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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史略 卷之二/第八世新大帝紀--초벌번역**재정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03:52
몸은 쉬었으면 하는데, 쉬어지지 않습니다.
큰 잘못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보다 마음이 바쁘신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무리를 좀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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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世<新大帝>紀
◎ 帝, 諱<伯固>, <太祖>之別子也. 母<尙>太后, <溫>之女也. 儀表英特, 性仁恕, 有大志. <次大>無道, 民臣不親恐禍, 及己使(貊)部, 而不返遯于山谷. <次大>疑之, 問於<尙>后曰; "<伯固>誰子", 后欺以爲<仙帝>出. <次大>怒曰;** "<伯固>生時, 汝爲上皇之寵后. 胡云<仙帝>出乎."** 遂與后相隔索, <伯固>甚急, 后乃通<明臨答夫>爲援, 進毒于<次大>而未薨. <答夫>乃入帳中, 刺脅殺之, 秘不發喪, 捕<次大>心腹壯士, 凡十日, 而盡殺之. 然後迎帝于<淌水宮(在烏拉街)>卽位.
○ 제의 휘는 <백고>이고, <태조>의 별자이다. 모친은 <상온>의 딸인 <상>태후이다. 의표는 영특하였고, 성품은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가 무도하여, 백성과 신하들은 가까이 지내길 꺼려하고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백고>도 <맥>부의 사자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는 산곡에 숨어버렸었다. <차대>가 <백고>를 의심하여,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의 자식이냐?" 물었고, 후가 <선제>의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더니, <차대>가 화를 내어 말하길;**"<백고>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상황의 총애를 받던 후였었는데, 어찌 <백고>가 <선제>의 자식이라 하는가?." 하였다.**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백고>의 상황이 위급하여지니, <상>후는 <명림답부>에 연통하여 <백고>를 돕게 하고는, <차대>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죽지 않았다. <답부>는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죽었다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고,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제가 <창수궁>에서 즉위하였다.
◎ 元年乙巳, 十一月, 右輔<箊疾>獻璽于帝曰; "先君不幸棄世, 有子不肖, 天人之心歸于陛下. 願, 爲億兆, 登祚上, 俯伏三, 讓以後受寶登壇, 而受百官萬民之山呼>." 天日復明.
以<穆度婁>女爲皇后. <松奇>太輔, <箊疾>左輔, <尙庚>右輔. <答夫>, <淹호>沛者, 妻以帝女. <索頭><査山>殂, 子<眞>立, 以<비>公主妻之. 太史<米肯>請改元<光國>, 上曰; "德不稱位. 猶恐背天違民, 何敢改元. 效嚬哉." <査眞>分其國, 爲三部, 自<扶餘>至<烏孫>云.
○ 원년(단기2498년/AD165)을사, 11월, 우보 <어질>이 제에게 옥새를 바치며 아뢰길; "선군(<차대제>)께서는 불행하게 세상을 등지셨으며, 아들이 불초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뜻이 폐하에게 돌아왔습니다. 원컨대, 억조창생을 위하여, 묘당에 올라 세 번을 절하신 후에, 새보를 받아 단위에 오르시어, 백관과 만민의 산호만세를 받으십시오."라 하였다. 하늘의 해가 밝음을 되찾았음이다.
<목도루>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송기>를 태보로, <어질>을 좌보로, <상경>을 우보로 삼았다. <답부>는 <엄호>패자로 삼고, 제의 딸을 처로 삼아주었다. <색두>의 <사산>이 죽어, 아들 <사진>이 섰기에 <비>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태사 <미긍>이 연호를 바꿔 <광국>으로 하자고 청을 하니, 상이 답하길; "덕이 제위를 칭할 만큼 되지 못하니, 오히려 하늘의 뜻을 등지고 백성의 뜻을 거스를까 걱정해야 할 것인즉, 어찌 년호를 바꾸어 비웃음 살 일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사진>이 자기의 나라를 3 부로 나누었는데, <부여>에서 <오손>까지였다고 한다.
◎ 二年丙午, 正月, 辛亥, 朔, 日食. 大赦<次大>之囚而兼赦<次大>之族屬. <次大>子<芻安>來謁請罪, 勞之曰; "叔父不仁, 妄殺無咎, 天人怒矣. 汝則無罪不須逃." 若乃賜<狗山瀨>․<豆婁谷>二所爲食邑, 號以讓國君.
命<答夫>總執兵馬之權, 兼統<梁貊>之事, 位與三輔齊, 三輔之權盡歸於<答夫>. 時乃國相之始. <答夫>時, 稱以<輔外太大加>, <乙巴素>時, 號以國相.
○2년(단기2499년/AD166)병오, 정월, 신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차대>가 가둔 사람들과 <차대>의 족속을 대대적으로 풀어주었다. <차대>의 아들 <추안>이 찾아와 죄 주기를 청하니, 위로하여 이르길; "숙부는 어질지 못하여 죄 없는 이들을 함부로 죽여서 하늘과 사람들이 노하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쓸데없이 도망할 필요가 없다."라 하고는 <구산뢰>와 <두루곡> 두 곳을 식읍으로 주었으며, 양국군이라 불렀다.
<답부>에게는 군권을 총괄하는 권한을 주었고 겸하여 <양맥>의 정사도 두루 맡아보게 하였는데, 지위는 **삼보와 나란하였으나, 삼보의 권한은 모두 <답부>에게 귀속 하였다.** 이로써 '국상'제도가 시작되었음이다. <답부>시절엔 '보외태대가'라 불렀고, <을파소>시절엔 '국상'이라 불렀다.
◎ 三年丁未, 二月, <松奇>薨, <箊疾>太輔, <尙庚>左輔, <白面>右輔, <淵合>大主簿. <幽州><公孫域>自稱<玄菟>太守, 來侵, <丘利>․<禾晉>擊破之.
七月, <濟>伐<羅>國西二城, 虜千余人去. 八月, <羅>一吉湌<興宣>二万兵圍<濟>東六城, 其主自將八千勁騎至<漢水>, <濟>人大惧, 還其所浮而和.
九月, 如<卒本>祀祖廟, 十月, 還.
○ 3년(단기2500년/AD167)정미, 2월, <송기>가 죽어, <어질>을 태보로, <상경>을 좌보로, <백면>을 우보로, <연합>을 대주부로 삼았다. <유>의 <공손역>이 스스로 <현토>태수라 하면서 쳐들어왔고, <구리>와 <화진>이 이를 격파하였다.
7월에 <백제>가 <신라>의 서쪽 두 성에 쳐들어가 1000여 명을 잡아갔다. 8월에 <신라>의 일길찬 <흥선>이 2만병으로 <백제>의 동쪽 여섯 성을 포위하였고, <신라>의 왕이 정예기병 8000을 이끌고 <한수>에 다다르니, <백제>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자기의 땅으로 배타고 물러가서 화약하였다.
9월, <졸본>으로 가서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고는 10월에 돌아왔다.
◎ 四年戊申, 五月, <濟>人<都彌>來降, 置之<蒜山>. <羅><繼元>死, <興宣>伊湌.
<穆>后生女<玉陽>
十二月, <禾白>․<禾晉>․<高德>․<穆巴>等分四道伐<幽>․<幷>二州. 驅其大姓十二家而來. 命與公卿相婚, 櫛梭萡織金銀諸工使居西河, 經籍医藥之士, 皆授以官.
命<白面>畵<東明>像, 頒于仙院曰; "<芻牟>, 神而非人也. 夙興孜孜二十余年如一日. 况吾輩乎, 仙院政院一律, 夙興孜孜, 克己然後, 可答聖像, 及修鏡五十七繪卷.
○ 4년(단기2501년/AD168)무신, 5월, <백제>사람 <도미>가 항복하여 왔기에 <산산>에 살게 하였다. <신라>의 <계원>이 죽고 <흥선>이 이찬이 되었다.
<목>후가 딸 <옥양>을 낳았다.
12월, <화백>․<화직>․<고적>․<목파> 등이 네 길로 나누어 <유주>와 <병주>를 정벌하고, 대성씨 12 가를 몰아왔다. 공경의 작위를 주고 서로 통혼하게 하였다. '즐사박직금은(櫛,梭,萡,織,金,銀)'하는 장인들은 서하에 살게 하였고, 대개의 '경적의약지사(經,籍,医,藥之士)'에게는 관직을 주었다.
<백면>에게 <동명>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선원에 나누어주고 이르길;
"<추모>는 신이셨지 인간이 아니시었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시기로 20여년을 하루같이 하시었다. 나를 따르는 무리들아! 선원과 정원 모두가 하나같이 일찍 일어나 부지런 하여 자신을 극복한 연후에, 성상(聖像)에 답하고, 그리고 대경 그림 57권을 닦을 것이다."라 하였다.
◎ 五年己酉, 二月, <幽州>賊<喬玄>來寇<句麗城(林西)>, <禾晉>擊其軍於<河山(經柵)>破之. 四月, 閱兵於<西河>, 詔曰; "兵者國之元氣也. 朕與士卒同甘苦以禦賊, 大小官民悉體此旨." <漢>人<耿臨>自稱<玄菟>太守, 與<喬玄>, 來寇<丘利地(庫倫)>, <禾白>擊退之, 獲其妻子圖劒.
○ 5년(단기2502년/AD169)기유, 2월, <유주> 도적 <교현>이 <구려성(림서)>에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화진>이 <하산(경책)>에서 그의 군대를 쳐부수었다. 4월에 <서하>에서 열병하여 조서로 이르길; "군사는 나라의 근본을 지키는 힘이다. 짐도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면서 도적을 막을 것이다. 대소 관리와 백성들 모두는 이 뜻을 알아주어야 할지니라." 하였다. 자칭 <현토>태수라 하는 <한>인 <경림>이 <교현>과 함께 <구리>의 땅에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화백>이 이를 쳐서 물리치고, 그들의 처자와 인장 및 보검을 노획하였다.
◎ 六年庚戌, 正月, 以<紇>氏爲宮人. <于恢>爲使者. <紇>氏, <桶口>王妃也, 年五十. 三月, 丙寅, 晦, 日食. 十月, <濟>侵<羅>邊.
○ 6년(단기2503년/AD170)경신, 정월, <흘>씨를 궁인으로 들였다. <우회>를 사자로 삼았다. <흘>씨는 <통구>왕의 비였으며, 나이가 50이었다. 3월, 병인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0월,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 七年辛亥, 五月, <箊疾>夢見<高福章>, 疾作, 將移水閣, <福章>子擊殺之. 朝廷難其事. 命移于<柵城>.
<尙庚>太輔, <白面>左輔, <穆崇>右輔, <陽弼>․<高衡>左右大評者, <穆天>中宮大使者.
<羅>穀貴民飢.
○ 7년(단기2504년/AD171)신해, 5월, <어질>이 꿈에 <고복장>을 보고나서 병이 들어 물 가의 정자로 이사하려는데, <복장>의 아들이 이를 살해하였다. 조정은 이 일로 난감하였다. <책성>으로 떠나라고 명하였다.
<상경>을 태보로, <백면>을 좌보로, <목숭>을 우보로, <양필>과 <고형>을 좌․우 대평자로, <목천>을 중궁의 대사자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곡식이 귀하여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 八年壬子, 正月, <穆后>生<晉岐>太子. 九月, <公孫域>․<耿臨>․<喬玄>等與<索頭>合兵來寇<句麗(林西)>․<盖馬(開 魯)>等城, 皆潰. <禾晉>自<丘利(庫倫)>退保<河城(通遼)>. <答夫>往<南口(遼源)>, 淸野以待之, 不過旬月, 果飢而退. 此, 所謂“千里運糧勢, 不能久者”也. 乃以勁騎七千擊之. <火晉>亦至合擊于<坐原(通遼東南雙福廟界)>大破之, 匹馬得返. 是謂<坐原>大捷. 賜<答夫><坐原>地, 後改以<質山>. 是年, <羅><仇道>海湌, <仇須>弟一吉湌. 二月, <羅>, 大疫, 禱其祖廟.
○ 8년(단기2505년/AD172)임자, 정월, <목>후가 <진기>태자를 낳았다. 9월, <공손역>․<경림>․<교현> 등이 <색두>와 병력을 합하여 <구려>․<개마>성 등을 쳐서 궤멸시키니, <화진>은 <하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이에 <답부>가 <남구>로 가서 들판을 불태워 비우고 기다리니, 불과 달포가 아니 되어 먹을 것이 떨어져 물러갔다. 이를 두고, "군량을 1000여리나 실어 날라야 할 형세라면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답부>가) 정예 7000 기마군으로 몰아쳤고, <화진> 또한 도착하여 <좌원>에서 함께 쳐서 대파시켰다. 몇 기만이 살아서 돌아갔다. 이를 두고 <좌원대첩>이라 한다. <답부>에게 <좌원>의 땅을 주었는데, 후에 <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해에 <신라>에서는 <구도>가 해찬이 되고, <구수>의 동생이 일길찬이 되었다. 2월엔 <신라>에 돌림병이 크게 돌아, 조상의 사당에 빌었다.
◎ 九年癸丑, 正月, 宮人<朱>氏生<延憂>太子, 香滿室. 上, 大喜, 封爲<馬山宮>妃, 以其父<輅>爲採供使. <輅>, <文>之別子也.
五月, <倭>女主與<羅>修好.
○ 9년(단기2506년/AD173)계축, 정월, 궁인 <주>씨가 <연우>태자를 낳았는데, 방 안이 향기로 가득하였다. 상이 크게 기뻐하여 <마산궁>비로 올려주었고, 그녀의 부친 <로>는 채공사로 삼았다. <로>는 <문>의 별자였다.
5월, <왜>의 여주는 <신라>와 잘 지내기로 하였다.
◎ 十年甲寅, 正月, <尙庚>病免, <白面>太輔, <穆崇>左輔, <陽弼>右輔, <米肯>大評者. <肯>, <漢>人也. 通天文, 明史記, 精律令. 上, 以<寡>公主妻之, 遂大用能, 謙讓勤儉, 敎民不倦. 是月, <羅>雨土, 而, 二月, 旱, 井水渴.
置評府․劾府․供府․採府․賓府․奴府․王子私兵府, 皆以大加領之, 次以大評․六劾․大供․大採․大賓․大奴․將軍等, 主其事. 乃<米肯>之奏也.
○ 10년(단기2507년/AD174)갑인, 정월, <상경>이 병들어 물러나니, <백면>을 태보로, <목숭>을 좌보로, <양필>을 우보로, <미긍>을 대평자로 삼았다. <미긍>은 <한>인인데, 천문을 알고, 사기에 밝고, 율령에 정통하였다. 상이 <과>공주를 처로 삼아주고는 그의 능력을 크게 썼는데도, 겸양근면하고, 백성을 가르침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 이 달(정월)에 <신라>에서는 흙비(황사?)가 내렸고, 2월엔 가물어 우물물이 말랐다(또는 두 달이나 가뭄이 계속되어 우물물이 말랐다).
평부․핵부․공부․채부․빈부․노부․왕자사병부를 두었고, 대가들이 맡아 다스리게 하였으며, 대평․대핵․대공․대채․대빈․대노․장군 등이 보좌하여 그 부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 일 또한 <미긍>이 아뢴 것이었다.
◎ 十一年乙卯, 三月, 上, 以<玄>太子徒, 善而好仙, 欲立<南武>太子爲東宮. <南武>曰; “不可, 以越兄.” 按行州邑, 至<提那>而淹留. <玄>太子往諭而還. <發岐>娶<虎川>. <朱>氏生女<□>.
○ 11년(단기2508년/AD175)을묘, 3월, <현>태자와 그 무리는 선(善)하고 선(仙)하기를 좋아하여, 상은 <남무>태자를 동궁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남무>는 “형을 뛰어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시골로 나가서 <제나>에 꼭꼭 숨어있자, <현>태자가 찾아가서 명을 전하고 돌아왔다. <발기>가 <호천>에 장가를 들었다. <주>씨가 딸 <□>를 낳았다.
◎ 十二年丙辰, 三月, 以<南武>爲正胤. 后兄<穆天>爲東宮大夫, <于素>東宮皀衣(皂衣). <白面>薨, 年八十, 美容儀, 善畵繪. 以<尙>太后外族, 居中用事六十年. 未有一失, 人稱其難. 然, 德不普, 身器不容國, 非宰相才云. <穆崇>太輔, <陽弼>左輔, <高衡>右輔. <盖婁>殂, <肖古>立.
○ 12년(단기2509년/AD176)병진, 삼월, <남무>를 정윤으로 삼고, 후의 오라비 <목천>을 동궁대가로, <우소>를 동궁 흡의(조의)로 삼았다. <백면>이 나이 80으로 죽었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가지런하였으며, 대경 그림을 잘 그렸다. <상>태후의 외가 식구로서, 벼슬살이를 60년이나 하면서, 허튼 일을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말하길 '매우 힘든 일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덕을 널리 펴지 못하고 몸과 사람됨이 나라를 감싸 안지 못하면 재상감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겼다. <목숭>이 태보가, <양필>이 좌보가, <고형>이 우보가 되었다. <개루>가 죽고, <초고>가 섰다.
◎ 十四年戊午, 三月, 印宮皀衣(皂衣)<于素>女, 爲東宮妃, 加<素>爵, 爲<提那>沛者. 十月, 丙子, 晦, 日食. 上泫然流涕曰; "朕以不德忝居寶位. 上不能孝母, 下不能慈民. 昔, 我<東明仙皇>, 日行百善, 而猶以爲不足, 朕欲日行一善, 而不及, 豈不悲哉. 左右悚然. 是日, 太輔<穆崇>薨, 年六十九. <弼>代之, <高衡>左輔, <穆天>右輔.
○ 14년(단기2511년/AD178)무오, 3월, 동궁흡의(조의) <우소>의 딸이 동궁의 비가 되니, <소>의 작위가 더하여져서 <제나>패자가 되었다. 10월, 병자,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이르길; "짐은 부덕하여 보위를 더럽히고 있소. 위로는 모친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자애롭지 못하였소. 일찍이, 나의 <동명선황>께서는 하루에 백 가지의 선행을 하시고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셨거늘, 짐은 하루에 한 가지의 선행을 하고자 하여도 이루지 못하고서도 슬퍼할 줄 몰랐소."라 하니, 좌우가 송연(두려워)해 하였다. 이 날, 태보 <목숭>이 죽어 <양필>이 대신 태보가 되고, <고형>이 좌보가, <목천>이 우보가 되었다.
◎ 十五年己未, 九月, <梁貊公>攝政. <明臨答夫>暴死, 年五十二, 葬以<梁貊大王>駙馬都尉之禮, 于<質山園>. 有膽力權智, 謀事必成, 人以爲天, 得<尙>太后寵, 專國政十五年, 內外洽然. 十二月, 上崩於石鸞宮, 春秋五十九, 葬于<故國谷(八浪河羊角山)>. 上, 寬厚好仁, 喜聞<漢>人經籍, 擇師而講, 欲行聖人之治, 而權委於<尙>太后․<明臨答夫>, 故不得如意而終, 惜哉.
○ 15년(단기2512년/AD179)기미, 9월, <양맥공>이 정사를 맡았다. <명림답부>가 나이 52살에 갑자기 죽어, <양맥대왕>부마도위의 예를 갖추어서 <질산원>에 장사하였는데, 담력이 있고 **비상사태 때 변통하는** 지략이 있어, 도모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었으며, 사람을 하늘과 같이 여겼고, <상>태후의 총애로 국정을 15년이나 도맡아 보았는데, 도성 안과 바깥 지방 모두가 흡족해 하였다. 12월에 상이 서도의 란궁에서 춘추 59세로 죽어 <고국곡(팔랑하양각산)>에 장사했다. 상은 품성이 '관후호인'하였고, <한>인들의 경적 내용을 즐겨 들었는데, 스승을 두어 강의하게 하였으며, '성인지치'를 펼치고 싶어 하였으나, 정사를 <상>태후와 <명림답부>에게 위임하였던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서글픈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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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똑같은 부탁을 드립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5)

큰 잘못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보다 마음이 바쁘신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무리를 좀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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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世<新大帝>紀
◎ 帝, 諱<伯固>, <太祖>之別子也. 母<尙>太后, <溫>之女也. 儀表英特, 性仁恕, 有大志. <次大>無道, 民臣不親恐禍, 及己使(貊)部, 而不返遯于山谷. <次大>疑之, 問於<尙>后曰; "<伯固>誰子", 后欺以爲<仙帝>出. <次大>怒曰;** "<伯固>生時, 汝爲上皇之寵后. 胡云<仙帝>出乎."** 遂與后相隔索, <伯固>甚急, 后乃通<明臨答夫>爲援, 進毒于<次大>而未薨. <答夫>乃入帳中, 刺脅殺之, 秘不發喪, 捕<次大>心腹壯士, 凡十日, 而盡殺之. 然後迎帝于<淌水宮(在烏拉街)>卽位.
○ 제의 휘는 <백고>이고, <태조>의 별자이다. 모친은 <상온>의 딸인 <상>태후이다. 의표는 영특하였고, 성품은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가 무도하여, 백성과 신하들은 가까이 지내길 꺼려하고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백고>도 <맥>부의 사자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는 산곡에 숨어버렸었다. <차대>가 <백고>를 의심하여,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의 자식이냐?" 물었고, 후가 <선제>의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더니, <차대>가 화를 내어 말하길;**"<백고>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상황의 총애를 받던 후였었는데, 어찌 <백고>가 <선제>의 자식이라 하는가?." 하였다.**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백고>의 상황이 위급하여지니, <상>후는 <명림답부>에 연통하여 <백고>를 돕게 하고는, <차대>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죽지 않았다. <답부>는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죽었다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고,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제가 <창수궁>에서 즉위하였다.
◎ 元年乙巳, 十一月, 右輔<箊疾>獻璽于帝曰; "先君不幸棄世, 有子不肖, 天人之心歸于陛下. 願, 爲億兆, 登祚上, 俯伏三, 讓以後受寶登壇, 而受百官萬民之山呼>." 天日復明.
以<穆度婁>女爲皇后. <松奇>太輔, <箊疾>左輔, <尙庚>右輔. <答夫>, <淹호>沛者, 妻以帝女. <索頭><査山>殂, 子<眞>立, 以<비>公主妻之. 太史<米肯>請改元<光國>, 上曰; "德不稱位. 猶恐背天違民, 何敢改元. 效嚬哉." <査眞>分其國, 爲三部, 自<扶餘>至<烏孫>云.
○ 원년(단기2498년/AD165)을사, 11월, 우보 <어질>이 제에게 옥새를 바치며 아뢰길; "선군(<차대제>)께서는 불행하게 세상을 등지셨으며, 아들이 불초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뜻이 폐하에게 돌아왔습니다. 원컨대, 억조창생을 위하여, 묘당에 올라 세 번을 절하신 후에, 새보를 받아 단위에 오르시어, 백관과 만민의 산호만세를 받으십시오."라 하였다. 하늘의 해가 밝음을 되찾았음이다.
<목도루>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송기>를 태보로, <어질>을 좌보로, <상경>을 우보로 삼았다. <답부>는 <엄호>패자로 삼고, 제의 딸을 처로 삼아주었다. <색두>의 <사산>이 죽어, 아들 <사진>이 섰기에 <비>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태사 <미긍>이 연호를 바꿔 <광국>으로 하자고 청을 하니, 상이 답하길; "덕이 제위를 칭할 만큼 되지 못하니, 오히려 하늘의 뜻을 등지고 백성의 뜻을 거스를까 걱정해야 할 것인즉, 어찌 년호를 바꾸어 비웃음 살 일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사진>이 자기의 나라를 3 부로 나누었는데, <부여>에서 <오손>까지였다고 한다.
◎ 二年丙午, 正月, 辛亥, 朔, 日食. 大赦<次大>之囚而兼赦<次大>之族屬. <次大>子<芻安>來謁請罪, 勞之曰; "叔父不仁, 妄殺無咎, 天人怒矣. 汝則無罪不須逃." 若乃賜<狗山瀨>․<豆婁谷>二所爲食邑, 號以讓國君.
命<答夫>總執兵馬之權, 兼統<梁貊>之事, 位與三輔齊, 三輔之權盡歸於<答夫>. 時乃國相之始. <答夫>時, 稱以<輔外太大加>, <乙巴素>時, 號以國相.
○2년(단기2499년/AD166)병오, 정월, 신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차대>가 가둔 사람들과 <차대>의 족속을 대대적으로 풀어주었다. <차대>의 아들 <추안>이 찾아와 죄 주기를 청하니, 위로하여 이르길; "숙부는 어질지 못하여 죄 없는 이들을 함부로 죽여서 하늘과 사람들이 노하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쓸데없이 도망할 필요가 없다."라 하고는 <구산뢰>와 <두루곡> 두 곳을 식읍으로 주었으며, 양국군이라 불렀다.
<답부>에게는 군권을 총괄하는 권한을 주었고 겸하여 <양맥>의 정사도 두루 맡아보게 하였는데, 지위는 **삼보와 나란하였으나, 삼보의 권한은 모두 <답부>에게 귀속 하였다.** 이로써 '국상'제도가 시작되었음이다. <답부>시절엔 '보외태대가'라 불렀고, <을파소>시절엔 '국상'이라 불렀다.
◎ 三年丁未, 二月, <松奇>薨, <箊疾>太輔, <尙庚>左輔, <白面>右輔, <淵合>大主簿. <幽州><公孫域>自稱<玄菟>太守, 來侵, <丘利>․<禾晉>擊破之.
七月, <濟>伐<羅>國西二城, 虜千余人去. 八月, <羅>一吉湌<興宣>二万兵圍<濟>東六城, 其主自將八千勁騎至<漢水>, <濟>人大惧, 還其所浮而和.
九月, 如<卒本>祀祖廟, 十月, 還.
○ 3년(단기2500년/AD167)정미, 2월, <송기>가 죽어, <어질>을 태보로, <상경>을 좌보로, <백면>을 우보로, <연합>을 대주부로 삼았다. <유>의 <공손역>이 스스로 <현토>태수라 하면서 쳐들어왔고, <구리>와 <화진>이 이를 격파하였다.
7월에 <백제>가 <신라>의 서쪽 두 성에 쳐들어가 1000여 명을 잡아갔다. 8월에 <신라>의 일길찬 <흥선>이 2만병으로 <백제>의 동쪽 여섯 성을 포위하였고, <신라>의 왕이 정예기병 8000을 이끌고 <한수>에 다다르니, <백제>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자기의 땅으로 배타고 물러가서 화약하였다.
9월, <졸본>으로 가서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고는 10월에 돌아왔다.
◎ 四年戊申, 五月, <濟>人<都彌>來降, 置之<蒜山>. <羅><繼元>死, <興宣>伊湌.
<穆>后生女<玉陽>
十二月, <禾白>․<禾晉>․<高德>․<穆巴>等分四道伐<幽>․<幷>二州. 驅其大姓十二家而來. 命與公卿相婚, 櫛梭萡織金銀諸工使居西河, 經籍医藥之士, 皆授以官.
命<白面>畵<東明>像, 頒于仙院曰; "<芻牟>, 神而非人也. 夙興孜孜二十余年如一日. 况吾輩乎, 仙院政院一律, 夙興孜孜, 克己然後, 可答聖像, 及修鏡五十七繪卷.
○ 4년(단기2501년/AD168)무신, 5월, <백제>사람 <도미>가 항복하여 왔기에 <산산>에 살게 하였다. <신라>의 <계원>이 죽고 <흥선>이 이찬이 되었다.
<목>후가 딸 <옥양>을 낳았다.
12월, <화백>․<화직>․<고적>․<목파> 등이 네 길로 나누어 <유주>와 <병주>를 정벌하고, 대성씨 12 가를 몰아왔다. 공경의 작위를 주고 서로 통혼하게 하였다. '즐사박직금은(櫛,梭,萡,織,金,銀)'하는 장인들은 서하에 살게 하였고, 대개의 '경적의약지사(經,籍,医,藥之士)'에게는 관직을 주었다.
<백면>에게 <동명>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선원에 나누어주고 이르길;
"<추모>는 신이셨지 인간이 아니시었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시기로 20여년을 하루같이 하시었다. 나를 따르는 무리들아! 선원과 정원 모두가 하나같이 일찍 일어나 부지런 하여 자신을 극복한 연후에, 성상(聖像)에 답하고, 그리고 대경 그림 57권을 닦을 것이다."라 하였다.
◎ 五年己酉, 二月, <幽州>賊<喬玄>來寇<句麗城(林西)>, <禾晉>擊其軍於<河山(經柵)>破之. 四月, 閱兵於<西河>, 詔曰; "兵者國之元氣也. 朕與士卒同甘苦以禦賊, 大小官民悉體此旨." <漢>人<耿臨>自稱<玄菟>太守, 與<喬玄>, 來寇<丘利地(庫倫)>, <禾白>擊退之, 獲其妻子圖劒.
○ 5년(단기2502년/AD169)기유, 2월, <유주> 도적 <교현>이 <구려성(림서)>에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화진>이 <하산(경책)>에서 그의 군대를 쳐부수었다. 4월에 <서하>에서 열병하여 조서로 이르길; "군사는 나라의 근본을 지키는 힘이다. 짐도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면서 도적을 막을 것이다. 대소 관리와 백성들 모두는 이 뜻을 알아주어야 할지니라." 하였다. 자칭 <현토>태수라 하는 <한>인 <경림>이 <교현>과 함께 <구리>의 땅에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화백>이 이를 쳐서 물리치고, 그들의 처자와 인장 및 보검을 노획하였다.
◎ 六年庚戌, 正月, 以<紇>氏爲宮人. <于恢>爲使者. <紇>氏, <桶口>王妃也, 年五十. 三月, 丙寅, 晦, 日食. 十月, <濟>侵<羅>邊.
○ 6년(단기2503년/AD170)경신, 정월, <흘>씨를 궁인으로 들였다. <우회>를 사자로 삼았다. <흘>씨는 <통구>왕의 비였으며, 나이가 50이었다. 3월, 병인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0월,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 七年辛亥, 五月, <箊疾>夢見<高福章>, 疾作, 將移水閣, <福章>子擊殺之. 朝廷難其事. 命移于<柵城>.
<尙庚>太輔, <白面>左輔, <穆崇>右輔, <陽弼>․<高衡>左右大評者, <穆天>中宮大使者.
<羅>穀貴民飢.
○ 7년(단기2504년/AD171)신해, 5월, <어질>이 꿈에 <고복장>을 보고나서 병이 들어 물 가의 정자로 이사하려는데, <복장>의 아들이 이를 살해하였다. 조정은 이 일로 난감하였다. <책성>으로 떠나라고 명하였다.
<상경>을 태보로, <백면>을 좌보로, <목숭>을 우보로, <양필>과 <고형>을 좌․우 대평자로, <목천>을 중궁의 대사자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곡식이 귀하여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 八年壬子, 正月, <穆后>生<晉岐>太子. 九月, <公孫域>․<耿臨>․<喬玄>等與<索頭>合兵來寇<句麗(林西)>․<盖馬(開 魯)>等城, 皆潰. <禾晉>自<丘利(庫倫)>退保<河城(通遼)>. <答夫>往<南口(遼源)>, 淸野以待之, 不過旬月, 果飢而退. 此, 所謂“千里運糧勢, 不能久者”也. 乃以勁騎七千擊之. <火晉>亦至合擊于<坐原(通遼東南雙福廟界)>大破之, 匹馬得返. 是謂<坐原>大捷. 賜<答夫><坐原>地, 後改以<質山>. 是年, <羅><仇道>海湌, <仇須>弟一吉湌. 二月, <羅>, 大疫, 禱其祖廟.
○ 8년(단기2505년/AD172)임자, 정월, <목>후가 <진기>태자를 낳았다. 9월, <공손역>․<경림>․<교현> 등이 <색두>와 병력을 합하여 <구려>․<개마>성 등을 쳐서 궤멸시키니, <화진>은 <하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이에 <답부>가 <남구>로 가서 들판을 불태워 비우고 기다리니, 불과 달포가 아니 되어 먹을 것이 떨어져 물러갔다. 이를 두고, "군량을 1000여리나 실어 날라야 할 형세라면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답부>가) 정예 7000 기마군으로 몰아쳤고, <화진> 또한 도착하여 <좌원>에서 함께 쳐서 대파시켰다. 몇 기만이 살아서 돌아갔다. 이를 두고 <좌원대첩>이라 한다. <답부>에게 <좌원>의 땅을 주었는데, 후에 <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해에 <신라>에서는 <구도>가 해찬이 되고, <구수>의 동생이 일길찬이 되었다. 2월엔 <신라>에 돌림병이 크게 돌아, 조상의 사당에 빌었다.
◎ 九年癸丑, 正月, 宮人<朱>氏生<延憂>太子, 香滿室. 上, 大喜, 封爲<馬山宮>妃, 以其父<輅>爲採供使. <輅>, <文>之別子也.
五月, <倭>女主與<羅>修好.
○ 9년(단기2506년/AD173)계축, 정월, 궁인 <주>씨가 <연우>태자를 낳았는데, 방 안이 향기로 가득하였다. 상이 크게 기뻐하여 <마산궁>비로 올려주었고, 그녀의 부친 <로>는 채공사로 삼았다. <로>는 <문>의 별자였다.
5월, <왜>의 여주는 <신라>와 잘 지내기로 하였다.
◎ 十年甲寅, 正月, <尙庚>病免, <白面>太輔, <穆崇>左輔, <陽弼>右輔, <米肯>大評者. <肯>, <漢>人也. 通天文, 明史記, 精律令. 上, 以<寡>公主妻之, 遂大用能, 謙讓勤儉, 敎民不倦. 是月, <羅>雨土, 而, 二月, 旱, 井水渴.
置評府․劾府․供府․採府․賓府․奴府․王子私兵府, 皆以大加領之, 次以大評․六劾․大供․大採․大賓․大奴․將軍等, 主其事. 乃<米肯>之奏也.
○ 10년(단기2507년/AD174)갑인, 정월, <상경>이 병들어 물러나니, <백면>을 태보로, <목숭>을 좌보로, <양필>을 우보로, <미긍>을 대평자로 삼았다. <미긍>은 <한>인인데, 천문을 알고, 사기에 밝고, 율령에 정통하였다. 상이 <과>공주를 처로 삼아주고는 그의 능력을 크게 썼는데도, 겸양근면하고, 백성을 가르침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 이 달(정월)에 <신라>에서는 흙비(황사?)가 내렸고, 2월엔 가물어 우물물이 말랐다(또는 두 달이나 가뭄이 계속되어 우물물이 말랐다).
평부․핵부․공부․채부․빈부․노부․왕자사병부를 두었고, 대가들이 맡아 다스리게 하였으며, 대평․대핵․대공․대채․대빈․대노․장군 등이 보좌하여 그 부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 일 또한 <미긍>이 아뢴 것이었다.
◎ 十一年乙卯, 三月, 上, 以<玄>太子徒, 善而好仙, 欲立<南武>太子爲東宮. <南武>曰; “不可, 以越兄.” 按行州邑, 至<提那>而淹留. <玄>太子往諭而還. <發岐>娶<虎川>. <朱>氏生女<□>.
○ 11년(단기2508년/AD175)을묘, 3월, <현>태자와 그 무리는 선(善)하고 선(仙)하기를 좋아하여, 상은 <남무>태자를 동궁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남무>는 “형을 뛰어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시골로 나가서 <제나>에 꼭꼭 숨어있자, <현>태자가 찾아가서 명을 전하고 돌아왔다. <발기>가 <호천>에 장가를 들었다. <주>씨가 딸 <□>를 낳았다.
◎ 十二年丙辰, 三月, 以<南武>爲正胤. 后兄<穆天>爲東宮大夫, <于素>東宮皀衣(皂衣). <白面>薨, 年八十, 美容儀, 善畵繪. 以<尙>太后外族, 居中用事六十年. 未有一失, 人稱其難. 然, 德不普, 身器不容國, 非宰相才云. <穆崇>太輔, <陽弼>左輔, <高衡>右輔. <盖婁>殂, <肖古>立.
○ 12년(단기2509년/AD176)병진, 삼월, <남무>를 정윤으로 삼고, 후의 오라비 <목천>을 동궁대가로, <우소>를 동궁 흡의(조의)로 삼았다. <백면>이 나이 80으로 죽었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가지런하였으며, 대경 그림을 잘 그렸다. <상>태후의 외가 식구로서, 벼슬살이를 60년이나 하면서, 허튼 일을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말하길 '매우 힘든 일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덕을 널리 펴지 못하고 몸과 사람됨이 나라를 감싸 안지 못하면 재상감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겼다. <목숭>이 태보가, <양필>이 좌보가, <고형>이 우보가 되었다. <개루>가 죽고, <초고>가 섰다.
◎ 十四年戊午, 三月, 印宮皀衣(皂衣)<于素>女, 爲東宮妃, 加<素>爵, 爲<提那>沛者. 十月, 丙子, 晦, 日食. 上泫然流涕曰; "朕以不德忝居寶位. 上不能孝母, 下不能慈民. 昔, 我<東明仙皇>, 日行百善, 而猶以爲不足, 朕欲日行一善, 而不及, 豈不悲哉. 左右悚然. 是日, 太輔<穆崇>薨, 年六十九. <弼>代之, <高衡>左輔, <穆天>右輔.
○ 14년(단기2511년/AD178)무오, 3월, 동궁흡의(조의) <우소>의 딸이 동궁의 비가 되니, <소>의 작위가 더하여져서 <제나>패자가 되었다. 10월, 병자,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이르길; "짐은 부덕하여 보위를 더럽히고 있소. 위로는 모친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자애롭지 못하였소. 일찍이, 나의 <동명선황>께서는 하루에 백 가지의 선행을 하시고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셨거늘, 짐은 하루에 한 가지의 선행을 하고자 하여도 이루지 못하고서도 슬퍼할 줄 몰랐소."라 하니, 좌우가 송연(두려워)해 하였다. 이 날, 태보 <목숭>이 죽어 <양필>이 대신 태보가 되고, <고형>이 좌보가, <목천>이 우보가 되었다.
◎ 十五年己未, 九月, <梁貊公>攝政. <明臨答夫>暴死, 年五十二, 葬以<梁貊大王>駙馬都尉之禮, 于<質山園>. 有膽力權智, 謀事必成, 人以爲天, 得<尙>太后寵, 專國政十五年, 內外洽然. 十二月, 上崩於石鸞宮, 春秋五十九, 葬于<故國谷(八浪河羊角山)>. 上, 寬厚好仁, 喜聞<漢>人經籍, 擇師而講, 欲行聖人之治, 而權委於<尙>太后․<明臨答夫>, 故不得如意而終, 惜哉.
○ 15년(단기2512년/AD179)기미, 9월, <양맥공>이 정사를 맡았다. <명림답부>가 나이 52살에 갑자기 죽어, <양맥대왕>부마도위의 예를 갖추어서 <질산원>에 장사하였는데, 담력이 있고 **비상사태 때 변통하는** 지략이 있어, 도모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었으며, 사람을 하늘과 같이 여겼고, <상>태후의 총애로 국정을 15년이나 도맡아 보았는데, 도성 안과 바깥 지방 모두가 흡족해 하였다. 12월에 상이 서도의 란궁에서 춘추 59세로 죽어 <고국곡(팔랑하양각산)>에 장사했다. 상은 품성이 '관후호인'하였고, <한>인들의 경적 내용을 즐겨 들었는데, 스승을 두어 강의하게 하였으며, '성인지치'를 펼치고 싶어 하였으나, 정사를 <상>태후와 <명림답부>에게 위임하였던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서글픈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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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똑같은 부탁을 드립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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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12년(A.D.176)년에 개루가 죽고 초고가 섰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10년차이가 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A.D.166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성겸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라 백제왕기 전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 만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이어지는 역사를 바로세울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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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김성겸 님. 모두(冒頭)의 글이 눈시울을 붉히게 합니다. “몸은 쉬었으면 하는데, 쉬어지지 않습니다. 큰 잘못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보다 마음이 바쁘신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무리를 좀 했읍니다.“ ............. 좀 쉬시면서, 직장과 가정일도 챙기면서 ‘대장정’을 하기를 앙망(仰望)합니다. 긴 호흡으로 끌고 나가야하기 때문에, 선생의 뜻과는 달리 ‘몸’의 협조와 가정과 직장의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던 말건, 댓가가 있건 말건, 해야 할 일은 한다.”는 학자의 기개 앞에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무리 하시지 말기를 거듭 청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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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김성겸 님. 십오년 기미(十五年己未) 기사(記事)에....‘有膽力權智’를 해석함에 있어서 “담력이 있고 권력과 지략이 있어,”로 해석하셨습니다. 이때의 권(權)은 권력(權力)이라기 보다는 ‘권도(權道)’를 뜻하는 말로 보입니다. 즉 지혜를 상도(常道)와 권도(權道)로 나누는데, 상도(常道)는 대원칙, 대강(大綱), 근본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뜻하고, 권도(權度)의 권(權)은 ‘저울질하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평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비상사태 때, 이를 긴급 조율(調律)하는 변통능력을 뜻합니다. 현대인에게는 권도(權道)라는 말이 거의 사어(死語)에 가깝기 때문에, ‘비상사태 때 변통능력’ 혹은 ‘비상사태 때 임시방변을 잘 구사했고,’로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즉 ‘有膽力權智’는 “담력이 있고, 비상사태 때 변통하는 지략이 있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시간을 두고, 찬찬히 들여다보고, 혹 의견이 있으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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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계 선생님, 고민한 부분을 해결해 주셨읍니다. 똑같이 옥편/자전을 보면서도 흘려버린 것이 옳을 줄이야...!!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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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김성겸 님. 첫 기사(記事)에....‘胡云<仙帝>出乎’을 “나이 많은 사람들은 <백고>가 <선제>의 자식이라고들 한다."고 하였다.”로 해석(解釋)하셨습니다. 호(胡)의 원래 뜻은 자전(字典)에 ‘턱밑의 살’로 나와있어서, ‘늙은 사람이 턱밑의 살이 늘어지는 현상’을 뜻하는 의미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호(胡)를 ‘북방민족’을 나타내는 용어로 뇌리(腦裏)에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점을 사천(史穿) 선생께서 주(注)를 달아줌이 좋을 듯 싶습니다. “기왕(旣往)이면 용례(用例)를 달면 더욱 좋다.”고 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配慮)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해석(解釋) 자체가 ‘교육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좌계 역시 꼼꼼히 들어다 보다가 “호(胡)에 ‘늙은 사람’이란 뜻이 있나?”하고 자전(字典)을 기웃거리고서야 비로서 알게 된 것입니다. 본문(本文) 해석 앞에 주(注) 혹은 주(註)를 다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해석(解釋)을 위한 성실성 - 사천(史穿) 선생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처음 여(如)의 뜻에 “행차하다.”는 용례(用例)가 있음을 꼼꼼히 가려낸 점에 좌계가 크게 놀랐는데,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동학(同學)을 위한 친절성도 좀 베푸시길... 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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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계 선생님, 정말 꼼꼼하게 살펴주신 점 고맙습니다. "胡" 역시 한참이나 고민했던 글자입니다. "胡"가 자신들을 "胡"로 불렀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어쩌면, "胡"라는 글자는 "기로"라는 것과 바꿔서 쓸 수도 있는 글자라 여겼읍니다. 여기서는 나이가 많은 즉, 옛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었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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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 호는 "어찌"라는 의미도 있습니다.(존한자사전) 따라서 "<伯固>生時, 汝爲上皇之寵后. 胡云<仙帝>出乎." 의 해석은 '백고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상황의 총애를 받던 후였는데, 어찌 <선제>의 자식이라고 하는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胡 【호】턱밑살; 어찌; 수하다(오래 살다); 늙은이; 멀다; 창가지(창끝의 갈라진 갈래); 오랑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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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선생님, 감사합니다. 꼼꼼히 보아주셨읍니다. 말씀하신대로 하여도 훌륭한 번역이 됩니다. <태조>의 아들인지 또는 <신명선제>의 아들인지는 낳은 후만이 알겠지만, 좀 더 진행하다가 "何" 대신에 "胡"를 쓴 예가 여러 번 나오면, 참조하겠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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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님. 참으로 놀라운 시각(視覺)입니다. 이런 서로의 절차탁마(切磋琢磨) 때문에, 동학(同學)으로써 깊은 우정(友情)을 느끼며, 배우는 기쁨을 누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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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南堂) 유고(遺稿)의 중요성 /사천(史穿) 김성겸 님. 남당(南堂) 유고(遺稿)는 단순히,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새로운 틀’에서 보게하는 중요한 일사(逸史)임이 사천 선생의 해석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절감(切感)케 됩니다. 꾹~ 참고 있었지만, 대장정(大長征)을 하는 선생의 노고(勞苦)에 위로가 될 것 같아 약간의 감회를 적습니다. 1)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에 대한 이야기 좌계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로써 ‘아시아 역사’를 새롭게 보는 시각을 지녔지만, 사실 사서(史書)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이를 언급하는 문귀(文句)를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신대제기’ ‘4년 무신(四年戊申)’ 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記事)가 적혀 있습니다. 원문(原文) 命<白面>畵<東明>像, 頒于仙院曰; "<芻牟>, 神而非人也. 夙興孜孜二十余年如一日. 况吾輩乎, 仙院政院一律, 夙興孜孜, 克己然後, 可答聖像, 及修鏡五十七繪卷. 해석(解釋) 옮김 <백면(白面)>에게 <동명(東明)>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선원(仙院)에 나누어주고 이르길; "<추모(芻牟)>는 신(神)이셨지 인간이 아니시었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시기로 20여년을 하루같이 하시었다. 나를 따르는 무리들아! 선원(仙院)과 정원(政院) 모두가 하나같이 일찍 일어나 부지런 하여 자신을 극복한 연후에, 성상(聖像)에 답하고, 그리고 대경(代鏡) 그림 57권을 닦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런 기사(記事)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를 구체적으로 선원(仙院)과 정원(政院)으로 구분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말을 바꾸어 ‘선정(仙政) 이원(二院)체제’라고 표현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2) 대경(代鏡) 앞에 수련(修練)하는 조의(皁衣)의 교육 모델 뿐만 아니라, 고구리 벽화가 대경(代鏡) ‘앞’에 수련(修練)하는 사라진 조의(皁衣)-교육의 모델(model)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위 기사(記事)입니다. 이런 획기적인 사료(史料)를 강단(講壇)에서는 절대 번역 작업을 못하리라고 좌계는 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들의 토대를 송두리째 무너트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천(史穿) 선생께서 남당(南堂)-유고(遺稿)를 해석(解釋)하는 주필(主筆)을 맡으신 것은 동학(同學)으로써 고개 숙여 고마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정(大長征)이기에 ‘긴 호흡’으로 가는 자세가 중요할 듯싶습니다. 감히 청(請)하건데, 무리하지 마시옵고, 몸의 협조와 직장과 가정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진행시키는 리듬 조절을 부탁드립니다. 이 일은 해낼 사람이 사천(史穿) 선생 외에 그 누가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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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님 좌계님 고맙습니다. 두분 노력에 경의를 보냅니다. 한 구절 더 제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位與三輔齊, 三輔之權盡歸於<答夫>. : 지위가 삼보(태보, 좌보, 우보)와 나란히 하였으며, 삼보의 권한이 다하여(그 권한이) <답부>에게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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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선생님, <백고>가 진짜 <태조>의 아들이라면 <수성>이 죽일 것 같아 거짓말을 하니 <수성>이, "그때는 너랑 형이랑 한참 좋아지내던 때인데, <백고>가 형의 아들이 아니라고?!"라고 반문한 것으로 번역을 변경합니다. "胡爲乎(호위호) 어찌하여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