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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史略卷之一/第二世<光明大帝>紀 - 초벌번역(***재삼정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22
엊그제의 제1세 부분보다 좀 양이 많습니다.
크게 어긋난 곳이 있으면 의견을 주시길 앙망합니다.
사정에 의해 애써도 모르거나 읽어낼 수 없는 글자는 옮기지 못하였읍니다.
(우선은 지명 비정에는 집착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봅니다)

벌써 다른 곳에서는 남당 박창화 선생께서 남겨 놓으신 이 유고에 대하여,
(필요한 것을 취하는 도움을 받으면 그분의 뜻을 세워드릴 수 있는 것인데)
좀 했다 자부하는 사람들이 "박창화가 사학을 제대로 했느니...." 경망되이 평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가능하면 담겨있는 내용을 모두 펼쳐내어 세간에 보이게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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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世<光明大帝>紀

◎元年壬寅,九月,葬先帝于<龍山(勃利之龍山)>,以遺命禁洵. <阿爾>妃生子<都절>. 以<禮>后爲太后. 十二月,<烏伊><黃龍>王,<摩離><卑離>王.
◎원년(단기2315년/BC19)임인, 9월, 선제를 <용산((발리지용산)>에 장사하고, 선제가 남긴 명에 의해 따라죽어 묻히는 것(순장)을 금하였다. <아이>비가 아들 <도근->도절>을 낳았다. <예>후를 태후로 올렸다. 12월, <오이>는 <황룡>왕을, <마리>는 <비리>왕을 삼았다.

◎二年癸卯,正月,改元<琉璃光明>. <再思>太輔, **<陜父>左輔主民大加**, <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主宮大加, <屋智>主穀, <勾鄒>主刑, <都祖>主藥, <松義>主賓, <仇都>主神. 三月,閱水陸軍於<河>濱. 九月,與<召>后觀稼<西河>而如<溫湯>獲白獐. 十月,鸞集新庭.
◎2년(단기2316년/BC18)계묘, 정월, 연호를 <유리광명**>으로 고쳤다. <재사>는 태보로, **<협보>는 좌보이면서 민생담당 대가로**, <분노>는 우보로서 군사담당 대가로, <고루>는 궁궐담당 대가로 삼고, <옥지>에게는 곡물생산을, <구추>에게는 형벌 관장을, <도조>에게는 의약담당을, <송의>에게는 접객을, <구도>에게는 제신을 맡겼다. 3월, <하>수 가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하였다. 9월, <소>후와 함께 <서하>의 곡식농사를 살피고, <온탕>에 갔다. 흰 노루를 잡았다. 10월, 란새가 새 궁전의 뜰에 모였다.
가◎三年甲辰,正月,以<順奴>爲<沸流>治, 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涓奴><黃龍><荇茶><卑離>上與<召>皇后治之,以慰<召>后之心. 三月納<禾姬>. 五月,與太后皇后如<海山><鹽□>而還. <東明>神宮成. 七月,以<松>氏爲妃. 作< 川(倭肯河)>離宮,上與<召>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請移都于<尉那城(鏡泊湖東)>,許之. 十月,<溫>公主崩. 春秋二十. 上減食二日,<召>皇后慰止之.
◎3년(단기2317년/BC17)갑진, 정월, <순노>는 <비류>가 <미추홀(밀산)>에서 다스리고, <관노>와 <계루>는 <온조>가 <우양>에서 다스리고, <연노><황룡><행다><비리>는 상과 <소>황후가 다스리도록 하여 <소>후의 마음을 위안토록 하였다. 3월, <화희>를 받아들였다. 5월, 태후 및 황후와 함께 <해산><염□>에 갔다가 돌아왔다. <동명>신궁이 완성되었다. 7월, <송>씨를 비로 올렸다. <골천(왜긍하)>에 별궁을 지어 상은 <소>황후 및 <온>공주와 함께 기거했다. <한남>왕 <온조>가 입조하여 <위나성(경박호동)>으로 도읍을 옮기겠다 청하니 허락하였다. 10월, <온>공주가 죽었다. 나이 스물이었다. 상이 이틀을 먹는 것을 줄이니, <소>황후가 위로하며 감식을 그만하라 하였다.

◎四年乙巳,二月,勸耕巡戍. 八月,<劉河>蠶師. 九月,<馬>公主及<雉姬>入宮. <平>氏生女. 十二月,<芬奴>伐<北沃沮><敦河(皮盧肥場□)>,平之.
◎4년(단기2318년/BC16)을사, 2월, 농경을 권장하며 수자리를 돌아봤다. 8월,<유하>에게 누에치기를 가르치는 일을 주었다.  9월, <마>공주와 <치희>가 입궁했다. <평>씨가 딸을 낳았다. 12월, <분노>가 <북옥저>와 <돈하(피노비장□)>를 쳐서 평정하였다.

◎五年丙午,正月,以<香>公主妻**<高婁>.  三月, <紫蒙>王<涉臣>女<臯豆>妻<乙豆智>. <曼>公主妻**<沸流>.  置車騎府.  五月,互市<溝婁(雙山)>.  八月,與<召>后勸稼<西河>奬十羊五豕. 十月,大閱<滸口(呼蘭)>.
◎5년(단기2319년/BC15)병오, 정월, <향>공주를 **<고루>의 처로 삼았다.  3월, <자몽>왕 <섭신>의 딸 <고두>가 <을두지>의 처가 되었고, <만>공주는 <비류>의 처가 되었다.**   거기부를 두었다. 5월, <구루(쌍산)>에 호시를 열었다. 8월, <소>후와 함께 <서하>에서 농사를 힘쓰게 하고 (집집마다) 양 열 마리 돼지 다섯 마리를 키우기를 권장하였다. 10월, <호구(호란)>에서 군사 사열을 크게 하였다.

◎六年丁未,四月,增漢官而招一技者厚□給妻. 爲<松>妃等<豆谷(湯原溫家之地)>行宮. 七月,拔<蓋馬城(開□)>,虜其王<小 >,約貢牛馬.
◎6년(단기2320년/BC14)정미, 4월, 한관의 수를 늘리고, 한 가지라도 능통한 자에게는 후하게 □도 주고 짝도 지어주었다. <송>비 등을 <두곡(탕원온가지지)>의 행궁에 있게 하였다. 7월, <개마성(개□)>을 쳐서 그 곳의 왕인 <소쾌>를 붙잡아, 소와 말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七年戊申,正月,<□>太子薨,四歲. 皇后如<汗南>. 五月, <解明>生. 上如<汗南>迎后而□. 有'魚遊詞'.
◎7년(단기2321년/BC13)무신, 정월, <□>태자가 나이 네 살에 죽었다. 5월, <해명>이 태어났다. 상은 <한남>으로 가서 황후를 맞아 돌아왔다. '어유사'라는 노래가 있다.

◎八年己酉,五月,<柴吉>子<昌>特立. <翊>公主入宮.
◎8년(단기2322년/BC12)기유, 5월, <시길>의 아들 <창>을 특별히 세웠다. <익>공주가 입궁하였다.

◎九年庚戌,四月,田于<箕山>七日,得眞珠於<桂>后陵,返于<凉谷( 川行宮)>. <雉姬>與<禾姬>相罵而去. <雉><鄭共>女也. 家在<汗>濱上, 追之樹下, 有'黃鳥詞'. 八月,<素奴>女可妻<羊>太子. 太輔<房良>請退,不許.
◎9년(단기2323년/BC11)경술, 4월, <기산>에서 7일간 사냥을 하다가 <계>후의 무덤가에서 진주를 주워 <양곡(골천행궁)>으로 돌아왔다. <치희>가 <화희>와 서로 욕하다가 (친정으로) 돌아갔다. <치희>는 <정공>의 딸이었다. (친정)집이 <한>수 물가에 있었는데, 그녀를 뒤따라가서 나무밑에 이르렀는데, '황조사'가 있다. 8월, <소노>의 딸이 <양>태자의 처로 삼을만하였다. 태보인 <방양>이 물러나겠다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十年辛亥,正月,<沸流>太輔. 四月,鍊于<南口>. <解術>生.
◎10년(단기2324년/BC10)신해, 정월, <비류>를 태보로 삼았다. 4월, <남구>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해술>이 태어났다.

◎十一年壬子,四月,<涉臣>反. <芬奴>拔其都城(□□). <臣>南莽. <雉姬><鵲姬>皆生女.
◎11년(단기2325년/BC9)임자, 4월, <섭신>이 반란하였다. <분노>가 그의 도성(□□)을 치니, <섭신>은 남쪽으로 도망갔다. <치희>와 <작희>가 모두 딸을 낳았다.

◎十二年癸丑,<漢오>無子,以其侄<□>爲太子.
◎12년(단기2326년/BC8)계축, <한오>가 아들이 없어 조카 <□>를 태자로 삼았다.

◎十三年甲寅,正月,<阿爾>后崩,春秋三十三. 后,皇后前夫<仇台>女也. 性溫慈貞敏,生<都절 >太子及三公主. <金蛙>王殂,<帶素>立.
◎13년(단기2327년/BC7)갑인, 정월, <아이>후가 죽었다. 나이 서른 셋이었다. (아이)후는 (소)황후의 전 남편인 <구태>의 딸이었다. 성품은 따뜻하고 자애로우며 정숙하고 영리하였고, <도절>태자와 공주 셋을 낳았다. <금와>왕이 죽어 <대소>가 즉위하였다.

◎十四年乙卯,正月, <都 >如<柵城>娶<帶素>女. 七月,<溫祚>立柵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帶素>引五萬軍入寇(通江),大雪七日,凍死者十九,悔不聽<解素>之諫.
◎14년(단기2328년/BC6)을묘, 정월, <도절>이 <책성>으로 가서 <대소>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온조>가 <한산>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공주를 온조에게 처로 주었다. 10월, <대소>가 5만군을 끌고와서 도적질을 하였는데, 큰눈이 7일간이나 내려 얼어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나 되니, <해소>가 말리던 것을 뿌리친 것이 후회되었다.

◎十九年庚申,八月,<託利><斯卑>傷逸豕于<長屋澤(小興□湖)>,命坑之. 而不豫,皇后與巫跌禱謝之. <武骨>左輔,<高婁>右輔.
◎19년(단기2333년/BC1)경신, 8월, <탁리><사비>가 잘 생긴(또는 달아난) 돼지를 <장옥택>에서 상하게 하니, 그를 땅에 묻으라 명하였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게 되자, 황후와 무당이 잘못을 빌고 사죄하였다. <무골>을 좌보로, <고루>를 우보로 삼았다.

◎二十年辛酉,正月,<都절>太子,自<柵城>□,未幾薨,<帶素>自愧其失而還<都 >而留其女,故<都 >悲傷不起. 五月,<沸流>薨,年三十七. 上減食以慰皇后,以<阿爾>女<眞>公主妻<沸流>子<昜人>. <曼>公主改嫁于<都助>. <陜父>太輔. <大房良>薨,年八十二,賜其妻<□>公主年穀.
◎20년(단기2334년/AD1)신유, 정월, <도절>태자가 <책성>에서 돌아오기 전에 죽으니, <대소>는 이 일에 스스로 부끄러워 하며, <도절>의 시신은 돌려보내고, 자기의 딸은 데리고 있으려 하니, (죽은)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5월, <비류>가 나이 37살에 죽었다. 상은 감식하여 황후를 위로하였고, <아이>의 딸인 <진>공주를 <비류>의 아들인 <양인>의 처로 삼았다. <만>공주는 <도조>에게 개가하였다. <협보>를 태보로 삼았다. <대방량>이 나이 82살에 죽으니, 그의 처인 <□>공주에게는 1년치의 양식을 주었다.

◎二十一年壬戌, 파奴掌牲<薛支>遂逸豕至<國內><尉那岩(烏屯河古城洞)>,見鹿魚富裕,宜五穀,多茂林大樹,藥泉,神山以爲可都地. 三月,謁上請建都. 四月, 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與皇后相都于<國內(解慕漱與柳花相逢故曰國內)>. 九月,與皇后又如<國內><熊心(金山)><合歡(吉祥)><尉那岩>等地,而仍遊<沙勿澤(湍湖)>. 防隱者位<沙勿>于澤畔石. 上載而귀, 皇后曰: "山間賤夫何用乎". 上曰: "不然<伊尹><呂尙>皆此類也".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公主生<溫祚>子<多婁>.
◎21년(단기2335년/AD2)임술, 제사희생물을 담당하는 파노 <설지>가 도망간 돼지를 좇아 <국내><위나암(오둔하고성동)>에 이르러, 고라니, 사슴, 물고기가 여유있게 많고, 오곡을 가꾸기 적당하고, 무성한 숲과 큰 나무가 많고, 약수가 샘솟고, 신성한 산이 있어 도읍으로 하기에 합당한 땅임을 보았다. 3월, 상께 도읍을 건설하자고 주청하였다. 4월, <위중림(재위나암근지)>에 사냥을 나갔고, 황후와 함께 <국내(해모수여유화상봉고왈국내)>가 도읍으로 삼기에 어떠한 가를 살피러 갔다. 9월, 황후와 함께 <국내><웅심><합환><위나암> 등지를 (살피러) 갔다가, <사물택>을 유람하였는데, 그 곁에 숨어 사는 사람이 <사물택> 반석 위에 앉아 있었다. 상은 이 사람을 태우고 돌아왔다. 황후가 "산 속에 사는 미천한 사람을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하고 물으니, 상이 "모르면 몰라도 <이윤>이나 <여상>과 같은 사람일 것이오."라 답하였다. <현>공주를 <작>태자비로 삼았다. <재사>공주가 <온조>의 아들인 <다루>를 낳았다.

◎二十二年癸亥,十二月,移居<尉那岩>,是爲<北都>. 作新宮於<銀川岺>下(鶴□). 十二月,田于<質山>陰(□化),五日不返. <陜父>諫曰: "天子之 在於鍊兵. 今風雪如此,□露獵騎,而行樂可乎". 上以<陜父>初附於<沸流>有蘊意至是罷之. <陜父>以瓢浮海入<新羅>.
◎22년(단기2336년/AD3)계해, 12월, <위나암>으로 이거하니, 이곳이 <북도>인데, <은천령> 아래에 신궁을 지었다. 12월,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며, 닷새가 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협보>가 여쭙길: "천자의 사냥은 군사를 훈련시킴에 있습니다. 지금 풍설이 이러하여, 사냥마가 고단합니다. 그런데도 행락이 가당하오신지요?" 하였다. 상은 <비류>에서 처음 만나고나서부터 마음 속에 쌓인 것이 있어, 이때에 이르러 그를 파면하였다. <협보>는 미련없이 <신라>로 흘러들어갔다.

◎二十三年甲子,二月,以<解明>爲東宮.  算十七. 母<松>后夢鸞乘日而出. 性英明好勇,形 亦多肖. 上故以皇后女<珍>公主妻之, 大赦國中. <松>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炤室,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故名岺曰<鶴岺>. <鵲>太子浮海入<新羅>.
◎23년(단기2337년/AD4)갑자, 2월, <해명>이 동궁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다. 모친 <송>후가 란새가 날아오르고 해가 뜨는 꿈을 꾸었었다. 성품은 영명하고 씩씩함을 좋아하고, 얼굴도 닮은 데가 많았다. 상은 그리하여 황후의 딸인 <진>공주를 (해명의) 처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송>후는 <은천> 신궁에서 <무휼>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밝혀주었다 하여 궁의 이름을 <주유>라 불렀고, 흰 학이 고개를 선회하였다 하여 상이 고개 이름을 <학령>이라 불렀다. <작>태자는 <신라>로 흘러들어갔다.

◎二十四年乙丑,九月,田于<箕山>,得<羽澤>妻以< >公主, 有畜□才.
◎24년(단기2338년/AD5)을축, 9월, <기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우택>이라는 사람을 얻어 <전>공주를 처로 맞게 하였다. 짐승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다.

◎二十六年丁卯,四月,<解邑朱>生.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遣兵及粮于<溫祚>以助伐<韓>,三年繼之.
◎26년(단기2340년/AD7)정묘, 4월, <해읍주>가 태어났다. <온조>가 <한산>으로 거쳐를 옮겼다. <대소>의 형제 여덟이 왕위를 다투면서 서로를 죽였다. <온조>에게 병사와 식량을 보내주어 <한>을 정벌하는 것을 도왔는데, 3년을 계속하였다.

◎二十七年戊辰,三月,賜<解明>死,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弓授<解明>,<解明>折之曰:"非我有力也,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曰:"<解明>不愛其妻,而侮辱國老. 陛下何不責之." 上乃召<解明>,責之曰:"不愛<珍>女違父母也. 侮辱國老輕社稷也. 交通後宮淫亂之兆也. 寧其生不若死." <解明>悲憤立槍於<礪津(八虎力河支流)>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新羅>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安圖)>. 七月,<都助>太子薨,年二十四,<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松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 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27년(단기2341년/AD8)무진, 3월, <해명>에게 자진하라 했다. 이때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황룡>왕<오이>가 보궁을 <해명>에게 건네자, <해명>이 이를 부러뜨리고 나서는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고 활이 튼튼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이>는 크게 참담하였다. 황후가 "<해명>은 자기 처를 아끼지도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해명>을 나무라지 않으십니까?" 하고 아뢰니, 상은 <해명>을 불러 책망하길 "<진>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후궁과 서로 오감은 음란할 조짐이다. 사람들을 편안케 하려면 죽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하여 창을 <려진>(땅)에 세워놓고는 (창 위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용감하게 자진함을 좋게 여겼다. <신라>는 <작>태자에게 왕녀를 처로 삼아주었다. <온조>가 <한산(안도)>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태자가 죽었다. (<도조>는) <해명>의 동복 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인 <송양>을 닮았다.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차례 질책을 받았었는데도, <해명>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자신이 동궁이 되었으면 싶어, 자기 처인 <만>공주에게 상께 청해보라고  하였다.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이나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스스로 불타올라 덥다." 말하더니,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음뿐이었다."고 말하였다.

◎二十九年庚午,六月,赤蛙攻黑蛙于茅川(□沙河), □之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子爲<新羅>太輔.
◎29년(단기2343년/AD10)경오, 6월, <모천(□사하)>에서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는데, □의 사람들은 <대소>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공주가 궁에 왔다가 돌아갔다. <작>태자가 <신라>의 태보가 되었다.

◎三十一年壬申,七月, 漢人<田譚>與<索頭>相爭,請救於<勾鄒>,<勾鄒>使<延丕(召后孫子)>擊< 譚>殺之. <嚴尤>來寇, 虜其將卒二千餘,馬仗無數,印顆十二,拓地七百餘里. 十月,以< >公主妻<乙豆智>.
◎31년(단기2345년/AD12)임신, 7월, 한인 <전담>이 <색두>와 싸웠는데, <구추>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구추>는 <연비(소후손자)>를 보내어 <전담>을 치고 그를 죽였다. <엄우>가 쳐들어와서 노략질 하므로, (그들과 맞싸워) 이천여명의 장졸을 사로잡고, 병마와 병장기는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되었고, (획득한) 인과도 12개나 되고, 땅도 칠백여리를 얻었다. 10월, <양>공주를 <을두지>의 처로 삼았다.

◎三十三年甲戌,正月,以<無恤>爲東宮,敎以弓馬用其之術. 七月,以<豆>公主妻<高婁>. 八月,<烏伊>領兵二萬伐<涉臣>拔<勾麗城(林西)>,虜<涉臣>而□, <紫蒙>十二國悉平. 十月<摩離>亦引兵二萬拔<貊窟><貝沙(海拉南屯)>而還. <帶弗>殺<帶素>而自立(<弗><帶伯>之子,一作<金蛙>子).
◎33년(단기2347년/AD14)갑술, 정월, <무휼>을 동궁으로 삼고, 군마를 사용하는 전술을 가르쳤다. 7월, <두>공주를 <고루>의 처로 삼았다. 8월 <오이>가 군사 이만을 이끌어 <섭신>을 치고, <구려성>을 뿌리뽑고, <섭신>을 사로잡으니 귀복하였다. <자몽> 열 두 나라(마을)을 모두 평정하였다. 10월, <마리>도 군사 이만을 이끌고 나아가 <맥굴><패사(海拉南屯)>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불><대백>지자,일작<금와>자).

◎三十七年戊寅, 四月,<解術>溺死<礪津>,祭須尋其尸,葬于<王骨岺(八虎畔向陽山)>. 七月,<烏伊>薨,< 得>子<毛 >立,<伊>之參也.
◎37년(단기2351년/AD18)무인, 4월, <해술>이 <려진>에서 익사하여, (수신에게) 제사하고 깊은 곳에서 그 시신을 찾아 <왕골령(팔호반향양산)>에 장사했다. 7월,<오이>가 죽어, <보득>의 아들 <모린>이 섰는데, <오이>의 사위이다.

◎三十八年乙卯, 正月, 北都大震,移于東都. <默居>太輔.
◎38년(단기2352년/AD19)을묘, 정월, 북쪽 도성에 지진 크게 있었기에, 동쪽 도성으로 이거했다. <묵거>를 태보로 삼았다.

◎三十九年庚辰, 三月, 立<東明>神廟于<龍山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以<鮮><苩>兩公主妻<多婁>, 而賜'正胤冠인', 以爲<汗南>'傳國之璽'. 九月,田于<骨句川(□河)>,東宮得神馬狀如<巨婁>. 上曰:"<東明>復興之兆. 九月,<扶余>獻赤烏一頭二神.
◎39년(단기2353년/AD20)경진, 3월, <용산령(발리묘령)>에 <동명>신묘를 세웠다. <재사>공주와 <다루>가 둥에 들어왔기에, <선>과 <백> 공주 둘을 <다루>의 처로 삼아주고, '정윤관인(왕위계승자임을 표시하는 관모와 보검)'을 내려, <한남>국 전국옥새로 삼게 했다. 9월, <골구천>에서 사냥했는데, 동궁이 <거루>를 닮은 신마를 얻으니, 상이 "<동명>이 다시 일어날 징조로다."라 하였다. 9월, <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가마귀를 보내왔다.

◎四十年辛巳, 二月, <魔離>薨, 子<義鹿>立, 其母<素奴>女也.
◎40년(단기2354년/AD21)신사, 2월, <마리>가 죽어, 아들 <의록>이 섰는데, 모친은 <소노>의 딸이었다.

◎四十二年癸未,十一月,<帶弗>來侵,大破其軍於鶴盤岺下.
◎42년(단기2356년/AD23)계미, 11월, <대불>이 쳐들어오기에, <학반령> 아래에서 그 군대를 크게 쳐부쉈다.

◎四十四年乙酉,二月, <高婁>太輔, <松義>右輔, <乙豆智>左輔主兵.
◎44년(단기2358년/AD25)을유, 2월, <고루>를 태보로, <송의>를 우보로 삼고, <을두지>는 좌보로 삼고 동시에 군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四十七年戊子,八月, 太后崩,春秋八十五,葬於<豆谷>東原. 十月,上與皇后崩,于豆谷離宮. 上春秋六十八,皇后八十三. 皆葬于太后陵內. 東宮卽位於<豆谷>離宮.
◎47년(단기2361년/AD28)무자, 8월, <태후(예태후)>가 죽었다. 춘추 85세였고 <두곡> 동쪽 평지에 장사했다. 10월, 상과 황후가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상은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둘 다 태후릉 경내에 장사했다. 동궁이 <두곡>의 이궁에서 즉위하였다.

◎論曰:<光明>嚴毅少許, 謹於守成, 勸於擢才, 治天下四十年, 兵精粮足, 可謂賢矣. <陜父><解明><召>后之事,皆有欠焉.
찬자가 평하길: "<광명>은 엄하고 굳세어(성을 잘 내어) 너그러움이 적었도, 지키어 이룸에 충실하였고, 인재를 발탁함을 권장하여, 천하를 40년간 다스렸는데,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풍족하였으니 현명하였다 할만하다. <협보><해명><소>후 관련 처결에는 모두 흠결이 있었다." 한다.//

크게 매끄럽지 않았을 터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송 김 성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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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9)


정성일 (2007-05-01 16:35:52)  
김성겸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부분인데요.
광명왕의 재위가 47년이고 돌아가실때 나이가 86세라면 유리명왕 원년때의 나이가 40세가 됩니다.
동명왕이 돌아가실 때 나이가 40세이니 광명왕과 나이가 동갑입니다.
즉 광명왕이 동명왕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고구려사략에서도 나타나는데 두개의 사서가 같은 나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성일 (2007-05-01 17:23:15)  
동명왕이 졸본부여에 들어온 해의 나이가 19세, 광명왕과 18세의 나이 차이가 나고 광명왕의 나이는 68세, 예씨는 85세로 추측이 된다.
백제서기에서도 광명왕이 동명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백제서기에는 광명왕의 처인 아이와 송화가 일찍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광명왕의 왕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즉 고구려사초에서는 송화가 죽은 사실을 기재하지 않고 마치 살아 있었던 것처럼 적고 있다.
그것은 다음왕인 대무신왕(무휼)의 혈통과 관련되어 누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좌계 (2007-05-01 18:39:47)  
/ 정성일 님.
‘백제서기’를 비롯한 남당(南堂) 선생의 유고(遺稿) 해석과, 또 상호비교 검토 까지 하는 지난(至難)한 작업을 해주셔서 고마 와 같습니다.

모든 해석과 비교 연구가 그러하듯이 ‘세심함’과 ‘큰 뼈대’를 동시에 파악해야하는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정성일 님처럼, 사료(史料)의 비교분석도 중요하고, 서로 모순(矛盾)된 ‘사실(fact)’의 인지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료(史料) 자체의 인지(認知)’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인 듯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연구 태도는 ‘지나치게’ - 사료(史料)-인지(認知) 자체를 거부해온, 아주 이상한 풍토(風土)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좀 기존의 사료(史料)에서 제시된 ‘사실(fact)’와 ‘패러다임’에 안맞으면, “위서(僞書)다...”하는 실로 괴상한 역사연구의 태도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서(史書) 해석의 핵심은 ‘사료(史料)-인지(認知)’입니다.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리학(論理學)에서도 ‘명제(命題)가 일단 안정화’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이 옳은 말인지, 틀린 말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정성일 님’과 ‘김성겸 님’께서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를 번역하는 대장정(大長征)의 길로 들어섬에 대해서, 좌계 다시한번 머리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좌계 (2007-05-01 19:46:16)  
/사천(史穿) 김성겸 님.

1. 일단 해석에서 빠트린 곳이 있습니다.

◎二年癸卯,正月,改元<琉璃光明>. <再思>太輔, <陜父>左輔主民大加,

에서 ‘◎2년(단기2316년/BC18)계묘, 정월, 연호를 <유리명왕>으로 고쳤다. <재사>는 태보로,’ 로 사천 성생께서 해석하였으나 ‘주민대가(主民大加)로 삼았다.’가 빠져있습니다.

2. 문맥(文脈)이 ‘부드럽지 못한 부분’이 있음도 발견이 됩니다.
(*) 원문(原文)
<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사천선생의 초벌 해석)
: <송양>은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차례 질책을 받았고, <해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 (송양은 <해명>을) 동궁으로 만들고 싶어, 자기의 처인 <만>공주를 시켜서 상께 청하라 하니,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을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불타올라 덥다." 말하고,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시절 사람들은 "용감해도 죽고, 나약했어도 죽음뿐이었다."고 말하였다.

(문맥(文脈)의 흐름상 해석)
위 문장의 해석에 있어서, 해명(解明) 태자가 자살하자, 송양(宋讓) -비류국왕-이 그 빈 동궁(東宮)의 자리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
- (이 부분의 해석은)
“송양(宋讓)은 망녕되게 자신을 과장(誇張)하는 바가 있어서 질책(叱責)을 (상(上)으로부터 받는 것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명(解明) 태자가 죽는 것을 보고(=見<解明>之死), (그 빈자리인) 동궁(東宮)이 (되기를) 욕망하였다.”로 해야된다고 봅니다.

‘使其妻<曼>公主請于上’
- (이 부분의 해석은)
“(송양의) 처(妻)인 만(曼) 공주로 하여금 상(上: 광명대제)에게 (송양(宋讓)을 동궁(東宮)으로 삼아달라는) 청(請)을 하게 했다.”가 된다고 봅니다.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이런 우줍짢은 부탁을 받은 만(曼) 공주의 말이 나오는데,
- (위 구절의 해석은)
“만(曼)공주 말하기를 “(그냥 현 직위(職位)에 그대로 )있으면서, 스스로 수양(修養)만 하세요! (=在自修), (남편께서) 청(請)한 것을 못하겠습니다.(=而不在請) (그 청(請)이 의미하는 바가) 번민(煩悶)되어 스스로 여름 땡볕에 접한 것처럼 불탑니다. (=煩悶自焦觸暑)”라고 또악질을 하고, (까딱않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 (이 부분의 해석은)
이때 세상사람들은 말하기를 “ (동궁(東宮)자리라는 것은) 용감해도 죽는 자리이고, (만(曼)공주처럼) ‘결벽(潔癖)해서 몸을 사려 겁(怯)먹어도(=유(懦))’ 죽는 자리이구나!”라고 했다.
로 보입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좌계가 볼때에는 위 문맥(文脈)의 정확한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유는 송양(宋讓)은 고주몽-동명성왕과 분명 ‘졸본-부여 터’를 두고 경쟁을 벌린 사람이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동궁(東宮)이라는 자리’ 즉 ‘친자식 가운데 물려받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송양(宋讓)이 “저 자리를 내가 차지하면 어떨까?!”하는 욕심을 내고, 청(請)을 할수 있는 당시대 이상한 제도(制度)를 눈치채게 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曼) 공주께서 완강히 거부하자, 시인(時人)들의 평(評)이 “흠...그 자리는 이래 저래 죽는 자리구만!!”하는 평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는 동궁(東宮) - 다시 말하면, 차기(次期) 고구리 - 왕(王) 자리에 대한 우선권(優先權)이 고구리 왕가(王家)의 직계(直系)에만 한정(限定)되지 않음을 알게 하는 귀중한 사료(史料)라고 생각합니다.
좌계 (2007-05-01 20:00:08)  
/사천(史穿) 김성겸 님.

정말 엄청난 일을 진행시키고 계심에 머리숙여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일단 좌계가 볼때에는 삼국사기 등, 기존(旣存) 사료의 패러다임으로는 소화 못할 수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군요.

차분히 몇 번이고 읽어볼 필요가 있는 사료(史料)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좌계가 가장 크게 놀란 것은 ‘광명대제기’에 고주몽-동명성왕과 함께 고구리를 창업(創業)하신 오이(烏伊)께서 바로 황룡국(黃龍國) 국왕(國王)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만약에 좌계가 상정(想定)하는 것처럼.... 황룡국이 섬서성 태백산(太白山)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고구리가 창업(創業)할 때부터, 중국대륙 전체를 ‘세계경영’ 차원 - 옛말로 ‘평천하(平天下) 차원’에서 일어났음을 알게 하는 충격적인 사료(史料)입니다.

사천(史穿) 선생께서 이 ‘해석을 올리기 전’에 ‘얼떨떨하다’라는 표현을 “왜 썼는지?!” 좌계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학(同學)들을 위해, 꾸준히 해석하는 대장정(大長征)을 기원합니다.
훌륭한 해석 고마 와 같습니다.
김성겸 (2007-05-01 20:29:31)  
좌계 선생님 ;
1)바쁜 마음에 흘린 것이 있었고,
2)저는 <송양>이 직접 동궁자리를 탐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창에 몸을 날려 죽은 태자를 동궁자리에 밀어올려 자신의 이득을 노리려고
왕녀인 자기의 처를 이용하려 했었다는 과거지사로 보고 해석했던 것이었읍니다.
이전과 같이 시간을 내어 다시금 정리하면서 뜯어보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일 선생님;
정 선생님께서는 지금 사료들을 비교검토까지 하시면서 진행하시지만
저는 우선 해석에 집중하고 있읍니다.
현재까지의 느낌으로는 말씀하시는 <동명왕>은 시조<추모>가 아닌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조<추모> 재위시의 연호가 <동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즉, 자기의 선대를 생각하면서 <동명>이라는 연호를 쓸 생각을 하였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솟대 (2007-05-02 16:07:39)  
정말 노고가 많으십니다.
두분선생님과 같이 좌계선생님등께서 다듬고 정리하셔서 박창화선생님의 백제서기와 고구려사초를 새롭게 해석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으로 출판되기를 정말 고대합니다
김성겸 (2007-05-02 23:01:03)  
좌계 선생님의 첫 해석을 따르는 것이 훨씬 나아보여 따르기로 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인 것은
<다물>후<송양>은 선제16년(BC22년)에 이미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에 다시 나오는 <송양>이 그 첫 <다물>후 <송양>인지 분간이 아니됩니다....
아니면, 남당 선생께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채 잘 못 필사하셨거나...???...

오늘은 <대무신제기>를 가지고, 끊어읽기 표시하고, 확실하지 않거나 흐릿한 글자 확인하랴, 글자의 뜻과 용도 확인하랴, 가 해석 해보랴....
또, 어려운 귀절이 있고 하여 좀 쉬었다가 할 요량으로 일찍 사무실을 나왔읍니다.
라디오 (2007-05-03 01:06:53)  
수고가 많습니다.
고구려사초에 대해서 개입을 하지 않을 생각이오니..편안하게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분량이 많아 공력이 필요로 하는 작업일테고...
또한 어려운 부분을 잘 헤쳐나가시라 믿습니다.
청개구리 (2007-05-03 01:22:10)  
김성겸/님의 해석이 훌륭하군요.
고구려사초가 정확히 어떤 문헌들을 근거로 쓰여졌는지 궁금하군요.

2년의 일부 구절 而如<溫湯>에 대한 해석이 누락됐군요. 그 부분이 빠져도 요지 파악 측면에서는 별로 지장은 없지만...

3년에 있는 옆 구절은 以<順奴>爲<沸流>治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爲<溫祚>治都<牛壤>
해석이 조금 모호하군요. 우선 治都라는 표현을 처음 보는군요.

以<順奴>爲<沸流>治都<彌鄒忽(密山)>는 '순노 지역을 비류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미추홀에 도읍하게 하였다'로 간주한다면, 여기서 都가 나라 차원에서 '도읍'인지, 아니면 지방의 중심으로서의 '도읍'인지 헷갈리는군요.
라디오 (2007-05-03 01:47:19)  
高句麗史略 (주몽,유리왕)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43.pdf
高句麗史略 (16대 고국원왕~)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42.pdf
高句麗史抄 (주몽~15대 미천왕)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사료의 출처는 이곳이고..
어디에서 베꼈냐는 아직 미스테리입니다.
근거보다는 속내용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김성겸 (2007-05-03 12:04:19)  
청개구리 선생님, 짚어주신 점 고맙습니다.
흘린 것은 줍고,...
"以<順奴>爲<沸流>治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爲<溫祚>治都<牛壤>"는
"以<順奴>爲<沸流>治, 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로
끊어읽기를 정정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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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史略卷之一/第二世<光明大帝>紀의 27년기사에서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제가 큰 실수를 하였읍니다.
이미 옛날에 죽은 <송양>이 <동궁>자리를 탐냈거나, 서너달 전에 죽은 <해명>을 어찌하고자 한 사건이 아니라,
죽은 <해명>의 동복 친형인 <도조>가(7월에 죽음) 동궁의 자리를 탐하여
자기 처(만공주)를 상께 보내서 동궁자리를 달라고 부탁하라 하니,
<만>공주도 열받아 쓰러져 못 일어나고, <도조>도 결국 죽었다는 얘기임을
오늘에서야 알았읍니다.
27년기 중 제가 잘못한 부분은 바로잡아 놓았읍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큰 실수를 하여,
여러 선생님들과 네티즌 여러분들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이 싸이트의 얼굴을 어렵게 만들었읍니다.

죄송하게 생각하며, 금후 좀 더 뜯어보면서 진행하여 보겠읍니다.//

◎二十七年戊辰,...七月,<都助>太子薨,年二十四,<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 <宋讓>, 妄自誇張累被叱責, 見<解明>之死, 慾爲東宮,...
*** 이렇게 끊어읽고
◎27년(단기2339년/AD7)...무진7월, <도조>태자가 죽었다. (<도조>는) <해명>의 동복 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송양>은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차례 질책을 받았는데도, <해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 (<송양>이 <해명>을) 동궁으로 만들고 싶어, ...
*** 대략 이렇게 해석하여, 이미 일찌기 죽은 <송양>이 예전에 하였던 것 으로 보고 해석하여
전후 사정이 일맥상통하지 못하였던 것을, 그리고 다른 생각들을 하게 강요(?)한 셈이 되었던 것을

◎二十七年戊辰,...七月,<都助>太子薨,年二十四,<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宋讓>, 妄自誇張累被叱責, 見<解明>之死, 慾爲東宮,...
***로 끊어읽기를 정정하고
◎27년(단기2339년/AD7)무진7월, <도조>태자가 죽었다. (<도조>는) <해명>의 동복 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인 <송양>을 닮았다.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차례 질책을 받았는데도, <해명>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자신이 동궁이 되었으면 싶어, ....
***로 번역합니다.// 좌계 선생님의 아래 제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