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本紀新編列傳(박창화님의 다른유고 소개) - 온조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1:28
本紀新編列傳

p48

太子列傳

溫祚太子召西奴出也. 百濟以甘兒爲朱蒙之女以溫祚爲憂台之子, 其實甘兒爲優台女以溫祚爲朱蒙子也. 類利爲太子時封溫祚于西南(?)(?)之地, 後與母兄沸流共理而朝貢于宗國不絶其使及與公孫相親, 背叛父國累侵骨肉之國遂成仇讐(원문은 같은 자)必竟國破惜哉.

온조태자는 소서노의 소생이다. 백제는 감아를 주몽의 딸로 간주하고 온조를 우태의 자로 간주하였다. 실제는 감아는 우태의 딸이기 때문에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다. 유리가 태자일때 온조는 서남의 (?)(?)의 땅을 봉지로 하였다. 후에 동모형인 비류와 함께 다스렸는데 종주국(유리의 고구려)에 조공과 사신을 보내기를 끊지 않더니, 후손에 이르러서도 서로 친하였다. 아버지의 나라를 배반하고 골육의 나라(형제의 나라)를 계속 침략하더니 마침내 원수가 되었는데 반드시 나라를 깨뜨려야 끝이 난다. 아깝도다.
= 朝貢 : 종속국이 종주국에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던 일
= 公孫 : 임금이나 제후의 후손

(개인적인 의견)
박창화님의 다른 유고인 백제서기(백제왕기의 끝부분)에는 감아는 주몽과 소서노사이에 태어난 딸로 되어 있으나 고구려사초나 고구려사략에서는 감아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이 책에서는 감아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에서는 일부러 감아를 누락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 감아는 고구려사초나 고구려사략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온공주와 감아가 같은 사람인 듯 하다.
즉 감아는 아이와 함께 유리의 妃가 되었지만 결국엔 비류와 온조가 있는 한남으로 도망쳐 다시 온조의 배우자가 된 듯하다.
고구려는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20살 때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감아가 만약 우태의 딸이라면 이름을 숨길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고구려사초에 보면 유리왕의 삐뚤어진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임신한 아이가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데도 붙잡아 놓고 있으며, 소서노의 소생인 여동생들을 자신의 배우자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볼모인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동부여에 있을 때 자신에게 사신을 보내어 데리러 오지 않았음을 원망하고 있다.
즉 유리왕은 재능이 뛰어났을지는 모르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형제들을 핍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라디오 (2007-05-10 02:42:05)  
수고가 많습니다.
같은 문장인데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달라지니..재미있는 일이지요.
해석을 해 볼게요..

溫祚太子召西奴出也. 百濟以甘兒爲朱蒙之女而溫祚爲憂台之子, 其實甘兒爲優台女而溫祚爲朱蒙子也. 類利爲太子時封溫祚于西南肥사?之地, 後與母兄沸流共理而朝貢于宗國不絶其使及與公孫相親, 背叛父國累侵骨肉之國遂成仇讐(원문은 같은 자)必竟國破惜哉.
온조태자는 소서노가 낳은 아들이다. 백제는 감아는 주몽의 딸로, 온조는 우태의 아들로 간주하였다.실지로는 감아는 우태의 딸이고,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다. 유리가 태자가 되었을 때 온조를 서남쪽 비사?의 땅에 봉하였다.
후에 어머니(소서노)와 형 비류는 함께 (그 땅을) 다스렸고 종주국(漢나라)에 조공을 받쳤는데, 사신을 끊지 않았으니 더불어 公孫家와 서로 친하게 되었다. 어버이 나라(고구려)를 배반하여 골육의 나라를 계속 침략하더니
마침내 원수가 되어 필경에 나라가 망하니 애석한 일이로다.

종국이 한나라라는건 근거는 희박하고 (漢書를 봐야 알수 있겠죠) 개인적인 해석이니 재미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