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沾解尼今紀(첨해니금기) (A.D.310 - A.D.324:재위15년) -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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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19. 10:39
元年 正月 行白馬祭 于桃山
원년(A.D.310) 정월 도산(桃山)에서 백마제(白馬=庚午)를 행하였다.
阿爾兮后生 先今女光元公主 上洗之
아이혜(阿爾兮)후가 선금(先今, 조분)의 딸 광원(光元)공주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元昌伊伐飡 螺仁稟主
원창(元昌)을 이벌찬, 나인(螺仁)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行奈解大祭
3월 내해대제(奈解大祭)를 행하였다.
五月 行先今大祭
5월 선금대제(先今大祭, 조분)를 행하였다.
≪견해≫ 조분이 사망하지 않았음에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다.
七月 謁祖廟
7월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封骨正太子爲世神葛文王
골정(骨正)태자를 세신(世神)갈문왕으로 봉(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원년 기사
원년 7월 왕이 시조묘를 참배하였다. 그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했다.
白尺伊伐飡 學氏稟主
백척(白尺)을 이벌찬, 학씨(學氏, 내해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玉帽太后有疾 中外行禱
옥모(玉帽)태후가 병이 있어, 나라안팎에서 기도하였다.
十月 行月歌 于桃山 以慰太后
10월 도산(桃山)에서 월가(月歌)를 행하여 태후를 위로하였다.
十一月 仲解太子奉太后 入海宅
11월 중해(仲解, 첨해의 동생)태자가 태후를 모시고, 해택으로 들어갔다.
二年 正月 行白羊祭
2년(A.D.311) 정월 백양제(白羊=辛未)를 행하였다.
阿道伊伐飡 宝太稟主
아도(阿道, 제상의 祖父)를 이벌찬으로, 보태(宝太, 제상의 祖母)를 품주로 삼았다.
伊伐飡長萱 命參國政
이벌찬 장훤(長萱)에게 국정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三月 玉帽太后崩 于海宅 返葬于奈解陵 分骨于骨正陵 初足達妻雲帽 私通于仇道 而生后 異香滿室 夢見 玉耶生金花 故名玉帽 及長 美而善歌舞 十六列 于歌仙 行月歌 衆仙慕之 骨正太子引歸于宅 而幸之有娠 玉帽請爲妻 而骨微不得 欲自焚而死 伐帝乃命 骨正行吉 生助賁帝 又事奈帝 生尼今 尊爲太后 力扶召文遺臣 時人以后爲馬精 春秋七十四
3월 옥모(玉帽)태후가 해택(海宅)에서 죽어 내해릉(奈解陵)으로 장례를 되돌리고, 골정릉(骨正陵)에 뼈를 나누어 묻었다. 처음에 족달(足達)의 처 운모(雲帽)는 구도(仇道)와 사통하여 후(后)를 낳았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에서 옥야(玉耶, 석가에게 어진 아내로서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교만을 깨달은 여성?)가 금화(金花)를 낳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연유로 옥모(玉帽)라 이름지었다. 성장하면서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하여 16줄(나이 열여섯)에 가선(歌仙)으로 나아가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신선의 무리들이 옥모를 흠모하였다. 골정태자가 집으로 데리고 가서, 행차하여 임신을 하였다. 옥모가 처로 삼아주기를 청하였으나, 신분이 미미하여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불태워 죽으려 하였다. 벌제(伐帝)가 이에 골정에게 명하여 결혼을 하고, 조분제(助賁帝)를 낳았다. 또 내해제(奈解帝)를 섬겨 니금(尼今, 첨해)을 낳았다. 태후(太后)로 존중되게 되었다. 소문(召文)의 유신(遺臣)들을 힘써 도왔다. 당시 사람들이 후를 마정(馬精)이라 하였다. 춘추 74세였다.
命連檍等使 句麗結和
연억(連檍)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화친을 맺도록 명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견해≫ 옥모(玉帽)가 고구려와 화친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五月 修壤井
5월 양정(修壤)을 수리하였다.
七月 羘公伊伐飡 尺仁稟主
7월 양공(羘公)을 이벌찬, 척인(尺仁)을 품주로 하였다.
≪견해≫ 羘은 ‘日+羊’이 결합된 한자로 보이나, 같은 자를 찾을 수 없다.
三年 正月 馬侅伊伐飡 冬潛稟主
3년(A.D.312) 정월 마해(馬侅)를 이벌찬, 동잠(冬潛)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作南堂
7월 남당(南堂)을 지었다.
連白伊伐飡 良夫大書 黃音稟主
연백(連白)을 이벌찬, 양부(良夫)를 대서, 황음(黃音)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3년 기사
3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7월 남당〈남당을 혹은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양부를 이찬에 임명하였다.
四年 正月 謁白伊伐飡 秀皇稟主
4년(A.D.313) 정월 알백(謁白)을 이벌찬, 수황(秀皇, 조분과 가황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行玄鳥祭
현조제(玄鳥=癸酉)를 행하였다.
加耶君孝道 禪于其女河理智 迎宣威爲婿
가야(加耶)의 왕 효도(孝道)가 그의 딸 하리지(河理智)에게 선양을 하고, 선위(宣威)를 맞이하여 사위로 삼았다.
≪견해≫ 하리(河理)와 하리지(河理智)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모녀관계인 듯.
四月 倭獻土物 爲其太子求婚 于老戱之 ‘虜汝王爲鹽奴矣 何可婚乎’ 使怒歸 和絶
4월 왜가 토산물을 바치고, 그 태자를 위하여 구혼을 하였다.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너의 왕을 사로잡아 염전의 노예로 만들겠다. 혼사가 가당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화친이 끊어졌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3년 4월 기사에 내해의 아들 우로가 죽었다고 하므로, 우로의 아들이자 내해의 손자인 흘해가 310년에 즉위하였다고 하면 즉위 당시 이미 환갑을 넘은 노인으로써, 최소107세(우로가 사망당시 태어난 것을 가정)까지 장수한 왕이 된다. 통설 또한 우로 또는 첨해의 기사에 잘못이 있다고 본다.
≪비교≫ 1. 신라본기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2) 3년 기사
3년(A.D.249)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2. 신라본기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 머리기사
흘해이사금이 섰다. 그는 내해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우로각간이다.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七月 碧隆伊伐飡 環氏稟主
7월 벽융(碧隆)을 이벌찬, 환씨(環氏, 吳나라 여자)를 품주로 하였다.
阿爾兮后生 帝女旱元 帝洗之
아이혜(阿爾兮)후가 왕의 딸 한원(旱元)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乙弗立子釗爲嗣 南侵帶方
을불(乙弗, 미천왕)이 아들 쇠(釗, 고국원왕)를 후계자로 하고, 남쪽 대방(帶方)을 공격하였다.
≪비교≫ 고구려본기 미천왕 15년 기사
15년(A.D.314) 정월 왕자(王子) 사유(王子)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9월 남쪽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견해≫ 1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五年 正月 受朝 南堂
5년(A.D.314) 정월 남당(南堂)에서 조회를 받았다.
尙尺伊伐飡 檍氏稟主
상척(尙尺)을 이벌찬, 억씨(檍氏)를 품주로 하였다.
五月 以夫道爲物藏庫阿干 夫道漢祇人也 工書算而貧不諂 人薛忠奏 其可用 而徵之
5월 부도(夫道)를 물장고(物藏庫,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아간(阿干, 干은 지방관리인 듯)으로 삼았다. 부도는 한지(漢祇)인이다. 서(書, 글씨), 산(算, 셈)에 뛰어났으며, 가난하였으나 아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설충(薛忠)에게 쓸만한 인재임을 아뢰어, 그를 불러들였다.
七月 薛忠伊伐飡 宣骨稟主
7월 설충(薛忠)을 이벌찬, 선골(宣骨)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5년 기사
5년 정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한지부 사람 부도란 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첨하는 일이 없고 글씨와 산수에 능하여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를 맡겼다.
六年 正月 江盧伊伐飡 尙氏稟主
6년(A.D.315) 정월 강노(江盧)를 이벌찬, 상씨(尙氏)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乙弗大破 末曷玄菟城
2월 을불(乙弗, 미천왕)이 말갈(末曷) 현토(玄菟)성을 크게 깨뜨렸다.
≪비교≫ 고구려본기 미천왕 16년 기사
16년(A.D.315)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壤井祭)를 행하였다.
七月 連檍伊伐飡 康氏稟主
7월 연억(連檍)을 이벌찬, 강씨(康氏)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七年 正月 船孝伊伐飡 貝姬稟主
7년(A.D.316) 정월 선효(船孝)를 이벌찬, 패희(貝姬)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東神池有龍出 與宮女相合 金城南壇梪王 久臥忽起 命中外行禱
4월 동신지(東神池)에서 용이 나타나 궁녀와 뜻이 맞았다. 금성의 남쪽 제단의 독두나무(梪王, 나무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없는 늙은 나무를 의미)가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나라안팎에서 빌도록 명하였다.
≪견해≫ 여기서 용은 미추를, 궁녀는 아이혜를 말하는 듯 하다.
阿后生女三元 帝洗之 沾帝嬖臣裙白烝而生也
아후(阿后, 아이혜)가 딸 삼원(三元)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첨제(沾帝, 첨해)의 폐신(嬖臣, 귀여움을 받는 신하) 군백(裙白)이 증(烝)하여 낳았다.
七月 祈雨於祖廟及五岳 自五月不雨無穀 民心洶洶 大農師味鄒暴露呼天 旬日而雨
7월 조상의 사당과 오악(五岳)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5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이 여물지 않아 민심이 흉흉하였다. 대농사(大農師) 미추(味鄒)가 비바람이 드러나도록 열흘 동안 하늘을 불렀다. 이에 비가 왔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7년 기사
7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서는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조묘와 명산에 제사지내고 기원하였다. 곧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이 생겼다.
≪견해≫ 미추(味鄒)가 신라의 인심을 수습하여 가는 과정이 묘사된 기사다.
納長伊伐飡 紺姬稟主
납장(納長)을 이벌찬, 감희(紺姬)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年饑多盜 行旅多被掠 命仲解太子 巡視恤民
9월 이해에 굶주려 도둑이 많았다. 여행을 하는 자 대부분이 약탈을 당하였다. 중해(仲解)태자에게 명하여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였다.
八年 正月 白忠伊伐飡
8년(A.D.317) 정월 백충(白忠)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七月 碩烏伊伐飡 添狗稟主
7월 석오(碩烏)를 이벌찬, 첨구(添狗)를 품주로 하였다.
奈仁生 乞况子奈宗
내인(奈仁, 내해와 술례의 아들인 내식의 딸)이 걸황(乞况, 걸숙의 형)의 아들 내종(奈宗)을 낳았다.
九年 正月 邊骨伊伐飡 康安稟主
9년(A.D.318) 정월 변골(邊骨)을 이벌찬, 강안(康安)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末昕伊伐飡 乳帽稟主
7월 말흔(末昕)을 이벌찬으로, 유모(乳帽)를 품주로 삼았다.
九月 夫余來侵 級伐飡翊宗逆戰于槐谷西 死之 命厚葬 而錄其子女 宗尹仁
9월 부여(夫余)가 침범하자 급벌찬(級伐飡) 익종(翊宗)이 귀곡(槐谷)의 서쪽에서 역전(逆戰, 역습)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도록 명하였다. 그 자녀를 조사하여, 윤인(尹仁)을 종(宗, 적장자,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加耶老君孝道殂 命車理往吊之
가야(加耶)의 노군(老君, 늙은 왕, 혹은 존호) 효도(孝道)가 죽었다. 차리(車理, 미지와 대리의 아들)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十月 夫余又侵烽山城 不克而退
10월 부여가 또 봉산성(烽山城)을 침입하여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비교≫ 1.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9년 기사
9년 9월 백제가 침범하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0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2. 백제본기 고이왕 22년 기사
22년 9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다. 신라의 군사와 괴곡(槐谷)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그 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해≫ 이 기사의 기년은 백제 비류왕 15년에 해당한다.
十年 正月 遤老伊伐飡 淡乙稟主
10년(A.D.319) 정월 휭노(遤老)를 이벌찬, 담을(淡乙, 내담의 누나, 내담은 내음의 손)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東海出大魚三頭 長各三丈 高十二尺 命祭日月池 及戒邊等諸神
3월 동해(東海)에서 큰 물고기 3마리가 나타났는데, 길이가 각각 3장(丈, 어른의 키)이고 높이가 12척(尺, 자)이었다. 일월지(日月池, 혹은 日池와 月池)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주변에 제신(諸神, 모든 신)에게도 도달함이 있었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0년 기사
10년 3월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다. 그 길이는 세 발, 폭은 한 길 두 자였다.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阿后生女道明
아후(阿后, 아이혜)가 딸 도명(道明)을 낳았다.
碧弘生 味鄒女碧芝
벽홍(碧弘)이 미추(味鄒)의 딸 벽지(碧芝)를 낳았다.
七月 玄光伊伐飡 吉雲稟主
7월 현광(玄光)을 이벌찬, 길운(吉雲)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燕伐乙弗 乙弗稱臣于燕 崔毖之故也
12월 연(燕, 모용외)이 을불(乙弗, 미천왕, 여기서는 고구려)을 쳤다. 을불이 연에게 신하임을 칭하였는데, 최비(崔毖) 때문이다.
≪비교≫ 고구려본기 미천왕 20년 기사
20년(A.D.319) 12월 진(晉)나라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비는 비밀리에 우리와 단(段)씨, 우문(宇文)씨와 음모하여,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棘城)으로 진공(進攻)하였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나라가 우문씨와 모용외 사이에 모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宇文)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기를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우리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차지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이 장수가 되어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燾)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외가 병사를 거느리고, 도(燾)를 접견하였다. 도(燾)는 겁이 나서 머리를 굽혔다. 모용외는 도(燾)를 보내며 설명하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하였다.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燾)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도성(家, 나라)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인으로 하여금 요동(遼東) 관부(官府)를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河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엄습하여, 주민 1천여 호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 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어 우리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왕이 동맹을 요구하니, 이에 한(翰)과 인(仁)이 돌아갔다.
≪견해≫ 백제가 믿는 것은 진(晉)나라 이었다. 진(晉)이 요동을 잃게 되자 다시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 한 기사가 324년 3월 기사에 나타난다.
十一年 正月 康登伊伐飡 〈亥骨〉
11년(A.D.320) 정월 강등(康登)을 이벌찬, 〈해골(亥骨)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孫光卒 味鄒大日大師
5월 손광(孫光)이 죽어, 미추(味鄒)를 대일대사로 하였다.
七月 舟宣伊伐飡 虎羊稟主
7월 주선(舟宣)을 이벌찬으로, 호양(虎羊)을 품주로 하였다.
十二月 乙弗侵遼東 慕容仁拒戰破之
12월 을불(乙弗, 미천왕, 고구려)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였다. 모용인(慕容仁)이 막아서 싸우고 깨뜨렸다.
十二年 正月 孫宣伊伐飡 長述稟主
12년(A.D.321) 정월 손선(孫宣)을 이벌찬, 장술(長述, 장훤과 술례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達禮生 于老女茁禮
5월 달례(達禮, 조분과 아소례의 딸)가 우로(于老)의 딸 줄례(茁禮)를 낳았다.
七月 夫良伊伐飡 千羊稟主
7월 부량(夫良, 아부례의 아들, 아부례는 아소례의 언니)을 이벌찬, 천양(千羊)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帝與阿后迎味鄒於海宅 設眞齋七日 四方仙徒會者五千人 署其部屬
12월 왕과 아후(阿后)가 미추(味鄒)를 해택(海宅)에서 맞이하여 진재(眞齋, 제사나 의식을 지내는 행사)를 7일 동안 베풀었다. 사방에서 모인 선도(仙徒)가 5천명이었다. 부속(部屬, 어느 부류나 부문에 딸림)되는 관청(署)을 만들었다.
十三年 正月 公羊伊伐飡 船禮稟主
13년(A.D.322) 정월 공양(公羊)을 이벌찬, 선례(船禮)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設眞齋 于桃山
3월 도산(桃山)에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阿后生女昭明 味鄒烝而生也
아후(阿后)가 딸 소명(昭明)을 낳았다. 미추(味鄒)가 증(烝)하여 낳았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壤井祭)를 행하였다.
權妻聖元爲暖宮
권처 성원(聖元, 조분과 아이혜의 딸)을 난궁(暖宮)으로 하였다.
七月 乾亥伊伐飡 福羊稟主
7월 건해(乾亥)를 이벌찬, 복양(福羊)을 품주로 하였다.
天旱而蝗 年荒民飢 盜賊四起 帝嘆曰 “當朕之世 災難如此 無以爲君” 阿后曰 “味鄒聖人也 何不委以大政乎” 帝嘉其言 乃召味鄒讓政 味鄒固辭不受
(하늘의 운행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가 생기고, 이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왕이 한탄하여 말하기를 “짐이 맡아 다스리는 시기에는 재난(災難)이 이와 같은가. 누가 있어 임금이라 불러주겠느냐.”라고 하였다. 아후(阿后, 아이혜)가 말하기를 “미추(味鄒)는 성인입니다. 어찌하여 대정(大政, 나라 안의 큰 일, 여기서는 副君의 직위를 내리려 하는 것으로 보임)을 맡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하여 이에 미추를 불러 정사를 넘겨주려 하였으나, 미추가 고사(固辭, 간곡히 사양함)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3년 기사
13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생겼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十四年 正月 汗黃伊伐飡 昌聖稟主
14년(A.D.323) 정월 한황(汗黃)을 이벌찬, 창성(昌聖)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大雨 山崩四十余所 帝廢膳自責 欲迎味鄒監國 使盖相望 而不出 后自至味鄒 曰 “國君安則 其國危 唯神君長安 何自至” 乃出
5월 큰 비가 내려 무너진 산이 40여 개소였다. 왕이 자책(自責)하며 반찬을 먹지 아니하였다. 미추(味鄒)를 맞이하여 나라를 살피기를 바라서, 모든 재상들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아이혜)후가 스스로 미추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편안하면 그 나라가 위태롭다. 오로지 신군(神君)만이 오랫동안 편안히 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스스로 오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이에 미추가 왔다.
七月 彗星出東方 二十五日不滅 帝憂之 群臣皆以爲味鄒能消灾生民 乃以味鄒爲副君 出南堂 星卽滅藏 乃賜酺中外 又以帝女光元 妻味鄒 行吉
7월 혜성(彗星)이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25일 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근심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미추(味鄒)가 능히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백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미추를 부군(副君)으로 삼고 남당(南堂)을 나왔다. (혜)성이 곧 사라져서 감추었다. 이에 나라 안팎에 연회를 베풀고 또 왕의 딸 광원(光元, 조분과 아이혜의 딸이나 첨해가 아기를 씻김)을 미추에게 시집보내어 결혼식을 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4년 기사
14년 여름에 큰 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다.
7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혜성은 25일 만에 사라졌다.
≪견해≫ 천문에 관한 기사가 신라본기와 남당유고에 동시에 등장한다. 이 기사 또한 남당유고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중요기사다.
十五年 正月 淡添伊伐飡 足色稟主
15년(A.D.324) 정월 담첨(淡添)을 이벌찬, 족색(足色)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克宗能築城 有將才 故副君特拔 而任之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내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 극종은 축성에 능하고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부군(副君)이 특별히 뽑아 임명하였다.
三月 夫余請和 不許
3월 부여(夫余)가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七月 萱述伊伐飡 宣禮稟主
7월 훤술(萱述, 장훤과 술례의 아들, 즉 미추의 측근)을 이벌찬으로, 선례(宣禮)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閱馬 于北川
북천(北川)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九月 阿后生女光明
9월 아후(阿后, 아이혜)가 (조분의) 딸 광명(光明)을 낳았다.
≪견해≫ 출생기사에 생부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대개는 현직 왕의 자식인 경우가 많으나, 그렇지 않는 기사가 여러 곳에 보인다.
行大場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十一月 帝與阿后 入海宅
11월 왕과 아후(阿后)가 해택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副君朝于海宅 設眞齋
12월 부군(副君)이 해택(海宅)에서 조회를 받고,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帝與阿后副君登 雲梯山堂 行大日祭 而還海宅 疾作暴崩 乃二十八日之夕也 遺命副君卽位 而副君固辭避匿 阿后冒雪 而至副君之隱居野人家 幷騎而歸 行祥登祚 則靑鷄元旦也 仙徒山呼 于海宅 瑞氣彌滿 于海 而金日乃上 孫光大師常言 金氏當王 至是果驗 初所非王女述禮 在壤井廟 乃夢見 金色大鳥 自花林出 入懷 心奇之 而待兆 仇道王適之 行禱 仍與之私合 于廟中 曰 “吾夢見 白鵲化爲金鷄 花林當盛之運也” 述禮亦以夢告 以爲必生貴子 至期入仇道宅 誕之 隆準龍顔 四乳猿臂 寬厚有長者風 三歲而自知神仙 仇道命孫光大師 敎以眞經妙法 早通造化 仙徒皆歸心 曰 “吾君也” 祖廟中古有玉器 先今始謁而見其底有文 曰 “鷄尊當世 乃至大運” 而禪讓天下 非偶然也
왕이 아후(阿后, 아이혜)와 부군(副君, 미추)과 함께 운제산당(雲梯山堂)에 가서 대일제(大日祭)를 행하고 해택(海宅)으로 돌아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는데 28일의 저녁이었다. 부군(副君)에게 즉위하도록 유명(遺命,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 남긴 명령)을 남겼다. 부군이 고사(固辭)하여 피하여 숨었다. 아후(阿后)가 눈을 무릅쓰고 부군이 숨어 지내는 야인(野人)의 집에 이르러,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와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이 때가 청계(靑鷄=乙酉, 325년) 원단(元旦, 1월1일)이다. 선도(仙徒)들이 해택(海宅)에서 산호(山呼=山呼萬歲, 나라의 중요 의식에서 신하들이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여 두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던 일)를 하였다. 상서로운 기운이 바다에 두루미치어 가득 찼고, 누런 태양이 떠올랐다. 손광(孫光)대사가 항상 말하기를 김(金)씨가 왕을 맡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효험이 있었다. 처음에 소비(所非, 이음)왕의 딸 술례(述禮)가 양정(壤井)의 사당에 있었는데, 꿈속에서 황금색의 큰 새가 화림(花林)으로부터 나와 품으로 안겼다.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 조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구도(仇道)왕이 적기에 기도를 행하였다. 이에 구도와 사당 안에서 사합(私合,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사적으로 교합하는 일)하였다. (구도가) 말하기를 “나의 꿈에 하얀 까마귀가 황금색 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화림(花林)이 성하게 될 운이다.”라고 하였다. 술례 역시 꿈을 고(告)하니, 반드시 귀한 아들이 생길 것이라 하였다. 기한에 이르자 구도의 집으로 들어가 미추를 낳았다. 우뚝한 코(隆準)에 임금의 얼굴(龍顔)로, 4개의 젖(四乳, 4개의 젖이 달린 어미 소, 여기서는 백성을 보살핌)과 원숭이 팔(猿臂, 팔이 길고 힘이 있어 활쏘기에 좋음)처럼 힘이 좋았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장자(長者, 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의 풍채가 있었다. 3세에 이르자 신선을 알았고, 구도가 손광대사에게 진경묘법(眞經妙法)을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일찍이 조화(造化, 대자연의 이치)에 통하여, 선도의 마음이 모두 귀의하여 (선도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임금이다.”라고 하였다. 조상의 사당 안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옥그릇이 있었는데, 선금(先今)이 처음으로 알현할 때 그 밑바닥에 있는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은 “계존(鷄尊)이 세상을 맡으면 이에 대운(大運)이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하를 선양(禪讓)하였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5년 기사
15년 2월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8일 갑자기 병이 나서 왕이 붕어하였다.

원년(A.D.310) 정월 도산(桃山)에서 백마제(白馬=庚午)를 행하였다.
阿爾兮后生 先今女光元公主 上洗之
아이혜(阿爾兮)후가 선금(先今, 조분)의 딸 광원(光元)공주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元昌伊伐飡 螺仁稟主
원창(元昌)을 이벌찬, 나인(螺仁)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行奈解大祭
3월 내해대제(奈解大祭)를 행하였다.
五月 行先今大祭
5월 선금대제(先今大祭, 조분)를 행하였다.
≪견해≫ 조분이 사망하지 않았음에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다.
七月 謁祖廟
7월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封骨正太子爲世神葛文王
골정(骨正)태자를 세신(世神)갈문왕으로 봉(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원년 기사
원년 7월 왕이 시조묘를 참배하였다. 그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했다.
白尺伊伐飡 學氏稟主
백척(白尺)을 이벌찬, 학씨(學氏, 내해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玉帽太后有疾 中外行禱
옥모(玉帽)태후가 병이 있어, 나라안팎에서 기도하였다.
十月 行月歌 于桃山 以慰太后
10월 도산(桃山)에서 월가(月歌)를 행하여 태후를 위로하였다.
十一月 仲解太子奉太后 入海宅
11월 중해(仲解, 첨해의 동생)태자가 태후를 모시고, 해택으로 들어갔다.
二年 正月 行白羊祭
2년(A.D.311) 정월 백양제(白羊=辛未)를 행하였다.
阿道伊伐飡 宝太稟主
아도(阿道, 제상의 祖父)를 이벌찬으로, 보태(宝太, 제상의 祖母)를 품주로 삼았다.
伊伐飡長萱 命參國政
이벌찬 장훤(長萱)에게 국정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三月 玉帽太后崩 于海宅 返葬于奈解陵 分骨于骨正陵 初足達妻雲帽 私通于仇道 而生后 異香滿室 夢見 玉耶生金花 故名玉帽 及長 美而善歌舞 十六列 于歌仙 行月歌 衆仙慕之 骨正太子引歸于宅 而幸之有娠 玉帽請爲妻 而骨微不得 欲自焚而死 伐帝乃命 骨正行吉 生助賁帝 又事奈帝 生尼今 尊爲太后 力扶召文遺臣 時人以后爲馬精 春秋七十四
3월 옥모(玉帽)태후가 해택(海宅)에서 죽어 내해릉(奈解陵)으로 장례를 되돌리고, 골정릉(骨正陵)에 뼈를 나누어 묻었다. 처음에 족달(足達)의 처 운모(雲帽)는 구도(仇道)와 사통하여 후(后)를 낳았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에서 옥야(玉耶, 석가에게 어진 아내로서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교만을 깨달은 여성?)가 금화(金花)를 낳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연유로 옥모(玉帽)라 이름지었다. 성장하면서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하여 16줄(나이 열여섯)에 가선(歌仙)으로 나아가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신선의 무리들이 옥모를 흠모하였다. 골정태자가 집으로 데리고 가서, 행차하여 임신을 하였다. 옥모가 처로 삼아주기를 청하였으나, 신분이 미미하여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불태워 죽으려 하였다. 벌제(伐帝)가 이에 골정에게 명하여 결혼을 하고, 조분제(助賁帝)를 낳았다. 또 내해제(奈解帝)를 섬겨 니금(尼今, 첨해)을 낳았다. 태후(太后)로 존중되게 되었다. 소문(召文)의 유신(遺臣)들을 힘써 도왔다. 당시 사람들이 후를 마정(馬精)이라 하였다. 춘추 74세였다.
命連檍等使 句麗結和
연억(連檍)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화친을 맺도록 명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견해≫ 옥모(玉帽)가 고구려와 화친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五月 修壤井
5월 양정(修壤)을 수리하였다.
七月 羘公伊伐飡 尺仁稟主
7월 양공(羘公)을 이벌찬, 척인(尺仁)을 품주로 하였다.
≪견해≫ 羘은 ‘日+羊’이 결합된 한자로 보이나, 같은 자를 찾을 수 없다.
三年 正月 馬侅伊伐飡 冬潛稟主
3년(A.D.312) 정월 마해(馬侅)를 이벌찬, 동잠(冬潛)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作南堂
7월 남당(南堂)을 지었다.
連白伊伐飡 良夫大書 黃音稟主
연백(連白)을 이벌찬, 양부(良夫)를 대서, 황음(黃音)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3년 기사
3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7월 남당〈남당을 혹은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양부를 이찬에 임명하였다.
四年 正月 謁白伊伐飡 秀皇稟主
4년(A.D.313) 정월 알백(謁白)을 이벌찬, 수황(秀皇, 조분과 가황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行玄鳥祭
현조제(玄鳥=癸酉)를 행하였다.
加耶君孝道 禪于其女河理智 迎宣威爲婿
가야(加耶)의 왕 효도(孝道)가 그의 딸 하리지(河理智)에게 선양을 하고, 선위(宣威)를 맞이하여 사위로 삼았다.
≪견해≫ 하리(河理)와 하리지(河理智)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모녀관계인 듯.
四月 倭獻土物 爲其太子求婚 于老戱之 ‘虜汝王爲鹽奴矣 何可婚乎’ 使怒歸 和絶
4월 왜가 토산물을 바치고, 그 태자를 위하여 구혼을 하였다.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너의 왕을 사로잡아 염전의 노예로 만들겠다. 혼사가 가당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화친이 끊어졌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3년 4월 기사에 내해의 아들 우로가 죽었다고 하므로, 우로의 아들이자 내해의 손자인 흘해가 310년에 즉위하였다고 하면 즉위 당시 이미 환갑을 넘은 노인으로써, 최소107세(우로가 사망당시 태어난 것을 가정)까지 장수한 왕이 된다. 통설 또한 우로 또는 첨해의 기사에 잘못이 있다고 본다.
≪비교≫ 1. 신라본기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2) 3년 기사
3년(A.D.249)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2. 신라본기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 머리기사
흘해이사금이 섰다. 그는 내해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우로각간이다.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七月 碧隆伊伐飡 環氏稟主
7월 벽융(碧隆)을 이벌찬, 환씨(環氏, 吳나라 여자)를 품주로 하였다.
阿爾兮后生 帝女旱元 帝洗之
아이혜(阿爾兮)후가 왕의 딸 한원(旱元)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乙弗立子釗爲嗣 南侵帶方
을불(乙弗, 미천왕)이 아들 쇠(釗, 고국원왕)를 후계자로 하고, 남쪽 대방(帶方)을 공격하였다.
≪비교≫ 고구려본기 미천왕 15년 기사
15년(A.D.314) 정월 왕자(王子) 사유(王子)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9월 남쪽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견해≫ 1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五年 正月 受朝 南堂
5년(A.D.314) 정월 남당(南堂)에서 조회를 받았다.
尙尺伊伐飡 檍氏稟主
상척(尙尺)을 이벌찬, 억씨(檍氏)를 품주로 하였다.
五月 以夫道爲物藏庫阿干 夫道漢祇人也 工書算而貧不諂 人薛忠奏 其可用 而徵之
5월 부도(夫道)를 물장고(物藏庫,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아간(阿干, 干은 지방관리인 듯)으로 삼았다. 부도는 한지(漢祇)인이다. 서(書, 글씨), 산(算, 셈)에 뛰어났으며, 가난하였으나 아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설충(薛忠)에게 쓸만한 인재임을 아뢰어, 그를 불러들였다.
七月 薛忠伊伐飡 宣骨稟主
7월 설충(薛忠)을 이벌찬, 선골(宣骨)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5년 기사
5년 정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한지부 사람 부도란 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첨하는 일이 없고 글씨와 산수에 능하여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를 맡겼다.
六年 正月 江盧伊伐飡 尙氏稟主
6년(A.D.315) 정월 강노(江盧)를 이벌찬, 상씨(尙氏)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乙弗大破 末曷玄菟城
2월 을불(乙弗, 미천왕)이 말갈(末曷) 현토(玄菟)성을 크게 깨뜨렸다.
≪비교≫ 고구려본기 미천왕 16년 기사
16년(A.D.315)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壤井祭)를 행하였다.
七月 連檍伊伐飡 康氏稟主
7월 연억(連檍)을 이벌찬, 강씨(康氏)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七年 正月 船孝伊伐飡 貝姬稟主
7년(A.D.316) 정월 선효(船孝)를 이벌찬, 패희(貝姬)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東神池有龍出 與宮女相合 金城南壇梪王 久臥忽起 命中外行禱
4월 동신지(東神池)에서 용이 나타나 궁녀와 뜻이 맞았다. 금성의 남쪽 제단의 독두나무(梪王, 나무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없는 늙은 나무를 의미)가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나라안팎에서 빌도록 명하였다.
≪견해≫ 여기서 용은 미추를, 궁녀는 아이혜를 말하는 듯 하다.
阿后生女三元 帝洗之 沾帝嬖臣裙白烝而生也
아후(阿后, 아이혜)가 딸 삼원(三元)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첨제(沾帝, 첨해)의 폐신(嬖臣, 귀여움을 받는 신하) 군백(裙白)이 증(烝)하여 낳았다.
七月 祈雨於祖廟及五岳 自五月不雨無穀 民心洶洶 大農師味鄒暴露呼天 旬日而雨
7월 조상의 사당과 오악(五岳)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5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이 여물지 않아 민심이 흉흉하였다. 대농사(大農師) 미추(味鄒)가 비바람이 드러나도록 열흘 동안 하늘을 불렀다. 이에 비가 왔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7년 기사
7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서는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조묘와 명산에 제사지내고 기원하였다. 곧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이 생겼다.
≪견해≫ 미추(味鄒)가 신라의 인심을 수습하여 가는 과정이 묘사된 기사다.
納長伊伐飡 紺姬稟主
납장(納長)을 이벌찬, 감희(紺姬)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年饑多盜 行旅多被掠 命仲解太子 巡視恤民
9월 이해에 굶주려 도둑이 많았다. 여행을 하는 자 대부분이 약탈을 당하였다. 중해(仲解)태자에게 명하여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였다.
八年 正月 白忠伊伐飡
8년(A.D.317) 정월 백충(白忠)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七月 碩烏伊伐飡 添狗稟主
7월 석오(碩烏)를 이벌찬, 첨구(添狗)를 품주로 하였다.
奈仁生 乞况子奈宗
내인(奈仁, 내해와 술례의 아들인 내식의 딸)이 걸황(乞况, 걸숙의 형)의 아들 내종(奈宗)을 낳았다.
九年 正月 邊骨伊伐飡 康安稟主
9년(A.D.318) 정월 변골(邊骨)을 이벌찬, 강안(康安)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末昕伊伐飡 乳帽稟主
7월 말흔(末昕)을 이벌찬으로, 유모(乳帽)를 품주로 삼았다.
九月 夫余來侵 級伐飡翊宗逆戰于槐谷西 死之 命厚葬 而錄其子女 宗尹仁
9월 부여(夫余)가 침범하자 급벌찬(級伐飡) 익종(翊宗)이 귀곡(槐谷)의 서쪽에서 역전(逆戰, 역습)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도록 명하였다. 그 자녀를 조사하여, 윤인(尹仁)을 종(宗, 적장자,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加耶老君孝道殂 命車理往吊之
가야(加耶)의 노군(老君, 늙은 왕, 혹은 존호) 효도(孝道)가 죽었다. 차리(車理, 미지와 대리의 아들)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十月 夫余又侵烽山城 不克而退
10월 부여가 또 봉산성(烽山城)을 침입하여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비교≫ 1.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9년 기사
9년 9월 백제가 침범하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0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2. 백제본기 고이왕 22년 기사
22년 9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다. 신라의 군사와 괴곡(槐谷)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그 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해≫ 이 기사의 기년은 백제 비류왕 15년에 해당한다.
十年 正月 遤老伊伐飡 淡乙稟主
10년(A.D.319) 정월 휭노(遤老)를 이벌찬, 담을(淡乙, 내담의 누나, 내담은 내음의 손)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東海出大魚三頭 長各三丈 高十二尺 命祭日月池 及戒邊等諸神
3월 동해(東海)에서 큰 물고기 3마리가 나타났는데, 길이가 각각 3장(丈, 어른의 키)이고 높이가 12척(尺, 자)이었다. 일월지(日月池, 혹은 日池와 月池)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주변에 제신(諸神, 모든 신)에게도 도달함이 있었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0년 기사
10년 3월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다. 그 길이는 세 발, 폭은 한 길 두 자였다.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阿后生女道明
아후(阿后, 아이혜)가 딸 도명(道明)을 낳았다.
碧弘生 味鄒女碧芝
벽홍(碧弘)이 미추(味鄒)의 딸 벽지(碧芝)를 낳았다.
七月 玄光伊伐飡 吉雲稟主
7월 현광(玄光)을 이벌찬, 길운(吉雲)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燕伐乙弗 乙弗稱臣于燕 崔毖之故也
12월 연(燕, 모용외)이 을불(乙弗, 미천왕, 여기서는 고구려)을 쳤다. 을불이 연에게 신하임을 칭하였는데, 최비(崔毖) 때문이다.
≪비교≫ 고구려본기 미천왕 20년 기사
20년(A.D.319) 12월 진(晉)나라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비는 비밀리에 우리와 단(段)씨, 우문(宇文)씨와 음모하여,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棘城)으로 진공(進攻)하였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나라가 우문씨와 모용외 사이에 모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宇文)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기를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우리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차지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이 장수가 되어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燾)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외가 병사를 거느리고, 도(燾)를 접견하였다. 도(燾)는 겁이 나서 머리를 굽혔다. 모용외는 도(燾)를 보내며 설명하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하였다.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燾)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도성(家, 나라)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인으로 하여금 요동(遼東) 관부(官府)를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河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엄습하여, 주민 1천여 호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 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어 우리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왕이 동맹을 요구하니, 이에 한(翰)과 인(仁)이 돌아갔다.
≪견해≫ 백제가 믿는 것은 진(晉)나라 이었다. 진(晉)이 요동을 잃게 되자 다시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 한 기사가 324년 3월 기사에 나타난다.
十一年 正月 康登伊伐飡 〈亥骨〉
11년(A.D.320) 정월 강등(康登)을 이벌찬, 〈해골(亥骨)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孫光卒 味鄒大日大師
5월 손광(孫光)이 죽어, 미추(味鄒)를 대일대사로 하였다.
七月 舟宣伊伐飡 虎羊稟主
7월 주선(舟宣)을 이벌찬으로, 호양(虎羊)을 품주로 하였다.
十二月 乙弗侵遼東 慕容仁拒戰破之
12월 을불(乙弗, 미천왕, 고구려)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였다. 모용인(慕容仁)이 막아서 싸우고 깨뜨렸다.
十二年 正月 孫宣伊伐飡 長述稟主
12년(A.D.321) 정월 손선(孫宣)을 이벌찬, 장술(長述, 장훤과 술례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達禮生 于老女茁禮
5월 달례(達禮, 조분과 아소례의 딸)가 우로(于老)의 딸 줄례(茁禮)를 낳았다.
七月 夫良伊伐飡 千羊稟主
7월 부량(夫良, 아부례의 아들, 아부례는 아소례의 언니)을 이벌찬, 천양(千羊)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帝與阿后迎味鄒於海宅 設眞齋七日 四方仙徒會者五千人 署其部屬
12월 왕과 아후(阿后)가 미추(味鄒)를 해택(海宅)에서 맞이하여 진재(眞齋, 제사나 의식을 지내는 행사)를 7일 동안 베풀었다. 사방에서 모인 선도(仙徒)가 5천명이었다. 부속(部屬, 어느 부류나 부문에 딸림)되는 관청(署)을 만들었다.
十三年 正月 公羊伊伐飡 船禮稟主
13년(A.D.322) 정월 공양(公羊)을 이벌찬, 선례(船禮)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設眞齋 于桃山
3월 도산(桃山)에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阿后生女昭明 味鄒烝而生也
아후(阿后)가 딸 소명(昭明)을 낳았다. 미추(味鄒)가 증(烝)하여 낳았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壤井祭)를 행하였다.
權妻聖元爲暖宮
권처 성원(聖元, 조분과 아이혜의 딸)을 난궁(暖宮)으로 하였다.
七月 乾亥伊伐飡 福羊稟主
7월 건해(乾亥)를 이벌찬, 복양(福羊)을 품주로 하였다.
天旱而蝗 年荒民飢 盜賊四起 帝嘆曰 “當朕之世 災難如此 無以爲君” 阿后曰 “味鄒聖人也 何不委以大政乎” 帝嘉其言 乃召味鄒讓政 味鄒固辭不受
(하늘의 운행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가 생기고, 이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왕이 한탄하여 말하기를 “짐이 맡아 다스리는 시기에는 재난(災難)이 이와 같은가. 누가 있어 임금이라 불러주겠느냐.”라고 하였다. 아후(阿后, 아이혜)가 말하기를 “미추(味鄒)는 성인입니다. 어찌하여 대정(大政, 나라 안의 큰 일, 여기서는 副君의 직위를 내리려 하는 것으로 보임)을 맡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하여 이에 미추를 불러 정사를 넘겨주려 하였으나, 미추가 고사(固辭, 간곡히 사양함)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3년 기사
13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생겼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十四年 正月 汗黃伊伐飡 昌聖稟主
14년(A.D.323) 정월 한황(汗黃)을 이벌찬, 창성(昌聖)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大雨 山崩四十余所 帝廢膳自責 欲迎味鄒監國 使盖相望 而不出 后自至味鄒 曰 “國君安則 其國危 唯神君長安 何自至” 乃出
5월 큰 비가 내려 무너진 산이 40여 개소였다. 왕이 자책(自責)하며 반찬을 먹지 아니하였다. 미추(味鄒)를 맞이하여 나라를 살피기를 바라서, 모든 재상들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아이혜)후가 스스로 미추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편안하면 그 나라가 위태롭다. 오로지 신군(神君)만이 오랫동안 편안히 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스스로 오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이에 미추가 왔다.
七月 彗星出東方 二十五日不滅 帝憂之 群臣皆以爲味鄒能消灾生民 乃以味鄒爲副君 出南堂 星卽滅藏 乃賜酺中外 又以帝女光元 妻味鄒 行吉
7월 혜성(彗星)이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25일 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근심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미추(味鄒)가 능히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백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미추를 부군(副君)으로 삼고 남당(南堂)을 나왔다. (혜)성이 곧 사라져서 감추었다. 이에 나라 안팎에 연회를 베풀고 또 왕의 딸 광원(光元, 조분과 아이혜의 딸이나 첨해가 아기를 씻김)을 미추에게 시집보내어 결혼식을 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4년 기사
14년 여름에 큰 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다.
7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혜성은 25일 만에 사라졌다.
≪견해≫ 천문에 관한 기사가 신라본기와 남당유고에 동시에 등장한다. 이 기사 또한 남당유고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중요기사다.
十五年 正月 淡添伊伐飡 足色稟主
15년(A.D.324) 정월 담첨(淡添)을 이벌찬, 족색(足色)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克宗能築城 有將才 故副君特拔 而任之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내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 극종은 축성에 능하고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부군(副君)이 특별히 뽑아 임명하였다.
三月 夫余請和 不許
3월 부여(夫余)가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七月 萱述伊伐飡 宣禮稟主
7월 훤술(萱述, 장훤과 술례의 아들, 즉 미추의 측근)을 이벌찬으로, 선례(宣禮)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閱馬 于北川
북천(北川)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九月 阿后生女光明
9월 아후(阿后, 아이혜)가 (조분의) 딸 광명(光明)을 낳았다.
≪견해≫ 출생기사에 생부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대개는 현직 왕의 자식인 경우가 많으나, 그렇지 않는 기사가 여러 곳에 보인다.
行大場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十一月 帝與阿后 入海宅
11월 왕과 아후(阿后)가 해택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副君朝于海宅 設眞齋
12월 부군(副君)이 해택(海宅)에서 조회를 받고,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帝與阿后副君登 雲梯山堂 行大日祭 而還海宅 疾作暴崩 乃二十八日之夕也 遺命副君卽位 而副君固辭避匿 阿后冒雪 而至副君之隱居野人家 幷騎而歸 行祥登祚 則靑鷄元旦也 仙徒山呼 于海宅 瑞氣彌滿 于海 而金日乃上 孫光大師常言 金氏當王 至是果驗 初所非王女述禮 在壤井廟 乃夢見 金色大鳥 自花林出 入懷 心奇之 而待兆 仇道王適之 行禱 仍與之私合 于廟中 曰 “吾夢見 白鵲化爲金鷄 花林當盛之運也” 述禮亦以夢告 以爲必生貴子 至期入仇道宅 誕之 隆準龍顔 四乳猿臂 寬厚有長者風 三歲而自知神仙 仇道命孫光大師 敎以眞經妙法 早通造化 仙徒皆歸心 曰 “吾君也” 祖廟中古有玉器 先今始謁而見其底有文 曰 “鷄尊當世 乃至大運” 而禪讓天下 非偶然也
왕이 아후(阿后, 아이혜)와 부군(副君, 미추)과 함께 운제산당(雲梯山堂)에 가서 대일제(大日祭)를 행하고 해택(海宅)으로 돌아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는데 28일의 저녁이었다. 부군(副君)에게 즉위하도록 유명(遺命,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 남긴 명령)을 남겼다. 부군이 고사(固辭)하여 피하여 숨었다. 아후(阿后)가 눈을 무릅쓰고 부군이 숨어 지내는 야인(野人)의 집에 이르러,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와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이 때가 청계(靑鷄=乙酉, 325년) 원단(元旦, 1월1일)이다. 선도(仙徒)들이 해택(海宅)에서 산호(山呼=山呼萬歲, 나라의 중요 의식에서 신하들이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여 두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던 일)를 하였다. 상서로운 기운이 바다에 두루미치어 가득 찼고, 누런 태양이 떠올랐다. 손광(孫光)대사가 항상 말하기를 김(金)씨가 왕을 맡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효험이 있었다. 처음에 소비(所非, 이음)왕의 딸 술례(述禮)가 양정(壤井)의 사당에 있었는데, 꿈속에서 황금색의 큰 새가 화림(花林)으로부터 나와 품으로 안겼다.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 조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구도(仇道)왕이 적기에 기도를 행하였다. 이에 구도와 사당 안에서 사합(私合,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사적으로 교합하는 일)하였다. (구도가) 말하기를 “나의 꿈에 하얀 까마귀가 황금색 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화림(花林)이 성하게 될 운이다.”라고 하였다. 술례 역시 꿈을 고(告)하니, 반드시 귀한 아들이 생길 것이라 하였다. 기한에 이르자 구도의 집으로 들어가 미추를 낳았다. 우뚝한 코(隆準)에 임금의 얼굴(龍顔)로, 4개의 젖(四乳, 4개의 젖이 달린 어미 소, 여기서는 백성을 보살핌)과 원숭이 팔(猿臂, 팔이 길고 힘이 있어 활쏘기에 좋음)처럼 힘이 좋았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장자(長者, 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의 풍채가 있었다. 3세에 이르자 신선을 알았고, 구도가 손광대사에게 진경묘법(眞經妙法)을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일찍이 조화(造化, 대자연의 이치)에 통하여, 선도의 마음이 모두 귀의하여 (선도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임금이다.”라고 하였다. 조상의 사당 안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옥그릇이 있었는데, 선금(先今)이 처음으로 알현할 때 그 밑바닥에 있는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은 “계존(鷄尊)이 세상을 맡으면 이에 대운(大運)이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하를 선양(禪讓)하였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15년 기사
15년 2월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8일 갑자기 병이 나서 왕이 붕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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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년 7월 ≪비교≫ : 정월 왕자(王子) 사유(王子)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 정월 왕자(王子) 사유(斯由)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