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逸聖紀(일성기) (A.D.192 - A.D.212:재위21년) - 해석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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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17. 14:42
十
九年 正月 上命 以伐休爲護城將軍 以慰昔鄒之神 妻以洪介女黃氏 先是 伐休與小光太子女紫凰相通 生子骨正 欲爲夫婦 只后曰 “汝以我子
不娶上女 而孰娶上女乎” 至是 乃娶黃氏爲正妻 紫凰爲副妻 行吉 于壤井 時大雪丈餘 馬不能行 上與只后洪介汗介 滯雪 于壤井 洪介抱伐休 曰
“吾愛婿也” 伐休拜之 汗介亦抱之 曰 “吾愛婿也” 伐休不拜 上命拜之 曰 “吾權妻也 爲爾母 何不拜之” 伐休曰 “都都娘不能禳雪
故不足拜也” 上笑之 汗介曰 “吾故祈雪淨之 何禳之乎 婿兒無禮 夫今不責 而笑之 妾當冒雪而歸” 只后乃責伐休 拜之 伐休不得已下拜 曰
“若能淨之 可以拜也” 汗介笑曰 “汝爲我子 可朝暮淨之也” 伐休恥之 不言 汗介年少於伐休 而以上寵 呼以子之故也
19년(A.D.210) 정월 왕명으로 벌휴를 호성장군(護城將軍)로 삼아, 석추의 신령을 위로하였다. 홍개(洪介)의 딸 황씨(黃氏)를 시집보냈다. 먼저 벌휴와 소광(小光)태자의 딸 자황(紫凰)이 상통하여 아들 골정(骨正)을 낳고, 부부로 하여 주기를 바랐다. 지후가 말하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네가) 왕의 딸에게 장가를 들지 않으면, 누가 왕의 딸에게 장가를 들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에 황씨에게 장가를 들어 정처(正妻)로, 자황을 부처(副妻)로 삼았다. 양정(壤井)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당시 많은 눈이 어른의 키를 넘겨 말이 다닐 수 없었다. 왕과 지후와 홍개와 한개(汗介)가 양정에서 눈에 막혀 있었다. 홍개가 벌휴를 안으며 말하기를 “나의 사랑스러운 사위야.”라고 하였다. 벌휴가 (홍개에게) 절을 하였다. 한개 역시 벌휴를 안으며 말하기를 “나의 사랑스러운 사위야.”라고 하였다. 벌휴가 절을 하지 않았다. 왕이 벌휴에게 절하도록 명령하며 말하기를 “나의 권처이며 너의 어머니다(일성은 벌휴의 어머니 지진내례의 남편이다). 어찌하여 절을 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벌휴가 말하기를 “도도랑(한개)은 눈을 내리게 하는 푸닥거리에 능하지 않기 때문에, 절을 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다. 한개가 말하기를 “내가 눈을 빌었던 연유로 (세상이) 깨끗하여 졌는데, 어찌하여 푸닥거리를 하라는 것이냐. 사위 아이가 무례하다. 부금(夫今)이 꾸짖지 않고 웃기만 하니, 첩은 마땅히 눈을 무릅쓰고 돌아가겠다.”라고 하였다. 지후가 이에 벌휴를 꾸짖어 (한개에게) 절하도록 하였다. 벌휴가 부득이 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며 (벌휴가) 말하기를 “만약에 능히 (세상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가히 절을 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한개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조석으로 (너의 몸을) 깨끗하게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벌휴가 부끄러워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한개의 나이는 벌휴보다 어렸으나, 왕의 총애를 얻어 아들로 불렀던 까닭이다.
汗介生女冬介 上洗之 不知誰也
한개가 딸 동개(冬介)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한다.
三月 以洪完爲波珍飡 長昔爲南路將軍
3월 홍완(洪完)을 파진찬으로, 장석(長昔)을 남로장군으로 삼았다.
五月 上與洪介黃氏伐休 幸昔鄒祠 宅師神官酒食
5월 왕이 홍개와 황씨(黃氏)와 벌휴(伐休)와 더불어 석추사(昔鄒祠)에 행차하였다. 택사(宅師)와 신관(神官)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七月 上有疾 中外禱天
7월 왕이 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太子與只后 監國
태자와 지후가 나라를 살폈다.
九月 上疾愈 以汗介爲四品權妻 履功也
9월 왕이 병이 치유되어, 홍개를 4품권처로 삼았다. 이것은 (왕의 병이 낳도록) 기도한 공이다.
伐休爲京路 黃氏京母 洪介勸上 授之 伐休辭以年少 洪介曰 “夫今年老 吾所持者 唯汝而己 汝何不照 而辭之” 伐休不得已受之 人多非其太早 而能得將道 不失威皃 一軍咸 稱其神明
벌휴를 경로, 황씨를 경모로 하였다. 홍개가 왕에게 권하여 직을 내리도록 하였다. 벌휴는 나이가 어리다하여 사양하였다. 홍개가 말하기를 “부금(夫今)이 연로하고, 내가 기댈 곳은 오로지 너 뿐이다. 어찌하여 너를 알리지 않고 사양하느냐?”라고 하였다. 벌휴가 부득이 직을 수락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젊음을 그르다 하였다. 능히 장수의 도리를 알아 위엄과 자태를 잃지 않았다. 일군(一軍)이 모두 그 신명스러움을 칭송하였다.
伊伐飡彭息卒 板公代之
이벌찬 팽식(彭息)이 죽어, 판공(板公)이 대신하였다.
十一月 命方士大治等 求神草 于阿瑟羅 乃汗介徒也
11월 방사(方士) 대치(大治) 등에게 명하여, 아슬라(阿瑟羅)에서 신초(神草)를 구하도록 하였다. 곧 한개(汗介)의 무리이다.
≪견해≫ 아슬라(阿瑟羅)에 신초(神草)가 실제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와전되어 왔던 것 같다. 여러 번 등장하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문장이다.
十二月 圓孝伊伐飡 捺生稟主
12월 원효(圓孝)를 이벌찬, 날생(捺生)을 품주로 하였다.
二十年 正月 以汗介爲聖母 大赦天下
20년(A.D.211) 정월 한개(汗介)를 성모로 삼았다. 천하의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二月 以文介爲大母 汗國爲角干 汗昔爲太公 文其爲太太 賜大紫衣及月廩
2월 문개를 대모로, 한국(汗國)을 각간, 한석(汗昔)을 태공으로 삼았다. 문기를 태태(太太)로 하고 대자의(大紫衣)와 월름(月廩, 월급으로 주는 곡식)을 내려주었다.
五月 方士等 自阿瑟羅還 獻神草 上與汗介服之 汗介有色疾 上亦得其疾 汗介欺以爲神草 服之其疾乃愈 上以爲神 賜大治奈麻
5월 방사(方士)등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돌아와 신초(神草)를 바쳤다. 왕과 한개가 신초를 복용하였다. 한개가 색질(色疾)이 있었는데, 왕 역시 그 질병을 얻었다. 한개가 신초라 속이고, 복용하여 그 병이 이에 치유되었다고 하였다. 왕이 신령스러움이 있다하여, 대치내마(大治奈麻)를 삼았다.
居利太子使召文 娶妙德公主
거리(居利, 파사이사금의 아들, 박제상의 4대조)태자를 소문(召文)으로 사신으로 보냈다. 묘덕(妙德)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七月 紫凰生 伐休子伊買 上賜米 嘉之 洪介乃令汗介之徒 禱黃氏子
7월 자황(紫凰)이 벌휴(伐休)의 아들 이매(伊買)를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기뻐하였다. 홍개가 한개의 무리로 하여금 황씨(黃氏)의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게 하였다.
吉宣以其女田氏請媵勿氏 許之
길선(吉宣)이 그의 딸 전씨(田氏, 초고왕과 고이왕의 어머니)를 물씨(勿氏)의 잉첩으로 보내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비교≫ 남당유고 백제왕기 구기왕기 24년 기사
二十四年 辛卯 七月 吉宣以其妹勿氏年過三十 而多産子女 色漸根耗 請以其女田氏媵之 王大喜納之 田氏母彭田領來 館于龜宮 王密詣龜宮 不能待期而先通 田氏皃似勿氏 而尤美 王沈惑之 乃拜吉宣爲佐平 彭田爲國夫人 賜以莊園奴婢 如王子例 彭田亦有色 而善媚 王兼通之 時人多惜之 曰 “吾王之好色也 何易卵而換母邪” 盖以苩花母女易田氏母女故也 田氏年才十五 而頗之政事.
24년(A.D.211) 신묘 7월 길선(吉宣)이 그 여동생 물씨(勿氏, 178년 생)가 나이가 30살이 넘고 자녀를 많이 낳아, 색(色)이 점점 (남자의) 뿌리를 소모하게 하니, 길선의 딸 전씨를 잉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전씨를 받아들였다. 전씨(田氏, 197년 생)와 어머니 팽전(彭田)이 영(領)내로 들어와, 구궁(龜宮)에 묵었다. 왕이 은밀히 구궁에 도착하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통하였다. 전씨의 얼굴이 물씨와 비슷하나, 더욱 아름다웠는데 왕이 깊이 매혹되었다. 이에 길선에게 좌평(佐平)의 벼슬을 내리고, 팽전을 국부인(國夫人)으로 삼았다. 장원(莊園, 귀족의 사유지)과 노비를 내리고 왕자의 예우로 대하였다. 팽전 역시 색기가 있고 아첨을 잘하였다. 왕이 (전씨 모녀를) 겸하여 통정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 하며 말하기를 “우리왕은 여자를 밝힌다. 어찌하여 란(卵, 여자)를 바꾸고, 어머니를 바꾸고 그러한가.”고 하였다. 아마도 백화(苩花)모녀와 전씨 모녀를 바꾼 까닭이다. 전씨는 나이 겨우 15세이지만 정사에 자못 밝았다.
九月 上與汗介 巡狩南路
9월 왕이 한개와 더불어 남로(南路)를 돌며 보살폈다.
十月 上與汗介 宿高井月宮 火起宮門 汗介負上 而自欄跳入池中 衛頭文石 泳來拯之 上賜文石爵 賜其母昭夫那大白馬 流井頭敦車 于蚊川
10월 왕과 한개가 고정(高井) 월궁(月宮)에서 잠을 잤다. 궁문에서 불이 일어나서, 한개가 왕을 업고 난간에서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위두 문석(文石)이 수영하여 와서 건져내었다. 왕이 문석에게 작위를 내리고, 그 어머니 소부나(昭夫那)에게 대백마(大白馬)를 수여하였다. 정두 돈차(敦車)는 문천(蚊川)으로 유배를 보냈다.
≪비교≫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20년 기사
20년 10월 궁궐 대문에 불이 났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다.
≪견해≫ 남당유고에는 천문에 관한 기사가 없다.
十一月 上有疾 中外禱天
11월 왕이 병이 들어 나라 안팎에서 하늘에 빌었다.
十二月 太子執行天子事
12월 태자가 천자의 일을 집행하였다.
汗介復與太子相通 約爲八生夫婦 于月宮神堂
한개가 다시 태자와 상통(相通)하여, 팔생부부(八生夫婦)가 되기를 월궁(月宮) 신당(神堂)에서 약속하였다.
日宗伊伐飡 京氏稟主
일종(日宗)을 이벌찬, 경씨(京氏)를 품주로 하였다.
二十一年 二月 上崩 于月宮 只后命 太子行祥登祚 以內禮正宮皇后 汗介爲副后
21년(A.D.212) 2월 왕이 월궁(月宮)에서 죽었다. 지후가 태자에게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내례(內禮)를 정궁황후로, 한개(汗介)를 부후로 하였다.
四月 葬帝 于蛇陵門 愛禮皇后之右 只珍內禮皇后亦 投殉火而崩 新今號泣 禁止而已 先自刃投火 竟不能制其貞心 同葬于陵門 立廟曰 逸聖尼今廟 春秋七十八 帝少不喜色 唯以忠于先今 爲心及貴 而身體鴻胖 女寵甚廣 少時美如白玉 人以爲不須玩 花玩牟梁宅郞君 以朱唇粉面紫衣綠綬跨大白馬 吹笛而遇之 皆以爲天仙 及七十高齡勇力不衰 一日斗米斤肉 以爲百歲遐壽 竟爲汗介所沈 不亦天乎 帝愛民好士 勤於政事 拓北鄙 南隣 威加四海 可謂太平聖天子也 欽矣聖哉
4월 제(帝)를 사릉문(蛇陵門) 애례(愛禮)황후의 오른쪽에 장사를 지냈다. 지진내례 (只珍內禮)황후 역시 불속으로 뛰어들어 따라 죽었다. 신금(新今, 아달라)이 울면서 금지할 뿐이었다. 먼저 스스로 칼로 찌르고 불속에 몸을 던지매, 끝내 그 절개를 막을 수 없었다. 사릉문에 함께 장사를 지내고, 그 사당을 세워 일성니금묘(逸聖尼今廟)라 하였다, 춘추 78세였다. 왕(帝)이 젊었을 때는 여색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선금(지마)에게 충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스려 귀하여짐에 미쳤다. 신체가 크고 편안하며, 여자를 총애함이 심히 넓었다. 젊었을 때는 백옥처럼 아름다웠는데, 사람들이 모름지기 희롱함이 없었다. 꽃을 희롱하여 모량댁낭군(牟梁宅郞君)이라 하였다. 붉은 입술(朱唇), 분을 바른 얼굴(粉面), 자주색 옷(紫衣), 녹색 인끈(綠綬)을 매고 대백마(大白馬)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면,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하였다. 나이 70고령에 미침에도 씩씩한 힘이 쇠하지 아니하여, 하루에 한 말의 쌀과 한 근의 고기를 먹었으며, 이로써 백세까지 남들보다 오래도록 살 것(遐壽)이라 하였다. 결국 한개에게 빠지게 되니,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관리)를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근면하였으며, 북쪽의 두메산골을 넓히고, 남쪽의 이웃나라와 사해(四海)에 위엄을 더하였다. 가히 태평천자(平聖天子)라고 설명할 수 있다. 흠모함은 성스러움에서 비롯하였다.
≪견해≫ 일성이사금 또한 영토를 넓힌 기사가 있다. 194년 5월 북쪽으로 비열흘(比列忽)까지 넓혔다

19년(A.D.210) 정월 왕명으로 벌휴를 호성장군(護城將軍)로 삼아, 석추의 신령을 위로하였다. 홍개(洪介)의 딸 황씨(黃氏)를 시집보냈다. 먼저 벌휴와 소광(小光)태자의 딸 자황(紫凰)이 상통하여 아들 골정(骨正)을 낳고, 부부로 하여 주기를 바랐다. 지후가 말하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네가) 왕의 딸에게 장가를 들지 않으면, 누가 왕의 딸에게 장가를 들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에 황씨에게 장가를 들어 정처(正妻)로, 자황을 부처(副妻)로 삼았다. 양정(壤井)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당시 많은 눈이 어른의 키를 넘겨 말이 다닐 수 없었다. 왕과 지후와 홍개와 한개(汗介)가 양정에서 눈에 막혀 있었다. 홍개가 벌휴를 안으며 말하기를 “나의 사랑스러운 사위야.”라고 하였다. 벌휴가 (홍개에게) 절을 하였다. 한개 역시 벌휴를 안으며 말하기를 “나의 사랑스러운 사위야.”라고 하였다. 벌휴가 절을 하지 않았다. 왕이 벌휴에게 절하도록 명령하며 말하기를 “나의 권처이며 너의 어머니다(일성은 벌휴의 어머니 지진내례의 남편이다). 어찌하여 절을 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벌휴가 말하기를 “도도랑(한개)은 눈을 내리게 하는 푸닥거리에 능하지 않기 때문에, 절을 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다. 한개가 말하기를 “내가 눈을 빌었던 연유로 (세상이) 깨끗하여 졌는데, 어찌하여 푸닥거리를 하라는 것이냐. 사위 아이가 무례하다. 부금(夫今)이 꾸짖지 않고 웃기만 하니, 첩은 마땅히 눈을 무릅쓰고 돌아가겠다.”라고 하였다. 지후가 이에 벌휴를 꾸짖어 (한개에게) 절하도록 하였다. 벌휴가 부득이 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며 (벌휴가) 말하기를 “만약에 능히 (세상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가히 절을 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한개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조석으로 (너의 몸을) 깨끗하게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벌휴가 부끄러워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한개의 나이는 벌휴보다 어렸으나, 왕의 총애를 얻어 아들로 불렀던 까닭이다.
汗介生女冬介 上洗之 不知誰也
한개가 딸 동개(冬介)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한다.
三月 以洪完爲波珍飡 長昔爲南路將軍
3월 홍완(洪完)을 파진찬으로, 장석(長昔)을 남로장군으로 삼았다.
五月 上與洪介黃氏伐休 幸昔鄒祠 宅師神官酒食
5월 왕이 홍개와 황씨(黃氏)와 벌휴(伐休)와 더불어 석추사(昔鄒祠)에 행차하였다. 택사(宅師)와 신관(神官)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七月 上有疾 中外禱天
7월 왕이 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太子與只后 監國
태자와 지후가 나라를 살폈다.
九月 上疾愈 以汗介爲四品權妻 履功也
9월 왕이 병이 치유되어, 홍개를 4품권처로 삼았다. 이것은 (왕의 병이 낳도록) 기도한 공이다.
伐休爲京路 黃氏京母 洪介勸上 授之 伐休辭以年少 洪介曰 “夫今年老 吾所持者 唯汝而己 汝何不照 而辭之” 伐休不得已受之 人多非其太早 而能得將道 不失威皃 一軍咸 稱其神明
벌휴를 경로, 황씨를 경모로 하였다. 홍개가 왕에게 권하여 직을 내리도록 하였다. 벌휴는 나이가 어리다하여 사양하였다. 홍개가 말하기를 “부금(夫今)이 연로하고, 내가 기댈 곳은 오로지 너 뿐이다. 어찌하여 너를 알리지 않고 사양하느냐?”라고 하였다. 벌휴가 부득이 직을 수락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젊음을 그르다 하였다. 능히 장수의 도리를 알아 위엄과 자태를 잃지 않았다. 일군(一軍)이 모두 그 신명스러움을 칭송하였다.
伊伐飡彭息卒 板公代之
이벌찬 팽식(彭息)이 죽어, 판공(板公)이 대신하였다.
十一月 命方士大治等 求神草 于阿瑟羅 乃汗介徒也
11월 방사(方士) 대치(大治) 등에게 명하여, 아슬라(阿瑟羅)에서 신초(神草)를 구하도록 하였다. 곧 한개(汗介)의 무리이다.
≪견해≫ 아슬라(阿瑟羅)에 신초(神草)가 실제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와전되어 왔던 것 같다. 여러 번 등장하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문장이다.
十二月 圓孝伊伐飡 捺生稟主
12월 원효(圓孝)를 이벌찬, 날생(捺生)을 품주로 하였다.
二十年 正月 以汗介爲聖母 大赦天下
20년(A.D.211) 정월 한개(汗介)를 성모로 삼았다. 천하의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二月 以文介爲大母 汗國爲角干 汗昔爲太公 文其爲太太 賜大紫衣及月廩
2월 문개를 대모로, 한국(汗國)을 각간, 한석(汗昔)을 태공으로 삼았다. 문기를 태태(太太)로 하고 대자의(大紫衣)와 월름(月廩, 월급으로 주는 곡식)을 내려주었다.
五月 方士等 自阿瑟羅還 獻神草 上與汗介服之 汗介有色疾 上亦得其疾 汗介欺以爲神草 服之其疾乃愈 上以爲神 賜大治奈麻
5월 방사(方士)등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돌아와 신초(神草)를 바쳤다. 왕과 한개가 신초를 복용하였다. 한개가 색질(色疾)이 있었는데, 왕 역시 그 질병을 얻었다. 한개가 신초라 속이고, 복용하여 그 병이 이에 치유되었다고 하였다. 왕이 신령스러움이 있다하여, 대치내마(大治奈麻)를 삼았다.
居利太子使召文 娶妙德公主
거리(居利, 파사이사금의 아들, 박제상의 4대조)태자를 소문(召文)으로 사신으로 보냈다. 묘덕(妙德)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七月 紫凰生 伐休子伊買 上賜米 嘉之 洪介乃令汗介之徒 禱黃氏子
7월 자황(紫凰)이 벌휴(伐休)의 아들 이매(伊買)를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기뻐하였다. 홍개가 한개의 무리로 하여금 황씨(黃氏)의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게 하였다.
吉宣以其女田氏請媵勿氏 許之
길선(吉宣)이 그의 딸 전씨(田氏, 초고왕과 고이왕의 어머니)를 물씨(勿氏)의 잉첩으로 보내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비교≫ 남당유고 백제왕기 구기왕기 24년 기사
二十四年 辛卯 七月 吉宣以其妹勿氏年過三十 而多産子女 色漸根耗 請以其女田氏媵之 王大喜納之 田氏母彭田領來 館于龜宮 王密詣龜宮 不能待期而先通 田氏皃似勿氏 而尤美 王沈惑之 乃拜吉宣爲佐平 彭田爲國夫人 賜以莊園奴婢 如王子例 彭田亦有色 而善媚 王兼通之 時人多惜之 曰 “吾王之好色也 何易卵而換母邪” 盖以苩花母女易田氏母女故也 田氏年才十五 而頗之政事.
24년(A.D.211) 신묘 7월 길선(吉宣)이 그 여동생 물씨(勿氏, 178년 생)가 나이가 30살이 넘고 자녀를 많이 낳아, 색(色)이 점점 (남자의) 뿌리를 소모하게 하니, 길선의 딸 전씨를 잉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전씨를 받아들였다. 전씨(田氏, 197년 생)와 어머니 팽전(彭田)이 영(領)내로 들어와, 구궁(龜宮)에 묵었다. 왕이 은밀히 구궁에 도착하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통하였다. 전씨의 얼굴이 물씨와 비슷하나, 더욱 아름다웠는데 왕이 깊이 매혹되었다. 이에 길선에게 좌평(佐平)의 벼슬을 내리고, 팽전을 국부인(國夫人)으로 삼았다. 장원(莊園, 귀족의 사유지)과 노비를 내리고 왕자의 예우로 대하였다. 팽전 역시 색기가 있고 아첨을 잘하였다. 왕이 (전씨 모녀를) 겸하여 통정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 하며 말하기를 “우리왕은 여자를 밝힌다. 어찌하여 란(卵, 여자)를 바꾸고, 어머니를 바꾸고 그러한가.”고 하였다. 아마도 백화(苩花)모녀와 전씨 모녀를 바꾼 까닭이다. 전씨는 나이 겨우 15세이지만 정사에 자못 밝았다.
九月 上與汗介 巡狩南路
9월 왕이 한개와 더불어 남로(南路)를 돌며 보살폈다.
十月 上與汗介 宿高井月宮 火起宮門 汗介負上 而自欄跳入池中 衛頭文石 泳來拯之 上賜文石爵 賜其母昭夫那大白馬 流井頭敦車 于蚊川
10월 왕과 한개가 고정(高井) 월궁(月宮)에서 잠을 잤다. 궁문에서 불이 일어나서, 한개가 왕을 업고 난간에서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위두 문석(文石)이 수영하여 와서 건져내었다. 왕이 문석에게 작위를 내리고, 그 어머니 소부나(昭夫那)에게 대백마(大白馬)를 수여하였다. 정두 돈차(敦車)는 문천(蚊川)으로 유배를 보냈다.
≪비교≫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20년 기사
20년 10월 궁궐 대문에 불이 났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다.
≪견해≫ 남당유고에는 천문에 관한 기사가 없다.
十一月 上有疾 中外禱天
11월 왕이 병이 들어 나라 안팎에서 하늘에 빌었다.
十二月 太子執行天子事
12월 태자가 천자의 일을 집행하였다.
汗介復與太子相通 約爲八生夫婦 于月宮神堂
한개가 다시 태자와 상통(相通)하여, 팔생부부(八生夫婦)가 되기를 월궁(月宮) 신당(神堂)에서 약속하였다.
日宗伊伐飡 京氏稟主
일종(日宗)을 이벌찬, 경씨(京氏)를 품주로 하였다.
二十一年 二月 上崩 于月宮 只后命 太子行祥登祚 以內禮正宮皇后 汗介爲副后
21년(A.D.212) 2월 왕이 월궁(月宮)에서 죽었다. 지후가 태자에게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내례(內禮)를 정궁황후로, 한개(汗介)를 부후로 하였다.
四月 葬帝 于蛇陵門 愛禮皇后之右 只珍內禮皇后亦 投殉火而崩 新今號泣 禁止而已 先自刃投火 竟不能制其貞心 同葬于陵門 立廟曰 逸聖尼今廟 春秋七十八 帝少不喜色 唯以忠于先今 爲心及貴 而身體鴻胖 女寵甚廣 少時美如白玉 人以爲不須玩 花玩牟梁宅郞君 以朱唇粉面紫衣綠綬跨大白馬 吹笛而遇之 皆以爲天仙 及七十高齡勇力不衰 一日斗米斤肉 以爲百歲遐壽 竟爲汗介所沈 不亦天乎 帝愛民好士 勤於政事 拓北鄙 南隣 威加四海 可謂太平聖天子也 欽矣聖哉
4월 제(帝)를 사릉문(蛇陵門) 애례(愛禮)황후의 오른쪽에 장사를 지냈다. 지진내례 (只珍內禮)황후 역시 불속으로 뛰어들어 따라 죽었다. 신금(新今, 아달라)이 울면서 금지할 뿐이었다. 먼저 스스로 칼로 찌르고 불속에 몸을 던지매, 끝내 그 절개를 막을 수 없었다. 사릉문에 함께 장사를 지내고, 그 사당을 세워 일성니금묘(逸聖尼今廟)라 하였다, 춘추 78세였다. 왕(帝)이 젊었을 때는 여색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선금(지마)에게 충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스려 귀하여짐에 미쳤다. 신체가 크고 편안하며, 여자를 총애함이 심히 넓었다. 젊었을 때는 백옥처럼 아름다웠는데, 사람들이 모름지기 희롱함이 없었다. 꽃을 희롱하여 모량댁낭군(牟梁宅郞君)이라 하였다. 붉은 입술(朱唇), 분을 바른 얼굴(粉面), 자주색 옷(紫衣), 녹색 인끈(綠綬)을 매고 대백마(大白馬)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면,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하였다. 나이 70고령에 미침에도 씩씩한 힘이 쇠하지 아니하여, 하루에 한 말의 쌀과 한 근의 고기를 먹었으며, 이로써 백세까지 남들보다 오래도록 살 것(遐壽)이라 하였다. 결국 한개에게 빠지게 되니,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관리)를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근면하였으며, 북쪽의 두메산골을 넓히고, 남쪽의 이웃나라와 사해(四海)에 위엄을 더하였다. 가히 태평천자(平聖天子)라고 설명할 수 있다. 흠모함은 성스러움에서 비롯하였다.
≪견해≫ 일성이사금 또한 영토를 넓힌 기사가 있다. 194년 5월 북쪽으로 비열흘(比列忽)까지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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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량때문에 부득이하게 둘로 나누었습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림이나 표, 굵은 글씨는 저의 능력한계로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텍스트만 올립니다. 현재 여기에 올린글은 한문의 오타를 최대한 줄이고, 어색한 부분을 다시 해석해 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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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년 5월기사 : “右部執書神水面可憐 郎君即奴子 生女当” 作文宅母 生子莫作洪 匝判洪 聞之面赤 曰 -> “右部執書神水面可憐 郎君即奴子 生女当作文宅母 生子莫作洪 匝判” 洪聞之面赤 曰 로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런지 (2) 2년 5월기사 : ≪견해≫ 상장돈장 산억의 계보 유리(산제) - 산도(방아) - 산억(판구) - 판억 -> 유리(산제) - 산도(방아) - 산아(산도) - 산억(판구) - 판억 (3) 3년 12월기사 : 사신을 보내어 전피(獣皮, 짐승의 가죽)를 바치고 -> 사신을 보내어 수피(獣皮, 짐승의 가죽)를 바치고 (4) 6년 4월기사 : 대서(文良) 문량(文良)을 -> 대서(大書) 문량(文良)을 (5) 7년 12월기사 : 以治黒歯乱也 -> 以治黒(歯)乱也 (6) 8년 4월기사 : 홍가(推火)를 추화로 유배 보냈다. 다시 석추(昔鄒)를 이벌찬, 납리(納理)를 품주로 하였다. 마공(馬公, 지마와 미례의 아들)태자의 딸 마리(馬理)를 삼공(三公, 지마와 애례의 아들)태자의 비로 삼았다. -> 홍가(洪可)를 추화(推火)로 유배 보냈다. 다시 석추(昔鄒)를 이벌찬, 납리(納理)를 품주로 하였다. 마공(馬公, 파사와 미례의 아들)태자의 딸 마리(馬理)를 삼공(三公, 일성과 애례의 아들)태자의 비로 삼았다. (7) 10년 3월기사 : 너의 아버지(궁선)와 미례(애례의 어머니)대모의 집에서 즐겁게 놀았다 -> 너(궁선)의 아버지와 미례(애례의 어머니)대모의 집에서 즐겁게 놀았다 (8) 15년 8월기사 : 取郁甫伐休暖文三人 -> 取郁甫伐休暖門三人, 해석: 욱보(郁甫), 벌휴(伐休), 난문(暖文) 3사람과 -> 욱보(郁甫), 벌휴(伐休), 난문(暖門) 3사람과 (9) 19년 9월기사 : 홍개를 4품권처로 삼았다. -> 한개를 4품권처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