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秦史에서 한인천제의 61세 손 昆吾가 夏와 楚에 미친 영향
1) 支那歷史에서 夏의 백성으로 왜곡한 한인천제의 61세 손 昆吾族
청주는 夷의 본고장이다. 기주에 치우천왕과 황제가 10년 전쟁을
벌인 탁록이 있다. 청구는 발해만에 있었으나 침몰하여 사라졌다.
우리역사에서 어느 시대고 대방군과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치우천왕의 땅이 있었던 옛 청구국의 땅인 기주에 있었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우禹임금이 곤오昆吾에게 명하여 형산荊山에서 쇠를 캐내어 솥(鼎)을 주조하였는데1), 이 말이 어디에서 온 말인지 근원이 불분명하다”는 기록이 있다.
1) <帝王世紀> 禹鑄鼎於荊山 採金於山川 而陶鑄之於昆吾
이 말은 우임금시대에 청동 솥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을 끼워 넣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로 보인다. 이미 하화족이 동이족으로 몰아 역사에서 하차시킨 치우천왕이 청동으로 병기를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기록에 대응하여 황제가 청동기를 주조하였고, 그 대를 이어서 우임금도 청동기를 주조하였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냈을 근거 없는 말로 보는 것이다.
단국의 홍제 때의 곤오는 우임금 때에도 곤오로 세습되었고, 이 세습된 곤오중의 일족이 만약에 하의 땅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그가 우임금으로부터 청동기제조를 의뢰 받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곤오라는 이름이 차이나 역사에서 처음 나타나는 때는 하나라 때 제8세 제분 33년이다.(<竹書紀年>) 제분은 곤오씨의 아들을 유소국에 봉했다.2)고 하였다.
2) <竹書紀年>帝芬三十三年昆吾氏子于有蘇
이 기록은 하나라의 제분이 곤오를 유소국에 봉하기 전에 이미 곤오라는 종족명칭을 쓰는 종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곤 오는 우리 역사나 지나 역사에서 불가사의한 존재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곤오를 종족명칭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곤오족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화족의 역사에 청동기제조와 노나라 건국과 관련하여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3) 4)
3) <左傳> 魯昭公十二年記載 “昔我先王熊繹 辟在荊山 篳路藍縷 以處草莽 昔娥皇祖伯父昆吾, 舊許是宅
4) <金文氏族硏究> 翦伯贊先生在<先秦史>-書中考證說: “荊山者, 是爲楚之先王熊繹居所, 故昆吾之族, 實有遷於荊楚者.
그러나 현존하는 우리의 역사는 곤오족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말도 기록하여 남기지 않았다.
2) 昆吾族의 己豊이 檀國의 洪帝에게 귀순하다
역 사서에는 곤오족에 대하여 기록하여 남긴 것이 발견되지 않으나, 진주소씨晉州蘇氏 족보서문 <부소보서扶蘇譜序>, <동근구보서東槿舊譜序>, <소씨상상계蘇氏上上系>에는 곤오족에 대한 기록은 없고, 곤오 한 사람만을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천제 축융의 61세 손 태하공 기풍己豊으로 기록하였다.5) 그는 족성族姓이 기己이다.
5) <扶蘇譜序> 太夏公卽赤帝祝融之六十一世孫彼卽風夷人也
그 가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황제가 아들 25명을 낳아 그 중에서 한 명을 기己를 부계시칭으로 주어 기씨己氏가 활동하고 있었다. 기씨 중에서 제곡고신帝嚳高辛이 전욱고양諯頊高陽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치우천왕의 청구국과 유망의 유백국을 통합하여 강성해진 황제국을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제곡고신의 학정을 피하여 곤오족의 수장인 기풍이 단국檀國의 홍제洪帝에게 귀순하여 당시의 숙신(불함산 북쪽)에 자리 잡았다.6)
6) <扶蘇譜序> 太夏公初居灤河當肅愼 洪帝時入於弗咸山北仍封其地國名有蘇以上詳載於桓國史
제 곡고신이 그를 핍박했던 이유는 황제족과 종족이 달랐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곤오는 한인천제의 후손으로서 곤오를 족성으로 가지고 있었고, 제곡고신은 황제의 아들로서 기己를 씨칭으로 받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종족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족성은 모계집단의 성이고, 씨칭은 황제가 이룩하기 시작한 부계집단에서 새로이 창설한 성이므로, 두 집단이 설사 같은 기己라는 문자를 쓴다고 해도, 곤오 집안은 족성으로 쓰고 있었고, 제곡고신집안은 씨칭으로 쓰고 있었으므로, 두 집안이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3) 昆吾族의 己豊이 帝嚳高辛의 침범을 물리치다
곤 오족의 기풍이 홍제에게 귀순한 후, 홍제 8년 되는 해에, 제곡고신이 단국의 수분하의 동쪽 땅을 침범하였다. 기풍이 즉각 출동하여 제곡고신을 격퇴하였다. 홍제는 그 공을 치하하여 풍에게 소성蘇姓을 하사하고, 유소국에 봉했다.7)
7) <蘇氏上上系> 高辛暴政莫甚 故移居于弗咸山北肅愼 洪帝八年 高辛氏入寇 而爲義旅將 擊退於綏東之也 洪帝致賀其功 而封蘇城 爲河伯 一云 夏伯 時人曰 太夏公墓在蘇城 今扶蘇岬 事蹟詳載於桓國史檀君古記
그 러니까 기성己姓을 소성蘇姓으로 대체시켜 주고 영토도 하사하여 소국蘇國의 왕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곤오족은 기성을 쓰이지 않고 소성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곤오라는 족명은 그대로 쓰고 있었다. 이미 황제의 자손이 기씨己氏를 씨칭으로 쓰고 있었으므로, 홍제가 기성과 기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소성을 사성한 것으로 보인다.
4) 楚나라를 세운 蘇豊의 후손 昆吾族 熊繹
< 좌전左傳> 魯昭公 12년 기록에는 “옛날에 선왕 웅역熊繹이 창업을 할 때 형산에 있었는데, 그곳이 길을 울타리로 막고, 쪽빛실로 가리듯, 풀이 무성한 곳이었다. 황조皇祖가 백부 곤오였다. 옛날에 허락한 이 집이었다.8) 라는 말이 나온다. 웅역의 선조가 곤오라는 기록이 관심을 끈다.
8) <左傳> 魯昭公十二年記載 “昔我先王熊繹 辟在荊山 篳路藍縷 以處草莽 昔娥皇祖伯父昆吾, 舊許是宅 辟
<부소보서>에서 곤오는 적제 한인천제의 61세 손 기풍己豊이다.
전 백찬翦伯贊은 <先秦史>에서 고증하여 설명하기를, “형산은 초의 선왕 웅역의 거소이다. 때문에 곤의 씨족이 된다. 형초로 이주하여 자리 잡았다. 곤오나 초의 선왕(황고) 백부이다. 그러므로 초의 씨족은 형초로 이주하여 남쪽에 자리 잡은 자이다”9)라고 하였다.
9) <金文氏族硏究> 翦伯贊先生在<先秦史>-書中考證說: “荊山者, 是爲楚之先王熊繹居所, 故昆吾之族, 實有遷於荊楚者.
이 말은 초나라를 일으킨 사람이 곤오인데 초나라를 일으킨 곳이 형산이라는 뜻이다. 곤오족의 웅역이 형산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청동 솥인 정을 제조하였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 좌전左傳> 애공 17년에 곤어지昆吾之虛라고 한 곳은 유융주有戎州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성족己姓족이다10)라고 하였다. 초의 시조인 웅역의 근거지를 ‘곤오의 허’라고 하였고, 이곳을 유융주라고 하였으므로, 유웅주라는 지명에 근거하여 곤오가 융족戎族의 조상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10) <左傳> 哀公十七年 謂昆吾之墟 有戎州己姓
5) 昆吾己姓
<국어國語 정어鄭語>에도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정어鄭語에 기성곤오己姓昆吾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기성이 곤오라는 뜻이다.11) 이 기록은 <東槿舊譜序>의 기록12)과 일치한다.
11) <國語 鄭語> 己姓昆吾
12) <東槿舊譜序> 赤帝之後孫爲風姜姬己等諸姓至赤帝61世孫太夏公號昆吾諱豊本姓己改蘇
기 己와 기杞는 나(余)라는 뜻인데, 기杞는 하후夏后가 된다. 하후 즉 하나라의 우임금이 기성인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기성이 하족夏族이라는 것이다.13) (이상 <金文氏族硏究> 14, 15쪽 참조) 하족의 선조가 기성을 가진 곤오가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몇 되지 않는 귀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왜 이 기록이 중요한가를 다음의 예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13) <金文氏族硏究>15쪽 余以爲己與杞-字變. 杞爲夏后, 故己姓昆吾, 亦當爲夏族 北京大學出版社 1988.
14) < 竹書紀年>에 따르면 황제黃帝, 소호금천少昊金天, 전욱고양諯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堯, 舜의 6인을 夏이전의 제위로 기록하였고, 하夏의 제위는 우禹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록하였다. 상相은 우禹 , 계啓, 태강太康, 중강仲康에 이어 5위에 해당한다. 제곡고신의 아들 지摯를 빼어다가 소호금전에 갖다 붙여 제지소호씨帝摯少昊氏라고 하였다. <죽서기년>의 저자가 제곡고신의 아들 지를 할아버지 소호에게 갖다 붙인 것은 제지가 중여곤에게 돌아가야 할 제위를 가로챈 때문이라고 본다. 중여곤을 夏族에게서 배제함으로써 1차 역사왜곡이 시작되었고, 지를 소호에게 갖다 붙임으로써 2차 역사왜곡이 시작되었다.
상 업의 범위에 대하여 말하면, 갑골문에 나타나는 것에 근거하면, 당시는 상대商代(주, 夏代)의 상인商人(주, 夏人)이었다. 그들의 발자취에, 동북쪽은 발해연안 내지 조선반도에 이르렀다. 동남쪽은 오늘날의 강절江浙에 이르렀고, 서남쪽은 오늘날의 환악皖鄂내지 사천四川에 이르렀고, 서북쪽은 오늘날의 섬감저수陝甘宁綏 내지 멀리 신강新疆까지 이르렀다.(<先秦史> 제11장 商代의 社會經濟構造 翦伯贊 北京大學出版社 167쪽)
“갑 골문에 나타나는 것에 근거하면, 당시는 상대商代(주, 夏代)의 상인商人(주, 夏人)이었다. 그들의 발자취에, 동북쪽은 발해연안 내지 조선반도에 이르렀다.”에 주를 붙이기를 “조선인종은 본래 상족 지손의 후예가 된다(朝鮮人種 本爲商族支裔)고 하였고, 이 인용문의 근거는 <詩 商頌 玄鳥>의 상인은 조선의 동족으로 분포한다(是商人與分布于朝鮮之同族)는 말에서 들고 있다.
그 러나, 하국(商國)을 세운 우가 기성杞姓(己姓) 출신이거나, 기씨杞氏(己氏) 출신이므로, 조선과 동족이 될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다. 그가 기성己姓출신이라면 곤오의 후예이므로, 상족이 곤오족의 후예가 될 것이고, 그가 기씨己氏 출신이라면 조선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것이다.
< 일주서逸周書, 大聚解>에 곤오는 씨족 이름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씨족 이름이 아니라, 모계족성이다. 곤오가 하족이 될 수 없는 증거가 기록으로 <東槿舊譜序>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적제 한인천제의 후손으로 풍이족을 구성하고 있는 풍風, 강姜, 희姬, 기己 4성 중의 하나인 기성己姓에 속해 있었고, 기성의 종자권宗子權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기풍己豊이었고, 그가 배달나라의 단국의 홍제에게 귀순하여, 홍제 8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綏芬河의 동쪽 들(綏東之野)을 침범했을 때, 이를 물리쳐 홍제로부터 그 공으로 소성蘇城에 봉해지고, 하백河伯이 되었다.(<소씨상상계>)
우가 곤오가 물리친 제곡고신의 직계후손이므로, 그가 조선인과 동족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6) 蘇豊이 帝嚳高辛을 물리친 檀國의 땅 綏芬河의 동쪽에 얽힌 역사
< 소씨상상계>에는 단국과 하국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수분하라는 지명이 나온다. 수분하綏芬河의 수綏는 땅 이름이고, 분芬은 하국의 제분帝芬이다. 그러므로 수분하는 하국과 단국의 국경을 가르는 강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수분하의 서쪽은 하국의 땅이 되고, 동쪽은 단국의 땅이 되는 것이다. 제분의 시대는 단군조선 4세 오사구烏斯丘단군연대에 해당한다.
우禹가 하夏를 세운 때는 낙빈기 년표로 서기전 2211년, 즉 大正7년 松園書齋 발행 역대연대표에 서기전 2205년이므로, 오사구단군은 임인 19년(서기전 2119년)이다.
<단군세기>에는, “오사구단군은 하夏의 주인 상相(5세)14) 이 실덕失德하여, 람藍, 진眞, 변弁 3부部의 병력을 동원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였다”고 하였다.
7) 昆吾族 일대기
태 하공은 견이畎夷의 여자 유정有姃을 취하여 비로 삼고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낳았다. 장자는 갑岬이고, 병자년에 태어나 부통扶統이 되었다. 태하공의 차자는 한桓이고 3자는 흘紇이다. 3자는 서소국주西蘇國主가 되었는데, 즉 태하공과 의견이 맞지 않아 요堯의 신하가 되어 소성蘇城에 봉해졌다. 소성은 오늘의 업성鄴城이다. 후에 계속해서 102대를 이어갔고, 1200여세의 수壽를 누렸다.15)
15) <蘇氏上上系> 太夏公娶畎夷之女有姃爲妃 生三子一女 其長子曰岬生于丙子爲扶 其公其次子曰桓 其三子曰紇爲西蘇國主 則與太夏公意見不合致爲堯臣 封於蘇城今日鄴城 後繼出凡百二代壽一千二百餘歲
본문에서 태하공의 3자 흘紇이 아버지 태하공과 생각이 달라 요堯의 신하가 되었다는 기록은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과 일치한다. <죽서기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는 홀의 후예이다. 따라서 하국이 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를 모르고 조선이 상국의 지예支裔라고 함은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제 8세 제분帝芬 33년에 곤오昆吾씨의 아들을 유소有蘇에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은 유소有蘇이다.16)
16) <竹書紀年> 夏八世帝芬三十三年 封昆吾氏子于 有蘇 其國名曰有蘇
태 하공의 3자 흘이 아버지와 생각이 달라 아버지와 갈라서 요에게 귀순하였다는 말이다. 하의 8세 이전에 곤오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은 제곡고신의 학정을 피하여 단국의 홍제에게 귀순하였다. 홍제 8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의 동쪽 들을 침범했을 때, 이를 격퇴하여 그 공으로 소성蘇姓을 사성하였고, 이때 소성蘇城에 봉해졌다. 제분 33년이라면, 서기전 2007년으로, 단기 327년이다. 이때는 소성이 단국을 승계한 단군조선에서 하의 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7세 단군 한율翰栗(재위 54년) 때였다.17)
17) <檀君世紀> 甲寅元年(서기전 2047년) 七世檀君翰栗 在位54年
<동근구보서東槿舊譜序>에는 적제赤帝의 후손으로 풍風, 강姜, 희姬, 기己 등의 姓이 되었다. 적제 61세손에 이르러 태하공 곤오昆吳(號) 풍風(諱)이 본성本姓 기己를 소蘇로 바꾸었다.18)
18) <東槿舊譜序> 赤帝之後孫爲風姜姬己等諸姓至赤帝61世孫太夏公號昆吾諱豊本姓己改蘇
적 제는 한인천제이고, 풍씨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풍이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강성姜姓은 신농神農이 강수姜水에서 얻은 성이므로 신농이 시조가 되고, 신농의 8세손 유망이 중시조가 된다. 희姬는 유망의 이복동생인 황제를 시조로 한다. 유망과 황제는 소전少典의 자식이었다.19)
19) < 扶蘇譜序> 昔有赤帝諱復解號曰祝融爲桓國之帝於己卯都於風州倍谷. <路史 后記> 中說: “炎帝神農氏 姓伊耆, 名軌, 一曰石年是爲后帝皇君 炎精之君也. 母安登 感神(龍)于常羊 生神農于烈山之石室. 生而九井出焉. 初少典氏聚于有蟜氏 是曰安登 生子二人一爲黃帝之先 襲少典氏; 一爲神農 是 爲炎帝 炎帝長于姜水 成爲姜姓. 其初國伊 耆 故曰伊耆 丈八尺有七寸 弘身而牛願, 龍顔而大脣 <國語 晋語> 昔 少典聚于有蟜氏 生黃帝 炎帝 黃帝以姬水成 炎帝而姜水成 成而異德 故黃帝爲姬 炎帝爲姜 <國語 魯語> 炎帝而姜水成 爲姜姓之祖也. <黃帝故城行> 45쪽 据史料記載 黃帝大約生活在4,700年前 出生在有熊部落的酋長之家 … 南方苗黎族3大部落的首領
우 리와 차이나는 염제와 황제에 대하여 시각차를 가지고 있다. 우리 쪽 사서는 염제가 황제의 이복형이라고 하고, 차이나 쪽의 사서는 황제가 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염제는 신농에서부터 유망까지 족보가 이어져 내려오지만, 황제에게는 이어져 내려오는 독자적인 족보가 없으므로 유망이 형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치우천왕과 함께 웅족출신이고, 구려족 출신으로서 장자계승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점에서 중요성을 띠고 이다.
扶公(태하공의 장자 갑岬)의 장자 구수句秀가 인仁이 되었고, 부공의 차자次子는 일청一淸이라고 하는데 홍弘이 되었다. 부공의 딸은 정아靖妸라고 하는데, 부소신모扶蘇神母가 되었다.20)
20) <蘇氏上上系> 扶公之長子曰句秀爲仁 次子曰一淸爲弘 女曰靖妸爲扶蘇神母
부소신모는 부소의 여신이라는 뜻인데, 풍이의 제국인 한국에 속한 수메르의 영향을 받은 바빌론의 여신 아스타르테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구수의 아들은 선루仙婁라고 하는데, 고공高公이 되었다.
선 루의 장자는 영리英利라고 하는데, 태공泰公이 되어 당장경唐藏京으로 천도할 때 공이 있어 300리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서 상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21) 선루의 차자는 상화上和라고 하는데, 경공景公이 되었다. 3자는 남우南雨라고 하는데, 원공元公이 되었다.
21) <蘇氏上上系> 仙婁之長子曰英利爲泰公 唐藏京遷都時有功 故賜三百里領地 象見檀君古記
당 장경은 <단군세기>에 5세단군 구을 졍축 16년(서기전 2084년)에 장당경藏唐京으로 나온다.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 삼신三神의 단壇을 봉축封築하고 많은 한화桓花를 심었다고 하였다.22) 따라서 당장경으로의 천도는 후대의 일로 볼 수 있다.
22) <檀君世紀> 五世檀君丘乙 在位十六年 丁丑十六年 親行藏唐京 封築三神壇多植桓花
영리英利의 아들은 해월海月이라고 하는데, 세공世公이 되었다.
해월의 장자는 정조丁祖라고 하는데, 신해년에 태어났다. 해월의 차자는 법호法乎라고 한다.
정조의 장자는 가리加里라고 하는데, 진공眞公이 되었다. 임술년 여름에 하나라가 침범하여 하남河南에서 격퇴시켰다.
정조의 차자는 성고成高라고 하는데, 정공貞公이 되었다.
가리의 아들은 나랑那浪이라고 하는데, 순공純公이 되었다. 하왕夏王 상相이 견이畎夷를 공격하여 하나라를 정벌하였다.23)
23) <蘇氏上上系> 加里之子曰那浪爲純公 夏王相攻畎夷 故伐夏
하왕 상이 견이를 공격하였다고 하였으니, 상이라면 우禹가 세운 하夏의 5세 제상帝相이 된다. 그는 <죽서기년>에 따르면 무술년(역대연대표 서기전 2146년, 단기 188년)에 즉위하였다.24)
24) <竹書紀年> 帝相元年戊戌帝位居商 征淮夷 二年征風夷及黃夷
이 때라면 고조선의 3세단군(서기전 2182-2138 년 제위 45년)에 해당한다. <죽서시년>에는 제상 원년에 상相이 상商에 살면서 회이淮夷를 정벌하였고, 또 2년에 풍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죽서기년의 저자는 <죽서기년>에서 풍자 이하의 글이 없어져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 “風夷와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을 보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제상이 풍을 정벌하였다는 것은 <동근구보서>에 따르면, 제상이 견이를 공격하였음을 뜻한다. 견이가 공격을 받자, 소나랑이 출동하여 이를 격퇴한 것이다.
나랑의 장자는 노니老尼라고 하는데, 덕공德公이 되었다. 그 후에 자손이 계속해서 나와 무릇 30여대가 되었다.
나랑의 차자는 나벌奈伐이라고 하는데, 태재太宰가 되었다. 정축년에 삼소三蘇가 주청奏請하여 평제平帝가 삼소 즉 북소北蘇 남소南蘇 서소西蘇를 두었고, 강동江東 12봉峰까지 근수槿樹를 심었다.25)
25) <蘇氏上上系> 次曰子奈伐爲太宰 歲丁丑三蘇奏請 而平帝置三蘇 則北蘇南蘇西蘇 而至江東十二峰種 槿樹
평 제平帝라는 특이한 제위帝位가 나타난다. 평제라는 제위가 <단군세기>에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기>에서는 보인다. 조선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단국의 제위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기>에서는 1세 단군왕검을 단국의 제위를 이어서 3세 성제聖帝라고 하였고, 2세 부루단군을 4세 원제元帝라고 하였고, 3세 가륵단군을 5세 인제仁帝라고 하였고, 4세 오사구단군을 6세 광제光帝라고 하였고, 5세 구을단군을 평제平帝라고 하였다.26)
26) <朝鮮紀> 第七世檀帝(註 <檀君世紀> 五世檀君) 平帝諱丘乙 光帝太子也
구을 단군 즉 평제의 시대에 태재라는 관직이 있었고, 소나벌이 태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삼소의 존치를 주청하여 그대로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에 흘紇의 후손은 서남쪽으로 천도하여 그 땅을 봉지로 하였고, 후에 제원濟原에 있는 소국蘇國의 주읍主邑이 되었다. 후손이 계속해서 나와 무릇 63대에 9백여 세의 수壽를 누렸다.27)
27) <蘇氏上上系> 此時紇之後繼 遷于西南仍封其地 爲 後蘇國主邑於濟原
홀 은 그의 아버지 태하공과 뜻이 맞지 않아 제요帝堯의 신하가 된 사람이다. 그의 후손들이 제요에 의하여 중신으로 중용되었음을 <죽서기년>에서 볼 수 있다. 하의 4세 제중강帝仲康이 석錫을 곤오에게 명하여 백伯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28)
28) <竹書紀年> 帝仲康六年錫昆吾命作伯
석錫은 주석이다. 곤오 즉 흘의 후손이 금을 녹여 기물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 벌의 장자를 성창成昌이라고 하는데, 태사太師가 되었다. 후손이 나라를 정하고 공익대부工翊大夫가 되었다. 나벌의 차자는 기강己江이라고 하는데, 후손이 문수상대부文洙上大夫가 되었다. 나벌의 3자는 두노頭老라고 하는데, 태재太宰 즉 진주소씨의 직계조상이 되었다.
나벌의 4남은 개남介男이라고 하는데, 후손 내벌乃伐, 다른 말로 나벌奈伐이다. 기자奇子 때에 首相이 되었다.
기자는 기자조선을 말한다. 한漢이 조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신인 기자조선奇子朝鮮이다. 단군조선은 진秦에게 멸망하였고, 기자조선은 한에게 멸망하였다. 이 기자조선의 수상직을 나벌이 수행한 것이다.
문 제는 변하고 점점 더 복잡해져갔다. 형산이 산으로 자리 잡으면서 논쟁을 빠져들었다. 부질없이 곤오가 지명을 따라 어찌 물의를 자아내는가. 인명에는 2가지 해석 방법이 있다. <묵자墨子 경주耕柱>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곤오가 지명이라고 하는 이유이다.29) 또 <일주서逸周書 대취해大聚解>에서 알 수 있는데, 곤오가 씨족명이라는 것이다.30)
29) <墨子 耕柱> 昆吾乃地名
30) <逸周書 大聚解> 昆吾乃氏族名
< 백호통白虎通 호편號篇> 중에서 알 수 있는데, 곤오가 오패五覇 중에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오패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곤오씨, 대팽씨大彭氏, 시위씨豕韋氏, 제한씨齊桓氏, 진문공晋文公이다.” 이때의 곤오씨는 원고시대遠古時代의 많지 않은 대의 곤오씨족 후예라 이미 없어진 조상이다.31)
<좌전> 노소공 12년에서 알 수 있듯이 곤오는 초국楚國 선조의 이름이다.32)
31) <白虎通 號篇> 中甚至把昆吾作爲五覇之一: “五覇者何謂也? 昆吾氏 大彭氏 豕韋氏 齊桓公 晋文公 是也. 此時的昆吾氏爲古時代 昆吾氏族的第多少代後裔 已無從稽考
32) <左傳> 魯昭公十二年中可知 昆吾乃是楚國先祖之名
부 질없이 <묵자 경주>에서 산천에서 금을 캐어 곤오에게 주조하게 하였다고 하였다.33) 분명히 하건대, 곤오는 지명이다. 이 지명의 유래에 하족夏族은 구성되지 않았을 때라 곤오씨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마땅히 별도로 논의해야 한다.34)
33) <墨子 耕柱> 採金於山川而陶鑄之於昆吾-語分明是在說明昆吾乃是地名
34) <金文氏族硏究> 15쪽 至於此地名的由來是否和構成夏族-的昆吾氏族有關
부 질없이 <제왕세기> 가운데에, “우가 형산에서 솥을 만들게 하였다”는 말의 진위여하를 논하지 않고 하화씨夏華氏의 전설과 합함으로써 일치시킨 것이다. 제멋대로 초국의 선조가 이곳에서 창업하였다고 하고, 선조라고 하고 또 하후씨를 씨족의 후대사람이라고 하였다. 솥을 만들었다는 것은 맞지 않으며 직접 관련이 없다.35)
35) <金文氏族硏究> 16쪽 <帝王世紀> 中的 “禹鑄鼎於荊山”之說 和夏后氏的傳說難以一致化 因爲儘管楚國祖先在 此地創業, 也儘管這-祖先又是夏后氏-族的後人 但和鑄鼎似無直接關涉
고적에 기재된 근거에 따라 곤오는 금이 많은 땅이다. 곤오는 씨족이다. 또 멋대로 오래도록 주조하였다고 하였다.36) 다음과 같이. <逸周書 大聚解> “곤오를 불러, 금을 녹여 금판에 명문을 새기도록 하였다”.37)
36) <金文氏族硏究> 16쪽 根據古籍記載: 昆吾-地多金 昆吾-族又擅長鑄造
37) <逸周書 大聚解> 乃召昆吾 冶而銘之金版
또 곽박郭璞의 <山海經注>에 보면, “곤오의 산”이라고 하였다. “이 산에서 나는 것의 이름이 동銅인데, 불처럼 붉은 색이다. 이것으로 칼날을 만든다. 옥을 자르는 것이 진흙을 자르는 것과 같다.”38) 알 수 있는 것은 곤오가 땅에서 나는 금이라는 것이다. <呂氏春秋 郡守>를 다시 보면, “곤오가 형상을 도기처럼 주조하였다고 하였다. 즉 곤오족이 형상을 도기처럼 주조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동을 주조하는 기술이 바르고, 도기를 만드는 기술을 따라 생겨난 기술인데, 특별히 도기처럼 제작하였다.39)
38) <山海經注> 昆吾之山-條 此山出名銅 赤色如火 以之作刃 切玉如割尼也
39) <呂氏春秋 郡守> “昆吾作陶” <金文氏族硏究> 16,17쪽 則加見昆吾-族善於作陶. 而鑄銅技術正是 從製陶中誕生的 特別是陶範的製作
8) 昆吾族이 만든 靑銅器에 나타난 銘文
선 진시대에 발굴된 청동기에는 <父癸鼎>, <父乙尊>, <父癸爵> 등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있다. 지금까지 지나 학자들에 의하여 父자로 기록된 금문은 자이다. 그러나 왜 자를 父자로 보아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자를 父자로 보도록 설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문자가 형상이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父자로 보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자를 父자로 보아야 한다면 형상이 비슷한 爻자도 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금문에는 이렇게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문자들이 많다.
금 문과 갑골문이 유행했던 시대가 구려시대에서 동이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으므로, 청동기가 발견된 지역은 구려나 동이의 근거지가 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소산인 청동기는 물론이고 갑골문이나 금문이 동이족의 것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록에 구려족의 수장인 치우천왕이 청동기를 주조하였고, 황제와 우의 시대에 곤오족이 청동기제조에 관련이 되어 있다고 했으므로, 현존하는 청동기에서 곤오족이 주조한 청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금 문을 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한자桓字(漢字로 쓰고 있다)를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하는 방법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자에는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이 있는데, 父를 음독으로 읽으면, 부로 읽고, 훈독으로 읽으면 아버지로 읽는다. 이 음독과 훈독을 적절히 섞으면 이두가 된다. 또한 음이나 훈은 같으나 문자를 다르게 쓰는 경우도 있고 이를 향찰鄕札이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갑골이나 금문을 읽는 데는 이러한 기본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발음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集韻> 1古本切讀 <집운> 古에서 고를 발음하고 本에서 ㄴ만을 띠어내어 발음한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곤이라는 발음이 나온다. 이러한 원칙을 가지고 을 발음하면, 1자와 자로 나누어 1자는 곤(곶을, 꽂을)으로 ?鳧渼? 손으로 발음하되 손자에서는 ㄴ자만을 띠어 발음한다. 이리하여 곤자로 발음한다. 따라서 자를 곤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이 렇게 발음을 다르게 하면, <父癸鼎>은 <1- 昆癸鼎>으로, <父乙尊>은 <1 -昆乙尊>으로, <父癸爵>은 <1- 昆癸爵>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 청동기는 지금까지 지나의 학자들이 주장해 온 제곡고신帝嚳高辛이 제조자가 아니라 곤오가 제조자가 되는 것이다.
9) 결론
우 리 역사에서 전혀 그 존재를 모르던 곤오족을 우리 역사에 자리매김하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아울러 <부소보서>류의 족보서문이 우리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된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 보았고, 지나인이 잠절한 우리의 선진사와 청동기문화도 제자리를 찾아 자리매김하자는 생각도 피력하였다.
출처 : | 칼럼 | 글쓴이 : 마고지나 원글보기 ![]() |