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高句麗史略卷之一/始祖<芻牟大帝>紀 - 초벌번역(**재수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03
아래는 표지엔 "고구리사초"라고 되어 있는데, 안쪽의 첫 면에는 "고구리사략권지일"이라 되어 있는,
"남당 박창화 선생"께서 "고구리"관련 역사를 정리(?)하시어 필사하여 놓으신 내용을 초벌 번역한 것입니다.
저 나름대로 끊어읽기를 하였읍니다만, 잘 못된 곳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PDF 자료의 선명도 문제와 약자(?)인 듯한 글자를 제가 충분히 해독하지 못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금후에는 글자가 희미한 것은 제 아들녀석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미 읽어보셨거나 관심 있으신 선생님들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문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천학인 제가 감히 도전한 일에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15세 미천대제기"까지 일별한 개인적 소견으로는 ;
아직 생소한 내용들도 많고, 지명의 위치 비정 등에 있어서는
(건방지다 할 수 있겠지만, 추가적인 확인이 있기 전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앞서서 <평양변>과 <요동론>을 일별하였는데,
기원 전후의 세칭 우리의 삼국 <요동>에 대하여는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보셨으나,
이후의 시기에 대하여는 <일본>에 오래 계신 영향이었는지 의아하기도 합니다.
지명비정에 있어서는 <구자일>씨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남당 박창화 선생"께서 하여 놓으신 비정한 지명의 현재의 위치보다는
자료빈곤에 어려움이 많았던 우리에게 추가적인 사실(史實)을 얻어서 남겨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명비정 문제는 현세의 과학적인 방법 등으로 보완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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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스스로도 어려워서 도움을 기대했던 부분을, 좌계, 정성일, 백송 선생님 등의 도움이 있으셔서,
좀 더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었기에 재차 정정된 것으로 바꾸어 올려놓겟읍니다.
함께 다듬어 주시면 계속적으로 정정토록 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2007/05/03-
<남당 박창화> 선생 찬술
<高句麗>史抄
<高句麗>史略卷之一
始祖<芻牟大帝>紀
◎辛巳,夏,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南來乘玄武(方丈大龜)而至<普述(穆陵河口)>,與三賢(再思,武骨,默居)逐虎攘< 鞨>以開<順奴>. 是年,<禮>后生<光明>. 壬午春,與<樂浪><卒本>定界. 秋,納<召西奴>爲妃.
◎신사년(단기2294년/BC40) 여름, 네 명의 호걸(오이,마리,협보,분노)과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현무(크기가 한 길이 되는 거북)를 타고 <보술(목릉하구)>(수)에 이르고, 세 명의 현자(재사,무골,묵거)와 함께 호랑이와 <갈(鞨)>을 쫓아내고 <순노(口서한口)>(부)를 열었다. 이 해에 <예>후가 <광명>을 낳았다.
임오년(단기2295년/BC39) 봄, <낙랑>및 <졸본>과 (경)계를 정하고, 가을엔 <소서노>를 비로 삼았다.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二月,<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順奴>. <卒本>之民推上,爲皇帝,卽位於<沸流谷><西城山(勃利縣二龍山)>. 國號<高句麗>,建元曰<東明>. 命<漢素>造船,<鄭共>製兵,<馬黎>畜馬(皆漢人也). <末曷>大擧入寇,上親征斬首千級. 五月,訪<松讓>于<沸流(□原□□沸流谷□)>,以德義曉之,妄稱仙族而不屈,遂奪其珍寶妻子而來. 七月,<松讓>入寇,破之,虜獲二千口,約貢而示縱. 八月,鍊于<汗(□□)>濱,歸者二千余人. 十月,祀隧祭豊,<扶餘>鳩含麥而來. 十一月,與<黃龍>定界,割<箕丘(老岺)>印. <羊吉>以女妻<烏伊>,徵其民以築<眞珠城>.
◎<동명>원년(단기2297년/BC37), 2월, <졸본>왕 <연타발>이 죽었다. <소서노>가 나라를 <순노>에 바쳤고, <졸본>사람들이 상을 받들어 황제로 모시니, <비류곡><서성산(발이현이룡산)>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은 <고구리>이고, 연호는 <동명>이다. <한소>에게는 배를 만들게 하고, <정공>에게는 병장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마리>에게는 말을 기르게 하였다(개한인야). <말갈(末曷)>이 대거 들어와 노략질 하니, 상이 친히 정벌하여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5월, <비류(□원□□비류곡□)>로 <송양>을 찾아가서, 베푸는 뜻으로 타이르니, 자기들은 선족(仙族)이라 참칭하며 굽히지 않기에, 처자와 진보(珍寶)를 빼앗아 돌아왔다. 7월, <송양>이 쳐들어와 노략질하기에 격파하여 2천명을 사로잡았더니, (조)공하고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8월, <한(汗)>수 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훈련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2천여명이었다.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여 **풍년을 빌었더니,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종자)를 물어왔다.** 11월, <황룡>과 경계를 정하였는데, <기구(노령)>의 동쪽을 차지하였다. <양길>의 딸을 <오이>의 처로 삼았고, 그의 백성을 징발하여 <진주성>을 쌓았다.
◎二年,乙酉,正月,徵<黃龍>馬三千匹,鍊于<中川(拉林河)>,<羊吉>憂惧死. 二月,<桓那國(吉林)>女主<桂婁>來降,納爲夫人. 四月,<召>后生子<沸流>,爲人多情而懦弱. 六月,<松讓>,懸鹿漂都,以國來獻,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慕漱之地也). 七月,<黃龍>男三千爲軍,**女五(千)爲婢,冶工三十(所)**兵船二百成. 八月,<烏伊>等伐<河北(今通河木葫巴彦以北地)><鞨>平之,以其地爲<湯西(鐵驪界)>< 質山(綏化界)>二郡,樹木塹. <天獐鹿>無盡,乃鍊兵而 之. 畜神馬五十匹於<石河(七虎力河)>. <漢京房>,以易進<石顯>,殺之.
◎2년(단기2298년/BC36)을유, 정월, <황룡>의 말 3천필을 징발하여 <중천(납림하)>에서 훈련하였는데, <양길>이 걱정하다 놀라서 죽었다. <한나국(길림)>여왕 <계루>가 항복하여 왔기에, 부인으로 삼아 거두었다. 4월, <소>후가 아들 <비류>를 낳았는데, (비류의) 사람됨은 다정하나 나약하였다. 6월, <송양>이 (1)懸鹿漂都하여(줄로 매어놓은 사슴들과 도읍이 홍수로 물에 뜨거나 유실되어 빈털털이가 되어), 나라를 통째로 바쳐왔기에,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모수지지야). 7월, <황룡>의 남자 3천명을 군사로 만들고, **여자 5천명을 하인으로 삼았으며, 야공 3십 곳을 두어** 병선 2백 척을 만들었다. 5월, <오이> 등으로 하여금 <하북(금통하목호파언이북지)>의 <갈(鞨)>을 평정하여, 그 땅에 <탕서(철려계)>와 <질산(수화계)> 2개의 군을 두고, 참호에는 나무를 심었다. 사슴과 노루가 한없이 많아서, 군사훈련도 겸하여 사냥하였다. <석하(칠호력하)>에서 신마 50필을 길렀다. <한경방>이 깔보고 <석현>으로 오기에, 그를 죽여버렸다.
◎三年丙戌,三月,二龍見于<골嶺(□湖□)>,相都未營. 十月,**祀隧,群鳩播麥于神田.** <桂婁>生子<高婁>,爲人尙義忠孝,陛爲小后. 十二月,<寶得(黃龍主)>女<禾>爲妃. 召<朝天>于<河>濱不來.
◎3년(단기2299년/BC35)병술, 3월, 용 두마리가 <골령(□호□)>에 나타나 도읍할 자리를 살폈는데 눌러앉지는 않았다.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였더니, 비둘기떼가 신전(神田)에 파종하였다.** <계루>부인이 아들 <고루>를 낳았는데, 사람됨이 의, 충, 효를 귀하게 여기기에, 소후로 올려 주었다. 12월, <보득(황룡주)>의 딸 <화>를 비로 삼았다. <조천>을 <하>수 가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逐于水(黑龍江)外.**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富錦)>. 七月,宮室成,茅茨土階. 九月,<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4년(단기2300년/BC34)정해, 정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에 있는 <갈(鞨)>의 10부락을 정벌하여 (이들을) 물줄기(흑룡강) 밖으로 몰아냈다.** <낙랑>주와 함께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7월, 흙계단 위에 궁실을 띠풀로 지붕을 이어 지었다. 9월, <화>비가 아들 <을두지>를 낳았다. <시길>의 딸 <시화>를 <협보>의 처로 삼았다.
◎五年戊子,正月,<召>后生子<溫祚>,爲人英偉有智. 上曰: "此眞吾子也. <沸流>猶汝而溫順, 此子猶我而豪爽." 后笑曰: "皆汝出也,何有眞乎." 設<漢舘>,以敎民. 幸<羅淵>拿<荇>騎探其虛實.
◎5년(단기2301년/BC33)무자, 정월, <소>후가 아들 <온조>를 낳았는데, (온조의) 사람됨은 뛰어나게 듬직하고 지혜로왔다. **상이 이르길; "이 아이는 진짜 내(내가 원하던 품성의) 아들이오 <비류>는 당신(소서노)을 닮아 온순하고, 이 아이는 나를 닮아 호탕하고 시원시원하여 보이오."라 하니,** <소>후가 답하길; "둘 모두 당신(추모) 자식입니다. 어찌 진짜 가짜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관(한문자 등을 가르치는 학교)>을 두어 백성들을 가르쳤다. <라연>에 행차하여 <행인국>의 말 타는이를 붙잡아 그 나라의 허실을 살폈다.
◎六年乙丑,正月,<桂>后生女<曼>. 五月,幸<質陽(通江)><沿滸( 蘭河)><作沾>,而功<朝天>,遁于<北棘(克山)>. 七月,<芬奴>定<荇南(蘭西肇□安達等地)>進駐<滸原(□通□)><天>都也. <黃龍>修文而 酒,<荇人>好仙而荒淫. 十月,拔<北棘>. <天>走<海山(仙人山)>,以<荇人國>爲<荇東><荇西><荇南>三郡
◎6년(단기2302년/BC32)을축, 정월, <계>후가 딸 <만>을 낳았다. 5월, <질양(통강)><연호(호란하)><작첨>에 행차하여 <조천>을 치니, <북극(극산)>으로 피하여 숨어들었다. 7월, <분노>가 <행남(난서조□안달등지)>을 평정하고 <호원(□通□)>에 있는 <(조)천>의 도읍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황룡>은 '문(학문?)'을 하는데 흐린 술을 마시며, <행인>은 '선'을 즐겨하나 황음하였다. 10월, <북극>을 쳐서 멸하였다. <(조)천>이 <해산(선인산)>으로 달아나, <행인국>을 <행동>, <행서>, <행남>의 세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七年庚寅,三月,定官秩. 一品公(三輔)紫袖金花銀魚, 二品大卿(主兵刑民宮穀)紫衫金花銀魚, 三品小卿(大注簿,大將軍,大使者,大對盧)紫衫銀花銅魚, 四品上大夫(于台,沛者,將軍,大仙人,大評者)緋衫銀花銅魚, 五品中大夫(都尉,仙人,使者,評者)同而雉花等. 四月,勸農. 八月,虜<句茶(海龍王)><閃尼(女主)>. 十月,親行隧祭(祭天),置郊豕神鹿. 十月,<桂>皇后以創毒崩,上慟哀之,作吾妻曲. 后能騎射,<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珠河)>. 子<高婁><曼>公主皆賢. 是年,<召>后始養蠶得絹綴織之以爲帝依.
◎7년(단기2303년/BC31)경인, 3월, 관등의 체계를 바로잡았다. 1품인 공(삼보)은 자주색 소매 옷에 금화 머리장식과 은어 허리장식을 하고, 2품인 대경(주병형민궁곡)은 자주색 적삼에 금화와 은어 패식을, 3품인 소경(대주부,대장군,대사자,대대로) 자주색 적삼에 은화와 동어 패식을, 4품인 상대부(우태,패자,장군,대선인,대평자)는 비색 적삼에 은화와 동어 패식을, 5품인 중대부(도위,선인,사자,평자)는 4품과 같으나 (은화 대신) 꿩깃 등을 머리에 꽂았다. 4월, 농사를 장려하였다. 8월, <구다(해룡왕)>와 <섬니(여주)>를 사로잡았다. 10월, 친히 동굴무덤에 제사하였는데, 돼지와 사슴을 제물로 하였다. 10월, <계>황후가 상처가 썪어 죽으니. 상은 이를 애통해 하였고, '오처곡'을 지었다. 황후는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기에, <행인>및 <구다>와 전쟁할 때 어가를 뒤에서 호위하여 공을 세우다가 <황산>에서 흘러가는 화살에 맞았었다. 춘추 32세였으며, <진주산(주하)>에 장사하였다. 아들 <고루>와 <만>공주 둘 다 (사람됨이) 어질었다. 이해에 <소>후는 누에치기를 시작하여 실을 뽑아 천을 짜서 황제의 옷을 만들었다.
◎八年辛卯,正月,沿<黑水(黑龍江)>立亭. <黃龍>主<寶得>殂, <于仁>(從弟)立. 八月,<卑離(西扶餘)><紫蒙(□□)>來貢. 十月,不豫簡政.
◎8년(단기2304년/BC30)신묘, 정월, <흑수(흑룡강)>가에 정자를 세웠다. <황룡>주 <보득>이 죽어, <우인(종제)>이 섰다. 8월, <비리(서부여)>의 <자몽(□□)>이 와서 조공하였다. 10월,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워(상이 위독하거나 하여) 정사를 간략히 하였다.**
◎九年,壬辰,五月,<柵城>巫來. <類利>彈雀. 十月,<烏伊>等伐<北沃沮(□太人自治州)>破十二部落. <召>后生<馬>公主, 問<禮>后事.
◎9년(단기2305년/BC29)임진, 5월, <책성>의 무당이 왔다. <유리>가 참새를 쏘았다. 10월, <오이>등이 <북옥저(□태인자치주)>를 정벌하여 12부락을 깼다. <소>후가 <마>공주를 낳고, <예>후의 일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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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癸巳,二月,營<石(阿城)>于<鴨水(阿什)>以<質朴>爲主. 九月,白鸞來集<石>王臺,故名之曰<鸞臺>. 上與<召>皇后居之. 十一月,<尉厭(芬奴弟)><馬黎>< 狗>等伐<北沃沮>拓地千餘里,以其生口八萬,置於<杜訥原(伯都訥之西北)>之西,名曰<梁貊谷( 南大□開通之間)>.
◎10년(단기2306년/BC28)계사, 2월, <압수(아십)>에 <서도(아성)>를 세우고 <질박>이 다스리게 하였다. 9월, 흰색의 란새들이 날라와서 <서도>의 왕대에 모였기에, <란대>라 이름하였다. 상과 <소>황후가 이곳에 기거하였다. 11월, <위염(분노제)>, <마리>, <어구> 등이 <북옥저>를 정벌하여 땅을 천여리 넓히고, 그곳의 백성 8만을 <두눌원(백도눌지서북)>의 서쪽 땅에서 살게 하고, <양맥곡>이라 이름하였다.
◎十一年甲午,五月,幸<梁貊谷>,遇<卑離>主<素奴>相見,以其不敬,拿來<東都>. <松讓>妄稱<北扶余>之仙宗, <素奴>妄稱嫡孫拒垠其谷,故伐之. 八月,<烏伊>拔<不而城( 南)>,徙其大姓於<湯東>,以<烏伊>爲其假王. 十二月,<烏干(烏伊弟)>,<馬黎>等伐<長岺(長岺)><高顯(□柳)>,痢氣軍多傷.
◎11년(단기2307년/BC27)갑오, 5월, <양맥곡>으로 행차하다가 <비리>주 <소노>와 마주쳤는데, 그가 불경스러워 <동도>로 잡아왔다. <송양>은 <북부여>의 선종이라 망칭하고, <소노>는 그 (양맥)곡의 안쪽 끝에 (숨어)있으면서 (부여의) 적손을 망칭하였기에, 이들을 정벌하였다. 8월, <오이>가 <불이성(조남)>을 쳐서, 그곳의 대성씨들을 <탕동>으로 옮겼는데, <오이>를 그곳의 가왕으로 삼았다. 12월, <오간(오이제)>과 <마리> 등이 <장령>과 <고현(□류)을 쳤는데, 독기운 때문에 군사 중에 상한 이가 많았다.
◎十二年乙未,正月,親至<長岺>觸氣而還. 七月,親征<西河(長春)>拔之,本<黃龍>地,與<長岺>共反者也. 使<尉厭>守之, 幷伐<長岺>. 九月,<禾>妃生<羊>太子,爲小后. 十月,<摩離>拔<海山>虜<朝天>. 上謂<天>曰: "<黃龍>文而淫,汝國仙而淫. 文仙皆好道,過卽敗食色,皆好道,過卽傷, 汝知之乎." <天>卬頭請命,命居<湖>上養氣.
◎12년(단기2308년/BC26)을미, 정월, 친히 <장령>에 이르렀다가 (독)기운을 느끼고는 돌아왔다. 7월, <서하>를 친정하여 멸하였는데, 본래 <황룡>의 땅이었고, <장령>과 함께 반란한 적이 있다. <위염>을 시켜 <서하>를 지키게 하고는, <장령>도 정벌하였다. 9월, <화>비가 <양>태자를 낳았고, 소후가 되었다. 10월, <마리>가 <해산>을 쳐서 <조천>을 사로잡았다. 상이 <천>에게 이르길: "<황룡>은 학문하나 음란하고, 너의 나라는 선을 하나 음란하다. 문(文)과 선(仙)은 모두 도(道)를 즐기는 것이나, 지나치면 먹고 탐하지도 못하게 된다. 둘 다 도를 즐기나, 지나치면 상하는 법인 것을 그대는 아는가?" 하니, <천>은 머리를 숙이고 처분만 바랐고, 상은 <조천>에게 "<호>상에 살면서 기운을 북돋우라."고 하였다.
◎十三年丙申,二月,<烏伊>拔<高顯>. 五月, <尉厭>拔<南口(遼原)>,以<乙音>爲<玄토>太守,以營<南口>. <音>,<召>皇后外兄也. 納造船大加<漢素>女<平>氏爲夫人. 九月,播麥于<西河>,與<平>氏如<溫湯(九臺)>. 十月, 于<頭訥原>,置鯉宅十 (養鯉之沼兼造器故以寫鯉宅). <召>后實諸妃公主習□.
◎13년(단기2309년/BC25)병신, 2월, <오이>가 <고현>을 뿌리뽑았다. 5월, <위염>이 <남구>를 뿌리뽑고, <을음>을 <현토>태수로 삼아 <남구>에 머물게 하였다. <음>은 <소>황후의 외가(이종) 오라비였다. 조선대가 <한소>의 딸을 받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9월, <서하>에 보리를 파종하고, <평>씨와 함께 <온탕(구대)>에 갔다. 10월, <두눌원>에서 사냥하고, 잉어를 기르는 집(양리지소겸조기고이사리택) 열을 두었다. <소>후는 모든 비와 공주들에게 ∼를 가르쳤다.
◎十四年丁酉,二月,<朝天><荇南>沛者. 八月,<柳花>太后崩,于<柵城>,擧哀于<東都>. 遣<仇都><松義>吊賻作像立聖母神廟于<南岺(龍瓜 岺)>.
◎14년(단기2310년/BC24)정유, 2월, <조천>을 <행남>패자로 삼았다. 8월, <유화>태후가 <책성>에서 죽어, <동도>에서 애도하였으며, <구도>와 <송의>를 보내 조문하고 재물을 내어 상을 만들고 성모신묘를 <남령(용과혼령)>에 세우게 했다.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而<馬黎>敎<溫祚>,上與<召>后,時往聽之.
◎15년(단기2311년/BC23)무술, 5월, 동쪽으로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고, 배타고(?) <시길>에게 가서 그의 딸 <작>을 받았다. 8월, 신마 2천필을 둘러보았으며, <마리>에게 <온조>를 가르치라 하였었는데, 이때 상은 <소>후와 함께 가서 (온조의 교육상황이 어떠한 지를) 들었다.
◎十六年己亥,正月,多勿候<松讓>薨. <平>氏生女<漢>.
◎16년(단기2312년/BC22)기해, 정월, 다물후<송양>이 죽었다. <평>씨가 딸 <한>을 낳았다.
◎十七年庚午,八月,行聖母祭. <解素(柳花□生金蛙子)>送<禮>后及<類利>.
◎17년(단기2313년/BC21)경오, 8월, 성모제를 지냈다. <해소(유화□생금와자)>가 <예>후와 <유리>를 보내주었다.
◎十八年辛丑,五月,御馬<巨婁>死. 六月,<禾>后崩. 春秋三十三,葬于<桂>后塚西. 十月,上與<禮>后<類利>謁<神隧>. <召>皇后退居<牛壤(桂樓北)>.
◎18년(단기2314년/BC20)신축, 5월, 어마인 <거루>가 죽었다. 6월, <화>후가 죽었다. 나이 33세이었고, <계>후 무덤의 서쪽에 장사했다. 10월, 상은 <예>후 및 <유리>와 함께 신성한 동굴무덤을 찾아뵈었다. <소>황후가 거처를 <우양(계루북)>으로 하여 물러나왔다.
◎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東宮. 二月,<鵲>氏生<鵲>太子. 四月,上崩於石,東宮卽位. 「仙記」曰:"上不樂居位,傳인璽于東宮." 九月,乘龍上天遺棄玉鞭處爲龍山陵. <禮>后生女<再思>.
◎19년(단기2315년/BC19)임인,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2월, <작>씨가 <작>태자를 낳았다. 4월, 상이 서도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에는: "상은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다."라 쓰여 있다. 9월, 용이 하늘로 올라가며 옥채찍을 버려놓은 곳이 <용산릉>이 되었다.
◎論曰:"<東明>以不世出之英主,年未四十,席卷東土,開七百年之基.可謂聖矣.後之<阿骨打><思必烈>亦有□不及處矣,但其尙屬未開之. 初,后妃之制未□,胎弊於後. 急於創業,未克其壽惜矣.
◎찬자가 평하기를: "<동명>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나이 40이전에 동쪽 땅을 석권하여 700년이나 가는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성인이라 할 만하다. 후세에 나타난 <아골타>나 <사필렬>도 역시 부끄럽게도 미치지 못할 곳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다. 초기에 후와 비 관련 제도를 완비하지 못하여, 이것이 후에 폐단(일찍 죽었음)이 있었다.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 급하였기에,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폐단)이 애석하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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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능한한 다듬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남당 박창화 선생"께서 "고구리"관련 역사를 정리(?)하시어 필사하여 놓으신 내용을 초벌 번역한 것입니다.
저 나름대로 끊어읽기를 하였읍니다만, 잘 못된 곳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PDF 자료의 선명도 문제와 약자(?)인 듯한 글자를 제가 충분히 해독하지 못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금후에는 글자가 희미한 것은 제 아들녀석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미 읽어보셨거나 관심 있으신 선생님들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문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천학인 제가 감히 도전한 일에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15세 미천대제기"까지 일별한 개인적 소견으로는 ;
아직 생소한 내용들도 많고, 지명의 위치 비정 등에 있어서는
(건방지다 할 수 있겠지만, 추가적인 확인이 있기 전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앞서서 <평양변>과 <요동론>을 일별하였는데,
기원 전후의 세칭 우리의 삼국 <요동>에 대하여는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보셨으나,
이후의 시기에 대하여는 <일본>에 오래 계신 영향이었는지 의아하기도 합니다.
지명비정에 있어서는 <구자일>씨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남당 박창화 선생"께서 하여 놓으신 비정한 지명의 현재의 위치보다는
자료빈곤에 어려움이 많았던 우리에게 추가적인 사실(史實)을 얻어서 남겨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명비정 문제는 현세의 과학적인 방법 등으로 보완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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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스스로도 어려워서 도움을 기대했던 부분을, 좌계, 정성일, 백송 선생님 등의 도움이 있으셔서,
좀 더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었기에 재차 정정된 것으로 바꾸어 올려놓겟읍니다.
함께 다듬어 주시면 계속적으로 정정토록 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2007/05/03-
<남당 박창화> 선생 찬술
<高句麗>史抄
<高句麗>史略卷之一
始祖<芻牟大帝>紀
◎辛巳,夏,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南來乘玄武(方丈大龜)而至<普述(穆陵河口)>,與三賢(再思,武骨,默居)逐虎攘< 鞨>以開<順奴>. 是年,<禮>后生<光明>. 壬午春,與<樂浪><卒本>定界. 秋,納<召西奴>爲妃.
◎신사년(단기2294년/BC40) 여름, 네 명의 호걸(오이,마리,협보,분노)과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현무(크기가 한 길이 되는 거북)를 타고 <보술(목릉하구)>(수)에 이르고, 세 명의 현자(재사,무골,묵거)와 함께 호랑이와 <갈(鞨)>을 쫓아내고 <순노(口서한口)>(부)를 열었다. 이 해에 <예>후가 <광명>을 낳았다.
임오년(단기2295년/BC39) 봄, <낙랑>및 <졸본>과 (경)계를 정하고, 가을엔 <소서노>를 비로 삼았다.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二月,<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順奴>. <卒本>之民推上,爲皇帝,卽位於<沸流谷><西城山(勃利縣二龍山)>. 國號<高句麗>,建元曰<東明>. 命<漢素>造船,<鄭共>製兵,<馬黎>畜馬(皆漢人也). <末曷>大擧入寇,上親征斬首千級. 五月,訪<松讓>于<沸流(□原□□沸流谷□)>,以德義曉之,妄稱仙族而不屈,遂奪其珍寶妻子而來. 七月,<松讓>入寇,破之,虜獲二千口,約貢而示縱. 八月,鍊于<汗(□□)>濱,歸者二千余人. 十月,祀隧祭豊,<扶餘>鳩含麥而來. 十一月,與<黃龍>定界,割<箕丘(老岺)>印. <羊吉>以女妻<烏伊>,徵其民以築<眞珠城>.
◎<동명>원년(단기2297년/BC37), 2월, <졸본>왕 <연타발>이 죽었다. <소서노>가 나라를 <순노>에 바쳤고, <졸본>사람들이 상을 받들어 황제로 모시니, <비류곡><서성산(발이현이룡산)>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은 <고구리>이고, 연호는 <동명>이다. <한소>에게는 배를 만들게 하고, <정공>에게는 병장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마리>에게는 말을 기르게 하였다(개한인야). <말갈(末曷)>이 대거 들어와 노략질 하니, 상이 친히 정벌하여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5월, <비류(□원□□비류곡□)>로 <송양>을 찾아가서, 베푸는 뜻으로 타이르니, 자기들은 선족(仙族)이라 참칭하며 굽히지 않기에, 처자와 진보(珍寶)를 빼앗아 돌아왔다. 7월, <송양>이 쳐들어와 노략질하기에 격파하여 2천명을 사로잡았더니, (조)공하고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8월, <한(汗)>수 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훈련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2천여명이었다.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여 **풍년을 빌었더니,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종자)를 물어왔다.** 11월, <황룡>과 경계를 정하였는데, <기구(노령)>의 동쪽을 차지하였다. <양길>의 딸을 <오이>의 처로 삼았고, 그의 백성을 징발하여 <진주성>을 쌓았다.
◎二年,乙酉,正月,徵<黃龍>馬三千匹,鍊于<中川(拉林河)>,<羊吉>憂惧死. 二月,<桓那國(吉林)>女主<桂婁>來降,納爲夫人. 四月,<召>后生子<沸流>,爲人多情而懦弱. 六月,<松讓>,懸鹿漂都,以國來獻,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慕漱之地也). 七月,<黃龍>男三千爲軍,**女五(千)爲婢,冶工三十(所)**兵船二百成. 八月,<烏伊>等伐<河北(今通河木葫巴彦以北地)><鞨>平之,以其地爲<湯西(鐵驪界)>< 質山(綏化界)>二郡,樹木塹. <天獐鹿>無盡,乃鍊兵而 之. 畜神馬五十匹於<石河(七虎力河)>. <漢京房>,以易進<石顯>,殺之.
◎2년(단기2298년/BC36)을유, 정월, <황룡>의 말 3천필을 징발하여 <중천(납림하)>에서 훈련하였는데, <양길>이 걱정하다 놀라서 죽었다. <한나국(길림)>여왕 <계루>가 항복하여 왔기에, 부인으로 삼아 거두었다. 4월, <소>후가 아들 <비류>를 낳았는데, (비류의) 사람됨은 다정하나 나약하였다. 6월, <송양>이 (1)懸鹿漂都하여(줄로 매어놓은 사슴들과 도읍이 홍수로 물에 뜨거나 유실되어 빈털털이가 되어), 나라를 통째로 바쳐왔기에,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모수지지야). 7월, <황룡>의 남자 3천명을 군사로 만들고, **여자 5천명을 하인으로 삼았으며, 야공 3십 곳을 두어** 병선 2백 척을 만들었다. 5월, <오이> 등으로 하여금 <하북(금통하목호파언이북지)>의 <갈(鞨)>을 평정하여, 그 땅에 <탕서(철려계)>와 <질산(수화계)> 2개의 군을 두고, 참호에는 나무를 심었다. 사슴과 노루가 한없이 많아서, 군사훈련도 겸하여 사냥하였다. <석하(칠호력하)>에서 신마 50필을 길렀다. <한경방>이 깔보고 <석현>으로 오기에, 그를 죽여버렸다.
◎三年丙戌,三月,二龍見于<골嶺(□湖□)>,相都未營. 十月,**祀隧,群鳩播麥于神田.** <桂婁>生子<高婁>,爲人尙義忠孝,陛爲小后. 十二月,<寶得(黃龍主)>女<禾>爲妃. 召<朝天>于<河>濱不來.
◎3년(단기2299년/BC35)병술, 3월, 용 두마리가 <골령(□호□)>에 나타나 도읍할 자리를 살폈는데 눌러앉지는 않았다.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였더니, 비둘기떼가 신전(神田)에 파종하였다.** <계루>부인이 아들 <고루>를 낳았는데, 사람됨이 의, 충, 효를 귀하게 여기기에, 소후로 올려 주었다. 12월, <보득(황룡주)>의 딸 <화>를 비로 삼았다. <조천>을 <하>수 가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逐于水(黑龍江)外.**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富錦)>. 七月,宮室成,茅茨土階. 九月,<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4년(단기2300년/BC34)정해, 정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에 있는 <갈(鞨)>의 10부락을 정벌하여 (이들을) 물줄기(흑룡강) 밖으로 몰아냈다.** <낙랑>주와 함께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7월, 흙계단 위에 궁실을 띠풀로 지붕을 이어 지었다. 9월, <화>비가 아들 <을두지>를 낳았다. <시길>의 딸 <시화>를 <협보>의 처로 삼았다.
◎五年戊子,正月,<召>后生子<溫祚>,爲人英偉有智. 上曰: "此眞吾子也. <沸流>猶汝而溫順, 此子猶我而豪爽." 后笑曰: "皆汝出也,何有眞乎." 設<漢舘>,以敎民. 幸<羅淵>拿<荇>騎探其虛實.
◎5년(단기2301년/BC33)무자, 정월, <소>후가 아들 <온조>를 낳았는데, (온조의) 사람됨은 뛰어나게 듬직하고 지혜로왔다. **상이 이르길; "이 아이는 진짜 내(내가 원하던 품성의) 아들이오 <비류>는 당신(소서노)을 닮아 온순하고, 이 아이는 나를 닮아 호탕하고 시원시원하여 보이오."라 하니,** <소>후가 답하길; "둘 모두 당신(추모) 자식입니다. 어찌 진짜 가짜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관(한문자 등을 가르치는 학교)>을 두어 백성들을 가르쳤다. <라연>에 행차하여 <행인국>의 말 타는이를 붙잡아 그 나라의 허실을 살폈다.
◎六年乙丑,正月,<桂>后生女<曼>. 五月,幸<質陽(通江)><沿滸( 蘭河)><作沾>,而功<朝天>,遁于<北棘(克山)>. 七月,<芬奴>定<荇南(蘭西肇□安達等地)>進駐<滸原(□通□)><天>都也. <黃龍>修文而 酒,<荇人>好仙而荒淫. 十月,拔<北棘>. <天>走<海山(仙人山)>,以<荇人國>爲<荇東><荇西><荇南>三郡
◎6년(단기2302년/BC32)을축, 정월, <계>후가 딸 <만>을 낳았다. 5월, <질양(통강)><연호(호란하)><작첨>에 행차하여 <조천>을 치니, <북극(극산)>으로 피하여 숨어들었다. 7월, <분노>가 <행남(난서조□안달등지)>을 평정하고 <호원(□通□)>에 있는 <(조)천>의 도읍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황룡>은 '문(학문?)'을 하는데 흐린 술을 마시며, <행인>은 '선'을 즐겨하나 황음하였다. 10월, <북극>을 쳐서 멸하였다. <(조)천>이 <해산(선인산)>으로 달아나, <행인국>을 <행동>, <행서>, <행남>의 세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七年庚寅,三月,定官秩. 一品公(三輔)紫袖金花銀魚, 二品大卿(主兵刑民宮穀)紫衫金花銀魚, 三品小卿(大注簿,大將軍,大使者,大對盧)紫衫銀花銅魚, 四品上大夫(于台,沛者,將軍,大仙人,大評者)緋衫銀花銅魚, 五品中大夫(都尉,仙人,使者,評者)同而雉花等. 四月,勸農. 八月,虜<句茶(海龍王)><閃尼(女主)>. 十月,親行隧祭(祭天),置郊豕神鹿. 十月,<桂>皇后以創毒崩,上慟哀之,作吾妻曲. 后能騎射,<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珠河)>. 子<高婁><曼>公主皆賢. 是年,<召>后始養蠶得絹綴織之以爲帝依.
◎7년(단기2303년/BC31)경인, 3월, 관등의 체계를 바로잡았다. 1품인 공(삼보)은 자주색 소매 옷에 금화 머리장식과 은어 허리장식을 하고, 2품인 대경(주병형민궁곡)은 자주색 적삼에 금화와 은어 패식을, 3품인 소경(대주부,대장군,대사자,대대로) 자주색 적삼에 은화와 동어 패식을, 4품인 상대부(우태,패자,장군,대선인,대평자)는 비색 적삼에 은화와 동어 패식을, 5품인 중대부(도위,선인,사자,평자)는 4품과 같으나 (은화 대신) 꿩깃 등을 머리에 꽂았다. 4월, 농사를 장려하였다. 8월, <구다(해룡왕)>와 <섬니(여주)>를 사로잡았다. 10월, 친히 동굴무덤에 제사하였는데, 돼지와 사슴을 제물로 하였다. 10월, <계>황후가 상처가 썪어 죽으니. 상은 이를 애통해 하였고, '오처곡'을 지었다. 황후는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기에, <행인>및 <구다>와 전쟁할 때 어가를 뒤에서 호위하여 공을 세우다가 <황산>에서 흘러가는 화살에 맞았었다. 춘추 32세였으며, <진주산(주하)>에 장사하였다. 아들 <고루>와 <만>공주 둘 다 (사람됨이) 어질었다. 이해에 <소>후는 누에치기를 시작하여 실을 뽑아 천을 짜서 황제의 옷을 만들었다.
◎八年辛卯,正月,沿<黑水(黑龍江)>立亭. <黃龍>主<寶得>殂, <于仁>(從弟)立. 八月,<卑離(西扶餘)><紫蒙(□□)>來貢. 十月,不豫簡政.
◎8년(단기2304년/BC30)신묘, 정월, <흑수(흑룡강)>가에 정자를 세웠다. <황룡>주 <보득>이 죽어, <우인(종제)>이 섰다. 8월, <비리(서부여)>의 <자몽(□□)>이 와서 조공하였다. 10월,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워(상이 위독하거나 하여) 정사를 간략히 하였다.**
◎九年,壬辰,五月,<柵城>巫來. <類利>彈雀. 十月,<烏伊>等伐<北沃沮(□太人自治州)>破十二部落. <召>后生<馬>公主, 問<禮>后事.
◎9년(단기2305년/BC29)임진, 5월, <책성>의 무당이 왔다. <유리>가 참새를 쏘았다. 10월, <오이>등이 <북옥저(□태인자치주)>를 정벌하여 12부락을 깼다. <소>후가 <마>공주를 낳고, <예>후의 일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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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癸巳,二月,營<石(阿城)>于<鴨水(阿什)>以<質朴>爲主. 九月,白鸞來集<石>王臺,故名之曰<鸞臺>. 上與<召>皇后居之. 十一月,<尉厭(芬奴弟)><馬黎>< 狗>等伐<北沃沮>拓地千餘里,以其生口八萬,置於<杜訥原(伯都訥之西北)>之西,名曰<梁貊谷( 南大□開通之間)>.
◎10년(단기2306년/BC28)계사, 2월, <압수(아십)>에 <서도(아성)>를 세우고 <질박>이 다스리게 하였다. 9월, 흰색의 란새들이 날라와서 <서도>의 왕대에 모였기에, <란대>라 이름하였다. 상과 <소>황후가 이곳에 기거하였다. 11월, <위염(분노제)>, <마리>, <어구> 등이 <북옥저>를 정벌하여 땅을 천여리 넓히고, 그곳의 백성 8만을 <두눌원(백도눌지서북)>의 서쪽 땅에서 살게 하고, <양맥곡>이라 이름하였다.
◎十一年甲午,五月,幸<梁貊谷>,遇<卑離>主<素奴>相見,以其不敬,拿來<東都>. <松讓>妄稱<北扶余>之仙宗, <素奴>妄稱嫡孫拒垠其谷,故伐之. 八月,<烏伊>拔<不而城( 南)>,徙其大姓於<湯東>,以<烏伊>爲其假王. 十二月,<烏干(烏伊弟)>,<馬黎>等伐<長岺(長岺)><高顯(□柳)>,痢氣軍多傷.
◎11년(단기2307년/BC27)갑오, 5월, <양맥곡>으로 행차하다가 <비리>주 <소노>와 마주쳤는데, 그가 불경스러워 <동도>로 잡아왔다. <송양>은 <북부여>의 선종이라 망칭하고, <소노>는 그 (양맥)곡의 안쪽 끝에 (숨어)있으면서 (부여의) 적손을 망칭하였기에, 이들을 정벌하였다. 8월, <오이>가 <불이성(조남)>을 쳐서, 그곳의 대성씨들을 <탕동>으로 옮겼는데, <오이>를 그곳의 가왕으로 삼았다. 12월, <오간(오이제)>과 <마리> 등이 <장령>과 <고현(□류)을 쳤는데, 독기운 때문에 군사 중에 상한 이가 많았다.
◎十二年乙未,正月,親至<長岺>觸氣而還. 七月,親征<西河(長春)>拔之,本<黃龍>地,與<長岺>共反者也. 使<尉厭>守之, 幷伐<長岺>. 九月,<禾>妃生<羊>太子,爲小后. 十月,<摩離>拔<海山>虜<朝天>. 上謂<天>曰: "<黃龍>文而淫,汝國仙而淫. 文仙皆好道,過卽敗食色,皆好道,過卽傷, 汝知之乎." <天>卬頭請命,命居<湖>上養氣.
◎12년(단기2308년/BC26)을미, 정월, 친히 <장령>에 이르렀다가 (독)기운을 느끼고는 돌아왔다. 7월, <서하>를 친정하여 멸하였는데, 본래 <황룡>의 땅이었고, <장령>과 함께 반란한 적이 있다. <위염>을 시켜 <서하>를 지키게 하고는, <장령>도 정벌하였다. 9월, <화>비가 <양>태자를 낳았고, 소후가 되었다. 10월, <마리>가 <해산>을 쳐서 <조천>을 사로잡았다. 상이 <천>에게 이르길: "<황룡>은 학문하나 음란하고, 너의 나라는 선을 하나 음란하다. 문(文)과 선(仙)은 모두 도(道)를 즐기는 것이나, 지나치면 먹고 탐하지도 못하게 된다. 둘 다 도를 즐기나, 지나치면 상하는 법인 것을 그대는 아는가?" 하니, <천>은 머리를 숙이고 처분만 바랐고, 상은 <조천>에게 "<호>상에 살면서 기운을 북돋우라."고 하였다.
◎十三年丙申,二月,<烏伊>拔<高顯>. 五月, <尉厭>拔<南口(遼原)>,以<乙音>爲<玄토>太守,以營<南口>. <音>,<召>皇后外兄也. 納造船大加<漢素>女<平>氏爲夫人. 九月,播麥于<西河>,與<平>氏如<溫湯(九臺)>. 十月, 于<頭訥原>,置鯉宅十 (養鯉之沼兼造器故以寫鯉宅). <召>后實諸妃公主習□.
◎13년(단기2309년/BC25)병신, 2월, <오이>가 <고현>을 뿌리뽑았다. 5월, <위염>이 <남구>를 뿌리뽑고, <을음>을 <현토>태수로 삼아 <남구>에 머물게 하였다. <음>은 <소>황후의 외가(이종) 오라비였다. 조선대가 <한소>의 딸을 받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9월, <서하>에 보리를 파종하고, <평>씨와 함께 <온탕(구대)>에 갔다. 10월, <두눌원>에서 사냥하고, 잉어를 기르는 집(양리지소겸조기고이사리택) 열을 두었다. <소>후는 모든 비와 공주들에게 ∼를 가르쳤다.
◎十四年丁酉,二月,<朝天><荇南>沛者. 八月,<柳花>太后崩,于<柵城>,擧哀于<東都>. 遣<仇都><松義>吊賻作像立聖母神廟于<南岺(龍瓜 岺)>.
◎14년(단기2310년/BC24)정유, 2월, <조천>을 <행남>패자로 삼았다. 8월, <유화>태후가 <책성>에서 죽어, <동도>에서 애도하였으며, <구도>와 <송의>를 보내 조문하고 재물을 내어 상을 만들고 성모신묘를 <남령(용과혼령)>에 세우게 했다.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而<馬黎>敎<溫祚>,上與<召>后,時往聽之.
◎15년(단기2311년/BC23)무술, 5월, 동쪽으로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고, 배타고(?) <시길>에게 가서 그의 딸 <작>을 받았다. 8월, 신마 2천필을 둘러보았으며, <마리>에게 <온조>를 가르치라 하였었는데, 이때 상은 <소>후와 함께 가서 (온조의 교육상황이 어떠한 지를) 들었다.
◎十六年己亥,正月,多勿候<松讓>薨. <平>氏生女<漢>.
◎16년(단기2312년/BC22)기해, 정월, 다물후<송양>이 죽었다. <평>씨가 딸 <한>을 낳았다.
◎十七年庚午,八月,行聖母祭. <解素(柳花□生金蛙子)>送<禮>后及<類利>.
◎17년(단기2313년/BC21)경오, 8월, 성모제를 지냈다. <해소(유화□생금와자)>가 <예>후와 <유리>를 보내주었다.
◎十八年辛丑,五月,御馬<巨婁>死. 六月,<禾>后崩. 春秋三十三,葬于<桂>后塚西. 十月,上與<禮>后<類利>謁<神隧>. <召>皇后退居<牛壤(桂樓北)>.
◎18년(단기2314년/BC20)신축, 5월, 어마인 <거루>가 죽었다. 6월, <화>후가 죽었다. 나이 33세이었고, <계>후 무덤의 서쪽에 장사했다. 10월, 상은 <예>후 및 <유리>와 함께 신성한 동굴무덤을 찾아뵈었다. <소>황후가 거처를 <우양(계루북)>으로 하여 물러나왔다.
◎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東宮. 二月,<鵲>氏生<鵲>太子. 四月,上崩於石,東宮卽位. 「仙記」曰:"上不樂居位,傳인璽于東宮." 九月,乘龍上天遺棄玉鞭處爲龍山陵. <禮>后生女<再思>.
◎19년(단기2315년/BC19)임인,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2월, <작>씨가 <작>태자를 낳았다. 4월, 상이 서도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에는: "상은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다."라 쓰여 있다. 9월, 용이 하늘로 올라가며 옥채찍을 버려놓은 곳이 <용산릉>이 되었다.
◎論曰:"<東明>以不世出之英主,年未四十,席卷東土,開七百年之基.可謂聖矣.後之<阿骨打><思必烈>亦有□不及處矣,但其尙屬未開之. 初,后妃之制未□,胎弊於後. 急於創業,未克其壽惜矣.
◎찬자가 평하기를: "<동명>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나이 40이전에 동쪽 땅을 석권하여 700년이나 가는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성인이라 할 만하다. 후세에 나타난 <아골타>나 <사필렬>도 역시 부끄럽게도 미치지 못할 곳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다. 초기에 후와 비 관련 제도를 완비하지 못하여, 이것이 후에 폐단(일찍 죽었음)이 있었다.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 급하였기에,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폐단)이 애석하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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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능한한 다듬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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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황후가 2남1녀을 두었군요.....! 고구려비사를 보면 비류를 고추모태왕과 결혼하여 2년 후에 비류를 낳았는데 고추모태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음 추모태왕과 소서노황후가 결혼 후 5년 뒤에 온조를 낳았는데 ◎5년(단기2301년/BC33)무자, 정월, <소>후가 아들 <온조>를 낳았는데, (온조의) 사람됨은 뛰어나게 듬직하고 지혜로왔다. 상이 이르길; "이 아이는 진짜 내 아들이다."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온조는 추모태왕의 아들이라 더 기뻐하지 않았나 하며 또한 온조가 뛰어나고 지혜로와서 기뻐하였나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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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님, 감사합니다. 달리 드릴 말이 생각이 나지 않군요. 짧은데두 불구하고 진심을 받아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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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김성겸 님. ◎五年戊子,正月,<召>后生子<溫祚>,爲人英偉有智. 上曰: "此眞吾子也."<沸流>猶,"汝而溫順.","此子猶我而豪爽.". 后笑曰: "皆汝出也,何有眞乎." 設<漢관>,以敎民. 幸<羅淵>拿<荇>騎探其虛實. 위 문장의 해석에서 ‘유(猶)’를 ‘머뭇거리다’로 해석하였으나, 이 유(猶)에는 ‘비유(比喩)’ 혹은 ‘비교(比較)’의 뜻과 또한 ‘같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좌계의 의견으로는 ‘曰: "此眞吾子也."<沸流>猶,"汝而溫順.","此子猶我而豪爽.". 后笑曰: "皆汝出也,何有眞乎."’의 해석에 있어서.... ◎ [상(上: 고주몽)이 말씀하시기를 “이 녀석은 진짜 내자식이구나. 비류(沸流)는 너(온조를 뜻함)하고 비교하면 온순하구나. 이 아이(온조를 뜻함)를 나와 ‘같아서’ 호협(豪俠)하게 생겼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소서노(召西弩)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두 녀석 다 당신에게서 나왔어요. 어찌 진짜 가짜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부드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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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살펴주시어 고맙습니다. 좌계 선생님, 아래와 같은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猶"는 "닮다"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上曰: "此眞吾子也."<沸流>猶汝,而溫順.", "此子猶我,而豪爽.". 로 끊어 읽고 보면..., "이 애(온조)는 내가 진짜 원하는 아들이요, <비류>는 당신(소서노)을 닮아 온순하고, 이 애(온조)는 나를 닮아 호쾌하고 심지도 굳어 보이오." 라고 해석하면 매끈하여 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떠하실른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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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 선생님, 고생많으십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 드리구요. 항상 님의 박학다식함을 부럽게 생각하고 또 잘 보고 있습니다. 완역하시고 정성일님과 책한권 내 보세요. 고구려사초, 백제서기를 묶어서요. ㅎ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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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史穿) 김성겸 님. 미호선재(美乎善哉)! 그 어떠한 해석보다도 진의(眞意)에 가깝다고 확신합니다. 완벽한 해석에, 좌계 승복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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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 선생님 아직 해석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선생님께 보여드리기 곤란하지만 선생님의 연구에 도움이 될까하여 자료를 올립니다. 壬午春與樂浪王柴吉定(원문은 약자)界以奄利東興?之使安其心. 遣再思于卒本修和. 卒本王延陀勃以女召西奴妻之. 解(원문 角+羊)弗以禮氏爲妻. 임오(B.C.39)년 봄 낙락왕 시길(柴吉)과 경계를 정하여 이로써 엄리의 동쪽을 편안하게 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재사를 졸본으로 보내어 나라를 합쳐 다스리게 되었다. 졸본왕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처로 삼았다. 해불이 예씨를 처로 삼았다. 癸未春練兵于汗濱(三姓)都于鶻岺上(西湖景) 계미(B.C.38)년 봄 한빈(졸본부여의 3부족)의 도읍인 골령의 위쪽(서호경)에서 병사를 훈련하였다. = 참조문 : 남당 박창화 선생님 유작인 백제왕기의 뒤편 백제서기 四年丁丑三月次子溫祚生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七月分國爲東西南三部, 使乙氏吃氏解氏分長其州 7월 나라를 나누어 동, 서, 남 3개부로 나누고, 그 땅을 을씨, 흘씨, 해씨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元年甲申春二月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원문은 약자)于芻牟. 四豪三賢請卽帝位上固辭不得卽位於沸流谷西城山(勃利縣 二龍山)國號高句麗建元東明. 원년 갑신(B.C.37)년 봄2월 연타발이 죽었다. 소서노가 나라를 추모에게 바쳤다. 4명의 호걸과 3명의 현자들이 제위에 나아가 오르기를 청하여 고사하였으나 〔비류곡 서성산(발리현 이룡산)에서〕 즉위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나라의 연호를 동명이라 하였다. = 고사(固辭) : 제의나 권유 따위를 사양함. = 勃利縣은 흑룡강성에 위치 三月 末曷(?)(?)(?) 3월 말갈??? 用漢人, 漢素造船, 鄭共製兵, 馬黎畜馬. 한인 등용하여 한소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정공에게 병사의 옷(갑옷)을 만들게 하고, 마려에게 말을 비축하도록 하였다. = 참고 : 高句麗史抄 命<漢素>造船,<鄭共>製兵,<馬黎>畜馬(皆漢人也). = 馬黎는 온조가 새나라(백제)를 세울 때 따라간 신하이다. 末曷大擧入寇?汗濱上親征斬首千級. 말갈이 대거 들어와 한빈을 도둑질하여 위쪽에서 친히 정벌하여 적 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五月訪松讓于沸流(湯原)以德義?曉之妄稱?仙族?而不屈遂奪珍宝?妻子而來. 5월 비류에 가서 송양을 만나 덕과 의로써 선인자손이라고 거짓으로 칭하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으나 굴하지 않아 진귀한 보배와 처자식을 빼앗아 왔다. 七月松讓大擧入寇大破其軍渡河追擊虜南女二千余口. 讓(?)行請罪命修歲貢而示七縱之意. 7월 송양의 무리가 대거 들어와 도둑질하여 대파하였다. 송양의 군대가 물을 건너자 추격하여 남여 이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송양이 죄를 청하여 와서 매년 조공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칠종(칠금)의 뜻이다(???). = 七縱七擒 : 제갈공명이 맹획을 전술로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놓아주어 감복시켰다는 고사.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볼 수 없다. 八月練兵於汗濱壯士來歸(원문은 약자)者二千余人. 8월 한빈에서 병사를 훈련하고 장사 이천여명이 들어오고 돌아갔다. = 부족에 있는 장정들이 2000명씩 훈련을 받고 나가고, 이 말은 고구려가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上與后觀稼而歸喜年大豊曰黍稷豆梁足矣奈無麥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 상(추모)과 후가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가며 올해는 대풍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올해는 黍稷(메기장과 찰기장), 콩 대들보 (식량)가 족한데 (비록 역사적으로 쌍 풍년은 없다고 할지라도) 보리가 수확이 없어 어찌할까. 보리를 머금은 비둘기는 뜰아래 있는데 성모궁의 비둘기다. = 여기서 聖母는 추모의 母인 유화를 일컫는다.(아래 글 참조) 十月祀神遂而謝豊. 10월 신에게 제사지내 따르고 풍년에 감사했다. 十一月率精騎渡汗水(牧丹江)至中川(拉林河)召黃龍王羊吉畏惧不敢出遣其兄?子于仁定界割箕丘(老岺山)印之爲獵場. 11월 훈련된 기병을 거느리고 汗水(목단강)을 건너 중천(납림하)에 이르러 황룡왕을 불렀다. 양길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고 그 형의 아들을 보내어 어짊으로써 경계를 정하여 기구(노령산)를 나누어 동쪽을 수렵장으로 하였다. 十二月烏伊鍊兵五千于中川, 羊吉以女妻烏伊而請和徵, 黃龍國壯丁而築眞珠城(眞河) 12월 오이가 중천에서 병사 오천을 훈련시켰다. 양길이 딸을 주어 오이의 처로 삼게 하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황룡국이 장정으로써 진주성(진하)을 쌓았다. 帶素殺其兄帶伯娶其妻烏花. 대소가 그 형 대백을 죽이고 그 처 오화를 취하다. 二年乙酉正月徵黃龍馬三千匹鍊兵于中川. 羊吉憂惧而死. 子宝得浸於酒色于仁懦弱無謀. 2년 을유(B.C.36)년 1월 황룡국의 말 3천필을 징발하여 중천에서 병사를 훈련하였다. 양길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죽었다. 아들 보득은 주색에 빠져 있고 어질고 나약하고 꾀가 없었다. 二月桓那國女主桂婁來降以其地爲桂林(吉林)烏干(烏伊弟)爲沛子(太守)桂婁爲夫人. 2월 환나국의 여주인 계루가 항복하여 왔다. 그 땅을 계림(길림)으로 하고 오간(오이의 제)을 패자(태수)로 삼고 계루를 부인으로 삼았다. = 烏干은 온조가 새나라(백제)를 세울 때 따라간 신하이다. 백제의 초기 영토를 추측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命松讓出兵三千人來五千石. 송양에게 삼천명의 출병을 명했고 곡식 오천섬이 왔다. 四月皇后生子沸流女溫于溫水宮. 4월 황후가 아들 비류와 딸 온을 온수궁에서 낳았다. = 이 부분이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다른 유고인 백제왕기의 뒤편 백제서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비류의 나이가 11살 차이가 나면서 백제서기에서는 우대의 자식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추모의 자식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데 두 책 중 어느 하나는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동명왕 말미에 소서노가 처녀로 시집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명왕 19년에 유리가 아이와 결혼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17년에 보면 아이가 소서노의 전남편 구태(백제서기에서는 우대 또는 우태)의 자손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는 전남편의 유복녀인데 소서노를 처녀로 만들다 보니 아이가 유리와 아버지가 같은 형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것만큼은 사실대로 기술한 것 같다. 두 가지의 책을 종합하면 소서노가 재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추모는 우태의 졸본부여를 물려받았므로 시조를 우태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일이 발생하므로 우태의 자인 비류를 추모의 아들로 하여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 (참고문)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다른 유고인 백제왕기의 뒤편 백제서기의 우대왕 원년 祀河神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使人迎皈遂以卒本之地皈之, 하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류라 하였다.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의 땅에 맞이하였다.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이 해에 해부루왕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에게 명하여 졸본의 왕노릇을 하게 하였다. 元年甲戌五月立召西奴爲妃 원년(B.C.47) 갑술 5월 우태가 왕으로 서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日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讓自知德薄獻國爲臣. 上以其地爲故國原而松讓爲多勿候. 多勿復舊?之意也. 盖聖父解慕漱與聖母柳花逍遙之地也.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을 상을 걸었다. 7일간 큰비 후에 도읍이 떠내려가고 군사를 일의키어 (백성을) 구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송양은 스스로 지혜와 덕이 없음을 알고 나라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 추모(上:여기서는 임금을 뜻함)가 그 땅을 고국원으로 삼고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다물이란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땅은 추모(盖가 추모를 뜻함)의 아버지 해모수가 어머니 유화와 더불어 소요하던 땅이다. = 逍遙 :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 七月以黃龍國男丁三千人爲軍女丁五千人爲婢. 冶工三十取?兵船二伯隻成. 7월 황룡국 남정(성년남자) 3천명을 군인으로 하고 여정(성년여자) 5천명을 하녀로 삼았다. 대장장이 30명을 구하고 싸움하는 배 2백척을 만들었다. 八月鍊兵二萬於汗濱及中川, 上親自跋涉櫛風沐, 兩一飯三起晏眠夙興殆無虛日, 屈己下人喜, 聞自過上自公卿下室小卒皆能直諫, 每召漢人習其風俗聞其治亂喜形於色, 無大故則不廢. 8월 병사 2만을 한빈에서 중천까지 훈련시켰다. 왕이 스스로 걷고(밟고), 건너고, 늘어서서 바람으로 머리를 감고 (병사와) 친하게 되었으며, 한번의 식사와 세 번의 훈련에 어울리고, 해가 저물면 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아침 해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자신을 낮추어 아랫사람들이 기뻐했다. 왕이 스스로의 잘못을 공경하게 듣고, 아랫사람의 거처에서 병사들이 능히 직접 간하는 소리를 할 수 있었다. 매번 漢人을 불러 그 풍속을 익혔으며 그곳의 다스림에 대해 듣고 얼굴색을 보고 기뻐하였다. 큰 사고가 없으면 떠나지 아니하였다. = 大故 : 큰 사고 烏伊摩離扶芬奴各領三千軍伐河北羯?平之以其地爲湯西質山二軍. 오이, 마리, 부분노의 영지에서 각 3천의 군대로 하북 양평의 땅을 쳐서 그 땅을 탕서, 질산 이군으로 삼았다. 九月畋于質山鍊兵八千. 9월 질산에서 사냥을 하며 병사 8천명을 훈련하였다. 神馬五千匹自東扶餘隨拘而至畜於石河. 동부여에서 석하에서 모은 신마 오천 필을 잡아끌고 왔다. 三年丙戌三月黃龍雌雄見於鶻岺. 至王骨岺支(岐?)首脫爪至南岺支(岐?)蟠三日乃. 以其山爲龍山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3년 을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이(추모와 황룡왕) 鶻岺에서 만났다. 왕이 骨岺의 갈림길 首脫爪에서 岺의 남쪽 갈림길 蟠까지 3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산을 龍山이라 하고 물 이름을 龍溝라 하였다. 군신들이 상서롭다하여 궁실을 짓기를 청하였으나 병사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十月設東明大會於神隨群鳩. 播麥於神田. 10월 동명대회 열어 비둘기 무리들이 신을 따라 갔다. 신전에 보리를 뿌렸다. = 여기서 神은 유화부인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됨. 위에 글 참조 桂婁夫人生子高婁. 계루부인이 아들 고루를 낳았다. 十二月以宝得女禾爲小妃. 12월 보득의 딸 화씨를 小妃로 삼았다. 練兵一萬於河濱(哈爾濱)召荇人國王祖天不來. 하빈(합이빈)에서 병사 1만을 훈련시키고, 행인국 왕 조천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賊(말갈)十部落逐于水外. 4년 정해(B.C.34)년 1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의 적(말갈) 열 부락을 쳐서 水外로 쫓아냈다. = 여기서 水는 흑룡강을 뜻한다. 즉 賊은 흑수말갈을 뜻한다. = 참고 : 남당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遂于水(黑龍江)外.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富錦)>. 七月, 宮室成茅茨土階. 九月,<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4년 정해(B.C. 34)년 1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에 있는 <갈(鞨)>의 10부락을 정벌하고 물줄기(흑룡강) 밖까지 길을 냈다. <낙랑>주와 함께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7월, 흙계단 위에 궁실을 조촐하게(띠풀과 납가새풀로 지붕을 이어) 지었다. 9월, <화>비가 아들 <을두지>를 낳았다. <시길>의 딸 <시화>를 <협보>의 처로 삼았다 召樂浪王柴吉獵于河南(富錦) 낙랑왕 시길을 불러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六月 ??? 6월 七月東明神宮成茅茨土階. 7월 동명신궁을 흙 층계위에 띠로 지붕을 이어 지었다. 九月禾妃生子乙豆智. 9월 화비(황룡국왕의 딸)가 아들 을두지를 낳았다 以柴吉女柴花妻陜父 시길의 딸 시화를 협부(협보)의 처로 삼았다 五年戊子正月皇后生子溫祚. 5년 무자(B.C.33)년 1월 황후가 아들 온조를 낳았다. =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백제서기와 다른 부분이다. = 이 부분이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다른 유고인 백제왕기의 뒤편 백제서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온조의 나이도 비류와 같이 11살 차이가 나면서 백제서기에서는 우대의 자식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추모의 자식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四年丁丑三月次子溫祚生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說漢舘於河濱以迎漢人使之敎民. 하빈의 한관에서 교육을 하였는데 한인을 맞이하여 시켜서 백성들을 교육을 하였다 拿荇人國獵騎于羅淵探其虛實. 행인국을 손에 넣기 위해 나연에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그 곳의 허실을 찾았다. 大閱于滸口 허구에서 왕이 군대를 정열하여 점검하였다. 五月金蛙移都柵城 5월 금와가 책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六年己丑正月桂婁夫人生女高曼. 陞爲小妃. 6년 기축(B.C.32)년 1월 계루부인이 딸 고만을 낳았다. 小妃로 (직을) 올렸다. 五月上至質陽命舟師?治滸作站荇人來拒而大敗祖天遁北棘 5월 왕이 질양에 이르러 단사에게 명하여 호를 다스리게 하고 역마을을 만들게 하여 행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크게 깨뜨렸다. 조천이 북극으로 숨어들었다. = 참고 : 남당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六年己丑,正月,<桂>后生女<曼>. 五月,幸<質陽(通江)><沿滸(蘭河)><作沾>而功<朝天>,遁于<北棘(克山)>. 七月,<芬奴>定<荇南(蘭西肇□安達等地)>進駐<滸原(□通□)><天>都也. <黃龍>修文而 酒,<荇人>好仙而荒淫. 十月,拔<北棘>. <天>走<海山(仙人山)>,以<荇人國>爲<荇東><荇西><荇南>三郡 ◎6년(BC32)기축, 정월, <계>후가 딸 <만>을 낳았다. 5월, <질양(통강)><연호(호란하)><작첨>에 행차하여 <조천>을 치니, <북극(극산)>으로 피하여 숨어들었다. 7월, <분노>가 <행남(난서조□안달등지)>을 평정하고 <호원(□通□)>에 있는 <(조)천>의 도읍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황룡>은 학문을 하는데 흐린 술을 마시며, <행인>은 선 수행을 즐겨하나 황음하였다. 10월, <북극>을 쳐서 멸하였다. <(조)천>이 <해산(선인산)>으로 달아나, <행인국>을 <행동>, <행서>, <행남>의 세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七月扶分奴定荇南諸郡進駐滸原天之取?都也. 7월 부분노가 행남의 모든 군을 (평)정하고, 나아가 호원에 (군대를) 주둔하고 하늘(天)을 취하여 도읍으로 삼았다. = 참고 : 남당 박창화님의 유고 백제왕기 뒤편 백제서기 十六年己丑丁月將軍烏伊芙芬奴分兩道攻太伯山南東荇人國取其地爲城邑. 16년(B.C.32) 기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와 부분노에게 양쪽 길로 태백산 남동쪽 행인국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十九年壬辰五月以荇人國王女碧蘿爲太子沸流妃. 賜脯群臣. 19년(B.C.29) 임진 5월 행인국 왕녀 벽라를 태자 비류의 비로 삼았다. 군신들에게 포(말린 고기)를 선물로 하사하였다. 十月拔北棘天北走海山以其地爲三部. 10월 북극을 빼앗아 하늘(조천)이 해산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그 땅을 3부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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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가 있어요. 大閱于滸口 호구에서 왕이 군대를 정열하여 점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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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가 있어요. 五月上至質陽命舟師?治滸作站荇人來拒而大敗祖天遁北棘 5월 왕이 질양에 이르러 주사에게 명하여 호를 다스리게 하고 역마을을 만들게 하여 행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크게 깨뜨렸다. 조천이 북극으로 숨어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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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선생님, 돕고자하시는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아직 저는 상세한 비교연구를 할 겨를이 없읍니다. 저는 한문을 잘 하지는 못합니다만, 제대로 배우지도 공부하지도 못하였지만, 그래도 아니 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아 애를 써보고 있읍니다. 상세한 비교 연구는 다른 분들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양해하여 주시길 앙청합니다. 조금 전에 <제2세 광명대제기>를 1차 끝을 내고, <제3세 대무신제기>를 오늘 초벌번역 착수합니다. 댓글을 읽다보니 "八月練兵於汗濱壯士來歸" 관련 글귀에 "來歸"자를 우리말로 옮기실 때 "왔다가 돌아갔다"는 의미로 하셨읍니다.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歸"라는 글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갔다" 또는 "우리편이 되었다"라는 의미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來歸"는 와서 귀복하였다. 즉, 와서 훈련에 참여하고 (완전히) 우리의 사람이 되었다... 이런 뜻으로 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