.” 라고 하였다. 10월 동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두 나라가) 병합될 조짐이라고 하였다.

원문(原文)
四十年辛巳二月 卑離王魔離薨年八十四, 子義鹿代之, 其母古王素奴女也.

해석(解釋)
40년(A.D.21)신사년 2월 비리왕 마리가 죽었는데 나이84세다, 아들 의록이 대신 들어섰는데, 모친은  옛 왕 소노의 딸이었다.

원문(原文)
四十二年癸未十一月 帶弗來侵, 東宮以逸待勞伏兵出奇大破, 其軍於鶴盤岺下(鶴立同)其兵棄馬登山而走皆被, 伏兵取擒歸者百一, 上大悅而撫東宮曰芻牟復來.

해석(解釋)
42년(A.D.23)계미년 11월 대불(帶弗)이 쳐들어 왔다. 동궁(東宮:무휼)이 직접 숨어 기다리다가 복병을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가하여 그(대불)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그(대불의) 병사들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모두 달아났다. 복병들이 생포하고 돌아간 자는 100명중 한명 정도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동궁(東宮)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추모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위 기사(記事)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대비시켜, 남당(南堂) 유고의 년표(年表)가 더 신뢰성이 있음을 다음과 갈이 넌지시 말하기도 했습니다.

= 위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2년기에 나온다. 10년의 차이가 난다. 무휼이 A.D.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해에 20살이 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10살 소년이 기묘한 계책으로 물리쳤다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2. 유리명왕(B.C.19~A.D.18.재위기간 37년)
32년(A.D.13)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원문(原文)
四十三年甲申二月 上與后及太后壽(본문은 약자)東都行東明大祭. 墨居薨年八十二.
43년(A.D.24)갑신년 2월 왕과 왕후가 태후의 장수(長壽)를 빌러 동도(東都)로 가서 ‘동명(東明)의 큰 제사’를 지냈다. 묵거(黙居)가 죽었는데 나이가 82세였다.

원문(原文)
四十四年乙酉二月 高婁太子太輔, 宋義右輔, 乙豆智左輔主兵大加.

해석(解釋)
44년(A.D.25)을유년 2월 고루(高婁)태자를 태보로, 송의(宋義)를 우보로, 을두지(乙豆智)는 좌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원문(原文)
四十七年戊子 八月太后崩春秋八十五, 葬於豆谷東原. 十月皇后與上謁太后陵而還豆谷離宮. 上先崩皇后繼崩, 葬于禮太后陵內 上春秋六十八后八十三. 東宮受宝卽位

해석(解釋)
47년(A.D.28)무자년 8월 (예)태후가 춘추 85세로 죽었다, 두곡(豆谷) 동원(東原)(동쪽 평원)에 장사를 지냈다. 10월 황후(皇后)와 상(上)께서  태후(太后)릉(陵)을 찾아뵙고 두곡(豆谷)이궁(離宮)으로 되돌아왔다. 왕(王)이 먼저 죽고 황후가 따라 죽었는데 예태후(禮太后)릉 경내에 장사를 지냈다. 왕의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동궁이 보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

- 이상 해석(解釋), 해설(解說)을 마치면서...
해석(解釋)에 관해서는 이글을 읽으신 동학(同學)들께서는 이견(異見)이 있으시면, ‘남김없이’ 의견을 ‘댓글’로써 개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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