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始祖<芻牟大帝>紀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20
김성겸님의 고구려사초에 대한 탁월한 해석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다만 몇가지 대목에 관하여 라디오님이 연결해 놓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원문사진파일 高句麗史略을 근거로 제 견해를 첨가해 봅니다.
다음은 고구려사략의 기록입니다.(원문은 정성일님 댓글인용)
元年 甲申 八月練兵於汗濱壯士來皈者二千余人.
원년 갑신 8월 한수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명에 복종하고 참가한 장사가 이천여명이었다.
上與后觀稼而歸喜年大豊, 曰黍稷豆梁足矣奈無麥,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 自足鳩群含麥來播者無數名曰鳩麥
황상과 황후가 농사현황을 둘러보고 돌아가며 올해는 대풍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올해는 기장과 콩 조(粱)는 충분한데, 보리가 없으니 어찌할까(보리씨앗이 없었다는 뜻인 듯)”. (이때에) 누군가 기르는 것이(史는 使의 오기인 듯)확실한 비둘기 한쌍이 보리를 물고 뜰에 내려왔다. 이는 곧 성모궁에서 기르는 비둘기였다. 이어서 많은 비둘기 무리가 보리씨앗을 물고 와서 파종하는 것이 무수하였다. (그래서 이 보리를)이름하여 <비둘기 보리>라고 하였다.
*황상이 백성을 위해 곡식을 걱정하자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또한 성모(유화)의 사랑이 비둘기를 내려보낸 것으로 연결됩니다.
十月祀神遂而謝豊.
10월 <신수>에서 풍년 감사 제사를 지냈다.
*<신수>는 신을 모신 종묘가 있는 곳일 수도 있고. 단지 지명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二年 乙酉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月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讓自知德薄獻國爲臣. 上以其地爲故國原而松讓爲多勿候. 多勿復舊?之意也. 盖聖父解慕漱與聖母柳花逍遙之地也.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을 내 걸었다.(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걸었다. 7월 큰비가 내려 도읍이 물에 잠기자 황상이 군사를 동원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송양은 스스로 덕이 없음을 알고 나라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 황상이 그 땅을 고국원으로 삼고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다물이란 “옛 것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그 땅은 위대한(盖:숭상하다) 성부 해모수께서 성모 유화와 더불어 소요하던 땅이다.
三年 丙戌 十月設東明大會於神隨, 群鳩播麥於神田.
삼년 병술 시월 동명대회를 <신수神隨>에서 열었다. 많은 비둘기가 보리를 신전에 파종하였다.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 賊<曷末>十部落逐于水外.
사년 정해 정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을 정벌하고 도적무리인 말갈<末曷>의 열개 부락을 강밖으로 쫓아내었다.(遂가 아니라 逐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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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성겸님의 해석아래에 *표는 제 견해입니다.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 十月,祀隧祭豊<扶餘><鳩含>麥,而來.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고 <부여><구함>의 보리농사가 풍년들기를 빌고 돌아왔다
*隧는 <신수神隨>, 즉, 시월 풍년 감사제사를 신수에서 지냈다.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를 물고왔다로 해석이 됩니다.
◎二年,乙酉, 六月,<宋讓>,懸鹿漂都,以國來獻,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慕漱之地也).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懸鹿漂都하여 나라를 (통째로) 바쳐오기에, <다물후>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모수지지야).
*懸鹿漂都(현록표도):이것만 보면 의미가 안통하는데 고구려 사략을 보면 ‘현록’과 ‘표도’는 각각 다른 달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三年丙戌,. 十月,祀隧群,鳩播麥于神田.
10월, 동굴무덤들에 제사하고, 신전(神田)에 보리를 편안하게 파종하였다
* 隧는 <神隨>로서 지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群鳩(군구) : 뭇 비둘기가 보리를 파종한 것이구요.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遂于水(黑龍江)外.
◎4년(단기2300년/BC34)정해, 정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에 있는 <갈(鞨)>의 10부락을 정벌하고 물줄기(흑룡강) 밖까지 길을 냈다.
*鞨갈은 말갈(末曷)인 것으로 보이고, 遂는 逐의 오기로 보입니다.
◎十九年壬寅, 四月,上崩於石,東宮卽位. 「仙記」曰:"上不樂居位,傳□璽于東宮." 九月,乘龍上天遺棄玉鞭處爲龍山陵. <禮>后生女<再思>.
◎19년(단기2315년/BC19)임인,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2월, <작>씨가 <작>태자를 낳았다. 4월, 상이 서도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에는: "상은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다."라 쓰여 있다. 9월, 용이 하늘로 올라가며 옥채찍을 버려놓은 곳이 <용산능>이 되었다.
*乘龍上天遺棄玉鞭處 : 이것은 비유로서 ‘황상이 용을 타고 승천(즉 죽음)하고, 옥채찍을 버려놓은 곳(즉 시신을 장사지낸 곳)’이다로 해석이 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저는 다만 몇가지 대목에 관하여 라디오님이 연결해 놓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원문사진파일 高句麗史略을 근거로 제 견해를 첨가해 봅니다.
다음은 고구려사략의 기록입니다.(원문은 정성일님 댓글인용)
元年 甲申 八月練兵於汗濱壯士來皈者二千余人.
원년 갑신 8월 한수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명에 복종하고 참가한 장사가 이천여명이었다.
上與后觀稼而歸喜年大豊, 曰黍稷豆梁足矣奈無麥,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 自足鳩群含麥來播者無數名曰鳩麥
황상과 황후가 농사현황을 둘러보고 돌아가며 올해는 대풍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올해는 기장과 콩 조(粱)는 충분한데, 보리가 없으니 어찌할까(보리씨앗이 없었다는 뜻인 듯)”. (이때에) 누군가 기르는 것이(史는 使의 오기인 듯)확실한 비둘기 한쌍이 보리를 물고 뜰에 내려왔다. 이는 곧 성모궁에서 기르는 비둘기였다. 이어서 많은 비둘기 무리가 보리씨앗을 물고 와서 파종하는 것이 무수하였다. (그래서 이 보리를)이름하여 <비둘기 보리>라고 하였다.
*황상이 백성을 위해 곡식을 걱정하자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또한 성모(유화)의 사랑이 비둘기를 내려보낸 것으로 연결됩니다.
十月祀神遂而謝豊.
10월 <신수>에서 풍년 감사 제사를 지냈다.
*<신수>는 신을 모신 종묘가 있는 곳일 수도 있고. 단지 지명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二年 乙酉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月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讓自知德薄獻國爲臣. 上以其地爲故國原而松讓爲多勿候. 多勿復舊?之意也. 盖聖父解慕漱與聖母柳花逍遙之地也.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을 내 걸었다.(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걸었다. 7월 큰비가 내려 도읍이 물에 잠기자 황상이 군사를 동원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송양은 스스로 덕이 없음을 알고 나라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 황상이 그 땅을 고국원으로 삼고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다물이란 “옛 것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그 땅은 위대한(盖:숭상하다) 성부 해모수께서 성모 유화와 더불어 소요하던 땅이다.
三年 丙戌 十月設東明大會於神隨, 群鳩播麥於神田.
삼년 병술 시월 동명대회를 <신수神隨>에서 열었다. 많은 비둘기가 보리를 신전에 파종하였다.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 賊<曷末>十部落逐于水外.
사년 정해 정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을 정벌하고 도적무리인 말갈<末曷>의 열개 부락을 강밖으로 쫓아내었다.(遂가 아니라 逐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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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성겸님의 해석아래에 *표는 제 견해입니다.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 十月,祀隧祭豊<扶餘><鳩含>麥,而來.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고 <부여><구함>의 보리농사가 풍년들기를 빌고 돌아왔다
*隧는 <신수神隨>, 즉, 시월 풍년 감사제사를 신수에서 지냈다.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를 물고왔다로 해석이 됩니다.
◎二年,乙酉, 六月,<宋讓>,懸鹿漂都,以國來獻,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慕漱之地也).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懸鹿漂都하여 나라를 (통째로) 바쳐오기에, <다물후>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모수지지야).
*懸鹿漂都(현록표도):이것만 보면 의미가 안통하는데 고구려 사략을 보면 ‘현록’과 ‘표도’는 각각 다른 달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三年丙戌,. 十月,祀隧群,鳩播麥于神田.
10월, 동굴무덤들에 제사하고, 신전(神田)에 보리를 편안하게 파종하였다
* 隧는 <神隨>로서 지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群鳩(군구) : 뭇 비둘기가 보리를 파종한 것이구요.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遂于水(黑龍江)外.
◎4년(단기2300년/BC34)정해, 정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에 있는 <갈(鞨)>의 10부락을 정벌하고 물줄기(흑룡강) 밖까지 길을 냈다.
*鞨갈은 말갈(末曷)인 것으로 보이고, 遂는 逐의 오기로 보입니다.
◎十九年壬寅, 四月,上崩於石,東宮卽位. 「仙記」曰:"上不樂居位,傳□璽于東宮." 九月,乘龍上天遺棄玉鞭處爲龍山陵. <禮>后生女<再思>.
◎19년(단기2315년/BC19)임인,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2월, <작>씨가 <작>태자를 낳았다. 4월, 상이 서도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에는: "상은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다."라 쓰여 있다. 9월, 용이 하늘로 올라가며 옥채찍을 버려놓은 곳이 <용산능>이 되었다.
*乘龍上天遺棄玉鞭處 : 이것은 비유로서 ‘황상이 용을 타고 승천(즉 죽음)하고, 옥채찍을 버려놓은 곳(즉 시신을 장사지낸 곳)’이다로 해석이 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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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님 수고가 많습니다. 우대왕편을 마무리 지을까 하는데..아직 판독 불가한 글자가 있어.. 혹시 나름대로 오자 수정한 정보가 있으시면 공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해석쪽에도 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문제 제기한 구절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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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선생님, 감사합니다. 옳게 보셨다는 생각입니다. 반영하여 수정하여 놓겠읍니다. 계속하여 살펴주시면, 결국 우리 사학을 살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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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님/ 우대왕편 해석에서 정성일님이 2차보정이라고 올린 글 중 몇몇 문장의 해석에 관해서는 저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초기 해석문 올렸 때 이미 댓글로 제 의견을 모두 밝힌 바 있습니다. 한문을 단순히 우리말로 옮기는 것 이외에 내포된 다른 의미도 있기에 시각이 다를 수 있지요. 그리고 원문한자 오자 수정은 저도 눈이 나빠 일일이 원문파일을 확인해 아니하였기에 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 아니합니다. 김성겸님/ 건투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