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祗摩紀(지마기) (A.D.159 - A.D.191:재위33년) - 해석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14:36
土豕 元年 正月 太公摩帝薨 葬以王禮
토시(土豕=己亥) 원년(A.D.159) 정월 태공 마제가 죽어, 왕례(王禮)로 장사지냈다.

二月 上與愛后 親祀祖廟 賜酺骨門
2월 왕과 애후(愛后, 애례)가 친히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골문에 연회를 베풀었다.
≪용어≫ 1. 宴(연) : 잔치, 술자리
         2. 享(향) : 누리다, 드리다, 제사지내다, 흠향하다
         3. 酺(포) : 연회, 귀신이름

昌永伊飡 宮孝稟主 玉權水路 羊皇水母 啓其別軍使 申權(一)吉飡 順宣斗胡級飡 翌宗京路 狗日京母 昕連護城大師
창영(昌永)을 이찬으로, 궁효(宮孝)를 품주로, 옥권(玉權)을 수로로, 양황(羊皇)을 수모로, 계기(啓其)를 별군사, 신권(申權)을 길찬으로, 순선(順宣)과 두호(斗胡)를 급찬으로, 익종(翌宗)을 경로로, 구일(狗日)을 경모로, 흔련(昕連)을 호성대사로 삼았다.
≪견해≫ 吉飡은 一吉飡의 잘못인 듯.

三月 扶余使 來吊先今 獻方物
3월 부여가 사신을 보내어 선금(先今)을 조문하고 특산물을 바쳤다.

上洗 愛后女淡理
왕이 애후의 딸 담리(淡理)를 씻겨주었다.

七月 上與太聖愛后 遊音汁伐 試射士
7월 왕과 태성(太聖, 사성)이 애후와 음즙벌(音汁伐)을 여행하며, 사사(射士)를 시험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2년 기사
2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二年 正月 以馬知那爲神籬將軍 莫兮南路 加車南母
2년(A.D.160) 정월 마지나(馬知那)를 신리장군으로, 막혜(莫兮)를 남로로, 가거(加車)를 남모로 삼았다.

三月 降雹傷麥 昌永請免 不許 允良西路 白馬卒故也
3월 우박이 내려 보리가 상했다. 창영(昌永)이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량(允良)을 서로로 삼았는데, 백마(白馬, 서군사)가 죽은 까닭이다.

遣大頭逸聖 于州郡 按民察吏
대두 일성(逸聖)을 주군으로 보내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관리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五厚獻阿瑟羅地
오후(五厚)가 아슬라(阿瑟羅)의 땅을 바쳤다.

四月 大水 上减食自責 慮囚除死罪 悉宥之
4월 홍수가 나서 왕이 음식을 줄이며 자책하였다. 죄수를 조사하여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3년 기사
3년 3월 우박이 내려 보리싹이 상하였다.
4월 홍수가 났다. 죄수들을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七月 朱日遣使 獻美女 ‘以爲居陀本屬臣邦 請歸于臣’ 上不許
7월 주일(朱日)이 사신을 보내어 미녀를 바치며 ‘거타(居陀)은 본래 신의 나라(邦, 제후국)였으므로 신에게 돌려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汗門爲北路 虹盧爲阿瑟羅太守
한문(汗門)을 북로로, 홍노(虹盧)를 아슬라태수로 삼았다.

板久生 上子板公
판구(板久)가 왕의 아들 판공(板公)을 낳았다.

九月 召文景文王崩 子翡貝立 時景文荒色亂政 翡貝母與妙后 爭寵 或云景文遇鴆而崩 上遣私臣逸聖吊之 翡貝以其姊現郞妻之
9월 소문 경문왕(景文王)이 죽어 아들 비패(翡貝)가 섰다. 당시 경문은 황색(荒色=荒淫, 바람피우다의 옛말)하여, 정사가 어지러웠다. 비패의 어머니와 묘후(妙后)가 왕의 총애를 다투었다. 혹은 경문이 우연이 짐새의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왕이 사신(私臣) 일성(逸聖)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비패가 누나 현랑(現郞)을 일성에게 시집보냈다.

加利井主 生上女七利 上洗之
가리정주(加利井主)가 왕의 딸 칠리(七利)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十一月 逸聖與現郞 歸 上見而美之 召幸之 曰 “爾母與汝 孰美” 現郞曰 “妾母年倍于妾 而色亦倍之” 上爲之動容
11월 일성(逸聖)과 현랑(現郞)이 돌아왔다. 왕이 현랑의 아름다움을 보고 불러 행차하여 말하기를 “너의 어머니와 너 둘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우냐.”고 물었다. 현랑이 말하기를 “첩의 어머니는 저보다 나이가 곱절이 많지만, 색(色)도 역시 곱절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현랑의 거동과 차림새를 배웠다.

三年 正月 支所禮伊飡 毛利稟主 玉權京路 翌宗水路
3년(A.D.161) 정월 지소례를 이찬으로, 모리(毛利)를 품주로, 옥권(玉權)을 경로로, 익종(翌宗)을 수로로 삼았다.

二月 朱日侵居陀 上怒 命馬知那伐之
2월 주일(朱日)이 거타(居陀)를 침공하였다. 왕이 노하여 마지나(馬知那)에게 주일를 치도록 명하였다.

三月 以仇鄒太子爲祥文大師 逸聖爲少師
3월 구추(仇鄒)태자를 상문대사로, 일성을 (상문)소사로 하였다.

七月 上親征加耶 至黃山江 爲伏兵所圍 兵官雄宣披圍救出 馬知那大軍繼至 敵退遁
7월 왕이 가야를 친히 정벌하러, 황산강(黃山江)에 이르렀는데 복병에게 둘러싸임을 당하였다. 병관 웅선(雄宣)이 포위를 헤치고 왕을 구출하였다. 마지나의 대군과 이어짐에 이르자 적(敵)이 퇴각하여 물러났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4년 기사
4년 2월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7월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九月 上閱兵 于推火 以吉元爲征虜大將軍
9월 왕이 추화(推火)에서 병사를 점검하였다. 길원을 정로대장군으로 삼았다.

十月 朱日遣使請和 不許
10월 주일(朱日)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以骨花妻雄宣
골화(骨花, 파사와 골치의 딸)를 웅선(雄宣)에게 시집보냈다.

四年 正月 馬知那伊飡 兪生稟主
4년(A.D.162) 정월 마지나를 이찬으로, 유생(兪生)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大破加耶兵 于黃山
2월 가야의 병사를 황산(黃山)에서 크게 깨뜨렸다.

現郞生 上子完郞 上命逸聖洗之
현랑(現郞)이 왕의 아들 완랑(完郞)을 낳았다. 왕이 일성에게 아기를 씻기게 명하였다.

五月 上引精兵一萬 進圍比只伐 大雨不止 吉元請罷之 上怒 囚吉元 于軍中
5월 왕이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비지벌(比只伐)을 둘러쌌으나, 큰 비가 그치지 않았다. 길원이 (정벌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왕이 노하여 길원을 군중(軍中, 진영의 안, 여기서는 전쟁 중의 임시감옥)에 가두었다.

八月 上自比只還都 命罷征虜軍 時大雨連下 三朔 我軍多罹病 上乃釋吉元 而罷兵
8월 왕이 비지(국)에서 환도하였다. 정로군을 마치도록 명하였다. 큰 비가 계속 이어져 내렸다. 3번의 초하루동안 우리 군이 모두 병이 앓았다. 왕이 이에 길원을 석방하고, 병사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5년 기사
5년 8월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九月 上新置三母井 以胞妹宝摩爲天井聖母 天公女天惠爲地井聖母 沙乙那女骨那爲人井聖母
9월 왕이 삼모정(三母井)을 새로 두었다. 같은 어머니 동생 보마(宝摩)를 천정신모로, 천공(天公)의 딸 천혜(天惠)를 지정성모로, 사을나(沙乙那)의 딸 골나(骨那)를 인정성모로 두었다.

五年 正月 愛后生南君太子 上洗之 賜酺三日
5년(A.D.163) 정월 애후가 남군(南君)태자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고 3일 동안 연회를 베풀었다.

以茂山神君入 爲伊飡 其妻又日爲稟主
무산신군(茂山神君)이 들어오게 하여 이찬으로 삼고, 무산신군의 처 우일(又日)을 품주로 삼았다.

詔 “男子十歲以上 皆習射騎擊釰 女子十歲以上 皆習蚕麻酒色 各令所司 試 賞其優 勿拘骨品”
조서를 내려 “남자 10세 이상은 모두 활쏘기, 말타기, 겨루기, 칼쓰기를 배우도록 하고, 여자 10세 이상은 천마(蚕麻, 누에와 삼베)와 주색(酒色)을 배우고, 각령(各令, 해당 장관 또는 部)의 관아에서는 시험하여 우수자에게는 골품에 구애하지 않고 상을 내리라”고 하였다.

三月 召文崇德太子 廢翡貝 而自立 以妙后爲妻 遣其弟景王太子 獻其女貝文公主 曰 “臣女陋 不足以奉天帝 願爲濯足女 幸甚” 上許之
3월 소문의 숭덕태자(崇德太子)가 비패(翡貝)를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묘후(妙后)를 처로 삼고 그의 동생 경왕태자(景王太子)를 보내어 숭덕의 딸 패문(貝文)공주를 바치며 말하기를 “신의 딸은 못생겨서 천제를 모시기에는 부족하나, 원컨대 발을 씻겨주는 여자로 삼아주시면 퍽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견해≫ 숭덕은 前王 경문의 동생인데도 太子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서, 무척 헷갈렸던 부분이다. 숭덕은 비패의 숙부다.

七月 上與逸聖 巡幸西北路 問民戍兵
7월 왕과 일성(逸聖)이 서북로를 돌아다니며 어루만지고, 백성과 수병(戍兵, 수비병)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六年 正月 上與愛后三母 祭靑龍神 于高井東門
6년(A.D.164) 정월 왕과 애후가 3모와 고정(高井) 동문(東門)에서 청룡(靑龍=甲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靑裔遣使 獻南海珍物 答以衣酒
청예(靑裔)가 사신을 보내어 남해의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답으로 옷과 술을 보냈다.

三月 增修中外倉廩 及內外船隻 以便穀運
3월 나라안팎의 곡식창고를 늘려짓거나 고치어, 나라안팎의 선박에 이르자, 곡식의 운반이 편리해졌다.

五月 以宮公爲大理大師 申權爲京都兵官
5월 궁공(宮公)을 대리대사로, 신권(申權)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六月 置四宅大母 春宅掌吉事 夏宅掌作事 秋宅掌樂事 冬宅掌祥事 置典翁八人
6월 사택대모(四宅大母)을 두었다. 춘택(春宅)은 길사(吉事)를, 하택(夏宅)은 작사(作事)를, 추택(秋宅)은 악사(樂事)를, 동택(冬宅)은 상사(祥事)를 맡겼다. 전옹(典翁) 8명을 두었다.

逸聖妻婁生與兵官永宣私通 于嚴亭
일성의 처 루생(婁生)이 병관 영선(永宣)과 엄정(嚴亭)에서 사통하였다.

七年 正月 以逸聖爲護城大師 昕連爲京路 玉權爲神籬將軍 馬知那伊飡 兪生稟主
7년(A.D.165) 정월 일성을 호성대사로, 흔련을 경로로, 옥권을 신리장군으로, 마지나를 이찬으로, 유생을 품주로 삼았다.

四月 婁生生 永宣女解生
4월 루생(婁生)이 영선(永宣)의 딸 해생(解生)을 낳았다.

五月 以貝文爲春宅大母 骨門爭之 上不許
5월 패문(貝文)을 춘택대모로 삼았다. 골문에서 따져 물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六月 立汗兒廟 于北川 以赤旨子竹竹爲主
6월 한아(汗兒)의 사당을 북천(北川)에 지었다. 적지(赤旨)의 아들 죽죽(竹竹)을 주(主)로 삼았다.

悉直獻大雀 于班君
실직에서 대작(大雀, 큰 참새)을 반군(班君)에게 바쳤다.

天惠聖母生 上子惠公
천혜(天惠)성모가 왕의 아들 혜공(惠公)을 낳았다.

八月 行嘉俳 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虹盧卒 以五厚子兵君代之
홍노(虹盧, 아슬라태수)가 죽어, 오후(五厚)의 아들 병군(兵君)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冬 無雪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水酒太守君乙卒 樊五代之
수주태수 군을이 죽어, 번오를 대신하게 하였다.

八年 正月 上祭火馬神 于南門
8년(A.D.166) 정월 왕이 남문에서 화마(火馬=丙午)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以仇鄒太子爲伊飡 味生爲稟主 味生上之胞妹也 上愛之 以爲稟主 群臣以爲前今之子 不可執政 上曰 “仇鄒忠於朕 其妻朕之半體也 此人不可 孰復可乎” 太子登相 乃始於仇鄒
구추(仇鄒, 삼국사기에는 탈해의 아들이라고 함)태자를 이찬으로, 미생(味生)을 품주로 하였다. 미생은 왕의 같은 어머니 여동생이다. 왕이 미생을 사랑하여 품주로 삼았다. 군신들이 전금(前今)의 아들은 집정(執政, 나라의 정부를 봄)함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구추는 짐에게 충성하고, 그 처 미생은 나의 반쪽(여동생)이다. 이 사람(구추)이 아니면 누가 가능하다는 것이냐”고 하였다. 태자가 재상의 지위에 오른 것은 곧 구추가 처음이었다.

穀公獻瓜 上歎其神明 加爵匝判 賜衣酒
곡공(穀公, 허루와 한나의 아들)이 오이를 바쳤다. 왕이 그 신명(神明)스러움을 칭찬하여, 작위를 더하여 잡판으로 하고, 옷과 술을 내렸다.

二月 召羅太守山我卒 以其國屬于所利城 西韓遂絶 上命有司 賜方我族屬一百人 家宅奴婢 于京都
2월 소라(召羅)태수 산아(山我)가 죽었다. 이로써 그 나라는 소리성(所利城)에 속하게 되었다. 서한(西韓=馬韓)이 드디어 끊어졌다. 왕이 유사(有司, 관청)에게 명하여 방아족(方我族)에 속하는 100인에게 경도(京都)에 살림집과 노비를 주었다.

五月 兄山人以竹皮爲器 獻于德公 德公曰 “吾非主上 何敢有此” 乃獻于上 上曰 “民自愛兄 兄何絶之” 乃下于骨夂 命兄山人爲竹皮奈麻
5월 형산인(兄山人)이 죽피(竹皮)로 그릇을 만들어 덕공(德公)에게 바쳤다. 덕공이 말하기를 “나는 주상(主上, 신하가 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이 아니다. 어찌 이와 같음이 있느냐”고 하며 곧 왕에게 그릇을 바쳤다. 왕이 말하기를 “백성이 형을 사랑함으로부터인데, 형은 어찌 거절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골치(骨夂)에게 내렸다. 형산인을 죽피내마(竹皮奈麻)로 삼았다.

大星墜井西 其聲如雷
큰 별이 정서(井西)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9년 기사
9년 2월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3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九月 穀大登 行大場 于南郊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貝文公主生 上子貝公 上大喜 洗兒如有不及 愛后怒不言 後五日 愛后亦生女 上洗之 命其名曰不言 愛后改以好言 上命鮑主約好言 爲貝公妻 愛后不敢復妬
패문(貝文)공주가 왕의 아들 패공(貝公)을 낳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아기를 씻겨줌과 같은 기쁨이 없었다(아기를 씻기는 것은 왕의 아들로 인정하는 행위로, 애후가 패공을 씻긴 일을 화냄). 애후가 노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5일 후에 애후 역시 딸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며 아이의 이름을 명하기를 불언(不言)이라고 하였다. 애후가 이름을 고쳐 호언(好言)이라 하였다. 왕이 호언을 포(사)의 주主로 약속하고 패공의 처로 삼았다. 애후가 다시는 감치 시새움하지 못했다.

十月 行先今祭
10월 선금(先今)의 제사를 지냈다.

甘文女主 請以服君太子爲夫 許之
감문(甘文)의 여주(女主)가 복군(服君)태자를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다.

九年 正月 以天公爲伊飡 大惠爲稟主 乃天惠聖母之父母也 以大公彡胡爲匝判 洪刀爲水路軍事 馬日神籬將軍
9년(A.D.167) 정월 천공(天公)을 이찬으로, 대혜(大惠)를 품주로 삼았다. 곧 천혜(天惠)성모의 부모다. 대공(大公)과 삼호(彡胡)를 잡판으로, 홍도(洪刀)를 수로군사로, 마일(馬日, 일지의 아들)을 신리장군으로 삼았다.

四月 上謂言只所聖人 曰 “爾神靈乎” 曰 “靈未知也 只言只也” 上曰 “何謂言只” 曰 “言只卽發不二也 不拘驗 不驗也” 上曰善 乃賜聖人爵阿飡 先是 有白亥祠 在神林池中 有兩白亥與七鷄爭技 俗傳不可 使外人見之 權妻之不及寵者 多生私子 皆委於祠主 育爲鷄亥 上幼時爲侮 所引常觀其枝 及長 護其祠 至是 知其鷄亥 多私宮人 欲誅之 召其聖人試之 聖人不諱直言 上嘉之乃止 遂以其祠爲言只所
4월 왕이 언지소(言只所)성인에게 까닭을 말하기를 “너는 신령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언지소의 성인)이 말하기를 “신령은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언지(言只)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 언지를 설명하겠느냐”고 물었다. (언지소의 성인이) 말하기를 “언지는 곧 두 가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는 경험은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고 하며 이에 (언지소) 성인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앞서 신림지(神林池)중에 백해사(白亥祠)가 있었는데, 백해(白亥)와 칠계(七鷄)가 있어, 양쪽이 기예를 겨루었는데, 세속에는 전하지 아니하고 바깥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였다. 권처(權妻) 중에서 총애를 받는 자가 사자(私子, 私通해서 낳은 자식)를 낳은 자가 많아 모두 사주(祠主)에게 맡기어 계도(鷄徒), 해도(亥徒)로 키웠다. 왕이 어렸을 때는 업신여겼으나, 이곳으로 끌려와 항상 그 기예를 관찰하였다. 장성함에 이르자 그 사당을 보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계도와 해도의 (기예를) 알게 되었다. 궁인들과 사사로움이 있어 목을 베려하였으나, 그곳의 성인을 불러 시험하였다. 성인은 직언하기를 기피하지 아니하니 왕이 기뻐하며, 이에 그치도록 하였다. 드디어 그 사당을 언지소(言只所)라고 불렀다.
≪견해≫ 언지(言只)의 의미를 더 알고 싶으면, 위화진경초를 살피기 바랍니다.

命馬政大頭 賜治疫藥師十二人 大白馬
마정대두에게 역병을 치료한 약사 12명에게, 대백마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十年 正月 翌宗伊飡 狗日稟主 昕連水路 洪刀京路 玉權西路 莫兮北路 逸聖南路 雄宣護城 林權爵阿飡
10년(A.D.168) 정월 익종(翌宗)을 이찬으로, 구일(狗日)을 품주로, 흔련(昕連)을 수로로, 홍도(洪刀)를 경로로, 옥권(玉權)을 서로로, 막혜(莫兮)를 북로로, 일성(逸聖)을 남로로, 웅선(雄宣)을 호성으로, 임권(林權)에게 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二月 築大甑山城 以屛旨爲城主 汗門之子也
2월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 병지(屛旨)를 성주로 삼았는데, 한문(汗門)의 아들이다.

三月 言只所聖人果多黑齒爲阿飡 群臣爭之 上曰 “爾等不知 其骨品 朕獨知人” 以爲獨知阿飡 盖爲鳥好大母之私子故也
3월 언지소(言只所) 성인 과다흑치(果多黑齒)를 아찬으로 삼았다. 군신들이 따지었다.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그 골품을 모른다. 짐이 홀로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독지아찬(獨知阿飡)이라 불렀다. 모두 조호대모鳥好大母의 사자(私子, 사적인 아들)인 까닭이다.

汗門爲神籬將軍
한문(汗門)을 신리장군으로 삼았다.

四月 野人加乙五古等 以爲厚福太子之命 奪我船舶 昕連縛獻至 未幾野人大至 皆爲昕連所敗
4월 야인(野人) 가을오고(加乙五古) 등이 후복태자(厚福太子)의 명으로 우리의 선박을 빼앗았다. 흔련이 (가을오고 등을) 결박하여 바쳐 이르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야인들이 크게 이르렀다. (야인들) 모두는 흔련에게 패배함을 당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0년 기사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대증산성을 쌓았다.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견해≫ 135년 9월 기사와 위의 기사가 연관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상장돈장에서 후복(厚福)은 유리이사금과 아혜의 아들이라 하였다.

七月 逸聖京路 洪刀南路 先是 上酷愛逸聖 至是譴出 旋入
7월 일성(逸聖)을 경로로, 홍도(洪刀)를 남로로 삼았다. 이전에 왕이 일성을 매우 총애하였는데, 이때에 꾸짖으러 나갔다가, 돌아왔다.
≪견해≫ 일성이사금이 어디로 가서 꾸짖고 왔는지 구체적인 명시가 없으나 위의 4월의 기사와 연관된다고 판단된다.

十一月 以扶余骨女加利爲五品權妻 克乃爲七品權妻 加利皃美而善生子 上寵愛之 呼以羊介 言其善生而美也 以外女爲權妻 自加利始
11월 부여의 골녀 가리(加利)를 5품권처로, 극내(克乃)를 7품 권처로 삼았다. 가리를 용모가 아름답고, 좋은(기준에 합당함) 아기를 낳았다. 왕이 총애하였다. 부르기를 양개(羊介)하고 하였는데, 기준에 합당한 아기와 아름다운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부터 외부에서 온 여자들 중 권처로 삼은 것은 가리가 시작이다.

以上女臼君爲阿瑟羅女主
왕의 딸 구군(臼君)을 아슬라(阿瑟羅) 여주(女主)으로 삼았다.

十一年 正月 大公伊飡 艾水稟主
11년(A.D.169) 정월 대공(大公)을 이찬으로, 애수(艾水)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大惠生上女 難之 上與醫頭臨之 曰 “姊以吾故受苦 朕甚悶之” 惠曰 “是妾初有之大慶 何辭小難乎” 乃名不避
2월 대혜(大惠)가 왕의 딸을 낳으며 어려워하였다. 왕이 의두(醫頭)와 함께 대면하여 말하기를 “누나는 나로 인하여 고통을 받았는데, 짐이 그것을 심히 번민하였다”라고 하였다. 대혜가 말하기를 “첩에게 있어 처음 있는 큰 경사인데 어찌 작은 어려움을 사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름을 불피(不避)라 지었다.

三月 上謂果多黑齒 曰 “聖人亦盜乎” 齒曰 “盜矣 其盜大 而難見 王者亦盜乎 曰盜矣 其盜小 而難見” 上曰 “何謂小乎” 曰 “王者天下之主 故慾無 不行而不及於小 故夢盜之也” 上曰 “善 吾於羊介然矣 先今之時 吾欲羊介 而夢盜之 今尙夢之 王者尙如此 况庶人乎” 乃命放中外盜囚 齒曰 “徒放之則 習而助惡臣 請聚而育之” 乃名其村曰盜村 方言奴小馬路 以果多黑齒爲奴小馬路村主 於是 盜窃乃息仁賢之風 復起
3월 왕이 과다흑치(果多黑齒)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성인 역시 도둑인 것이 로구나”라고 하였다. 흑치가 말하기를 “(성인 역시) 도둑이도다. 그 훔침이 크면 보이지 않고, 왕자(王者, 임금) 역시 도둑이로다. 훔친 것이 작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 작다고 말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흑치가) 말하기를 “임금은 천하의 주인으로, 그런 연유로 욕심이 없고, 작은 것에도 미치어 행하지 아니합니다. 그런 연유로 꿈에서 도둑질을 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옳도다. 나는 양개(羊介, 가리)에게 그러하였다. 선금(先今, 파사이사금)의 재위 시에 나는 양개를 바래서 꿈에서 양개를 훔쳤는데, 지금도 오히려 그것을 꿈꾼다. 임금이 오히려 이러할 진데 하물며 서민(庶人, 백성)은 어떠하겠는가”하고 하였다. 이에 나라안팎의 갇혀 있는 도적들을 풀어주기를 명하였다. 흑치가 말하기를 “(도적의) 무리를 풀어주면 되풀이하여 나쁜 신하들을 도와주게 되므로, 모아서 교육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촌의 이름을 도촌(盜村)이라 하고, 방언(方言)으로 노소마로(奴小馬路)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과다흑치를 노소마로촌주로 삼았다. 이때부터 도둑무리에게서 이에 어질고 착한사람들이 바람이 숨쉬어 다시 일어났다

七月 上聞勾利將侵扶余 謂角干昌永 曰 “扶余乃吾兒之外祖 有脣齒之係 安可坐見” 乃發西北路精兵一萬進 至甘買坪 余王聞之感謝 曰 “吾婿有義 兩國賴安” 乃犒大享將卒 而交歡 勾利竟不至 留一月 而歸
7월 왕이 구리(勾利)가 장차 부여(扶余)를 침략하고자 한다는 소리를 듣고, 각간 창영(昌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여는 나의 자식의 외조부로, 입술과 이빨의 관계(순망치한)가 있는데 어찌 앉아서 지켜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이에 서북로 정병 1만을 보내어 감매평(甘買坪)에 이르렀다. (부)여왕이 소식을 듣고 감사하여 말하기를 “나의 사위가 의리가 있구나. 양국이 의지하여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잔치를 벌여 장졸들을 먹이고 서로 기뻐하였다. 구리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는 위의 기사가 없다.

十月 扶余召文遣使 入朝獻貢
10월 부여와 소문(召文)이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견해≫ 소문국이 백제와 같이 입조를 한 듯 하다. 현재의 경남 의성은 신라 6부중의 한 곳이 아닐까?

十二年 正月 彡胡伊飡 勿治稟主
12년(A.D.170) 정월 삼호(彡胡)를 이찬으로, 물치(勿治)를 품주로 삼았다.

四月 大風 自東海突至 折木飛尾 以爲野賊大至 避遁者連野 翌宗等搜 其訛者示于民 禁止而不聽 至夜風靜而天晴 民心方安 是日 上在樓上 遙望 冥沙之中有一隊 扶護老弱 鎭民勿動 使人視之 乃盜村人也 召而問之 皆曰 “臣等犯法已重 不可保 有而賴聖德再生 願以已死之身 欲以死報 故不避水火也” 上歎曰 “人心本善 因其所遭 以爲惡也明矣” 爲其牧者 可不愼乎 命各賜酒 捀其少壯者 屬于兵官隸吏 老者待以老隸 命給肉米 乃詔于天下 曰 “夫夷村之人 効死如此 况他赤子乎 朕德薄不廣被 不知爾等之疾苦 今置問民之吏 于中外 凡有憂若者 勿諱直言 如幼子之訴母可也” 六部聞之 大洽曰 “先神降臨 云爾”
4월 큰 바람이 동해로부터 갑자기 이르러 나무가 꺾이고 꼬리털이 날렸다. 이것을 야적(野賊)들이 크게 이르렀다고 하여, 피하고 숨는 사람들이 들판으로 이어졌다. 익종(翌宗) 등이 찾아서 그릇되었음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금지시켰으나 (백성들이) 듣지 아니하였다. 밤이 되자 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이자, 바야흐로 민심이 평안해졌다. 이날 왕이 망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있으니, 명사(冥沙)의 가운데에 한 무리가 노약자를 곁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백성들을 진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아랫사람으로 하여 조사하게 하니, 곧 도촌(盜村)의 사람들이었다. (왕이) 불러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신들은 이미 죄가 중하여 지킬 수 없습니다. (왕의) 성덕에 의지하여 다시 태어났으니, 이미 한번 죽은 몸 죽음으로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물불도 가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본성은 비록 착하지만, 그 둘레에 있었던 이유로 악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그 목자(牧者)로 하여금 가부를 신중히 하도록 하였다. 각자에게 술을 주도록 명하고, 젊은 장정들은 뽑아서 병관과 예리(隸吏)에 속하게 하고, 늙은이는 노예(老隸)로 대우하도록 하였다. 고기와 쌀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에 천하에 조서를 내려 “사내가 도촌(盜村) 사람은 이와 같이 죽기를 본받아라. 하물며 다른 곳에서 온 백성들은 어떠하겠는가. 짐의 덕이 엷어 넓게 덮지 못하니 너희들의 질병과 고통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나라 안팎에 백성의 소리를 듣는 관리를 두니, 무릇 근심이 같은 것이 있는 자는 직언을 기피하지 말라. 어린 아이의 하소연과 어미(여자)도 이와 같이 가능하다”라고 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흡족하여 말하기를 “선신(先神)이 내려와 대면했다면 너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七月 大蝗傷穀 上與愛后三母 祭農神 于南郊
7월 큰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과 애후와 삼모가 남교(南郊)에서 농신(農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1년 기사
11년 4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렸다. 바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으며,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十二月 理方大師白石奏 曰 “三年不熟 今年最大饑 盜村之初 不過三百人 民知王化 而稍減 今年七月以後 盜村新加者 已過千人 各地問民所 所養盜民 亦過千人 養民如養子溺愛 反有不好 請以輕罰施之” 上不許 曰 “年兆在朕不德 民何罪乎” 乃自罰而訴天 京民聞 而相戒多 有感泣者
12월 이방대사 백석(白石)이 아뢰어 말하기를 “삼년동안 (곡식이) 익지 않았는데 올해는 최대의 굶주림이 있습니다. 처음에 도촌(盜村)은 300명이 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임금의 덕에 감화되어 점점 줄어들었는데, 금년 7월 이후로 도촌에 새로 늘어난 자가 이미 천명을 넘었으며, 각지의 문민소(問民所0에 부양하고 있는 도민(盜民)들이 또한 천명을 넘었습니다. 백성을 회유함에 자식을 기르는 것처럼 사랑에 빠져있으니, 반대로 좋아하지 않은 자가 있으니, 가벼운 벌을 베풀어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아니며 말하기를 “올해의 조짐은 모두 나의 부덕이다. 어찌 백성들에게 죄가 있겠느냐”라고 말하였다. 이에 스스로 벌을 내리기를 하늘에 하소연하였다. 서울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서로 주의하고 조심하는 자가 많았으며, 감동하여 우는 자가 있었다.

十三年 正月 復以伊飡爲伊伐飡 尺飡爲伊飡 置五品伊飡 兵官爲一品 主兵馬刑獄大等爲二品 主讌享吉事骨門爲三品 主骨品敎事神官爲四品 主祭祀理方護城爲五品 主工作護衛又置閒位伊飡三人 以補不時伊飡 皆置匝判 以輔之 定五路軍事之位 以水路爲上 復名以波珍飡 京西南北爲四道將軍 以京南爲左軍 西北爲右軍 有頭上 如故左右頭上 車騎大師位 齊波珍飡 皆屬兵官伊飡 匝判之下 皆置韓飡 阿飡以統其務 一新舊制
13년(A.D.171)정월 이찬(伊飡)을 다시 이벌찬(伊伐飡)으로 하였다. 척찬(尺飡)을 이찬(伊飡)으로 하고, 이찬의 품계를 다섯으로 하였다. 병관(兵官)을 1품으로, 주(업무)가 병마(兵馬), 형옥(刑獄), 대등(大等)은 2품으로, 연향(讌享), 길사(吉事), 골문(骨門)은 3품으로, 골품(骨品), 교사(敎事), 신관(神官)은 4품으로, 제사(祭祀), 이방(理方), 호성(護城)을 5품으로 하였다. 공작(工作), 호위(護衛), 또 한위(閒位) 이찬 3명을 두었다. 이로써 불시에 이찬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모두 잡판을 두어 보좌하도록 하였다. 오로군사(五路軍事)의 위계를 정하여, 수로를 으뜸으로 하여 다시 파진찬(波珍飡)으로 부르게 하고, 경서남북(京西南北)을 사도장군(四道將軍)으로 하여, 경남(京南)은 좌군(左軍)으로, 서북(西北)은 우군(右軍)으로 하여 두상(頭上)을 두어 옛날 좌우두상(左右頭上)과 같이 하였다. 거기대사(車騎大師)의 지위는 파진찬(波珍飡)의 지위와 나란히 하고, 모두 병관이찬(兵官伊飡)에 속하게 하였다. 잡판(匝判) 이하에는 모두 한찬(韓飡)을 두고, 아찬(阿飡)으로 그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옛 제도를 새롭게 하였다.
≪견해≫ 신라본기에는 해당 기사가 없다.

達門大母薨 春秋七十五
달문(達門)대모가 죽었는데 춘추 75세였다.

復以昌永爲伊伐飡 宮孝爲稟主 翌宗爲兵官伊飡 玉權爲大等伊飡 宮公爲骨門伊飡 永公爲神官伊飡 吉元爲護城伊飡 果多黑齒爲大道大師 妻以寡姊道生大母 上親 吉于鮑祠 道生大母 寡居以來 潛通于齒 生數子 皆爲鷄亥 至是竟以齒爲夫 骨門大駭 而宮公阿媚不爭 人皆譏之
다시 창영(昌永)을 이벌찬으로, 궁효(宮孝)를 품주로, 익종(翌宗)을 병관이찬으로, 옥권(玉權)을 대등이찬으로, 궁공(宮公)을 골문이찬으로, 영공(永公)을 신관이찬으로, 길원(吉元)을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과다흑치(果多黑齒)를 대도대사로 삼아 과부인 누나 도생(道生)대모을 처로 삼게 했다. 왕이 친히 포사(鮑祠)에서 결혼을 주재하였다. 도생대모가 과부로 살았을 때부터 (흑)치와 잠통(潛通, 결혼하지 않고 동거함)하여 자식을 여러 명 낳아 모두 계도와 해도로 보냈다. 이 때에 이르러 드디어 흑치를 남편으로 삼았다. 골문(骨門)이 소란스러웠는데 궁공(宮公)이 아첨하여 따지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그것을 꾸지람하였다.

三月 以稟主宮孝爲春宅大母 自此非四宅大母 則命不得爲稟主 令阿飡以上 正吉之妻 分隸四宅 以爲四節入侍 又置洗宅 于內掌 骨門改過 以逸聖爲洗宅大師
3월 품주 궁효(宮孝)를 춘택대모(春宅大母)로 삼았다. 스스로 이에 4택대모(四宅大母)가 그르다 하여, 곧 품주로 삼는다는 명(命)을 얻지 못하였다. 령(令)으로 아찬이상 정길지처(正吉之妻)는 4택에 나누어 속하게 하여, 이로써 4계절 들어와 (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또 내당(內掌)에 세택(洗宅)을 두어, 골문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였다. 일성(逸聖)을 세택대사(洗宅大師)로 삼았다.

野人遣使 請和 許之
야인(野人)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肥皇生女愛皇 上洗之
비황(肥皇)이 딸 애황(愛皇)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四月 霜隕害桑 蚕母會 禱北川
4월 서리가 내려 뽕나무가 해를 입었다. 천모(蚕母)가 북천(北川)에 모여 기도를 하였다.

以護城大師爲護城將軍 命彭公爲之
호성대사(護城大師)를 호성장군(護城將軍)으로 바꾸었다. 팽공(彭公)을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2년 기사
12년 3월 왜국과 강화하였다.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 금성 동쪽 민가가 내려 앉아 연못이 되었고, 그 곳에 연밥이 생겼다.

五月 置靑淵宮 掌後宮事 以洗宅大師逸聖爲翁
5월 청연궁(靑淵宮)을 설치하여 후궁에 관한 일을 맡겼다. 세택대사 일성을 (청연)옹으로 삼았다.

大井東門外 有貧民屋 陷爲池 芙蕖自生 命立芙蕖祠 以禳之
대정 동문 밖에 빈민의 집이 있었는데 무너져 연못이 되었다. 연꽃이 스스로 피어났다. 부거사(芙蕖祠)를 세우도록 하고, 푸닥거리 하도록 하였다.

汗門護城伊飡 吉元大等伊飡 玉權貶爲水路
한문(汗門)을 호성이찬으로, 길원(吉元)을 대등이찬으로, 옥권(玉權)을 낮추어 수로로 삼았다.

九月 召文景王太子 來朝言 其兄崇德好色 不理政事 太子允明 自昨冬得 專國政 以好妙爲妻 好妙淫奢 大起土木 國人苦之 請以上國命制之 上曰 “好色人之常情也 太子代政 爲妻起宮 未嘗得罪於朕 朕何言乎” 景王不悅 而去
9월 소문(召文) 경왕태자(景王太子)가 입조하여 말하기를, 그 형 숭덕(崇德)이 호색하고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태자 윤명(允明)이 작년 겨울부터 (정권을) 얻어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하고, 이로써 호묘(好妙)를 처로 삼았는데, 호묘가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켜, 나라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상국(上國)의 명으로 제어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호색(好色)은 인지상정이다. 태자가 정치를 대신하고, 처를 위하여 궁을 세운 것이다. 일찌기 짐에게 죄를 지은 바 없으니, 짐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경왕(景王)이 기뻐하지 아니하며 돌아갔다.

十月 馬知那爲伊伐飡 翼宅大母兪生爲稟主
10월 마지나(馬知那)를 이벌찬으로, 동택대모 유생(兪生)을 품주로 하였다.

十一月 多婁爲理方大師 妻以上女暖花
11월 다루(多婁)를 이방대사로, 왕의 딸 난화(暖花)를 처로 삼게 하였다.

十四年 正月 北路將軍飛報 末曷數十隊出獵我境 殺掠吏民 故捕其酋三人獻之 上命莫兮深入賊窟 掃蕩餘賊
14년(A.D.172) 정월 북로장군(北路將軍)이 말갈 수십 대(隊)가 우리의 국경으로 사냥을 나와서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거나 노략질하였다고 비보(飛報, 아주 빨리 보고함)를 전했다. 그런 이유로 말갈추장 3인을 붙잡아 바쳤다. 왕이 막혜(莫兮)에게 적의 소굴로 깊숙이 들어가 남은 적을 소탕(掃蕩)하도록 명하였다.

三月 以阿道爲大調大師 以掌財用 能知爲位和大師 掌貢擧
3월 아도阿道를 대조대사(大調大師)로 하여 재용(財用, 재물의 씀씀이)를 맡기고, 능지(能知)를 위화대사(位和大師)로 삼아 공거(貢擧, 재능 있는 시골자제를 뽑아서 서울로 올리는 일)를 맡겼다.

水酒太守樊五卒 以碧公代之
수서태수 번오(樊五)가 죽어, 벽공(碧公)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七月 末曷諸酋 分途入寇 大嶺柵主漢己 失守 賊大至泥河 人心洶洶 莫兮請救於扶余 扶余遣五將軍 助之 賊聞風 而退潰
7월 말갈의 모든 추장들이 길을 나누어 들어와 도둑질하였다. 대령책(大嶺柵) (성)주 한기(漢己)가 지키지 못해 (말갈)적이 니하(泥河)에 이르러 인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막혜(莫兮)가 부여에 구하기를 청하여, 부여가 5명의 장군을 보내어 도왔는데 (말갈)적이 그 풍문(소문)을 듣고 퇴각하여 흩어졌다.
≪비교≫ 1.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4년 기사
14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2. 백제본기 기루왕 49년 기사
49년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글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
≪견해≫ 169년 7월의 기사와 연결되고, 백제 기루왕 기사와 연결된다.

朶山主謁郞卒 子成繼之
타산(朶山) (성)주 알랑(謁郞)이 죽어, 자성(子成)이 이었다.
≪견해≫ 175년 5월 기사에 죽었다던 알랑(謁郞)의 기사가 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九月 以上女淡理爲馬公妻 行吉 鮑祠 上女密華妻吉元 同日 行吉 密華初嫁馬公 好淫 馬公棄之故也
9월 왕의 딸 담리(淡理)를 마공(馬公)의 처로 하여, 포사에게 결혼을 했다. 왕의 딸 밀화(密華)는 길원에게 같은 날 시집을 보냈다. 밀화는 처음에 마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음란함을 좋아하여(바람을 피워), 마공이 밀화를 버린 까닭이다.
≪견해≫ 밀화와 길원은 길선의 부모다. 백제왕기 구지왕 39년(226년)에 사망기사가 있는데 당시 나이가 55세라고 하였으니, 길선은 A.D.172년에 태어났다는 뜻으로, 이 때에 길선을 임신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十五年 正月 仇鄒太子伊伐飡 味生稟主 吉元兵官伊飡 逸聖護城伊飡 雄宣京路將軍
15년(A.D.173) 정월 구추태자(仇鄒太子)를 이벌찬으로, 미생(味生)을 품주로, 길원을 병관이찬으로, 웅선(雄宣)을 경로장군으로 삼았다.

骨老康造太子獻宝玉 于班君太子 盖始祖所遺 而吐解傳 于康造也 翠色而刻雙鳳 飾以黃金 紅玉者也 持此則長壽 而太平 班君多疾 故人勸康造獻之
골노(骨老) 강조(康造)태자가 보옥(宝玉)을 반군(班君)태자에게 바쳤다. 하늘나라 시조가 남기어, 토해(吐解)에게 전해져 강조에게 온 것이다. 취색(翠色, 비취색)으로 두 마리의 봉황을 새기고, 황금으로 장식한 홍옥(紅玉, 붉은 옥)이다.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장수하고 태평하다고 하였다. 반군태자는 질병이 많았는데 그런 까닭으로 (주변) 사람들이 강조태자에게 권하여 (반군태자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견해≫ 이 보옥이 반군태자 사후에 함께 묻혔는지를 알 수 없으나, 만약 묻혔다면 생몰년과 질병에 대하여 자세하므로 무덤의 주인을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반군태자의 생몰년은 156.10~181.4(壽 26)이다.

五月 太聖崩 于奈歷 葬于蛇陵門內
5월 태성(太聖, 사성)이 내력(奈歷)에서 죽어 사릉문(蛇陵門) 안에 장사를 지냈다.

八月 以馬知那女所松爲班君太子妃 行吉 神井
8월 미지나(馬知那)의 딸 소송(所松)을 반군(班君)태자의 비로 삼고, 신정(神井)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十月 以馬公爲太子兵官
10월 마공(馬公)을 태자병관으로 삼았다.
≪견해≫ 마공은 파사와 미례 사이에 태어났으므로, 지마와는 아버지가 같은 형제이고, 지마의 처인 애후와는 어머니가 같은 형제가 된다. 왕과 왕후의 최측근이라는 뜻이다.

十六年 正月 吉元伊伐飡 密華稟主
16년(A.D.174) 정월 길원(吉元)을 이벌찬으로, 밀화(密華)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上姊道生大母生 孿子三人 氣盡而薨 春秋五十三 上痛哀之 以聖母禮葬之 群臣爭其濫禮 而上竟不聽 道生溫美 善於滋味 上自幼愛之 呼以小母 曰 “愛我之甚 唯史母 道母爲最” 道生初 爲先今權妻 生女我生 甚美 上太子時 娶之爲妃 極愛之 生女布生 而早崩 是爲北川神 以此上尤愛 道生及許婁妃 連生子女 上視如慈母 許婁薨 爲摩帝妃 寡而引黑齒 生私子 竟以齒爲夫 齒以此騰寵官 至大阿 至是生其三孿 而薨 上以爲多功 于聖躬 從黑齒之言 立其祠 曰白鷄祠 尊道生爲白鷄聖母 以黑齒爲 靑亥大神 爾生女 福生妻之 實上女也 是爲赤鷄神母 是年十八 美名喧傳 數年之 問鷄奚之徒 彌滿國中 道生之女 皆爲黑齒之妾 骨女又多獻身爲福 黑齒之子 以百數 識者憂之 而不敢言
2월 왕의 누나 도생(道生)대모가 셋 쌍둥이를 낳고 기운이 다하여 죽었는데 춘추 53세였다. 왕이 도생대모의 죽음을 애통해 하여 성모의 예로 장사를 지냈는데 군신들이 넘치는 예를 따졌으나, 왕이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도생은 온자하고 아름답고, 몸에 좋은 음식을 잘 만들었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도생대모를 사랑하여 소모(小母)라 부르며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사모(史母, 사성)가 있다 할지하고, 도모(道母, 도생)가 최고다”라고 하였다. 도생은 처음에 선금(先今)의 권처가 되어 딸 아생(我生)을 낳았는데, 심히 아름다웠다. 왕이 태자일 때 아생과 결혼하여 비(妃)로 삼았고, 사랑함이 끝이 없었는데 딸 포생(布生)을 낳고 일찍 죽었다. 이분이 북천신(北川神)이다. 이 때문에 왕이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도생이 허루의 비가 되자 연이어 자녀를 낳음에도, 왕은 (여전히) 자모(慈母, 친어머니)로 보였다. 허루가 죽자 마제(摩帝)의 비가 되었다. (마제가 죽자) 과부의 몸으로 흑치(黑齒)를 끌어당기어 사자(私子)를 낳고, 끝내 흑치를 남편으로 삼았다. 흑치는 이처럼 총애를 받는 궁주의 (신임을) 타고 대아(찬)에 이르렀다. 이 때에 셋 쌍둥이를 낳고 죽었다. 왕이 성궁(聖躬, 임금의 몸)에 공로가 많다고 하여, 흑치의 말을 쫓아 사당을 지어 백계사(白鷄祠)라고 하였다. 도생을 높이어 백계성모(白鷄聖母)라 하고, 흑치를 청해대신(靑亥大神)이라 하였다. 도생의 딸 복생(福生)을 처로 삼았다. 실제로는 왕의 딸이다. 이분이 적계신모(赤鷄神母)다. 당시 나이 18세로, 아름다운 이름이 떠들썩한지 수년이어서, 계도(鷄徒)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 무리가 나라 안에 가득하였다. 도생의 딸들은 모두 흑치의 첩이 되었으며, 골녀(骨女) 중에 몸을 바치는 일을 복(福)으로 삼는 이가 많아, 흑치의 자식이 백여 명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걱정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五月 支所禮角干薨 其妻毛利 請以其財盡歸逸聖 許之 支所禮沈毅 有大略 有功于國 而未嘗自矜 自上卽位 廉退不進 其妻毛利年少 以公爲老 愛上寵臣逸聖 事之如夫 支所禮不妬尋常 人以爲難 至是毛利 以其田宅奴婢 悉屬逸聖 加亥之子 無所得 人多非之
5월 지소례(支所禮) 각간이 죽었다. 그 처 모리(毛利)가 그 재산을 일성에게 모두 바치고 귀의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지소례는 성냄을 가라앉히고, 뛰어난 계략이 있어, 나라에 공이 많았다. 일찍이 자랑하지 않고, 왕이 즉위한 이래로 옆으로 물러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처 모리의 나이가 어리고, 공(公, 지소례)의 나이가 많아,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일성을 사모하여, 남편처럼 섬기었다. 지소례가 시새움하지 않고 예사롭게 여겼다. 사람들은 비난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리가 논밭과 집, 노비를 일성에게 모두 부탁하였다. 가해(加亥)의 자식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그르다 하였다.

七月 甘文太子五九馬入朝 賜爵一吉飡
7월 감문(甘文)태자 오구마(五九馬)가 입조하여, 일길찬의 작위를 내렸다.

九月 毛利以其女只珍內禮爲逸聖密妻 請與上 自主 其吉 許之
9월 모리(毛利)가 그녀의 딸 지진내례(只珍內禮)를 일성의 밀처(密妻)로 삼았다. 왕과 자신이 혼사를 주재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견해≫ 일성과 지진내례는 아달라이사금의 부모다. 특히 지진내례는 석추와 사이에 벌휴이사금을 낳는다. 박씨에서 석씨로 왕성이 변환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지진내례의 출생기사와 사망 당시 나이 표기가 없으나, 어머니 모리는 140년 7월생, 아들 아달라이사금은 180년 9월생, 당시 초혼이 15~18세 정도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략 160년 전후로 추정된다.

十七年 正月 彡胡伊伐飡 勿治稟主 逸聖爲兵官伊飡 多婁爲護城將軍 彭公爲大理大師 穀公爲大農大師
17년(A.D.175) 정월 삼호(彡胡)를 이벌찬으로, 물치(勿治)를 품주로, 일성(逸聖)을 병관이찬으로, 다루(多婁)를 호성장군으로, 팽공(彭公)을 대리대사로, 곡공(穀公)을 대농대사로 삼았다.

三月 愛后生上孿子 皆男如玉 上喜甚洗之 曰 “如洗玉人” 乃名左玉右玉 加愛后金寶大冠 八寶翟衣
3월 애후가 왕의 쌍둥이를 낳았는데, 모두 남자아이로 옥처럼 피부가 희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아기들을 씻기며 말하기를 “옥인(玉人)을 씻기는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이름 짓기를 좌옥(左玉), 우옥(右玉)이라고 하였다. 애후에게 금보대관(金寶大冠)과 팔보적의(八寶翟衣, 8가지 보물로 만든 깃옷)를 더하였다.
≪견해≫ 애례의 사후에 금관이 부장되었을 것을 가정하여 생몰년(140.3~199.8, 壽60)을 참고해 주시기 바라며, 지마이사금과 일성이사금의 陵에 분골하여 묻혔다고 합니다.

四月 命能知擧 六藝之士 于國中 凡有一枝者 勿拘骨品 特爲拔擢
4월 능지(能知)에게 나라 안에서 여섯 가지 기예를 가진 인사를 추천하도록 명하였다. 무릇 한 가지의 기술을 가진 자라도 골품에 구애받지 않고, 특별히 발탁하도록 하였다.

甘文太子旭亥入朝 妻以七利公主
감문(甘文)태자 욱해(旭亥)가 입조하여, 칠리(七利)공주를 처로 삼게 하였다.

五月 執公爲大農大師 韓達爲大倉大師 毛公爲大藥大師 白石爲大乘大師 謁郞爲引導大師 干治爲宅城大師
5월 집공(執公)을 대농대사(大農大師)로, 한달(韓達)를 대창대사(大倉大師)로, 모공(毛公)을 대약대사(大藥大師)로, 백석(白石)을 대승대사(大乘大師)로, 알랑(謁郞)을 인도대사(引導大師)로, 간치(干治)를 택성대사(宅城大師)로 삼았다.

七月 上與愛后巡狩 至氷山 會崇德妙后 而還
7월 왕과 애후가 돌면서 사냥을 하다가 빙산(氷山)에 이르러 숭덕과 묘후를 만나고 돌아왔다.
≪견해≫ 경남 의성에 빙산사지오층석탑이 있으며, 소문국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 많다. 그러나 소문국의 본래의 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소문국의 멸망 후 자손들을 京都에 안치한 기록을 보면 의성군이 신라 6부중의 하나 일 수도 있겠다.

十八年 正月 玉權伊伐飡 羊皇稟主
18년(A.D.176) 정월 옥권(玉權)을 이벌찬으로, 양황(羊皇)을 품주로 삼았다.

角干昌永薨 永以樂浪外孫 早侍于上 極盡其忠 上亦信寵之 驟騰上相 有經世之才 人皆屬望酒色 濫度而遽薨 上痛惜之 命厚葬之 以其妻特爲三品權妻 子宮世爲護城兵官 永專寵以來 務樹己黨 殉之者甚多 樂浪君備乃 其女宮巳之夫也 聞喪 而不食三日
각간 창영(昌永)이 죽었다. (창)영은 낙랑(樂浪)의 외손이다. 일찍이 왕을 모심에 극진히 충심을 다하였고, 왕 역시 믿음과 총애가 있어 뛰어 나는 듯이 최고의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로, 사람들은 모두 주색을 바라는 바가 있으나, 도가 지나쳐 갑자기 죽었다. 왕이 아파하고 아까와 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루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그 처(궁효)를 특별히 3품 권처로 삼고, 아들 궁세(宮世)를 호성병관으로 삼았다. (창)영이 왕의 총애를 오로지 한 이래로 자신의 무리를 심으려 힘썼으며, 따라 죽으려는 자가 많았다. 낙랑군 제내(備乃)의 창영의 딸 궁사(宮巳)의 남편이다. 창영의 상(喪)을 듣고 3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8년 기사
18년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四月 大閱 軍馬 于京都
4월 경도(京都)에서 군마를 사열하였다.

七月 小光公自召文還 公上之秘子也 入召文七年學琴 通其神曲 命掌音聲 其母道生臨崩 欲見而召之 公以學未就 不歸 至是以阿母曲獻 于白鷄祠
7월 소광공(小光公)이 소문(召文)으로부터 돌아왔다. 공은 왕의 비자(秘子)다. 소문으로 들어와 7년 동안 거문고(혹은 가야금)를 배웠다. 그 신비스러운 곡(曲, 가락)을 통(通)하여 음성(音聲, 소리)에 관한 일을 맡기도록 명하였다. 그 어머니 도생이 죽음에 임하여 보기를 원하자 공을 불렀으나, 공이 아직 배움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아모곡(阿母曲)을 백계사(白鷄祠)에 바쳤다.

九月 所松生 班君女粉生 上與愛后臨洗 賜米
9월 소송(所松)이 반군(班君)의 딸 분생(粉生)을 낳았다. 왕과 애후가 아기를 씻기고, 쌀을 내려주었다.

十一月 宮公伊伐飡 宮孝稟主
11월 궁공(宮公)을 이벌찬으로, 궁효(宮孝)를 품주로 삼았다.

十九年 正月 以莫兮爲右軍頭上 洪刀西路 雄宣南路 碩孝北路 有禮京路 艾老爲護城將軍 多可西母 骨花南母 圓阿北母 雲生京母 碩孝以宮孝之胞弟也 自理方特授閫任 有禮以愛后寵弟 娶上秘女最有寵幸 識者憂其非人
19년(A.D.177) 정월 막혜(莫兮)를 우군두상으로, 홍도(洪刀)를 서로, 웅선(雄宣)을 남로, 석효(碩孝)를 북로, 유례(有禮)를 경로, 애노(艾老)를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다가(多可)를 서모, 골화(骨花)를 남모, 원아(圓阿)를 북모, 운생(雲生)을 경모로 삼았다. 석효는 궁효(宮孝)의 같은 어머니 동생이다. 이방(理方)에 있을 때부터 특별이 왕후 거처하는 곳(또는 성문의 수비)을 맡았다. 유례는 애후의 총애를 받는 동생으로, 왕의 총애를 최고로 받는 비녀(秘女)에게 장가를 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됨됨이가 없음을 근심하였다.

四月 逸聖伊伐飡 其妻婁生稟主 時宮公力薦逸聖 而勇退 以媚上意 上嘉其志 特拜角干 以其子束公爲理方大師
4월 일성을 이벌찬으로, 그 처 루생(婁生)을 품주로 삼았다. 당시 궁공(宮公)이 일성을 힘써 추천하고 용퇴하였는데, 이는 왕의 뜻에 아첨하기 위함이다. 왕이 그 뜻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특별히 각간의 직위를 내렸다. 궁공의 아들 속공(束公)을 이방대사로 삼았다.

五月 以束己爲左部執書 申權爲右部執書 束己者君己之子也 其妻吐乙 私媚于逸聖 而得之 人以吐乙執書 君己溫柔 久爲私臣 束己亦善媚柔 執書乃古私臣之職也 自幼媚於逸聖 完如侍妾 申權晉公之子 而吐乙之私夫也
5월 속기(束己)를 좌부집서로, 신권(申權)을 우부집서로 하였다. 속기는 군기(君己)의 아들이다. 속기의 처 토을(吐乙)은 사사로이 일성에게 아첨하여, 직위를 얻었다. 사람들은 토을을 집서라고 하였다. 군기는 온유하여 사신의 직위에 있었다. 속기 역시 선한 아첨과 편안하게 하였다. 집서(執書)는 곧 옛 사신(私臣)의 직위이다. (속기는) 어렸을 때부터 일성에게 아첨하였는데, 완전히 시첩(侍妾) 같았다. 신권과 진공의 자식들은, 토을의 사사로운 남편이다.

九月 中外大登 行大場 于北川
9월 나라 안팎에 곡식이 가득 찼다. 북천(北川)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始置大書省 掌明活書豆乙書符書 以束己執書爲其頭 以文父斗胡爲左右大書
처음으로 대서성(大書省)을 두어 명활서(明活書), 두을서(豆乙書), 부서(符書)를 맡겼다. 속기집서(束己執書)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문부(文父)와 두호(斗胡)를 좌우대서(左右大書)로 삼았다.

加耶君阿修立
가야군 아수(阿修)가 섰다

二十年 正月 愛后生上女金女 爲之延朝
20년(A.D.178) 정월 애후가 왕의 딸 금녀(金女)를 낳아, 조회를 연기하였다.

三月 以逸聖女達亥南君太子妃 上主吉 鮑祠
3월 일성의 딸 달해(達亥)를 남군태자비(南君太子妃)로 삼았다. 왕이 포사에서 혼사를 주재하였다.

四月 逸聖請免 不許 以汗門爲兵官伊飡
4월 일성이 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한문(汗門)을 병관이찬으로 삼았다.

置大日任典 掌社稷之神 以大光公爲其都頭
대일임전(大日任典)을 두어 사직의 신(神)에 관한 일을 맡겼다. 대광공(大光公)을 그 도두(都頭)로 삼았다.

五月 大雨水 民戶漂沒者甚多 命艾老築防 以備不虞 使申權巡問 恤民
5월 큰 비가 내렸다. 민가가 떠내려가거나 잠긴 집이 심히 많았다. 애노(艾老)에게 제방을 쌓도록 명하여 근심함이 없도록 대비하였다. 신권(申權)으로 하여금 어루만지며 (질병과 고통) 묻도록 하고 백성을 구휼하였다.

天門伊伐飡 暖花稟主
천문(天門)을 이벌찬으로, 난화(暖花)를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20년 기사
20년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물에 잠겼다.

十月 行白鷄祠大祭 上親臨之
10월 백학사(白鷄祠)에서 큰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친히 지켜보았다.

扶余使來朝
부여가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大角干吉元薨 其妻密華 納章公爲夫
대각간(大角干) 길원이 죽었다. 길원의 처 밀화(密華)는 장공(章公)을 거두어 남편으로 삼았다.
≪견해≫ 대각간(大角干)이라는 벼슬이 법흥왕때 처음 생긴 것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